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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afDLZbEaNQ 대륙한양에 대한 설명중 짠물....에 대해서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행일기 > 연행일기 제4권 > 계사년 > 최종정보연행일기 제4권 / 계사년(1713, 숙종 39) 1월3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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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춥지 않았다. 북경에 머물렀다.
식후에 장원익(張遠翼)이 와서 고하기를,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4대손 이정재(李廷宰), 이정기(李廷基) 두 사람이 들어와서 이동배(李東培)의 편지와 이여백(李如柏)의 화상을 주었습니다.”
하였다.
…………..
대개, 북경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드물어 남방 사람으로 서반을 삼는다. 옥하관(玉河館)으로 차정하여 보낸 자가 모두 6인인데, 이들은 모두가 남방 사람이다. 생긴 모습이 본래 크지 못하고, 비록 월급이 있다 하나 매우 박해서, 만리 타향에서 생활이 가난하며 군색한 빛이 면목에 드러난다. 사행이 올때 서책 매매를 이들이 담당하는데, 이로써 약간의 이득을 보는 일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곳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서반들을 통해서 정보를 알기 때문에 이들은 태반이 거짓 문서를 만들어 역관들에게 되팔고, 비록 아무 일도 없을 때라도 일이 있다고 하고, 일이 비록 가벼운 것이라도 무거운 것처럼 말하니, 이들의 말은 종래로 믿을 바가 못 된다. 오늘의 문답도 이 가운데 거짓된 말이 있을 것이요, 그중에 또한 진실과 거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박동화(朴東和)가 와서 회회국(回回國) 참외 반쪽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게 바로 황제에게 진상한 것인데, 통관 박득인(朴得仁)이 보내 온 것입니다.”
하였다. 그 모양이 남과(南瓜) 속명 호박 와 같으나 작고, 껍질은 푸르고 속은 누르고 붉어서 우리나라의 이른바 쇠뿔참외의 빛과 같으나, 그 씨는 보통 참외와 비슷하고 조금 크다. 맛은 달며 향기로워 우리나라 참외와는 현격하게 다르고, 껍질이 두껍기가 수박과 같으나, 두꺼운 껍질을 깎아 내고 씹으면 단단하면서도 연하고, 깨물면 소리가 나는데, 그 맛이 또한 참외보다 기이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쾌하여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천단(天壇) 물을 길어 온 지 이미 나흘째인데, 이 물과 딴 물에 비하여 낫기는 하나, 역시 매우 나빠 오늘부터 다시 조양문 밖 팔리포(八里鋪) 근처의 물을 또 길어 왔다. 천단 물에 비해서 조금 나은 듯하나 죽을 끓여도 안 된다. 이곳의 물은 우리나라의 저자 가운데 가장 짠물과 같이 짠데, 짠맛은 오래 마시면 점점 나아지나, 가장 고약한 것은 짠맛 가운데 단맛이 있어 마실 수가 없었다. 세수를 하면 얼굴이 터지고 손에 거스러미가 일어나며, 수건으로 문질러 3, 4일이 지나면 수지(水枝)와 같은 것이 이는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정양문 밖 40리쯤에 좋은 물이 있어 연동(蓮洞) 이 상공(李相公)이 왔을 때 늘 이 물을 마셨는데, 비싼 돈은 주어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한다.
오늘 죽통에 넣어 두었던 볶은 장[炒醬]을 꺼내어 먹었다. 올 때에 역관배들이 볶은장은 맛이 쉽게 변해서 먹을 수 없다 하였으나, 내가 올 때 큰 대통 한 마디를 둘로 잘라 각각 볶은 장을 넣은 뒤 모두 입을 막고 도로 전과 같이 붙이고 종이로 바깥을 발라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했었는데, 꺼내어 보니, 맛이 조금도 변치 않았다.
