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뿌리를 찾는 “뿌리공원(Root Park)”-7
종교적측면(宗敎的側面)에서 경조사상(慶弔思想)은 화(禍)를 멀리하고 복(福)을
부르는 ‘양화초복(禳禍招福)’의 관념(觀念)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인간의 유한(有限)한 생명과 제한된 능력(能力)에 비해 욕구(慾求)는 무한(無限)하기
때문에 갈등(葛藤)과 어려움에 봉착(逢着)하는데 종교적신앙(宗敎的信仰)은
그 해결을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초월자(超越者)에게 간구(干求)한다.
그런데 유가(儒家)는 인간의 바람을 조상신(祖上神)에게 의지 한다.
이른 아침 목욕재계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사당(祠堂)에 들러 신위(神位)를
배알(拜謁)하는 것은 일정(一定)한 성소(聖所)에 나아가 행(行)해지는
다른종교(他宗敎)의 예배의식(禮拜儀式)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숭배의 대상(崇拜對象)이 조상신(祖上神)이라는 점만 특이할 뿐이다.
예기(禮記)에서 공자(孔子)는 “제사를 지내면 복(福)을 받는다.”, “제사 에는
기원(祈願)이 있고 보답(報答)이 있다.”고 말 하였다.
이렇게 볼때 경조사상(慶弔思想)에는 ‘추원경모(追願景慕)’와 ‘기복적 신앙
(祈福的信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볼수가 있을것이다.
노산 이선승지 以善勝之
경주(월성)손씨
경주손씨(慶州孫氏)는 신라건국초기인 서기32년(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9년) 사로국 6촌 중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손씨로 사성(賜姓)받은 것이
시초이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5) 때 석종고사(石鍾古事)의 주인공인 국효 손순(孫順)을
중조로 하고 경주(慶州), 밀양(密陽), 평해(平海), 세파로 갈렸다. 손순(孫順)의
손자 손익원(孫翼洹)도 월성군에 봉군되어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는 세계가 실존하지 않고 고려말에 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지금 월드스타 축구선수 "손홍민"이 경주손씨 이다.
고흥류씨
고흥류씨의 시조는 고려문종 때 호장(戶長)을 지낸 류영(柳英)이다.
상계는 전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고흥류씨연혁(高興柳氏沿革)편에 류영의 7세손 류청신(柳淸臣)이 고려 고종 때의 인물
이라는 기록을 통해, 그가 문종 때의 인물이라 추정할 뿐이다.
그가 먹을 갈아 글씨를 썼다는 연단석(硯端石)과 세답석(洗踏石) 등의 유적을 통해 그가
흥양(興陽)에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류영의 아들인 류숭제(柳崇濟)와 손자인 류광(柳光)
도 호장을 지냈다.
류영의 6세손인 시중공(侍中公) 류승무(柳升茂)와 마찬가지로, 7세손 류청신(柳淸臣)은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출신으로 그 선대는 모두 부곡리(部曲吏)를 지냈다.
국가 제도상 부곡리는 비록 공적이 있어도 5품 이상 승진할 수 없었는데, 류청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몽골어를 배워 누차 사신을 따라 원나라에 가 응대
를 잘 했기 때문에 충렬왕의 신임을 받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오르고, 고이부곡은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되었다
3.1운동의 류관순 열사 가 고흥류씨 이다.
또한 은진송씨 들이 중흥조 할머니로 받드는 분 에 고흥류씨가 있다.
의령남씨
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문헌에 5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영양(英陽)·의령·
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 54본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 없다.
이들 3본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고 있다.
남민은 본래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를 지낸 김충(金忠)이었다. 755년(천보 14)[경덕왕 14]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有隣)[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땅에 표착하였으나, 신라의 자연 풍경이 아름다워 눌러 살고 싶다고 청하자,
경덕왕(景德王)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로 사성하고 천성이 영민하다 하여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줬다. 또한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영의(英毅)라 시호하였다.
고려 때 이르러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남홍보(南洪輔), 남군보(南君甫),
남광보(南匡甫) 등이 나와 각각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추밀원직 부사, 고성군(固城君)
등에 올라 영양 남씨(英陽南氏), 의령 남씨,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분적 시조가 되어 각기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이 중에서 둘째 집인 의령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진출
하여 상신(相臣) 6명과 대제학 6명을 배출하였다. 개국 공신 남재(南在), 남은(南誾) 형제
중 남재의 후대에서 많은 경상(卿相)과 석학이 나왔다. 남재의 손자 3형제 중 남지(南智)는
좌의정, 남간(南簡)은 예문관 직제학, 남휘(南暉)는 태종(太宗)의 부마가 되었다.
27살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장군이
썼다는 이 시 한수에 대장부의 기질이 잘 보이지만
이로 인해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白頭山石 磨刀盡
-남이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안동권씨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인 권행(權幸)이다.
원래 이름은 김행(金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 김씨다.
930년 왕건의 고려군이 견훤의 백제군과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태조는 그의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
라며 권(權)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작위를 제수하였다.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다. 권행, 김선평, 장정필 세 사람은 고려
창업의 공으로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 三重大匡太師)를 제수
받았으며 983년(성종 2) 이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三太師廟)를 세웠다.
사시지문(四始之門)은 안동 권 씨의 네 가지 처음이 된 것을 일컫는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첫 인물인 권중화(權仲和), 조선 개국 후 첫 대재학을 지낸
인물인 권근(權近), 세종대 처음으로 호당(湖堂)에 들어간 인물인 권채(權採), 그리고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그것이다.
재령강씨
재령 강씨(載寧 康氏)의 시조 강득룡(康得龍)은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으로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그의 친누이동생이다.
강득룡은 고려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결심, 관악산에 들어가 암자에 살면서 매일같이 산에 올라 개성을
향해 통곡하였는데, 이곳이 연주대(戀主臺)와 연주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여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그의 후손
들이 본관을 재령으로 하였다. 재령(載寧)이라는 지명은 황해도 재령(黃海道 載寧)을 뜻한다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의 현손인 박상충(朴尙衷)이 1353년(고려공민왕)에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
이자 처남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1,2위로 나란히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경사(慶史)와 역학(易學)에 능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박상충은 신진 유생
(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박상충의 아들인 박은(朴訔)이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열하일기를 썻던 연암 박지원 선생이 반남 박씨 이다.
양주최씨
양주최씨의 시조는 최억으로, 자(字)는 원가(遠可), 호는 청계(淸溪)이다.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에 태사(太師)와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1353년(공민왕)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지고 사패지를 하사받았다.
이후 후손들은 양주를 본관으로 삼고 세거하기 시작했다. 파(派)는 정언공파(正言公派)·호은공파
(湖隱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 등 5개 파로
구성되어 있다.
6세손까지는 양주에 거주했으나 이후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