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적세(沖積世), 그 후
이 문 열
나는 동굴 입구에서 아내로부터 오늘의 소(小)도구들을 넘겨받는다. 날이 선 단도 한 자루 오래 써서 윤기 나는 활과 독 발린 화살 열두 개. 그리고 구운 고기 몇 점과 익힌 낟알 한 주먹. 그리하여 길게 자란 풀숲과 짙게 드리운 나뭇잎을 헤치며 건너 숲 사냥터로 나는 떠난다.
꽤 늦은 아침이다. 모두들 벌써 사냥터로 떠났는지 간혹 보이는 것은 여인네들뿐이다. 노인과 아이들이 우리의 숲에서 사라져 간지는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은 아이들로 남아 있을 틈이 없고 노인들은 노인이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 그리고 그 때문에 깊어진 이 숲의 고요는 내 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동료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지나 않은가 그런데 오솔길 맞은편에 볼쑥 나타난 낯익은 사내가 있어 그런 내 불안을 얼마간 진정시킨다.
“이제 출근하십니까?”
약간 숙이는 대머리가 빛난다. 어깨에 걸친 그물, 이 사내는 사냥에 그물을 쓴다. 나도 전에 그물을 써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 사내는 꽤 재미를 보는 듯한 모양새다. 한 숲에 산다는 이유로 친절히 인사를 하지만 활을 멘 나를 보는 눈이 저토록 오만스럽지 아니하냐. 그 느긋한 목소리며 남아도는 기름기로 번질거리는 얼굴이며.
“아, 네. 좀 늦었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위축된다. 그러나 짐짓 딱딱한 목소리로 말끝을 사린다.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자를. 예컨대 자기의 솜씨에 만족해하는 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면 나는 이자와 헤어질 때까지는 계속 지리하고 속상할 것이다. 모아 둔 값진 모피가 몇 장이며, 소금에 절여 둔 고기가 얼마, 말린 낟알이 몇 독이라는 등 그런 종류의 얘기가 끝이 없을 것이다.
상대도 이런 내 기분을 알아차린 듯 이어 무엇인가를 떠벌리려던 입을 어색하게 다문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침묵한다. 친구 그대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오솔길 끄트머리의 움집에나 들러서 하게. 남의 화살촉이나 갈고 가죽이나 무두질해 하루의 먹이를 얻는 그들에게나. 많건 적건 나는 스스로 내 몫을 마련하고 있어. 뭐 그대가 대단하게 쌓아 두었다는 것도 그리 부러운 건 아니라네.
그러나 그는 결국 참지 못한다.
“요즈음 경기가 어떻습니까?”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경기라고? 언제 우리 모두에게 공통하는 그런 공평한 바람이 분 적이 있던가. 결국 묻는 것은 신이나 자연의 부당한 편애(偏愛)를 받는 집단에 내가 속했는가의 여부겠지. 일 없다. 그러나 나는 짐짓 호기롭게 답한다. 마찬가지, 괜찮다고. 물론 그 여운은 대화를 끝내기 위한 단호한 것이다.
마침내 그도 단념한다. 그리고 침묵 속에 숲을 빠져나온 우리는 그 어귀에 이르러 작별한다. 그와 나는 방향이 다르다. 그의 사냥터는 오른쪽으로 꺾어 가고, 나는 왼쪽으로 돌아 매우 소란한 사냥터 하나를 지나야 한다.
말이 났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사람들이 교역장(交易場)인가 뭔가로 부르는 그곳은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기묘한 사냥터다. 거기서는 매일처럼 사냥이 벌어지는데 그러나 밤만 지나면 또 어디선가 사냥감이 몰려들어 이튿날은 다시 새로운 사냥이 벌어지곤 한다.
그곳에서 사냥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정하다. 길을 잃을까 봐 멀리는 못 가는 친구들, 또는 겨우 무디고 짧은 창이나 조잡한 덫 외에 별다른 도구를 못 지닌 자들. 그러나 반들거리는 눈과 매끄러운 혀는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의 사냥을 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다. 통상으로 그들의 사냥은 단독이다. 거기다가 그곳의 사냥감들은 모두가 반복되는 사냥에 단련돼 있지만 잡히기는 잡힌다. 워낙 수가 많은 데다, 또 그곳은 사냥꾼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다.
그래서 자주 그 놀라운 수확은, 그들의 활기찬 함성과 땀 밴 근육처럼 나를 경탄시킨다. 그 사냥터 곳곳에 쌓여 있는 베어진 들짐승들, 털이 뽑힌 날짐승들, 흩어진 깃털과 발라진 뼈들, 피와 피……. 그렇지만 아 아,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얼마나 죄 많은 일인가. 설령 우리를 위해 익어 가는 것이 한 줌의 낟알일지라도 어찌 사라지는 생명의 고뇌가 없을 것인가.