종들이 점옥(簟屋)에 온돌방을 만들어, 오늘부터 따뜻한 바닥에 잠자게 되니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신지순(申之淳)이 관부(館夫)들에게 빌려 벼루와 필통을 얻어 와서 문방구를 대개 갖추었으며, 주방에서 밤마다 초를 보내어 낮에는 비록 바쁘나 밤이면 전문을 내리고 촛불을 밝히고 앉았으니, 고초 가운데도 또한 취미가 있다. 밤이 길어 잠이 안 오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잡지명 | 개벽 신간 제1호 |
발행일 | 1934년 11월 01일 |
기사제목 | 實話 西伯利亞의 お菊 |
필자 | 金璟載 |
기사형태 | 회고·수기 |
實話 西伯利亞의 お菊
金璟載
나에게는 아즉도 기억이 새롭다. 지금부터 X년전 北滿哈爾濱에서 당한 일이다. 그 날이 바루 8月 1日 부실부실 나리는 細雨를 마저 가면서 방랑의 울적한 心理를 풀(解) 길이 업서 街頭에 산책의 길을 떠낫다.
한 채의 靈柩의 압헤는 『舊西伯利浪人有志』라고 씨여 잇는 한쌍의 花環이 노히엿고 『西伯利亞出兵 戰功者 出上キク之柩』라는 銘旌이 바람에 흔들니고 잇다.
그것을 무심히 보고 지내는 나는 『出生キク』라는 일홈이 어듸에선가 만히 듯던 일홈이요『舊西伯利浪人有志』라는 것이 엇전지 나의 마음을 잡어 댕기는 인력이 잇섯다. 그래서 한번 다시 도라다 보고 잠간 머리를 개웃하고 지난 간 날의 기억을 상기할 기회를 주엇다.
그리고 오! 『西伯利亞의 お菊』가 죽엇구나 하고 측은한 생각이 드럿다. 새삼스럽게 인간의 허무가 늣기여젓다. 더욱이 넘우도 적막한 그 葬列에 동정의 눈물이 글성 글성 해젓다. 그런대 그럿케까지 일홈이 일세에 울니던 『西伯利亞의 お菊』도 北滿의 孤혼이 되고 마는가. 겨우 2,3인의 지나지 안는 護喪人, 음울한 天氣 부실 부실 나리는 細雨, 그의 최후는 넘우도 쓸쓸하고 비극이엿다. 오직 『舊西伯利浪人有志』라고 씨여 잇는 한쌍의 화환이 그의 생전을 말하는 듯 하엿다.
내가 아즉도 학생시대에 露西亞에는 XX革命이 잇고 獨逸과 單獨으로 講和가 성립되엿다. 이에 분개한 연합군은 첵크軍을 원조한다는 구실하에서 西伯利亞에 출병케 되엿다. 그에는 米國, 英國, 佛蘭西, 日本, 中國등이 動兵하야 西伯利亞의 요지를 점령해 버렷다.
그때의 신문이나 잡지에는 『西伯利亞의 お菊』란 일홈이 선전되기 시작하엿다. 그후 내가 西伯利亞에 가서 보니 거긔에서는 『馬賊할머니』로 그의 일홈이 알니워젓고 北滿에서는 『赤マントノ婆サン』으로 알니워젓다. 그리하야<53> 그의 본명인 『出上キク』를 아는 사람은 그 만치 안엇다.
20세 전후의 사람에게는 공상이 만타. 그리하야 소사(湧)오루는 漂泊性의 지배를 다분히 밧게 된다. 나도 그러한 청년의 한 사람이엿다. 더욱이 톨스토이의 復活에 나오는 「가주샤」는 동정하는 남어지에 西伯利亞가 그리워젓고 크로포토킨의 저서, 動物界의 道德에서 露國혁명가가 西伯利亞의 유배의 처분을 밧고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西伯利亞에 와서 土人과 동물들을 상대로 적막한 생활을 하는 그 중에서도 철학이 나오는 자연과학이 생성되고 잇는 그 장면의 묘사에서 西伯利亞가 그리워젓고 娼婦출신의 『西伯利亞의 お菊』가 열렬한 조국애의 충동을 바더서 생사의 간에 立하야 담대無雙한 그 志氣 神出鬼沒하는 그 동작은 나로 하야금 일층 더 西伯利亞를 그립게 햇다.
