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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웨핑터널 ⓒ위키피디아 |
올리브 산을 통과하는 노선은 21미터 깊이로 암벽을 절단해 3.2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노선으로 만들어졌다.
리버풀-맨체스터 노선 중 최대의 난공사가 이뤄진 곳은 맨체스터 인근의 체트모스 늪지대였다. 거의 3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광활한 늪지대를 통과 하지 않고서는 철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체트모스 늪지대를 돌아서 선로를 깔면 기관차가 아무리 빠르다 한 들 주행거리가 길어져 효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갖가지 이유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체트모스 습지가 결국은 철도 건설에 나선 이들을 모두 좌절의 늪으로 빨아들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골치 아픈 문제는 조지 스티븐슨을 도와 선로를 놓았던 로버트 스태너드라는 기술자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면서 풀렸다. 스태너드는 헤링본 스타일로 목재를 깔고 돌을 넣어 기초를 다지는 방식을 고안했다. 헤링본은 사진 찍기를 취미로 하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카메라 가방메이커지만 원래는 청어뼈를 뜻하는 말이다. 청어뼈의 구조를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청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청어뼈를 발라내는 일만큼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청어뼈는 촘촘한 구조가 특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스티븐슨은 이 헤링본 스타일로 목재를 구성하고 직물을 짜듯 섬유 구조로 엮은 뒤 늪지대에 돌과 함께 차곡차곡 쌓았다. 토탄으로 이루어진 늪지대를 가로질러 든든한 노반이 생기자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은 제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리버풀-맨체스터간의 노선에만 총 64개의 철교와 선로를 횡단하는 육교가 만들어졌다. 역사상 특정구간의 연결을 위한 길을 뚫으면서 이 처럼 엄청난 자금과 사람이 동원되었던 적은 고대 로마 이후 처음이었다. 길은 거대한 암벽조차 절개해 버렸고 터널과 다리를 이용해서 곧게 뻗어나갔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끝이 안 보이는 곧게 뻗은 길에서 기계 문명이 가져온 근대의 모습을 실감했다.
▲ 체트모스 늪지대를 관통하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1833년. 토마스 베리 그림. ⓒ구글 |
이동의 자유가 그 사회의 진보의 정도를 보여준다
1830년 9월 15일 드디어 리버풀과 맨체스터간의 철도가 개통식을 갖고 운행을 시작한다. 이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영국의 철도가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출발점이 된다. 인류는 비로소 자연력으로부터 탈출해서 이동의 혁명을 이뤘다. 산업혁명은 어쩌면 이동 혁명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철도가 탄생하기 이전의 육상교통은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도로와 운송수단의 측면에서 보자면 마차는 자연과 인간의 생산물 사이에 만들어진 어정쩡한 타협물이다. 바퀴는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원형처럼 굴러가기 좋은 형태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바퀴의 표면은 매끄러울수록 마찰을 줄여 잘 달릴 수 있다. 단 바퀴만 매끄러워서는 안 되고 이 바퀴가 닿는 표면인 길도 매끄러워야 한다. 그러나 매끄러운 바퀴를 장착한 수레를 끌어야 하는 말은 매끄러운 길에서는 미끄러워서 제대로 달릴 수 없다. 말발굽은 적당한 마찰력을 보장 받아야 제대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차가 달려야 하는 길은 말발굽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의 무르고 표면이 거친 면이 있어야 하면서도 마차의 매끄러운 바퀴가 진행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과 매끄러운 면이 존재해야 했다. 이 부조화는 마차가 일정 한계 이상 속도를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인류는 수천 년을 이동 시간에 있어서의 진화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철도는 마침내 이 자연력의 조건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길이 역시 매끄럽고 단단한 바퀴가 만나자 견인력이 뽑아낼 수 있는 한계치까지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견인을 담당했던 말이 기관차로 대체되자 동력을 가진 기계의 힘이 거칠 것 없이 시간의 벽을 뛰어 넘었다.
