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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물매 돌 신앙을 통한 교훈(삼상17:31-40)-2020.6.7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불신자들도 대부분 아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어울리지 않는 상대와의 대결이나 승부를 비유할 때 사용하지요. 그러나 이 불가능한 싸움은 다윗의 한판으로 싱겁게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다윗의 손에 들려진 물매 돌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물매돌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핵심이 아닙니다. 또한 다윗도 전쟁의 영웅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전쟁 역시 하나님이 주도하신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수시로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지요. 어떤 전쟁이든지 먼저 신경전을 벌입니다. 신경전은 상대의 분위기를 떨어뜨리는 최고의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교란시키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선봉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있었는데 가드 사람 골리앗입니다.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베틀 채 같은 창날은 철이 육백 세겔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괴물인간이었던 셈이지요. 이스라엘은 그의 외모에 주눅이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더 가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보내어 자기와 싸운 후에 그가 자기를 죽이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고, 자기가 그를 죽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종이 되어 섬기라는 것입니다(9절). 한마디로 최후통첩이지요.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11절). 골리앗이 무려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타나서 조롱했지만 이스라엘 중 누구도 싸우겠다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싸워서 죽으면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왕은 놀라서 발만 동동 거립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비책도 없어 보입니다. 풍전등화 같은 이스라엘의 운명 앞에서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일으키십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 가운데 막내입니다. 그는 양을 돌보는 목동이었지요. 위에 있는 3명의 형들은 사울의 군대에 징집을 받아 전쟁터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의 아비 이새가 다윗에게 이상한 심부름을 하나 시킵니다. 볶은 곡식과 떡, 그리고 치즈를 주면서 전쟁터에 있는 자기 형들에게 갖다 주고 안부를 알아오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아침 일찍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긴장감이 흐르는 전쟁터에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이야기인 즉, 만일 누구든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는 자는 왕이 많은 재물을 부하게 줄 것이며, 자기 딸을 그에게 줄 것이며, 그의 집을 이스라엘에서 자유케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25절). 그 말의 의미는 그 집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왕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왕이라면 하나님께 간구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꼼수로 해결하려고 하는 천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그 모양일 수밖에 없던 것이지요.
때문에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때 다윗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입니다. 벌써 다윗은 말하는 투가 다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나님에 대한 대항으로 본 것입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판단했지만,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당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처지에 몰린 이스라엘 군인들은 홍안의 소년 다윗에게 이야기를 다 해줍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전쟁에 나갈만한 사내도 아닌 다윗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다 해주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다윗의 장형 엘리압이 화를 냅니다(28절). 네 교만함과 마음의 완악함을 아는데 전쟁을 구경하러 왔냐고 따집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이 말하기를 어찌 이유가 없겠냐고 반문합니다(29절). 엘리압은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다윗을 이 전쟁터로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 즈음에 어떤 사람이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사울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다윗을 부릅니다. 지금 사울왕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아무라도 골리앗을 때려잡아 줄 사람이라면 무조건 콜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 불려간 다윗은 다짜고짜 왕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직언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다는 것입니다(32절).
그때 사울 왕이 말합니다. 너는 아직 싸울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라는 말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울은 이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다윗의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윗의 물매 돌 신앙은 무엇일까요?