『西伯利亞의 お菊』는 가주샤 크로포토킨과 함게 나의 머리에 깁히 印처진 사람이 하나이엿다.
사람의 일이란 모를 일이다. 내가 學生時代에 그럿케 추모하든 『西伯利亞의 お菊』를 오날 기약치 안은 이곳에서 그를 護喪하게 된 것이 우연치 안은 인연이라고 미더젓다.
哈爾濱東部의 日本人公同墓地에서 화장케 되엿고 『出上キク之墓』라는 한 개의 木碑가 새로 세워젓다.
나는 근일에 破寂거리로 엇던 잡지를 일고 잇는 중에 哈爾演의 東都 日本人公同墓地에는 임이 썩어 빠진 「出上キク』의 묘비가 넘우도 세인의 *薄을 개탄하고 잇다는 간단한 구절이 잇고 그의 생전을 추모하고 조상하는 문구가 나열되여 잇다. 벌서 오래 전부터 나의 기억에서 사라젓든 「西伯利亞의 お菊』는 다시 추억이라는 길을 발바서 고개를 들고 이러낫다. 그리고는 나의 純厚하든 학생시대가 회상되고 滿洲 西伯利亞에 방랑하든 그 때가 幻燈갓치 눈압헤 影寫되여 온다.
いやなキタイスキー嫌ひなスキー
好なやポンスキーにや金がない
이것은 北滿, 西伯利亞에 잇는 일본인 娘子軍의 입에서 흘너 나오는 노래의 한토막이다. 오동랫안 娘子軍生活을 게속하고 잇든 『西伯利亞의 お菊』도 술이 얼근이 취하면 언제나 이런 노래를 불넛다. 이제 겨우 20세도 차지 못하는 그 여자는 이러한 노래를 불너 가면서 海蔘威에서 니골니스크에 이만, 하바로스크 등지에로 그의 발길은 한 곳에 정착할 줄을 몰랏다. 하바롭스크는 西伯利亞에 잇서 상당히 큰 도시이건만 天來의 방랑성을 갓고 잇는 彼女에게는 만족을 주지 못햇다. 동모 한 名도 업는 길을 그는 오날은 동에서 내일은 서에서 이럿케 방랑의 길을 게속하고 잇섯다. 야고풀데, 오리긴 등의 금광지대에도 일시 몸을 당거 보앗으나 꼿 차저 다니는 나븨 모양으로 한 곳에서 정착하지를 못햇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술을 먹기 시작하야 대주객이 되엿고, 청춘의 정열은 순간순간으로<54> 이 사람의 가슴에서 저 사람의 입술에로 올마다니엿다. 그리하야 몸이 피로하고 세상만사가 귀치 안코 괴로운 때에는 아편을 한 대 피우고는 그저 꿈나라에로 차저 드럿다. 그럼으로 그에게는 논리도 도덕도 업고 타고난 방랑성과 자유가 잇을 뿐이엿다. 그는 오날의 사회에 잇서 한 개의 여성으로는 타락된 여성이엿고 한 개의 인간으로서도 파탄된 인간이엿다.
