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그리고 생각
겨울의 문턱을 지난 지가 언젠데 비가 청승맞게도 많이 내리는 것은 분명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변덕이다.
지구의 이상기온 탓일 것이다.
러시아의 어떤 곳은 영하 58도를 기록 중이고 아프리카의 어떤 곳은 연간 강수량을 뛰어넘는 폭우가 내려 수많은 사람이 홍수로 인한 피해로 집을 잃고 고통 속에 삶을 영위한다는 뉴스가 지구환경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끔 하지만 모두는 무감각하게 그런가 하고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비가 오는 날은 좋다.
집돌이 성향을 지닌 탓에 굳이 집을 나서지 않아도 성화가 따르지 않아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 때문이다.
온종일 집에 있으면 아내는 싫어한다.
운동하고 바람도 쐬고 햇볕도 쬐지 왜 꼼짝달싹을 하지 않냐며 성화를 부리는데 그것은 나의 게으름을 탓하는 얘기면서 건강을 챙기라는 당부가 어우러진 얘기다.
그러니 굳이 화를 내거나 마음이 상하진 않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그 말이 쏙 들어가고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으니 기분이 더 유쾌한지 모를 일이다.
비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행동반경을 좁게 만드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바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리는 빗소리도 좋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냥 편안하므로 좋다.
예전에 머슴살이하는 사람들은 비가 오면 자기들 세상이라고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어봤지만, 굳이 할 일 없는 나 또한 아내의 작은 잔소리마저 잠재워 무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 완전한 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이 옳구나 하고 새삼스레 긍정의 해답을 발견한다.
‘경제가 엉망이다.’라며 사람들은 난리다.
왜일까?
물가가 오르고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힘들어지고 젊은 청년들의 일자리가 부족하여 실업이 증가한다며 걱정을 한다.
높은 자리에 앉아 나랏일을 하는 양반들이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하고 매스컴에 흘러나오는 기사 따위를 되씹으면서 하는 얘기다.
진실일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의문이다.
집에서 나가면 근거리에 수많은 음식점이 있다.
집돌이라고 하지만 벗도 만나고 가끔은 약속이 있어 술도 한잔하니까 바깥세상에 나가는데 힘들다는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흥청망청 술자리에 빠져 흥얼거리는 인간들 천국이다.
경제가 엉망이라서 서민들 살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이건 무슨 현상이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돈이 돌지 않으면 술집에 손님은 횅하게 비워지고 흔히 말하는 파리를 날리고 있어야 정상인데 왜 저리 손님이 많을까에 대한 의문이 혼란스럽게 만든다.
장사가 안돼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주절대는 소상공인은 없는 손님한테 바가지를 씌우기 위한 꼼수인지 소줏값을 마음대로 올려받고 그래서 기분 나빠 손님이 안가면 장사가 안돼 못 살겠다고 호들갑을 떨고 그러면 그것을 기사화하여 당연한 결과인 듯이 난리를 치는 세상사의 흐름이 우습다.
손님이 없으면 이익을 줄여 박리다매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듯한데 오는 손님에게 소주 맥줏값을 올려 폭리를 취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면서 양심에 먹칠을 해버리고 당연한 듯이 떠들고 있다.
밀가루의 원가가 내렸으면 짜장면 국수 모두 내려야 정상인 듯한데 한번 올라간 음식값은 절대로 원위치하는 이는 없어 그래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 외 모든 것이 다 올라서 어쩔 수 없다는 얘기로 기결되겠지만 등 달아 난리 치지 않으면 어쩌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세상에는 남처럼 욕심 채우지 않고 천천히 가는 아름다운 삶도 존재하기에 그들의 항변에는 동의하기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없는데 뭐가 그리 갖고 싶지?
내가 가진 것이 없는데 사고 싶고 먹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생겨날까?
빈곤이 만들어내는 허기야 존재하겠지만 너 자신을 알라는 얘기가 있듯이 없으면 욕망이나 욕구를 줄어야 편하다는 사실에 왜 주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사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이니 공평이니 하는 얘기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미사 용어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호들갑을 떤다.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용어다.
열심히 일해 많이 벌었으면 풍족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풍족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덜 가졌으면 그것에 만족하면 불편함은 자연히 사라진다.
누군가 소불고기 먹는다고 형편이 안되는 나도 소불고기를 먹어야 공평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그 인생은 그 순간부터 비참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능력에 맞게 오리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면 되지 꼭 소불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 없으므로 자신의 능력을 모르면서 욕심내니 허기지고 서글프고 처량해지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가장 어울리는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삶의 방식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부러운 경우가 없다.
내 주머니 사정에 맞게 소비하는 방식을 구사하기 때문에 옆 테이블 손님의 음식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누군가가 부러워할 이유가 없어지더라는 얘기다.
부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진리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으므로 얼마만큼이 부의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늘 허기진 얼굴로 재산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그 욕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많으면 행복하고 적으면 불행한 것은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얘기 중에 큰 대궐에 불이 나서 집주인과 하인들이 울고불고 야단인데 그 길을 지나던 거지 부자의 대화 속에 이런 말이 있다.