이미 내 사냥터에는 동료들이 모두 나와 있다. 벌써부터 사냥이 시작된 모양이다.
“박 계장 늦었군. 빨리 판매부로 가 봐요. 바이어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야.”
징잡이가 사냥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수선을 떤다. 이 노회(老獪)한 친구는 우리가 사냥할 때 높은 곳에서 사냥감의 방향이나 알리고 북이나 두들긴다. 그러나 창칼을 쓰며 땀 흘리는 우리들보다 더 많은 고기를 배당받는다. 그 외에도 우리들의 복종까지. 나는 물론 그의 지시대로 서두른다. 하지만 도중에서 퉁퉁 부은 추장을 만난다. 그는 볼멘소리를 한다.
“부장이 출장 중일 때는 자네라도 일찍 와야지. 하여튼 빨리 가봐. 큰 거야. 잘해야 해.”
그러고 보니 창잡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며칠 전에 우리가 망가뜨린 창날이며 찢은 그물 따위를 보충하러 먼 숲으로 갔다. 나는 문득 나 혼자서 떠맡아야 하는 큰 사냥을 불안해하며 오늘따라 유난히 못 미덥게 느껴지는 내 활과 화살을 점검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목표로 접근한다.
지금까지 멀찍이서 기세를 올리며 사냥감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젊은 동료 하나가 그런 나를 맞아 안도한 듯 사냥감을 인계한다.
“인사하시지요, 계장님. 이분은 대영건설 자재과장님 이십니다.”
과연 크다. 쓰러뜨리기만 하면 근래에 드문 수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의 몸은 질긴 가죽과 두터운 털로 덮여 있고 발톱과 이빨은 날카롭다. 나는 바짝 긴장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소(苦笑)한다. 이 거대한 맹수 자신은 지금까지 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 사냥감을 덮쳤던 것일까. 어쩌면 아침만 해도 몇 마리의 연약한 들짐승을 해치웠으리라. 그것이 애매한 적의를 일키고 나는 침착하게 활줄에 화살을 먹인다.
하나, 둘, 셋…… 화살은 더러 맞기도 하고 더러는 빗나간다. 위협적인 이빨을 드러내고 위맹한 앞발을 휘두르기도 하던 목표는 점차 패퇴와 고통의 기색을 보인다. 그러나 열, 열하나, 열둘, 나의 화살은 끝난다. 거대한 상대에 비해 내 화살은 너무 가늘고, 그 독은 너무 약하다
나는 급격히 전의를 상실한다. 이제 남은 단도 한 자루가 무슨 힘이랴. 이때 전령이 추장의 호출을 알린다. 낭패하여 달려간 나에게 추장은 삼엄한 얼굴로 창 한 자루를 내민다. 창잡이가 늘 쓰던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다가 안 되면 저쪽 선으로 웅해 버려. 현품 납입 때 벗길 셈 잡고 말야. 그러나 뒷입은 미리 막아 놔야 해.”
나는 용기백배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사냥감은 여전히 미련한 눈을 껌벅이며 오히려 나를 잡겠다는 투로 오만하게 대기하고 있다. 나는 다시 심신을 가다듬고 목표와 대치, 기회를 타 받아 온 창으로 그 가슴을 깊숙이 찌른다.
그 보이지 않은 고뇌, 들리지 않은 비명. 가리어진 심장으로 피를 쏟으며 목표는 드디어 쓰러진다. 그러나 나는 피 묻은 창을 뽑아 미동도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더 찌른다. 죽은 듯하던 맹수가 얼마나 자주 우리들의 경박한 동료를 해쳤던가. 우리들은 그걸 ‘클레임’이라 부르는데, 지난번의 큰 사냥 때도 거기에 걸려 아까운 동료 하나가 희생되었다.
오후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몇 마리의 무리에서 떨어진 초식동물이 있었으나 점심나절 창잡이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준 덕분에 나는 화살 몇 개를 날리는 것으로 일과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황혼 ㅡ 빨갛게 물드는 원시림은 깃을 찾는 야조(野鳥)의 울음과 소혈(巢穴)로 돌아가는 짐승들의 풀잎 헤치는 소리로 수런거리고 우리들도 각자의 동굴로 돌아갈 시간이 왔다.
우리는 모두 하루의 몫을 배당받은 후, 분분한 인사와 함께 사냥터를 떠난다. 지금 우리의 동굴은 저녁 연기로 매캐하고 돌솥에 서는 고기와 낟알들이 익고 있을 것이리라. 아내들은 숲 어귀로 우리를 맞기 위해 고된 성년(成年) 연습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내보내리라. 그러나 나는 내 동굴과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저 건너 다른 숲, 밤이 되어서 오히려 밝아 오는 어떤 숲으로 나는 가려고 한다. 그곳에 촘촘히 들어선 저 ‘푸날루아’의 동굴로.