그럿케 방랑에 방랑을 거듭하고 잇는 『西伯利亞의 お菊』는 제-야강변의 대도시인 불라고비스첸스크까지 와서는 일시로 정착케 되엿으니 게가 海蔘威에서 1750露里의 길이다. 아무리 광야의 유혹이라 할지라도 이제 20세의 소녀가 단신으로서 여기까지 깁히 드러왓으니 그는 더 압흐로 드러가기가 염증도 낫을 것이다. 더욱 그때가 바루 西伯利亞철도 鳥蘇里線 延長工事가 시작되여서 포지가레오驛에서 불라고에支線 공사가 기공되엿음으로 그 부근에 노동자가 만히 모혀 드럿다. 그는 그들 노동자를 상대로 하고 스사로 娼婦가 되야서 영업을 개시햇다. 그리하야 일년이 가지 못해서 4,000餘圓의 저금을 하게 되엿으나 天津 北京에서 이러난 義和團事件은 그 波紋이 西伯利亞오지에까지 파급되야서 그는 海蔘威에로 피난케 되엿다. 海蔘威에서는 前記의 4,000圓을 기금으로 하야서 中國樓라는 요리집을 내이고 商路에 몸을 投하려고 햇으나 일본인 철퇴후의 沿海州는 도저히 자기 혼자서 견듸여 내는 수가 업섯다. 그래서 고국을 차저서 山口縣의 鄕里에 오니 그 때가 23세 잡히 든 해이엿다.
임이 유랑이 第二天性化하엿고 더욱이 윤락의 여성으로서 23세이니 그가 엇지 부자유스럽고 말성만흔 고향에서 참을 수 잇을 것이냐. 그는 고향에 간지 겨우 40일만에 다시 자유의 天地를 차저서 南中國 芝罘에 왓다.
그는 돈에 대한 애착을 몰랏다. 그럼으로 4,000圓이란 돈은 언제 어데서 엇더케 소비되엿는지 벌서 그의 주머니에서 떠나가고 마럿다. 芝罘에 다다른 그는 賣藥行商을 햇다. 黃縣에서 招遠에 捷霞, 萊陽등지을 거처서 齊南府에까지 山東省 일대를 편답하야 八寶丹, 態膽갓흔 것을 팔고 다니엿다. 때로는 부업에서 오는 수입이 더 만엇을 것도 사실이엿을 것이다. 그리하기를 3년간에 그는 3000圓이란 자금이 손에 잡히니 그것을 가지고 芝罘에서 吾妻旅館을 경영키로 하고 고향에서 아우『お龜』를 불너다가 그에게 경영권을 양도하고 자기는 仁川과 元山을 것처서 두 번재의 西伯利亞行을 햇다. 처음은 海蔘威에서 「오뎅야」를 내이고 잇다가 하바롭스크에 와서 여관겸 요리업을 시작케 되니 그가 日露戰爭의 직후이엿다.
여자의 나히 29세라면 성욕의 절정에 이른다. 방랑성을 풍부히 갓고 잇는 厥女는 끄러 오르는 漂泊의 욕정을 누르는 수가 업섯다. 그래서 여관도 요리업도 거더치우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낫다. 西伯利亞의 광야는<55> 정열의 화염에 타고 잇는 『西伯利亞의 お菊』를 그저 두지 안엇다. 그는 아무-르線을 타고 향방업시 길을 떠나서 두 번재의 불라고비스첸스크市에 차저드럿다. 黑龍江의 상류, 中露兩國의 국경인 이곳에 주저 안저서 술, 색, 아편을 무기로 하고 반년이상을 사러왓다. 露國의 東方侵畧史上의 출발점인 愛琿條約의 締結地인 中領 愛琿을 차저오니 그는 임이 폐허나 다름업는 쇠잔한 一小邑이엿다. 여기에서 기대가 문어즈니 그는 다시 賣藥行業을 하기로 하고 黑龍江의 상류, 杸花江의 하류 烏蘇里江의 沿岸의 土人의 촌락을 遍踏하면서
いやなキタイスキー嫌ひなルスキー
好なヤポンスキーにや金がない
이런 漂泊의 노래를 외롭고 슬푼 소래로 불넛다. 그리하야 이완노브스고에서 고로로푸카에 다시 알레키세-푸스크등에로 『お菊』는 유랑에 유랑을 거듭하고 잇섯다. 누구하나 반가히 마저주리 업는 광야에서 그저 묵묵히 유랑을 게속하고 잇는 가주샤의 신세와도 갓헛다.
