왕국의 쇠퇴는 빨리 왔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지만, 포지션의 구애를 받지 않는 토탈 사커의 대명사 네덜란드가 1970년대를 통틀어 최강의 팀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네덜란드는 월드컵 우승은커녕 출전초자 어려울 지경이었다. 모든 네덜란드 인들은 '나는 네덜란드인' 요한 크루이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크루이프의 맥을 잇는 새로운 영웅이 나오지 않으면 네덜란드 축구는 끝이었다. 팬들의 영웅 기대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다행히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선수를 찾아냈다. 그는 귀공자로 연상되는 크루이프의 외모와는 달리 검은 피부에 상대방을 압도할 것 같은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 루드 굴리트 였다.
굴리트는 1962년 암스테르담에서 수리남(3세기에 걸친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1975년에 독립한 나라)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굴리트의 아버지는 프로 축구선수였기 때문에 굴리트는 어려서부터 축구공을 가지고 놀 수 있었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되자 그는 동네 축구팀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굴리트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프로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에서 이민 온 그가 네덜란드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에게 무기가 되어 준 것은 바로 축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굴리트 에게 있어서 축구는 남들과 다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의 볼 다루는 솜씨는 한두 살 많은 아이들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탄력적인 신체라는 좋은 선물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행운아였다.
굴리트의 인생이 크게 움트기 시작한 것은 열여섯 살이 되던 때, 네덜란드의 프로팀 '하렘'과 계약하면서부터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프로가 된 굴리트에게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지만, 그러한 의문은 곧 엄청난 기대로 바뀌었다. 그는 주력 선수들 못지 않게 팀 승리에 공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경하던 크루이프와 같은 열아홉 살의 나이에 네덜란드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네덜란드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되찾고 싶은 욕망이 가슴을 뜨겁게 불사르고 있었다.
185cm, 83kg의 탄력있는 신체를 지닌 그는 놀랄 만한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거대한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순발력의 결함이 그에게는 없었으며 오히려 민첩한 몸놀림에서 나오는 화려한 스텝과 탄력, 본능으로 느끼는 게임 컨트롤, 거기에 공격적인 플레이는 모든 관중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굴리트는 하렘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여러 프로팀을 옮기면서 그때마다 팀을 우승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우승 청부업자'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그런 실력을 세계 축구계는 빠르게 감지했다. 당시 AC밀란은 이적료로 750만 달러를 들여 마라도나 이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지불했다.
AC밀란으로 가서도 굴리트의 선풍은 계속되어 세계축구클럽 리그의 최고봉인 세리에 A를 제패하였다. 1987∼88년 시즌에서 AC 밀란은 마라도나가 잇는 나폴리를 상대로 막판에 역전을 성공시켜 우승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굴리트가 마라도나에게 이긴 것을 의미했다.
이 시즌에서 굴리트는 유럽 연간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바론 돌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상을 인종차별 정책을 반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에게 바쳤다. 굴리트는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만델라를 칭송한 셈이었다. 그러한 굴리트의 개성은 지금까지의 축구 선수들에게는 없었던 것이었다.
유럽 최고의 선수로 네덜란드 팀을 이끌어 1988년 유럽선수권에 임한 굴리트에게 피로와 중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의 피로 누적으로 네덜란드 팀은 계속 고전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예선 초반 소련에게 패하고 아일랜드를 간신히 이겨 가까스로 결승 토너먼트에 올랐다. 결승 토너먼트에서도 고전했지만 준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준결승에서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 요한 크루이프의 후계자, 굴리트가 이끄는 네덜란드와 크루이프를 무너뜨린 황제 베켄바우어가 코치가 되어 이끄는 서독 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이다. 0대0 상황에서 경기는 후반으로 돌입하였고 55분에 서독 마테우스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균형을 깼다. 14년 전의 설욕을 불태우며 네덜란드는 맹렬한 역습을 개시했다. 75분에 페널티킥으로 답례해 시합은 다시 출발점으로 왔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왔다. 종료 직전 반 바스텐이 극적인 역전 골을 성공시킴으로써 승리를 쟁취했으며 패배한 서독의 베켄바우어는 네덜란드 승리의 주역으로 굴리트를 꼽았다.
결승전에서 만난 팀은 예선에서 한 번 패한 소련팀이었다. 그러나 복수를 끝낸 네덜란드 전사들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없었다. 그러나 굴리트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32분 코너킥에서 띄운 볼을 반 바스텐의 패스로 이어받은 굴리트는 야생마처럼 뛰어올라 강렬한 헤딩슛을 날렸다. 소련의 골키퍼 다사예프는 야신의 후예답게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지만 야신이 펠레를 막지 못한 것처럼 굴리트의 슛을 막지 못했다. 비록 늦었지만 이번 대회에서 굴리트의 첫 골이 터진 것이다. 이후 추가점을 넣어 2대0으로 소련을 제압한 네덜란드는 고대하던 유럽선수권을 품에 안았다.
그 다음은 월드컵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영웅 굴리트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경기 도중에 오른쪽 무릎 반월판의 부상으로 3번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1990년 월드컵에 참가 하기는 했지만 생동하는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단지 경기 흐름에 응해서 긴 패스를 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평판이 높았던 네덜란드가 그 대회에서 감춰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굴리트는 재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990년 12월 9일 도요타컵에서 그는 반 년전 월드컵에서의 굴욕감을 씻어 버렸다. 10번을 달고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그는 절망을 뛰어넘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굴리트의 활약으로 AC 밀란은 올림피아를 3대0으로 이겨 대회 첫 2연패를 달성했다.
그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부활의 의지를 세계인에게 보인 감동의 순간이었다
첫댓글 따딱 따딱 붙어있어 읽느라 혼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