물론 우리는 벌써 오래전에 ‘푸날루아’의 시대를 지나왔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아내이고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의 남편이던 그 시대는 一 그러나 우리들의 향수(鄕愁)다. 우리들의 아내가 어쩌다 그날을 기억하고 그날의 자유를 회복하려 들면 그렇게도 격노하고 가혹히 벌하지만, 지난날 겪었던 그 어떤 ‘거룩한 어머니’의 시대보다도, 또한 그 어떤 ‘위대한 아버지’의 시대보다도 열렬하게 우리는 그 시대를 동경한다.
그런데, 이제 내가 가려는 동굴에는 아직도 그 ‘푸날루아’가 있다. 처음부터 거기 남아 있던 여인들과 일찍이 남의 아내가 되어 그들만의 동굴로 떠났으나, 끝내는 돌아오고 만 여인들이 거기서 영원한 남편 ― 추상화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든 한 토막의 고기만 지니면 당연히 그네들의 남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은 그런 ‘푸날루아’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곳에 상주하지 않는, 그래서 가끔씩만 그런 곳에 들러 가끔씩만 ‘푸날루아’가 되는 남의 아내를 나는 만나러 간다. 나만의 ‘푸날루아’를.
그녀와 나는 지난 여름 우연히 만났다. 이 숲이 자욱한 이슬비에젖어 있던 그날, 나는 싫증 나는 나의 삶과 싫증 나는 사랑과 싫증나는 번민으로 사냥터를 벗어나 빗속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말없이 나타난 그녀가 넓은 잎새로 나를 가리어 주었다. 그리고 그 특출할 것도 없는 인연은 오래잖아 우리를 야합(野合)의 형식으로 맺어 놓았다.
그녀는 우리가 연합하여 죽음과 고독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우리가 손잡고 뛰어든 것은 욕정과 피로의 늪일 뿐이었다. 무성한 숲 그늘에서 혹은 어느 후미진 동굴을 빌려 우리가 그렇게도 격렬히 맺었던 성합(性合)은 언제나 쓸쓸함 속에 나뉘었고, 죽음조차 항시 가까이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 무엇이던가.
하기야 우리의 오래인 습성은 때로 내가 남의 여자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상기시킨다. 그게 바로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일 테지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병들거나 늙어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거나 들판에 방치하는 것에서 정중히 매장해 주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만도 무려 백만 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됐다는 것을. 그 점에서 나는 나의 숲과 그녀의 남편에게까지도 떳떳하다.
나는 그를 살해하고 그의 시체 옆에서 그녀를 강간한 것도 아니고 그가 없는 동굴에 침입하여 간사한 꾀로 그녀를 유혹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불문(不問)은 우리의 계율이었다. 그녀가 내 아내를 묻지 않은 것처럼 나는 한 번도 그를 묻지 않았다. 요컨대 나는 그의 존재를 묵살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의를 다해 왔다. 그녀가 항시 걸치고 다니는 착색된 멋진 모피나 목에 걸린 진귀한 조개껍데기 따위가 끊임없이 그의 존재를 상기시킬 때조차도.
나는 다만, 사랑할 뿐이다. 내가 대단한 열병처럼 젊음을 앓고 다니던 시절에 어지럽게 만났던 그 어떤 여인보다 더 희고 부드러운 그 가슴을, 무두질과 낟알 찧기에 거칠어진 아내의 그것보다 몇 배나 화사한 손을, 세월조차 비켜 간 것과 같은 순진한 영혼과 그 단순한 욕망을. 그리고 ㅡ 오늘은 그런 우리들 약속의 날이다.
아직 때가 일러 동굴 안은 어둡고 한산하다. 수액(樹液)과 지방으로 분장을 마친 한 무리의 ‘푸날루아’가 대기하고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환성으로 맞는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들의 환영을 거부하고 내가 자기들의 남편으로 오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녀들도 미련없이 물러난다. 약속의 시간은 아직 멀었다. 그때 기다리는 나를 위해 돌 탁자에 얹히는 술항아리. 나는 천천히 한 잔을 따른다.
원래 이 액체는 전대의 어떤 동료가 썩어 가는 보리를 아까워하다 만들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절약을 위한 이 액체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고 말았다. 나도 이제 이것을 위해 땀 홀려 얻은 오늘의 몫을 기꺼이 바치리라. 오전의 공로로 특별히 배당된 소의 허릿살 한 덩이까지도.