이럿케 유랑하고 잇든 『西伯利亞의 お菊』도 제-야江의 상류인 포도로 -푸카라는 협곡의 부락에서 정착케 되엿다. 포도로-푸카라면 砂金鑛지대로도 유명하거니와 歐羅巴 露西亞에서 流配處分을 밧고 온 重罪囚가 만키로도 유명한 곳이다. 광부 終身追放을 밧은 중죄인, 中國에서 살인이나 강도하고 官憲의 눈을 피하야 도망하야 온 不逞中國人, 그러니 포도로-푸카라는 峽谷의 부락에는 아츰 저녁으로 혈투의 참극이 끈치는 날이 업섯다. 厥女는 여기서 이들을 상대로 하고 영업을 개시햇다. 여자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업는 이럿케 殺風景한 광부촌에서 18세쯤 난 풍만한 여신이 突現하얏으니 그는 一大驚異가 아닐 수 업섯다. 그 險地에서 『お菊』는 그 뭇잡놈의 비우를 맛추워가면서 34세가 되기까지에 돈을 저축하기에 열중하얏으니 一萬 數千圓의 大金이 손에 쥐여질 때에 그는 고향이 다시 그리워젓다. 사람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는 인스프레이숑이다. 괴로운 때에도 슬푼 때에도 고향은 그리워지고 약간의 성공의 域에 도달한 때에도 고향은 그리워진다. 天來의 放浪性을 갓고 잇는 『西伯利亞의 お菊』에게도 이 때에 고향은 그리워젓다. 포도로-푸카의 협곡에 惡漢의 소굴인 이 땅을 厥女는 하로 속히 버서나고 십헛다.
고향에 도라온 그는 陽田溫泉에서 三朔을 체류하면서 前半生의 넘우도 험난한 생활에 피곤한 몸을 잠그고 잇섯다. 그러나 西伯利亞의 曠野는 그를 朝夕으로 불넛다. 고향을 그립어 하든 마음도 三朔이 다-가지 못해서 염증이 낫다.
그리하야 다시 西伯利亞의 高原을 향하고 발을 옴기엿으나 임이 그는 半生이 훨신 넘엇다. 술도 마음대로<56> 마시고 『若イ燕』도 가질 수 잇섯고 西洋賭博도 햇고 禁制品의 密輸도 햇다. 그러나 주름살 잡힌 그의 顔面筋肉은 언제까지나 그런 생활을 허락치 안엇다.
이 때에 西伯利亞의 聯合軍出兵은 『お菊』로 하야금 人間生活의 재출발의 기회를 주엇다. 그의 익숙한 西伯利亞의 지리는 조국을 위하야 공헌하여야 할 階梯를 주엇다. 그 때에 日本의 軍司令部가 갓고 온 西伯利亞의 군용지도라는 것은 실지에 잇서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햇다. 10리라고 記入되엿으나 實地에는 50리 60리가 넘으며 曠野로 記入된 곳이 준험한 산악지대다. 日本軍은 엇지 할 줄을 몰라서 허둥지둥하는 판에 『西伯利亞의 お菊』의 출현은 그는 暗夜의 태양과 갓헛다. 우물에 毒藥을 타서 놋코는 거즛 敗하야 日兵을 인도하고 목마른 군인은 반듯이 우물에 모혀 들 것이니 그리하야 전멸식키려고 赤色빨치산의 계획도 『お菊』의 探報로 그를 면할 수 잇섯다. 일부러 中國의 農村婦女로 변장하고 적진에 드러가서는 나는 우리 남편과 자녀를 日兵에게 慘殺당하고 그의 報復次로 차저왓다고 한 후에 그들의 빨치산군을 유도하야 陷穽에 모라 넛키도 한 두 번이 아니엿다. 혹은 적의 將領과 연애하야 비밀지도를 흠치여 내이엿고 日本人 병사에 석기여서 探報를 전하기 등 그의 神出鬼沒한 동작과 機智는 당시 西伯利亞에 파견한 일본군에게 잇서서는 업서서는 아니될 존재이엿다.
