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규가 만난 사람>
전통공연예술 산업화와 세계화의 마에스트로
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연구소 소장 김승국
김승국 전통공연예술연구소장
국악로에 인접한 창경궁 돈화문에서 대학로로 향하는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고궁호텔 우측 아담한 황토색 건물 3층에 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곱게 물든 가로수 잎을 정겹게 흔들어 대던 날 대표를 맡고 있는 김승국 소장을 만나기 위해 연구소를 찾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 부설 국악교육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 국립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강성 이미지가 강했던 김소장은 예상과 달리 아주 편안하고 온화한 인상이었다. 50년 전통의 명문 사학인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를 치밀한 기획력과 강한 업무추진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국립화한 1등 공신이 김소장이라는 것은 국악계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연구소 내부는 딱딱한 4각의 사무공간이 아니라 예술연구소답게 7각의 흰색 내부 공간으로 창덕궁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김소장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국보 278호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모형과 벽에 걸려있는 한국화 ‘승무’, 전통악기 해금은 전통과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무실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원남동에 터를 잡은 이유는 연구소 설립을 준비하면서 국악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종로의 국악로와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동숭동 대학로와 가까운 위치가 적당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호규 국악신문사 사장이 일찍이 점찍어 놓았던 지금의 사무공간을 소개해 주어, 연구소의 명칭과 그 위치가 주는 상징성이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에 바로 계약을 한 것이다.
좌로부터 채치성 국악방송본부장, 김승국 소장, 정인삼 한국민속촌농악단장, 김호규 국악신문사장
영어교사가 최고의 전통공연예술 전문가로 변신
김승국 소장은 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연구소 소장 직책 이외에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평안남도 문화재위원, 황해도문화재위원, 한국전통예술학회 이사, 귀신학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통연희단체총연합회 이사, 대한민국전통연희축제 자문위원, 부천무형문화엑스포 정책자문위원직을 맡고 있다. 또한 화성재인청복원사업 집행위원장, 문광부 전통예술TF위원, 사단법인 남사당보존회 이사장,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감직 등을 역임한 전통예술계에 없어서는 안될 중진이다.
하지만 그가 영어영문과 출신이며 시집을 3권이나 출간한 시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떻게 전통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상기된 표정으로 그 인연을 소상하게 털어 놓았다.
“1978년에 문학계의 선배이자 공간그룹의 ‘월간 공간’지의 편집장이었던 조정권 선배의 권유로 ‘월간 공간’ 편집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여학생 둘이 저를 찾아온 거예요. 그때 국악예고에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친구가 그 여학생들에게 국악예고에서 매년 펼치던 ‘민속국악제전’ 초대장을 제게 보내준거죠. 그때만 해도 저는 서구 음악과 미술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전통음악에 대해서 업신여기는 마음까지 있었죠. 그러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명인들의 공연이라도 안 갈 제가 어린 학생들이 펼치는 국악 공연을 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친구가 초대장을 들려 학생들까지 보낸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눈도장을 찍을 겸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로 바뀐 시민회관 별관 공연장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죠. 그런데 내 눈 앞에 펼쳐진 국악공연은 국악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완전히 부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마디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우리 전통음악과 소리와 춤이 너무나도 훌륭하며 소중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런 자랑스러운 전통예술을 지키고 계승하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바로 옆자리에 앉아 계신던 교장 선생님에게 제가 영어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저를 불러 주실 수 없는지 하며 청을 드리게 된거죠. 청을 드리기는 하였지만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 바로 다음해인 1979년 2월 말경 교장 선생님께서 영어 교사가 필요한데 오시지 않겠느냐는 전갈이 왔습니다.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를 던지고 국악예고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 인연이 30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욕적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처음의 그는 전통예술에 대한 식견은 전무한 평범한 영어교사에 불과했다. 처음 그가 부딪힌 한계는 아이들의 진로상담! 예술계에 진출할 학생들의 진로 상담을 하면서 전통예술에 대하여 무지해서는 올바른 진로 상담을 해줄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독학이지만 본격적으로 전통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도 영어교육 전공인 교육대학원이 아닌 문화재 전공의 예술대학원으로 진로를 정했다. 근무하고 있는 국악예고에는 기라성 같은 국악계의 명인들이 동료 교강사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그들로부터 많은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던 터라 그의 전통예술전문가로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특히 2006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예술정책TF 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전통예술정책 개발에 참여 했던 것이 전통공연예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가 전통예술을 공부하며 꼽은 최고의 멘토는 국악예고의 교감 재직시 한국전통예술학회장을 지내고 전통문화예술계의 석학인 동국대 명예교수인 홍윤식 박사다. 홍박사를 교장으로서뿐만 아니라 학문적 스승으로서 보좌했던 인연이 문화적 안목을 크게 트이게 하였고 학계, 문화계의 훌륭한 많은 인사들과 만나며 많은 감화와 인적 관계를 형성되게 되었다.
좌로부터 유길촌 무형문화엑스포 사무총장, 김종규 삼성출판사 회장, 최종실 중앙대 교수, 최종민 동국대 교수, 김승국 소장
전통공연예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기관 목표
연구소를 만들게 된 동기를 묻자 “30년간 오로지 전통공연예술인을 육성하는 전문교육기관에 몸담고 살아왔습니다.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으면서 전통공연예술의 산업화와 세계화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집중적인 행․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하여야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R&D연구가 필요한데 아직은 전통공연예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기관이 없다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30년간 전통예술 전문교육기관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전통공연예술계의 전문 연구자들과 뜻을 함께하여 연구소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설립취지를 밝혔다.
이런 취지에 맞게 연구소 창립 이사진들은 대외적 네임밸류보다 뜻을 함께하고 동고동락할 수 있는 전통공연예술 기획자, 전문예술인으로 고루 구성했고 연구원들은 전통공연예술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실력을 인정할만한 현장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실력 있는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연구소의 구체적 사업방향은 전통공연예술 정책연구, 전통공연예술 콘텐츠 연구 및 개발, 제작사업, 전통공연예술 교육자료(교재․교구)연구, 개발 및 보급사업, 전통공연예술 관련 학술발표회 개최 및 국제교류 사업, 축제 및 전통공연예술 공연기획사업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열악한 전통공연예술인들에 대하여 전통공연예술의 기획, 연출, 무대, 홍보, 마케팅 등 예술경영에 대한 컨설팅도 병행해 나가는 등 전방위적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좌로부터 홍윤식 동국대명예교수, 김승국 소장
전통공연예술인들을 위한 공간 만들어 나갈 터
전통공연예술계의 문제점을 묻는 질문에는 “전통공연예술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활동과 관련된 것으로서 전통음악, 전통무용, 전통연희(演戱) 등 소리와 몸짓을 주된 요소로 하는 창조적 행위 및 그 성과를 말하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 깃들어진 중요한 무형문화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통공연예술의 실태는 광복 후 급격한 서구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서양공연예술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국악’이라는 분야로 한정된 채, 국민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며,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라며 거침없는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연구소는 모든 전통예술인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 연구소는 저의 것도 아니고 우리 연구소 임원들의 것도 아닌 전통예술인 모두의 것입니다. 단지 저는 우리 전통예술인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소신껏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심부름꾼이 되고자 연구소를 연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진정성과 전통공연예술의 발전을 갈구하는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김호규 기자>
첫댓글 멋지십니다.
늦었다고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이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