왜냐하면 가끔씩 그것은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저 영원한 고향을 보여 주므로. 멀리 어느 하늘에선가 한번 헤어진 후 땅 위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그 고귀한 사랑과 대면케 하므로.
텅 빈 위는 탐욕을 부리고 거듭하는 잔의 취기는 미세한 혈관을 따라 내 몸을 돈다. 내 수많은 모공(毛孔) 하나하나에 무슨 작은 벌레처럼 스멀거리는 욕정. 오늘 밤은 오직 취하고 사랑하리라.
그런데 의외의 침입자가 나타난다. 어두운 구석에 먼저 와 있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사내다.
“혼자시군요. 합석해도 좋겠습니까?”
별로 취한 것 같지도 않은데 입김에선 진한 술 냄새가 풍긴다. 그 쏘는 듯한 냄새와 불길같이 번쩍이는 두 눈이 웬일인지 내게 황급한 거절을 표시하게 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곧 둘이 될 거란 말이지요? 그러나 마찬가집니다. 단자(單子) 간에는 창이 없어요. 결국은 당신도 혼자일 뿐입니다.”
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말은 ― 그러나 내게 곧 이 사내가 속한 집단을 추측케 한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나와 같은 숲에서 자란 친구로 그때는 시원찮은 녀석이었다. 우리가 다가올 성년을 위해 열심히 활과 창을 익히고 있을 때 녀석은 한갓진 곳에 처박혀 멍청한 공상에나 잠겨 있었다. 어쩌다 우리들끼리의 작은 사냥에 끼일 때가 있어도 기껏 녀석이 하는 짓이란 애써 몰아 논 산토끼에게 길이나 틔워 주고 우리의 화살에 떨어진 비둘기의 깃에 눈물이나 떨구는 따위 청승이었다.
그러더니 채 성년도 되기 전에 결국은 우리들도 떠나고 만 그 옛숲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지개인지 구름인지를 잡으러 떠났다는 것인데, 그 후 얼마간 우리에게 전해 온 그의 소식은 다만 초라한 방랑자의 행색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제법 한 몫하는 사냥꾼이 되었을 때 풍문은 멀리 평원 지방으로 내려간 그가 어떤 주술사(呪術師)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어린 날의 공상이나 다를 바 없는 멍청한 주문(呪文)이나 외고 다닌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몇 년인가 후에 나는 우연히 그를 만났다. 어느 평원 지방이었는데 그때 그는 그곳의 농경민들을 위해 비를 빌어 주고 있었다. 어느새 그도 제법 효험 있는 주술사가 된 듯 사람들은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은은한 열광마저 일었다. 그의 두 눈에 보이는 것도 분명 저 이름 있는 주술사의 두 눈에서 타오르는 그 형형한 빛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추억을 유쾌하게 한 것은 그 의식(儀式) 후에 마주했던 몇 시간이었다. 비록 그는 대화의 태반을 천민(賤民)들의 무분별한 갈채와 또 그만큼한 무관심에 대한 냉소로 채웠고, 그 나머지는 기껏 제례(祭禮) 후의 먼지 앉은 과일과 말라빠진 고기 토막밖에 점지하지 못하는 자기의 신을 원망하는 것으로 메웠지만 즐겁지 아니한가. 잠시라도 우리가 보잘것없는 육신과 그에 부하(負荷)된 모든 성가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숙명처럼 찾아야 하는 날래고 영악한 동물들과 가시덤불이며 엉겅퀴로 뒤덮인 대지를 잊고 언어의 마술에 취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 기억은 이 사내의 돌연한 침입을 관용한다.
“재미있습니다. 선생의 표정은 제가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하시는군요.”
그러는 사내의 눈에는 의외에도 취한 사람담지 않은 관찰의 눈길이 번득였다. 나는 이 사내가 내 마음을 환히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당황하며 주술사가 된 그 친구를 얘기한다. 당신도 그와 동류 같다는 말까지.
“하지만 아닙니다. 그런 망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게 퍽 안된 일이라고,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예사롭지 않은 생애를 고려해 보지조차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원인 모를 조급에 빠져 앞뒤 없이 아첨한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성나게 했는지 그는 갑자기 거칠고 퉁명스러워진다.
“겨우 그따위 이유로 나를 환영 했다면 나는 가겠소. 홍,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이 구역질나는 유아 취미(幼兒趣昧)라. 도대체 너절한 시(詩) 나부랭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요?”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가 버린다. 나는 무안하고 아연하다. 허나 이내 회복한다. 그의 팔은 그가, 내 팔은 내가 흔들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내 ‘푸날루아’를 기다린다. 이제 그녀는 올 것이고 우리는 어딘가 은밀한 곳을 찾아 사랑할 것이다.