戰地에 잇서 探報의 역할은 그가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 생명을 떼여 놋코 하는 일이니 행동도 機敏을 요하거니와 담이 커야 한다. 『西伯利亞의 お菊』의 행동은 넘우도 죽엄의 무서운 것을 모루고 잇섯다. 『西伯利亞의 お菊』는 항간에 널니 선전되기 시작햇다. 지금까지의 一個의 倫落女이든 厥女는 이제로부터 불타듯하는 조국애의 衝動을 밧엇다. 백알과 워드카에 취하야 젊은 사내의 품에서 酒와 色에 情熱을 바치고 잇든 厥女 그리하야 몸이 지칠대로 지처서 피곤이 到骨할 때에는 아편을 한 대 피우는 것으로 인간의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잇든 그가 後半生을 빗나게 살나고저 悔悟의 길에 오르니 그에도 그만큼 정열적이요 용감하엿다. 그러나 적극적의 천성을 갓고 잇는 彼女는 日本軍을 도와서 探報에 종사하고 參謀部의 지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만족치 아니하고 沿海州와 北滿에 산재한 馬賊과 제휴하야 白系의 세묘놉푸를 도왓다.
尼港의 大慘變이 잇고 그로하야 무장해제문제가 이러나니 그는 日本軍이 露人의 원한을 사게 되엿고 세묘놉푸도 치따에서 쪼기여 낫다. 그리하야 극동西伯利亞天地에는 혼돈상태가 다시 반복되고 잇섯다. 『西伯利亞의 お菊』는 혼돈에서 혼돈에 지속되고 잇는 西伯利亞天地를 눈압헤 바라보면서 머리에는 浦風捉雨의 幻像을 그리고 잇섯다. 그리하야 報子, 立山, 常勝, 滿天飛, 高山, 占山<57> 등의 馬賊頭目과 桃園의 結義를 맷고 비록 手下에는 一個의 부하가 업슬망정 厥女도 聯合團의 頭領이 되여서 謀計에 참여하게 되엿다. 심야에 인적이 끈히인 때에 厥女의 집에는 幾多의 풍운아가 가슴에 大計를 품고 들고나게 되엿으니 그는 맛치 水滸志에서 보는 梁山泊과 갓헛다. 누가 『西伯利亞의 お菊』를 윤락녀라고 하랴. 『赤マントノ婆サン』이란 별명은 이 때에 별명을 듯게 되엿든 것이다. 그 馬上에 안즌 그의 勇姿는 일층 北滿에서 그랫든 것이니 琿春습격이후 赤マント를 두루고 마적두목 중에도 靠山이라면 綠林聯盟의 大頭目이엿다. 풍운아 『西伯利亞의 お菊』는 자기보다 10여년의 연하인 靠山과 연애관계에 이르게 되엿고 그리하야 靠山의 용맹과 「お菊」의 智謀는 반듯이 一幕演劇을 연출키에 足햇다. 세묘놉푸를 도와서 極東의 新政府 건립을 謀策하고 잇든 중에 소관경찰서장으로부터 만찬의 초대를 밧고 갓든 靠山은 그 자리에서 잡히여서 慘殺되고 마럿다. 그 때의 「お菊」의 분노는 하눌이라도 찌를 듯 하야서 警察署의 습격을 결의하얏으나 副頭目 快山 長順 등의 만류로 하야 이루지 못하고 마럿다. 세묘로놉푸도 靠山의 피살을 듯고는 손에 들고 잇든 유리잔이 떠러지는 줄 모르게 세멘트바닥에 떠러저서 산산히 파열된 것을 정신 업시 나려다 보면서 『오호 나의 운명이 이럿케 될 것이냐.』고 비통해 우럿다고 한다.
