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을 해요
당신의 목소리는 코바늘 8호가 적당해요
가볍게 날리는 분홍의 기억 한 뭉치를 골랐어요
보풀처럼 번지는 무심함을 당겨 한 코에 한 번씩 입김을 불어 넣어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수시로 미간의 주름을 살피죠
오늘 본 영화처럼 촘촘했다가 느슨해지는 건 좋은 결말이 안 나요
뒤꿈치를 들던 첫 입맞춤처럼 한 단 한 단 키가 늘어나요
짧은뜨기는 기둥코 하나를 세워서 더디지만 튼튼하고
한길긴뜨기는 기둥코가 두 개라서 빠르지만 힘이 없어요
여러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
실밥처럼 눈이 내리면 자꾸 옆을 보게 돼요
여름에는 얇은 꿈으로 성글게 잠을 떠서 뒤척이는 세상을 덮어줘요
낮에 꺼내지 못한 색색의 이야기들로 여러 개의 별을 뜨며 밤을 견디죠
별들을 이어붙이며 멀리서 혼자 깜박거리는 당신을 생각해요
한 단을 마무리하는 빼뜨기는 문장의 마침표예요
숨을 몇 번 쉬었는지 강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뱉어버린 고백 같아요
마음이 식으면 미련 없이 줄을 풀지요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나의 입을 닮았죠
한동안
쇠못이 박힌 전봇대의 옆구리가 저리면
하늘에 쓴 보고 싶다는 말에 검은 밑줄이 그어진다
그 위에 앉은 참새 네 마리
‘보고 싶다’가 ‘보고싶다’로 총총 모이더니
갸우뚱 걸음을 옮기며 ‘보 고싶다’로 어렵게 입을 뗀다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날갯짓 몇 번으로 다잡고
다시 ‘보고싶 다‘로 길게 뜸을 들이다 날개를 접는다
다
싶
고
보
잠깐 흩어지다 멀리 날아간다
짹짹, 소슬바람이 불고
잭잭, 꽃눈 몇 송이 함께 날고
재재, 해 기우는 소리 나직하게 가라앉고
자자, 하는 너의 소리가 문턱을 넘어 들리는 것도 같고
ㅏㅏ, 나는 이렇게 날개만 남아
광안리
낯선 방에서 서로가 가져온 짐을 펼쳤다
어떤 건 쓰임새가 겹치고 어떤 건 생소했다
그가 가져온 치약을 칫솔에 담뿍 짜주었다
한번 써보라는 말에 정말 한 번인 것처럼 오래 이를 닦았다
입안 가득 몽글몽글 차오르는 거품 때문에
우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웃었다
키스를 끝낸 입술과 혀는 할 일을 다 한 듯 봉해져 선반 위에 올려졌다
침묵은 차가웠고 깜깜한 밖이 더 안온해 보였다
하루살이가 하루 살고 죽는 이유를 알아?
성충이 되면 입이 없어지기 때문이래
그는 영화를 보다가 소파 밑에서 혼자 잠들었다
갑자기 늙어버린 얼굴에 오래전 퇴화한 입의 흔적이 옅게 보였다
저녁 바다에 수만 개의 검은 보자기들이 출렁였다
나는 날이 환해질 때까지 보자기 하나하나를 집어서
우리가 가보기로 한 산책길과 헌책방, 카페와 밥집을 덮었다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꼭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루를 살고 우리는 광안리에서 죽었다
관계없이 삼백일이 흐르고
나이 마흔둘에 동갑내기 남자를 만난 보경이의 결혼식 후, 계절이 서너 번 바뀌고 우리 다섯은 다시 뭉쳤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근대 사복을 골라 입고 셔터를 눌러댔다. 낄낄깔깔, 달고나처럼 다디단 웃음에서 쓴맛이 났다. 헐거워진 입 밖으로 쪼개지고 금 간 별과 나무와 도형들이 튀어나왔다. 까맣게 잊었다가 어쩌다 한 번 만나 다정한 관계인 우리는 아름다운 맥시스커트에 걸맞는 코르사주를 서로 골라주며 친절했다. 넷이 잘 나오면 하나가 눈을 감았다. 셋이 웃고 있으면 둘이 찡그렸다. 나만 잘 나오면 그만인 단체 사진은 결국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각자 아름다운 얼굴로 타협을 봤다. 유지 장판이 깔린 온돌방에서 파자마를 입고 뒹굴며 늙은 처녀 총각이 만나 함께 꾸리는 신혼생활을 물었다. 그렇지 뭐, 신행 첫날부터 지금까지 관계없이 밤에 잠만 자. 보경이가 오징어를 씹으며 말했다. 순간 백일홍 꽃주를 홀짝거리던 소리도 과자 부스러기를 씹는 소리도 멈췄다.
모기 한 마리가 정적을 깼다. 모두 수선을 떨며 모기와 사투를 벌였다. 흰 실크 깃을 두른 요를 깔고 불을 끄니 창호지 바른 문틈으로 벌레 울음들이 기어 들어왔다. 이 요란한 고요와 관계없이 우리는 서로 돌아누웠다. 미로 속에 숨은 각자의 방에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삼백일이 흘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우리는 날개를 단 듯 푸른 기와지붕 위에 차례로 걸터앉았다. 별자리에 들지 못한 별들을 끌어당기느라 뒤척이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선짓국
울컥하고 쏟았겠다
대접 한 그릇에 담긴 비릿한 이것
녹슨 그넷줄에서 나던 쇠 냄새
출렁했겠다
말하자면 고통은 검붉다
국그릇을 왼쪽에 두는 습관이
밥그릇을 오른쪽에 두는 습관을 나무란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불길한 징조들이 계류한다
흐른다
누군가 지금 다리 밑에서 핏덩이를 줍고
탯줄을 자른다
씹을 수도 없이 한 번에 꿀꺽, 넘어가는
이 뜨겁고 말랑한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