초승달은 벌써 서편 숲 속으로 져 버리고 밤은 어둠과 함께 깊어간다. 그러나 내 ‘푸날루아’는 오지 않는다. 우리들은 초승달이 그 숲 전나무 가지에 걸릴 때 이 동굴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무슨 일인가 나의 여인이여.
동굴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하다. 성공한 사냥꾼들은 왁자하게 떠들며 술잔을 부딪치고, 실패한 사냥꾼들은 한구석 에 수런수런 우울한 술잔을 든다. 그러나 내 탁자의 빈자리는 채워질 줄 모른다. 무슨 일인가 나의 ‘푸날루아’…….
그런데 그가 돌아온다. 내가 두 번째 항아리에서 다시 몇 잔인가를 따르고 있을 때 어느 구석엔가 박혀서 진탕 퍼마셨음에 분명한 그 사내가 이번에는 동의도 없이 내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알지 못할 득의에 차 내게 말을 걸어온다.
“아마 그 사람은 오지 않을 모양이오. 자 ― 잊고 나하고나 한잔 합시다. 실은 나도 일주일째 여기서 누굴 기다리고 있소. 오늘도 틀린 것 같지만…….”
나는 착잡한 심경이 되어 그를 방관한다. 정말 이상한 사내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불쾌와 환영, 위압감과 경멸이 정확히 균형을 이룬 묘한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나를 개의치 않고 마치 하던 얘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이나 물어 온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왜 하필이면 당신을 택해 이리로 왔는지 아시오?”
나는 당연히 모른다. 주정뱅이의 행위 동기까지 단번에 간파할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름 없는 소집단의 궁수(弓手) 노릇이나 할 거냐. 그러나 상대의 목소리는 은밀해질 뿐이다.
“저기 저 사람들을 보시오.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소? 이를테면 저들의 머리통 같은 것 ― 그게 몸통에 비해 너무 작다고 생각지않소?”
그렇지만, 나는 동굴을 휘둘러보는 대신 그의 눈을 본다. 술은 두뇌와 더불어 이 사내의 눈마저 이상하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그런 내 눈길을 그는 오히려 공범자끼리의 은근한 말투로 받는다.
“하지만 당신은 예외요. 그리고 ― 그것이 나를 이리로 부른 것이오.”
나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다시 물어 온다. 이상하게 진득진득 묻어오는 목소리로.
“당신은 공룡(恐龍)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소?”
물론 나는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선주민(先住民)으로 이 땅에 번성하였지만, 자연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지속을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멸망해 갔다는 것을.
“틀렸소. 그들의 번성을 거부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소. 그들은 자신의 거대한 체구에 비해 너무도 작은 두뇌를 길렀기 때문이오. 몇 톤의 거구를 겨우 몇 백 그램의 뇌로 운용하며… … 그들이 하루 몇 트럭씩이나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 것은 오로지 그 육신을 위한 것일 뿐이었소. 그러나 ― 그들이 영원히 멸 망해 갔다는 것은 망상이오. 보시오. 그들은 저기 저렇게 부활하여 번성하고 있지 않소?”
그러고는 거의 방자할 만큼 혐오에 찬 눈으로 동굴 안을 휘둘러 본다. 그것이 은근히 내 분노를 자극하고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서슴없이 그를 부인한다. 만약 저들이 진정으로 그러한 공룡이라면 당신도 별수 없이 그들의 동류일 뿐이라고.
“그것도 틀렸소. 공룡은 변해서 나방이가 되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나방이오. 나방이 ― 그러나 잘못된 나방이오.”
나는 다시 요령부득이다. 그러나 그가 반복하는 나방이란 말은 문득문득 우리들의 지난번 밀회와 내 ‘푸날루아’를 연상시킨다. 그날 우리는 온 밤을 함께 보내었다. 나는 수말이었고, 사자였고, 파도였고, 폭포였다. 그녀는 들개였고, 암표범이었고, 회오리였고, 늪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밝고 해가 솟았을 때 또 그날의 사냥을 나서야 하는 나는 왠지 아직도 몽롱한 열정에 떠 있는 그녀가 한 마리 나비처럼 느껴졌었다.