大頭目 靠山을 상실한 綠林聯盟에서는 頭目相續問題로 派爭이 이러낫다. 그 하나는 『西伯利亞의 お菊』를 頭目으로 推戴하자는 派이요. 다른 하나는 快山을 推戴하려는 파이엿다. 그러나 戀人을 일흔 『お菊』는 상심이 컷다. 그리고 현재의 派爭은 장래에 잇서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저올 것을 아럿다. 그것은 前頭目 靠山이 小頭目 萬順을 살해하고 그의 부하를 그대로 포용하얏으니 그들이 靠山에 대한 雪怨을 자기에게 풀고저 할 날이 올 것을 아럿다. 그리하야 그는 頭目되려는 野心이 추호도 업다고 성명한 후에 海蔘威에로 도라왓다.
밤 길을 것는 二千의 한 小隊
말발굽 소리 요란도 하다
오날의 收穫은 五萬兩
내일은 저 街城의 습격일세
장하다 자유의 勇漢
豪俠타 綠林의 徒
人生은 하루아츰의 이슬
救國濟民 못할진댄
浦國捉雨의 綠林生活
이것이 男兒의 本懷일세
그럿타 우리는 父母도 업다
집이라곤 岩窟도 업다<58>
權門, 拜金, 俗鬧 다-버서나서
悠悠한 大自然의 天下兒로다
가자- 長白山의 大山寨
가자- 興安嶺의 大岩窟
이것은 漠漠無涯한 滿洲大曠原에서 모-젤式 短銃을 억기에 지고 風雲과 갓치 神出鬼沒하는 馬賊의 부르는 노래이다.
『西伯利亞의 お菊』는 綠林聯盟과 손을 끈코 海蔘威에 오니 임이 그 때는 日本軍이 전부 撤兵한 후이엿다. 그럿타 해서 厥女는 다시 花柳街에 몸을 던지고 십지는 안엇다. 이럿케 번뇌의 세월을 보내고 잇는 중에 奉直戰爭이 이러낫고 그의 여파는 이곳까지 파급되야서 국경지방의 馬賊團은 각기 動하기 시작햇다. 혹은 張作霖을 도와서 혹은 吳佩孚를 도와서 一幕의 演劇을 연출하려는 준비가 분주한 때이다. 그 때에 東中鐵道護路軍司令에 高士賓이 잇으니 그는 吉林軍 第一師長에서 左遷된 사람이엿다. 그가 直隷派와 내통하고 奉天軍의 後方 攪亂을 策하게 될 대에 『西伯利亞의 お菊』도 舊部下를 소집하야 국경의 보구라니츠나야에서 크게 氣勢를 떨치여서 馬橋河까지 진격하얏으니 그의 指揮將은 물론 「お菊」이엿다. 그는 陳頭에 서서 위엄을 뵈이엿다. 그러나 泰來站에서 吉林省督軍 孫烈臣의 正規兵에게 패하게 되엿고 中堅勢力이든 護路軍도 張宗昌軍에게 패하니 「お菊」는 葦子溝 密林地帶에 도피하엿다. 그후 高士賓은 琿春서 잡히여 局子街에서 斬罪되니 「お菊」는 겨우 海蔘威에 도망하야 왓으나 그는 의지할 곳이 업섯다. 풍문에 드르니 北滿富錦에 자기의 아우 「お龜」가 요리점을 내이고 잇다고 하야 그 험한 嶺路를 넘어서 겨우 松花江岸의 富錦을 차저 왓건만 「お龜」는 잇지 안엇다. 이럿케 되니 女丈夫 「お菊」도 자기의 동포가 그리워젓다. 그리하야 哈爾濱까지 徒步할 계획을 갓고 몸에 진니고 다니든 手持品을 파러서 85원의 여비로 하야 哈爾濱을 향해서 떠낫다. 수 백년 이래의 處女林 處女地이니 인가도 희박하고 무성한 樹林은 맹수의 自由天下가 되여 잇다. 그 險地를 버서나서 哈爾濱에 왓건만 누가 그를 반가히 마저줄가. 50이 近한 그의 몸에는 오랫동안 酒, 色, 아편과 갓가히 한 그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서 턱업시 늘거버리엿다. 그 우에 사정 업시 侵犯하는 病魔는 仁俠과 愛國心으로 一世에 울니던 『西伯利亞의 お菊』로도 엇지하는 수가 업섯다. 그리하야 그는 48세를 一期로 하고 北滿의 孤혼이 되고 마럿다.