“아들이 저 사람들처럼 울고불고 안 하는 것은 순전히 이 아비의 덕인 줄 알아라”
집을 가졌으니 불이 나서 고통을 당하지만, 거지는 집이 없으니 불타는 모습을 보고 절규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는 얘기다.
애당초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니 잃을 것도 없지만 욕심에 많이 가져 허물어지는 재산을 안타까워 울고 있는 대궐집 식솔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을 칠 생각이 없다는 얘기다.
노력 안 하고 나태하게 살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젊은 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고 이젠 늙었으니 남은 삶을 가진 만큼에 만족하고 잘 분배해서 쓰면서 안온하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내 속의 주류인 것이다.
할 수 있는데 왜 돈을 벌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더 많으면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충고하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방식은 내 것이니까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 의미이지 그들의 조언이 틀리고 내가 맞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적어서 불편한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그때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마음을 맞춰 살아가면 된다.
굳이 불필요한 것들을 사지 않으면 되고, 먹고 싶은 음식의 값이 내 지갑의 수준에 맞지 않으면 맛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바꿔버리면 아무 불편도 생겨나지 않는 게 삶이더라는 얘기다.
땡전 한 푼 없는 놈이 기생집이 뭐냐는 옛노래 가사처럼 자기 능력에 따라 살면 불편함도 없고 불행도 없고 아픔도 사실 없다.
내 삶에 만족하는 것은 내 맘이다.
내 맘이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내 맘이 변덕을 부려 아프게 만들 뿐 이 세상 어떤 사람, 어떤 물건이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며 굳이 욕심이나 욕망을 무작정 부풀릴 필요가 없다.
한 끼를 때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끼를 먹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끼를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세끼를 다 먹지 않아서 죽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수성찬으로 먹으나 보리밥에 소금 한 알로 먹으나 한 끼를 먹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니 옆 누군가가 먹는 음식에 마음 끌려 침샘 자극하여 스스로 비참함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인간은 괜히 자신을 스스로 비참하게 만드는 참 별난 취미가 있음을 본다.
가끔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식사를 한다.
뭘 먹을 것 인가에 대한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냥 한 끼를 때워 목숨을 연명하는 요식행위일 뿐이기 때문에 그 음식물이 무엇이어야 만족하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뭘 먹을 것인가? 하고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내가 먹을 수 있는 어떤 종류가 존재하느냐가 중요해 그냥 결정한다.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인지, 식은밥을 데워먹을 것인지, 아니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을 것인지 하고 생각해보면 식욕이 어느 것을 지명하는 쪽으로 음식을 먹으면 되고 혹여 위장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금 어떤 음식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안달을 하면 그냥 가볍게 굶으면 그만이다.
한 끼 굶는다고 죽을 것도 아니니까 맘 편하게 먹고 굶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이어트도 되고 위장에 부담도 들고 꽤 괜찮은 행동임은 틀림이 없다.
그게 쉽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굳이 뭘 먹을지 고민하고 반찬이 없어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한들 다 의미 없는 행동에 지나지 않고 없다고 불평함으로써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만 범하는 짓이다.
세상 누군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쉼 없이 흘러내리는 비는 가끔은 부러울 때가 있다.
나와의 관계가 순수하기 때문일 거다.
비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갈까? 하고 궁금해지고 그들만이 가지는 자유가 간혹 부러울 때가 있다.
나는 마음대로 흘러갈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사회적인 동물인 까닭에 내가 가고 싶다 해도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고 때론 멈춰야 하지만 비는 그냥 어디로 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가졌기에 부러운 것이다.
저 비와 함께 그냥 나도 떠나보면 안 될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안타까운 부러움으로 물들 뿐 누군가의 부와 명예와 권세가 부러운 적은 내 사전에는 없어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팔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 땜에 산다.
그러니 웃고 사는지 모른다.
새로운 욕망도 욕심도 버려두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안온하고 안락하다.
모든 것은 머무는 곳이 그들의 안식처이듯 나 또한 내게 주어진 이 작은 공간이 평온하고 한없이 넉넉한 공간으로 여기며 산다.
화려한 것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공간은 아니지만 작은 화분 하나 덩그렇게 놓인 이 공간에 내 마음을 다 펼쳐놓고 그냥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바람이 들어와 흔들리는 작은 화분의 나뭇잎을 바라보고 부딪쳐 음악으로 승화한 빗소리를 듣는 황홀함이 있어 좋은 것이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늘 있는 자리에 그대로 놓인 작은 소품들이 익숙해서 좋고 누군가의 견제와 잔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내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를 무지 사랑한다.
한 번도 자신을 미워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가 단순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구석을 가진 작은 여유가 존재해서 언제나 좋아한다.
비는 또 언제 거칠지 기약이 없지만 무작정 내린다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닌듯해서 그저 웃음 머금고 턱 괴고 누워 멍하니 바라봄이 여유로운 오늘 이 시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