“10여 년 전의 일이오. 어떤 외국 작가의 글에서 나는 이런 걸 읽은 적이 있소.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과연 오랜 성서(聖書)의 주장처럼 인간에게 최선의 것만을 허여했는지 의심스럽다고.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가장 바람직한 생의 형태로 나방이를 제시했소. 그것은 유충 시절에는 대개 추악한 모습으로 오직 먹고 싸고 그 밖의 혐오할 만한 작용에만 전념한다고 하오. 그러나 일단 나방이가 되면, 그래서 추악한 허물과 혐오스러운 작용에서 해방되면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가장 우아한 모습으로 오직 사랑만 즐긴다는 것이오. 우아한 나비로서…… 한 가난한 문과 대학생 이었던 탓이었겠지만 ― 그때 나는 얼마나 열렬히 그에게 동의했던지…… 그런데 말이오. 오래잖아 나는 바로 그 나방이가 되었소. 내가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3년 만이었을 거요. 요행히도 어느 신흥 기업의 말단을 차지한 나는 열심히 공룡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른바 그 행운이라는 게 찾아왔소. 세무 감사가 시작되면 이중장부의 원장을 트럭에 싣고 경춘(京春) 가도로 오르락내리락거리기도 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대의 석등(石燈)을 사장 댁의 정원으로 옮겨 심는 따위의 작업을 지휘하기도 하다가 무슨 통속극에서처럼 사장의 외딸과 결혼하게 된 것이오. 약간 바람기야 있지만 상당한 미인이고, 또 심심해서 불란서 유학이나 갈까 하던…….
그리고 ― 그날로부터 나는 일약 전신(轉)身하였소. 생활한다는 것은 하등 부담이 되지 않고 오직 그녀와 사랑하고 즐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오…….”
여기서 목마른 듯 잔을 비운 사내의 어투는 갑자기 자조적(自嘲的)인 것으로 변해 간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이 사내의 희로(喜怒)에 혼란된다.
“물론 당신은 내 얘기를 주정뱅이의 망상이 꾸며 낸 허구라고 단정할지 모르오. 그래, 당신도 행복해야 할 내가 왜 이런 불쾌한 모습으로 술에 젖어 있는가고 묻고 싶소? 당신도 나방이가 행복할 것이라 믿으시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환상 또는 미신에 불과하오. 사람들은 육체적인 결핍 에서만 벗어나면 곧 정신적이고 고귀하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럴 만한 천품을 지니지 못했소. 먼저는 공룡으로 걸신들린 것처럼 먹고 마시다가 어느 정도 그 탐욕의 배가 차면 그다음은 나방이의 길을 걸을 뿐이오. 두 눈을 이성(異性)의 둔부와 하복부 언저리에만 집중시키고 집요하게 추구할 뿐이오. 그리고 ― 이미 그것은 쾌락도 행복도 아니오. 공복과는 달라서 욕정은 또 새로운 욕정을 부를 뿐, 결코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아마도 나방이의 생명이 그 긴 유충 시절에 비해 너무도 짧은 것은 바로 그런 절망과 피로 때문일 것이오. 인간도 마찬가지 ― 더구나 발정기(發情期)가 아니라도 교접할 수 있는 엄청난 성욕을 가졌으면서도 엉뚱한 독점욕과 또 그것을 비호하는 여러 규범 아래 얽매인 인간에 이르면 그 절망과 피로는 더욱 가중되는 것이오…….”
아, 그 얘기. 그거라면 나도 알 듯하다. 나는 진작부터 몇몇 특별난 동료들에 관한 풍문을 들어 왔다. 부(富)의 편재(偏在) 때문에 땀 흘려 사냥할 필요가 없어진 그들의 광태에 대해. 그들은 주체할 수없는 풍요와 여가 때문에 하루 세 접시의 뻐꾸기 혀를 게워 내고 열 명의 아름다운 여자 노예를 갈아 댄다고 한다. 그런데 글쎄, 그게 당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불행이던가. 하지만 사내의 어조는 급격히 엄숙으로 전환되어 내 언어의 개입을 차단한다.
“물론 나와 같은 나방이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오. 그러나 그 불행은 결코 예외적인 것은 아니오. 물질문명의 진보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나방이로 만들고 말 것이오. 과학자들의 현란한 청사진(靑寫眞)이 실현되면 우리 모두가 의식주를 위해 근심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이 올 테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실로 가공할 것이오. 우리의 모든 것은 부패와 단명 속에 스러져 가고 누군가가 이다음에 이 땅을 차지할 생물들은 기록할 것이오. ‘이 어리석은 선주민들은 자신의 칼로 스스로를 상했다. 모두가 절망적인 나방이가 되어.’라고…….”
사내의 얘기는 계속된다. 그는 가상하게도 우리 전체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부터 나 자신의 사념에 빠진다.
사실 나는, 당신과 같은 동료들이 그리 대단하게 떠드는 우리의 문명이나 진보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당신들은 지나친 것을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부족한 것을 근심한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동료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아직 덜 벗어진 털과 퇴화 못 한 꼬리다. 내가 이 대지 위 곳곳에서 보는 것은 아직도 활동하는 화산이며, 미처 길을 잡지 못한 강들과 울창한 밀림이다.
