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이야기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左翼門(좌익문,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승門, 북문) 같은 4대문이 있다. 이 중 남문은 남한산성 유원지에서 2km 지점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문으로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이 문에는 유일하게도 至和門(지화문)이란 현판이 남아 있어 성남시에서는 ‘남문 앞 역사 터’를 꾸며 놓았다. 남문 앞에는 성남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350년가량의 느티나무가 5그루 있는데 이는 비가 올 때 경사진 성곽 주변의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함과, 적들로부터 시각적으로 차폐하려는 목적으로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다.
무궁화공원을 지나니 8각 정자가 있다. 영춘정(迎春亭)으로 원래는 남문 아래 있던 것을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현 지점으로 옮긴 정자다.
경치 좋은 곳에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고 방이 없이 마루만 있는 정자이니 사방을 어찌 아니 관망하랴. 그러나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만 그 사이로 성남시가 눈에 들어온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이야기
우: 남장대 터
거기서 400m 지점에 성 암문이 있고 그 위에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줄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2층 누각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가 있다.
장대(將臺)란 장군이 성(城)이나 보(堡)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 이외에도 동서남북으로 4개가 더 있는데 나머지는 터만 남아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장대는 수어장대뿐이다. 북한산에 동장대와 같은 것이다.
수어장대가 있는 곳이 이 산의 주산인 청량산(淸凉山, 482.6m) 정상이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에 연주봉(467.6m), 동에 망월봉(502m)과 벌봉(521.1m, 일명 남한산) 남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산성(山城)이란 침략하는 적에게는 공격을 어렵게 하고, 이를 막아야 하는 아군은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守城)하려는 의도에서 쌓은 성이 산성이다.
산성은 평상시에는 곡식과 무기를 저장하는 군창(軍倉)으로 쓰이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 모두를 이끌고 산성에; 들어와 농성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어장대 바로 밑에 청량당(淸凉堂)이란 당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비화 맺혀 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였다. 동남쪽 부분을 책임진 이희(李晦)가 공사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으로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인 송씨와 소실이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이회가 죽은 후 횡령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니 횡령한 사실이 없이 일가족이 무고하게 참변을 당한 것이 밝혀지자 그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서장대 옆에 청량당이란 사당을 짓고 초상을 안치해 두었다. 그 수어장대좌측에 커다란 매바위가 있는데 거기에도 이회(李晦)의 죽음과 관계된 전설이 돌에 음각되어 전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가 완벽한 시공과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하여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매가 있던 곳에 가보니 돌에 매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한다.
매바위 바로 앞에 무망루(無忘樓)란 누각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던 이 편액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밖에다가 만들어 놓은 누각이었다.
없을 ' 無'(무), 잊을 '忘'(망)이란 글자처럼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함께,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외부는 급경사이지만 내부는 경사가 완만한데다가 남한산성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고, 30여 개의 수구(水口)가 있다.
수어장대 뒤에 가 보면 원형극장 같은 곳이 있다. 이곳이 남한산성 내에 있다는 45개의 우물 중에 하나로 당시 병사들이 식수로 쓰던 샘터다. 이런 우물 외에도 성내에는 45개의 연못이 있어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 서문 이야기
수어장대에서 서문 가는 중간에 병암(屛岩)이란 바위가 있다.
-정조 때 산성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이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하였으므로 당시 부윤(府尹) 서명응이 이 백성들을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매력은 꾸불꾸불한 성을 끼고 오르내리다가 성문을 만나는 기쁨이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조용한 누각인데 성문을 내려가서 나서서 우러러 보면 성벽과 어울린 모습이 우람하고 아름답다. 성문이나 암문을 나서 보면 북한산성과는 달리 널찍한 밖에서 순례하는 넓은 길이 있다.
성문 부근에는 전설이 어린 유적지가 있는 법이다. 그 유적지의 하나가 국청사(國淸寺)였다.
남한산성에는 축성 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이 산성을 지키는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 등9개의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절들은 아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폭파되고 말았다. 그것을 현대 와서 복원한 절이 장경사, 망원사, 개원사요 국청사다.
-국청사는 인조 3년(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다. 각성대사(覺性大師)는 임란 때 불타버린 화엄사를 재건한 대사로 병자호란 때는 8도총섭절제줄군주장( 8道總攝節制中軍主將)으로 임명 받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고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사찰들을 중심으로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軍器)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의 하나가 국정사이다. 그러나 일제 침략 시 일본군에게 방화소진 된 것을 다시 중건중수 한 절이다.
북문을 가는 길에 매탄처 터가 있다.
-매탄처(埋炭處)란 병자년 혹독한 추위에서 전쟁을 치룬 후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천주사부터 북장대까지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곳이 94개소에 24.192석이었다고 한다. 북장대(北將臺) 터를 지난다.
-이곳은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 수어청(守禦廳)을 둔 곳 중에 하나다. 수어청에는 전후중좌우익(前後中左右翼)의 5영(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영장(中營將)이 배치돼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북문은 일명 전승문(全승門)인데 날이 저물어 가고 있어 만사 제폐하고 내일 다시 남한산성을 찾아 나머지를 두루 순례하기로 하고 부득이 행궁으로 하산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 행궁 가는 길
북한산 대남문에서 북한동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우람한 축대 위에 행궁 터가 있는데 남한산성에서는 이를 복원하고 있었다.
-행궁(行宮)이란 일명 이궁(離宮)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임금이 왕궁 밖에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하는데 피서나 피한(避寒) 또는 승경지에 짓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유사시에 피신하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47일간이나 이 행궁에서 적과 싸우다가 1만 7천명의 군량미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삼전도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