日淸戰爭의 직전, 朝鮮을 싸고 도는 日淸의 風雲이 刻刻히 위급을 報하고 잇을 때에 仁川에는 小規模의 한 개의 요리점이 열니엿으니 『お菊』의 형의 경영이엿고 손이 부족(第二의 26頁하로 續)<59>하니 와서 도와 달나는 편지를 밧고 仁川을 차저온 『お菊』은 方年이 겨우 17세의 소녀이엿다. 타고난 放浪性은 그를 仁川에 그냥 두지 안엇다. 그래서 西伯利亞에 갈 게획을 세우고 淸凉里에서 草履 한 켤레를 사서 신고는 元山을 향하야 떠낫다. 元山에서 海蔘威行 汽船의 石炭광에 숨어서 20일만에 海蔘港에 도착된 것이엿다. 그 후의 厥女의 일생은 임이 압헤서 그를 소개햇다.
그의 일생은 긔구도 햇거니와 찬란한 장면도 잇섯다. 내가 그 후 西伯利亞에서 또는 北滿에서 流浪生活을 하는 때에도 나는 멧 번이나 멧 번이나 『西伯利亞의 お菊』를 사모하엿는지 모른다. 그 험한 지역을 내가 스사로 踏破하게 되는 때마다 그는 여걸이라는 늣김이 커갓다. 물론 그와 나와는 경우도 다르고 입장도
첫댓글 친일파의 기록이라 안올리려 했는데 역사라? 지난번 윤치호의 글도 똑같습니다. 그 글중에 이씨 패밀리의 재산하나만으로 전쟁비용이 충당된 하죠............. 아무 방어능력 없는 북방의 외국인들과 일반인들이 중국군의 행패를 매우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패배할 경우 전 중화제국은 불법과 야만적인 병사들의 약탈로 인해 심각한 고충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중국! 하늘의 아들(오히려 ◯◯◯의)이라고 불리는 돼지꼬리 타타르인들의 부끄러움이여. 자신들이 떠벌리는 자랑, 자만심, 무지 그리고 이기심에 의해 점점 더 깊이 나라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들의 부끄러움이여.
중국은 1,400만 불의 차관을 구하기 위해 런던과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다. 단지 한 두 사람의 일본인이 그 전쟁을 위해 1,500만 불의 기금을 모금했다. 만일 중국 신문이 신용할 만하다면 이씨 가문(Li’s family) 홀로 수천만 불을 확보해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황실은 북경과 무크덴(Moukden)註 007에 있는 그들의 보물창고에 수억 원 어치를 쌓아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의 기록을 보면 블라디보스톡을 갈때는 항상 원산을 통해 가는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구한말의 원산이 현 대륙의 천진이 정확하다는 우리의 논거와 당시 블라디보스특이 현 바이칼호의 서남쪽 이르크추크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연결해 볼때 원산-블라디보스톡의 노선은 일전 1871년 러시아인이 기록한 지도그림에 나타난 현 천진에서 북경을 거쳐 태행산 동북을 넘어 몽고 울란바토르로 연결된후 바이칼호로 진입되던 노선이 바로 조선에서 만들어 운행하던 거대한 운하였음을 명확히 알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혁명이후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조선의 원산으로 탈출해 들어왔다는 역사의 기록들은 바로 현 바이칼호에서 내륙수로를 통해 울란바토르-태행산-북경-천진으로 이어지는 운하를 타고 내려왔음을 우리는 정확히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