거기다가 또한 나는 믿고 있다. 종자의 수백 배를 거두는 낟알의 재배나 자기 식량의 수십 배를 생산할 수 있는 노동력의 확대가, 즉 그로 인한 풍요와 여가가 우리들의 일부를 이상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적인 변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더군다나 사내가 가장 절망적인 단언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자라고 있고, 앞으로도 세상 곳곳에서 수없이 태어날 공룡의 새끼도 아니고 나방이의 유충도 아닌 그 모든 인간의 가능성들을.
그러나 사내의 열변은 도도하고 나는 무력하게 그런 그를 방관한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이 시각이 내 ‘푸날루아’가 나오기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늦었음을 상기한다. 나는 헛되이 돌아가야 할 것인가. 갑갑한 나의 동굴과 그 단조로운 일상으로. 식상(食傷)해 버린 모노가미의 사랑과 그 번민으로.
그때 낯익은 이 동굴의 ‘푸날루아’ 하나가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박 선생님, 전화예요.”
이 아무래도 이해 못 할 통신 방법. 그러나 우리가 지난날 연기를 사용했듯 또는 비둘기를 썼듯 나는 감탄 없이 이 방법을 쓴다. 지금 여기에 실려 온 목소리는 그녀다. 기다리던 나의 ‘푸날루아’다.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하지만 저 오늘은 그만두겠어요. 왠지 뒤승숭하고 ― 마음 내키지 않아요. 이해해 주세요. 정말 미안해요.”
이상하게도 차분한 목소리다. 통상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들뜬 감미로운 것이었다. 그 변화가 다소 불안하지만 나는 그녀의 통보를 거절한다. 우리는 오늘, 그것도 당장에 꼭 만나야 한다고. 그녀는 내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결정한 듯 승낙한다. 예전의 들뜨고 감미로운 그 목소리로.
“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곧 갈게요.”
이제 그녀는 어디선가 나를 향해 출발할 것이고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아마도 얼마간은 내게 더 여유가 생길 모양이오. 그 전화는 늦는다는 거지요?”
그를 떼 내기 위해 고의로 얼마간을 지체하고 돌아온 나에게 그때껏 버티고 있던 사내가 태평스럽게 묻는다. 나는 갑자기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부인한다. 그녀는 이미 출발했노라고. 그러나 상대는 여전하다.
“그래도 삼십 분은 걸릴 거요. 이 도시는 넓으니까”
사내는 느긋이 술잔까지 기울인다. 그 산악 같은 태연이 내게 원인 모를 절망을 주고 비상한 수단을 쓰게 한다.
나는 직접으로 퇴거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날카롭게 묻는다. 당신은 나를 아시느냐고 ―.
나는 그와 생면부지임을 상기시킴으로써 그의 무례를 과장하고 그래서 무안해진 그를 스스로 물러가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철판 같은 둔감으로 버틴다.
“물론이오. 친구 당신은 충적세(’中積世) 후기를 사는 한 마리의 병든 원숭이오.”
나는 어이가 없다. 그러나 터지려는 내 분노는 지그시 나를 내려보는 그의 이상하게 불타는 두 눈에 멈칫한다. 나는 쥐었던 주먹을 맥없이 펴서 애매한 술잔을 움킨다. 그러자 돌연 그의 두 눈은 광채를 잃고 대신 형언할 수 없는 침울이 과음으로 창백해진 얼굴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길고 헝클어진 머리칼과 더불어 희미한 알지 못할 연민을 일으킨다.
“너무 성내지 마시오. 그것이야말로 내가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찬사요. 그 병든 원숭이는 지금 공룡과 나방이 이상적인 인간을 꼭짓점 삼아 만드는 삼각형의 외심(外心) 부근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어쩌면 회복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잃어버린 인간에로의 통로를 찾아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리고 하나만 더 이해해 주시오. 나는 결코 당신을 방해할 뜻은 없소. 무엇인가 때가 이르고 있다는 예감, 어쩌면 당신이 이 세상에 나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것이 나를 다변(多辯)하게 하는 것뿐이오…….”
술 취한 사내의 엉뚱한 감상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알지 못할 내 연민은 깊어 간다. 그리하여 그가 이야기를 중단하고 쓸쓸하게 술잔을 들 때에는 나도 망연히 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치고 만다. 내가 잔을 다 비우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예의 그 이상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아내의 첫 번째 정부(情夫)는 연극을 하는 자였소. 아내가 가장 천한 욕정으로 어울린 자인데 그것은 아마도 그자의 그럴듯한 용모보다는 예리한 혀가 가장 철저하게 나와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일 것이오.”