철도가 바꾼 길의 모든 것은 그대로 도로 교통으로 전이됐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일반 도로에서도 말은 사라져 버렸고 철도의 기술적 원리들과 개념이 도로에 적용됐다. 포장 도로는 선로처럼 요철이 없는 매끄러운 길이어야 했고 되도록이면 평탄해야 했으며 곧게 직선으로 뻗어 나가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서 아스팔트가 확산되면서 19세기에 자리 잡은 철도의 길을 뒤따른다. 볼프강 쉬벨부시가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기술한 증언은 새로 생긴 길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준다. "이 도로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도로가 아니다. 1930년대에 전적으로 자동차 교통을 위해 건설된 현대적인 자동차 도로는 독일에서는 철도(Eisenbahn)의 철자를 따서 Autobahn(고속도로)이라 불렸고, 제국 철도청에서 관리하였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개통식은 경찰은 물론 군인까지 질서 유지에 동원될 정도로 엄청난 인파 속에 열렸다.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개통되고 나서야 비로소 철도가 연 세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철도 사고였다. 세계 철도사의 공식 사고 1호로 기록된 사고가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개통식에서 발생한다. 개통식이 열린 곳은 맨체스터에 있는 리버풀로드역이었다. 이 리버풀로드역으로 가기 위해 귀빈 전용 열차가 운행됐다. 귀빈 열차는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운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특별히 제작한 대통령 전용 기차가 있고 고속 열차로 이동 시에도 경호와 안전을 위해서 특별한 조치가 취해진다. 대통령을 비롯한 VIP로 정해진 이들을 위한 전용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은 따로 선발된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살아생전 중국을 방문할 때면 자신의 특별 열차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귀빈 전용 열차가 철도의 시작 때부터 도입되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있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여러 측면에서 생활의 진보와 인권 확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철도사에 관심이 있는 나는 이동의 자유가 얼마나 확장되었느냐가 그 사회가 걸어온 진보의 정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철도를 이용한 이동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는 나라인가? 안정적 직업이 있고 모아놓은 재산이 있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라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가졌거나 늙었거나 임신을 했거나 학생이거나 어리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게다가 정부와 자본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2014년엔 무려 350원이나 인상된 시간당 5210원의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면 주말에 서울-부산을 고속철도를 이용해 왕복하기 위해서는 22시간을 일해야 한다. 하루 8시간 노동을 가정했을 때 거의 3일을 꼬박 일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현실에서 미래도 더 나아보이지 않는다. 국토부는 철도 민영화에 대한 로드맵을 밝히고 수서발 KTX를 주식을 발행하는 회사로 만든다고 한다. 주식만 팔리면 이윤이 최고의 가치인 재벌이나 외국 자본이 철도의 주인이 된다. 지방선도 철도공사의 운영 포기를 유도해 민간 자본에 팔아넘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시민의 이동권은 19세기로 후퇴하기 직전이다.
빙하기가 온다면 당신은 '생존 열차' 몇 등실에 탈 것인가?
기후 조건의 변화와 전쟁 등 생존의 문제에 따른 민족의 대이동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대 이전의 인류 대부분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이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층이었다. 노예는 팔려갈 때가 아니면 이동할 일이 없었고 평민들도 지극히 예외적으로 이동이 가능했고 또 이동을 위해서는 권력자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동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이동자는 계급적 지위와 무관하게 이동수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철도가 개통되던 초기에는 마차를 이용했던 사람들이 철도를 이용하게 되었다. 여행자의 대부분은 마차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철도 개통 초기 1등실과 2등실, 3등실을 나누었던 것은 철도회사의 영업 전략 이전에 교양 없고 냄새나는 하층민과 섞이기 싫었던 귀족들의 요구가 관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이동권의 주인인 귀족과 상류 계층이 새롭게 등장하는 교통수단의 개통식에 참여하는 게 당연했고 이들만을 준비한 열차가 운행되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1800년대 중반에서 1900년대까지도 여러 나라의 열차들에서 기관차에 연결된 앞부분부터 1등 객실들을 연결해 초호화판 식당과 응접실과 침실을 구비했다. 이어진 2등실 칸들도 호화롭진 않았지만 쾌적한 여행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반면 3등실 칸들은 좌석 간격이 좁고 불편한데다 냉난방 시설의 부실 등 1,2 등 객실과는 여러모로 조건이 열악했다. 3등실 칸의 승객들은 서로의 체온과 먹을 것을 나누면서 열악함을 극복했다. 열차 객실에 근무하는 차장들을 보면 전형적인 군복 스타일의 제복을 입었다. 1등실과 2등 객실의 통로에서 이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도 이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는데, 군복 같은 제복은 열차 승객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군인 같은 차장은 3등실에 공짜로 숨어든 무임 승객에게는 절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될 존재였다. 전 세계에 전쟁이 나고 점령국이 철도를 장악한 나라에서는 이들 차장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히틀러 친위대의 비밀경찰 게슈타포나 일본 천황의 헌병과 나란히 승차하여 모두 승차권을 꺼내라고 명령할 때면 정당한 승차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쫄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인류에 빙하기가 덮치고 마지막 남은 생존 열차에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따라 열차 탑승권이 주어진다면 당신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6-7년 전 사회공공연구소에서 일하는 만화광 후배에게 프랑스의 만화가 자크 로브와 장 마르크 로세트가 그린 <설국열차>란 만화책을 빌려주면서 만약 만화처럼 열차의 지정된 객실에 타야 한다면 어느 칸에 탈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후배는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맨 뒤 칸이 아니겠느냐고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의 길로 치닫고 있고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만화의 내용에서처럼 기관차 엔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랑자 같은 천민들을 태운 꼬리 칸을 떼어내려는 모습이 진주의료원을 폐쇄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자들과 이를 방관하는 이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시장의 영역은 국가에 의해 보장됐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다.