(1) 두려움을 추방하는 믿음입니다(32절)
골리앗이라는 장수 앞에서 이스라엘은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왕까지 두려움에 눌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어떤 대안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울만한 장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왕이 몰랐다면 참모 중에 누구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무도 하나님께 묻거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는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원동력은 군인들의 사기입니다. 사기가 꺾이면 전쟁은 하나마나입니다.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상대의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주눅이 들어버리면 게임은 끝나고 맙니다. 주눅은 왜 드는 것일까요? 상대방에 의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게임이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으로 믿음의 적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낙심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는 역사하시지만, 낙심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 일도 안하신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부정적인 정탐꾼들 때문에 낙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죤 뉴턴 목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케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믿음의 사전에는 그런 말이 절대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낙심되는 것들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사울 왕 앞에 선 다윗이 고언하기를 골리앗으로 인해 낙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얼굴에서 낙담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홍안의 소년이 왕 앞에서 낙담하지 말라는 충고는 왕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두려워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보다 먼저 싸워야 할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골리앗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어떻게 소집되었는지 아십니까? 두려워서 떠는 자는 떠나가라는 말에 22,000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음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믿음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이나 환경만 바라보면 낙심된 일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찬송가 474장). 세상에는 낙심된 일이 많으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낙심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을 평강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낙심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다윗은 가장 시급한 것이 자기 백성 앞에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믿는 자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떠한 두려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방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34-37절)
다윗의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체험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용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축소시켜 버립니다. 전능하심을 머리로만 인정하는 믿음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담대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양 무리를 지킬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삶 가운데 개입하셨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체험했던 인물입니다. 때문에 그의 믿음은 확신이 있었고, 살아있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믿음으로 사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당당하게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34,36절).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해하고자 하면 수염을 잡고 쳐 죽였다고 증언합니다(35절). 무엇보다 그런 능력이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고 증언합니다(37절). 그런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을 모욕하는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들을 그 짐승과 같이 쳐부수고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36절). 그의 용기는 만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믿음의 확신은 자기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애송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체험한 것이기에 현장감이 있고 진정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때려잡고 승리하실 것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눈으로 골리앗을 쳐다보면 거대한 군함과 작은 돛단배의 싸움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골리앗을 사나운 짐승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보면 골리앗은 사자보다 굼뜨고, 곰보다 미련한 짐승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짐승을 잡는 막대기와 물매 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짐승을 때려잡는 마음으로 나간 것이지요.
(3) 자기 은사를 극대화시키는 믿음입니다(39-40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도박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노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사용하시되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사용하십니다. 절대 없는 것을 사용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활용하십니다. 골리앗 죽이는 일은 하나님께는 일도 아닙니다. 그냥 말씀으로 죽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해 죽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당신의 동역자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의지를 사울도 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울왕은 다윗에게 전쟁터로 가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덕담을 전해줍니다. 물론 립 서비스였는지는 모릅니다. 사울왕은 자기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혀줍니다. 놋 투구를 씌워주고 갑옷을 입혀주며 자기의 칼까지 주었습니다. 완전군장을 시켜준 것이지요. 어찌보면 빈틈이 없는 장군의 군장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어색하기 그지없고 전혀 익숙치 않았습니다. 익숙치 못한 것은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이 아니면 익숙치 못합니다. 자기 옷이 아니면 익숙치 못하고, 자기 집이 아니어도 익숙치 못합니다. 특별히 은사도 자기 것이 아니면 익숙치 못합니다. 익숙치 못하면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재미도 없습니다. 익숙한 것이 내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군장을 입고 시험적으로 걸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익숙치 못하므로 벗었습니다(39절). 그리고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매끄러운 다섯 개의 조약돌을 골랐습니다. 제구를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에게로 나간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전쟁에 나가는 군인의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짐승을 잡고 쫓고 죽이러 가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을는지 모릅니다. 그의 어설픈 모습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골리앗을 이기고 승리할 것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의 확신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장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군장이라도 다윗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날에서 자기를 지켜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신한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자기에게 익숙지 못한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익숙한 것을 찾았던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익숙한 것이 자기의 은사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흉내 내면 피곤하고 능률도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자기만의 재주가 될 수 있고, 특기가 될 수 있으며, 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가장 편리하고 쉬운 것이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가장 편리하고 쉽고 익숙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목동임을 감안할 때 허름한 옷과 막대기와 돌멩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복장에 그런 도구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 유명한 물매 돌 다섯 개를 손에 들고 말입니다. 다윗은 그 물매 돌로 거구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화 같은 승리를 허락해주신 것이지요. 다윗으로 하여금 영광의 승리를 자기 조국 이스라엘에게 안겨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다윗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마도 골리앗을 때려잡은 물매 돌은 한 개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호사가들은 몇 번째의 물매 돌로 골리앗이 맞아 죽었을까라는 부질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야구선수가 홈런 친 것이 중요하지 몇 번째 볼을 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윗은 다섯 개의 물매 돌을 준비한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한 개의 물매 돌만 준비했다면 하나님은 그 한 개의 물매 돌로 골리앗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섯 개의 물매 돌을 준비한 것은 다윗의 치밀한 준비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일은 막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실 때에 믿음으로 철저히 준비된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주어진 무언가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선한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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