기억한다. 우리 숲 속의 어떤 원숭이 떼의 암컷은, 침입자들이 무리의 모든 수컷을 물어 죽인 후 어린 것들까지 잔혹하게 살해하게 되면 갑자기 발정(發情)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짝지어 살던 수컷들과 그 새끼 되는 어린 것의 시체 옆에서 그 잔인한 학살자들과 혼음(混淫)에 빠진다고 한다.
“하여튼…… 그 덕분에 내 응접실은 예술하는 천민(賤民)들 ― 특히 허름한 문인 나부랭이로 득실거린 적이 있었소. 적어도 그들 중의 하나와 내 아내가 호텔 방에서 엉겨 있는 것을 내가 목도할 때까지는 말이오. 그런데 이상한 일이오. 그들 중 누구도 내 문턱을 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소. 경멸해 마지 않던 그것이…….”
나는 그 얘기가 지리할 것임을 짐작한다. 그러나 줄어들지 않는 연민 때문에 그를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병든 의사의 얘기였소. 당신도 어쩌면 그를 보았을 것이오. 완전한 건강을 누리기 위해 의사가 된 그 사람을 말이오. 그러나 막상 의사가 되었을 때 그가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은 이전보다 더 많은 병이었소. 처음 얼마 동안 그는 매일매일 새롭게 발견되는 수많은 병을 위해 그만큼의 처방전을 끊었소. 조제도 하였소. 하지만 그 어떤 시술(施術)도 투약도 끝내 자신에게 베풀 수는 없었소. 치료의 대상이 자기였기 때문이오. 한때는 다른 의사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였소. 그러기에는 그 자신 병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여기서부터 나의 연민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의 얘기는 점차 역겹고 지리해진다. 세상 어디에 그런 바보 같은 의사가 있을 것인가. 이거야말로 순전히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조심스렵게, 그러나 혐오를 감추지 못하고 그의 말머리를 자른다. 그런 공허한 얘기로 사람의 귀를 사로잡으려 했다면 그건 어리석었다고. 그는 의외로 담담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짧게 하겠소. 결국 여러 해에 걸친 상심과 고통 끝에 그 의사는 극약을 먹고 자살하고 말았소. 그러나 당신들이 흔히 단정하는 것처럼 그것이 절망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벽한 치료였던 것이오. 그래 죽음보다 더 완전한 건강이 어디 있겠소?”
여기서 나는 혼란되고 만다. 갑자기 엄습하는 취기 때문이었을까. 그 병든 지식에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가 도로 축 처지고 그러다가 두서없이 지껄이고 만다. 그 치료야말로 당신 같은 자에게나 최선이 될 거라고.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런 내 폭언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한 듯하다. 섬뜩할 만큼 잔잔한 미소 사이로 그의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인상적이다.
“결국 당신은 동의하였소. 이 적절한 순간에 고맙게도 당신에게 이해되다니…… 자, 보시오. 나는 이렇게 처방하였소.”
그러는 그의 손에는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날카로운 단도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그 차가운 빛 속에서 그제야 나는 그가 누구인가를 확인한다. 그의 날카로운 당착(撞着)도 공룡도 나방이도 그의 여러 자각(自覺) 증세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돌연 나는 공포보다는 조급으로 마비된다. 나는 이 사내를 붙들어야 한다고 막연히 느낀다.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몸과 혀는 함께 굳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 때가 온 모양이오. 일주일이나 기다린 것이 헛되지는 않았소. 나와 함께 치료해야 할 사람이 이제 온 거요. 자, 안녕히.”
사내가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쫓았던 그 어떤 짐승보다 날래게 탁자를 돌아 입구 쪽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아, 거기에는 내 ‘푸날루아’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조그만 거부나 회피의 기색도 없는 것이 안타깝다. 튀는 피, 피, 그리고 비명. 흐르는 피는 그녀가 걸친 흰 모피에 무슨 아름다운 무늬처럼 피어오른다. 혼신의 힘으로 일어선 나는 이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런 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조용한 지성의 고뇌가 아니라 저 원시림의 치정(痴情)에 들뜬 야수의 울부짖음이다.
“내 아내요, 색정광(色情狂)인 내 아내요, 집을 나가, 일곱 번째, 일곱 번째 정부와 어울리고 있었소…….”
갑자기 동굴 안은 어둡고 적막해진다. 아득히 먼 곳에서 원시림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 나는 알지 못할 잠 속에 떨어진다.
꿈 어지럽고 사나운 충적세의 꿈. 거기서는 공룡의 음울한 비명이 들리고 나방은 분분히 독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쓰러져 신음하는 원숭이 떼.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내가 미소하며 잠들 수 있는 것은, 아이들 ― 그 모든 것들의 어지러운 윤무(輪舞) 가운데서도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1980년)
2016년 11월 25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