▲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스틸컷. 계급별로 나눠진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을 그렸다. ⓒ화면 갈무리 |
황금 칸 탔을 도지사, 공공성을 파괴하다
시장의 활성화와 유지를 위해 학교도 병원도 교통도 에너지도 국가가 책임을 지고 사회에 공급했다. 그러나 시장의 힘이 국가 권력을 뛰어넘고 이 시장을 이루는 동기이자 기초인 이윤이 최고의 가치로 솟아오르자 국가가 책임지던 사회의 여러 분야들을 효율이라는 절대자가 지배하게 만들었다. 시장이 국가를 먹어치우고 난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공공성 파괴는 우리 눈에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철도를 민영화하겠다는 이유가 철도가 만들어낸 적자 때문이라고 하는 자들은 그 적자를 수 십 배 뛰어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철도의 사회적 가치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
황금 칸만을 이용했을 것 같은 도지사는 의료원을 폐쇄시키면서 천민들로 득실거리고 전체 열차에 부담만 주는 꼬리 칸을 떼어내는 후련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현대의 열차는 기술적 원리상 달리는 도중에 강제로 객차가 분리되면 제동기능을 하는 연결호스가 파열되어 비상 정차하게 되어있다. 적자투성이 의료원을 떼어낸 결과는 사회의 자연스런 기능을 파열시켜 결국 정지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을 경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부치는 세력들에 밀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조금씩 가진 것들을 박탈당한 채 점점 다음 칸으로 내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밀리다 보면 결국은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다.
▲ 경남도가 끝내 진주의료원 해산을 공표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달리는 열차의 맨 뒤 칸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섬뜩한 공포심이 든다. 불과 문 하나의 차이로 안전한 객실과 고속으로 멀어져 가는 선로가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그 황량한 자갈밭 선로 위로 눈을 질끈 감고 뛰어 내리도록 압박하는 끔찍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지옥으로 변한 학교의 옥상 위에서, 정리 해고 통지서를 받은 회사 앞의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수십 통의 대답 없는 취업용 이력서 뭉치를 쌓아둔 반 평짜리 고시원의 골방 안에서, 모두가 쫓겨난 텅 빈 의료원에서, 사라져갈 수많은 시골역 들에서.
이런 심각한 사회를 예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꼬리 칸 사람들의 반란을 걱정해서였을까? 여러 나라에서 한 열차에 귀빈실과 삼등실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열차를 등급별로 나누어 버렸다. 한국에서는 최고급 열차와 고급 열차와 일반 열차로 나눈 채 이름을 부여했다. 과거 새마을호와 비둘기호의 객실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현격한 차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아예 통째로 사라지게 하는 마법도 부린다. 비둘기호가 사라지고 통일호가 사라졌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열차 이름으로 등급을 나누는 후진적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라진 것이 아닌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최초의 철도 인명 사고
이제 철도사 최초의 인명 사고 현장으로 가보자. 귀빈 전용 열차가 개통식이 열릴 리버풀로드 역에 가기 전에 증기기관차에 물을 채우기 위해 맨체스터 외곽의 파크사이드 역에 잠시 정차했다. 철도 회사 관계자는 잠시 물을 채우는 중이니 객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옆 승강장에 총리를 태운 또 다른 특별 열차가 들어왔다. 이것을 본 50여 명의 고위급 인사들이 정차해 있던 귀빈 열차에서 내렸고 이중에는 전직 장관을 지낸 허스키슨 의원도 있었다. 허스키슨 의원은 총리를 지내고 있는 웰링턴 공작과 정치적 입장 차이로 갈등을 빚었던 과거가 있어 웰링턴 총리를 보자 화해의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마차가 일반적인 시절, 사람들이 마차 길을 가로질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은 흔하게 벌어졌다. 허스키슨 의원은 선로를 가로질러 총리가 앉아있는 객차로 다가가 창문을 통해 총리와 악수를 나눴다. 총리에만 신경을 썼던 허스키슨은 조지 스티븐슨이 운전하며 다고 오고 있는 로켓호를 보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기관차를 본 허스키슨은 허겁지겁 총리가 탄 객차의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객차 문이 밖으로 열리면서 손잡이를 잡은 채 매달려 있던 허스키슨 의원이 선로에 떨어졌고 로켓호는 그대로 허스키슨의 발을 뭉개고 지나가 버렸다. 허스키슨은 로켓호로 옮겨졌고 스티븐슨이 운전하는 기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고통을 멈추기 위해 엄청난 양의 아편 주사를 놓고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허스키슨 의원은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웰링턴 총리는 왜 성난 군중과 맞닥뜨렸나?
눈앞에서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웰링턴 총리는 행사를 취소하고 리버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맨체스터에서 총리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통식에 가야한다는 참모들에게 설득당해 뒤늦게 맨체스터의 리버풀로드역을 향해 열차를 출발시킨다. 맨체스터 외곽에 도착한 총리의 열차는 개통식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을 만나게 된다. 선로에 뛰어든 군중들이 너무 많아 지역의 관리들이나 경찰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총리를 태운 열차는 아주 느린 속도로 인파를 헤치고 드디어 맨체스터의 리버풀로드 역에 도착했다. 리버풀로드역에 도착한 총리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고 눈은 심하게 찌푸려졌다. 총리를 비난하는 플래카드와 깃발을 든 군중은 성난 시위대로 변해있었다. 웰링턴 총리는 자신이 탄 객실로 날아오는 야채더미들을 봐야만 했다. 시민들은 손에 든 야채와 과일을 총리에게 던지며 열차에서 내리지 말고 리버풀로 돌아가라고 함성을 질렀다. 기관차의 방향을 돌려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열차는 맨체스터로 돌아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리버풀로 돌아갈 수 있는 열차를 겨우 준비한 끝에 총리를 태운 열차는 선로에 뻗어있는 술 취한 사람들을 겨우 몰아내고 군중들의 조롱소리를 뒤로 한 채 맨체스터를 떠날 수 있었다.
▲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노선의 모습을 담은 크레이튼의 그림. ⓒ구글 |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철도 노선으로 여겨지는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기념비 적인 철도 개통식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축사나 팡파르는커녕 끔찍한 사망 사고가 벌어졌고 역사와 선로를 장악한 채 총리와 정치인들에 저주를 보내는 시민들의 함성이 철도 개통을 알렸다. 술주정뱅이들의 위협에 악단은 도망가 버리고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맨체스터 시민들에 환멸을 느끼는 총리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개통식이 아수라장이 된 걸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역관리들과 철도회사 직원들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볼이 부풀고 입이 나온 얼굴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 영웅 출신 웰링턴 총리가 이처럼 맨체스터 시민들에게 공격을 당한 이유가 있었다. 독재자라고 불릴 정도로 정부의 통제와 권력 집중을 중요시했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경제 불황으로 생활에 지친 시민들의 공산품가격 인하 요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휘그당이 내놓은 여러 가지 정치, 경제 개혁안에 대해 반대했다. 특히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됐던 영국 북부지역, 스코틀랜드 지역, 맨체스터와 리버풀, 글라스고 등의 시민들이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기에 개혁에 반대한 총리에 대한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산업의 팽창으로 신흥 도시로 떠오른 지역의 소외감이 개혁을 거부하는 정부와 총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들 지역의 대다수 민중들은 농촌 출신의 노동자였는데, 웰링턴 총리는 농촌에 대한 지원이나 노동자의 생활고를 무시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화약고였다. 게다가 신흥 공업지대로 떠오른 지역의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조차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정책을 편다고 총리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갖지 않았다.
웰링턴 총리는 11월 8일 하원에서 "나는 의회의 개혁 같은 것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여러 개혁조치에 반대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통해 정치적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린다. 며칠 후 웰링턴 총리의 연설이 신문에 실리자 분노한 런던 시민들은 다우닝가로 행진 했다. 시민들은 "총리는 물러가라!", "개혁!", 웰링턴 총리의 도움으로 창설된 "경찰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이를 막는 경찰과 폭력 사태를 빚었다. 다우닝가의 폭력 사태가 벌어진 다음날에는 시민들이 웰링턴의 집으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웰링턴의 집 창문 유리창 곳곳에 시민들이 던진 돌들로 구멍이 뚫렸다. 결국 11월 15일 총리와 내각은 총사퇴했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개통식 때 맨체스터 시민들로부터 야채더미를 맞으며 야유를 받은 지 정확히 두 달 만 이었다.
개혁이 실종되고, 정부기관이 시민들을 적으로 돌리고, 의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9세기 영국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