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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龍興宮)
龍興宮裡五雲多(용흥궁리오운다)-용흥궁 안쪽에 오색구름 가득하니
庚戌元年海內歌(경술원년해내가)-경술(1850년)원년 강화섬에 노래 소리 울렸네
江水益深山益重(강수익심산익중)-강물 더욱 깊이 흐르고 산 또한 첩첩하니
昇平日月聿中和(긍평일월율중화)-태평스런 세월이 중화를 이루었네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철종(哲宗)이 왕이 안되었으면 좀더 오래 살았을 것인데
조선 제25대 철종의 강화도 유적지 답사기를 쓰면서 조선왕 27명 중에서
가장 힘없는 왕이었지만 철종유적답사기는 가장 길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철종의 “용흥궁(龍興宮)” 답사기 키워드를 정리해 본다.
▲유배온 죄인의 아들(이원범-철종)이 왕이 되다
▲강화도령
▲철종의 가계(家系)
▲철종의 교육수준
▲철종의 어진(御眞)
▲철종의 외갓집
▲철종의 후사(後嗣)는?
▲철종이 살던 옛 초가집 용흥궁(龍興宮)
▲철종의 첫사랑 봉이(鳳伊) 처녀
19세에 왕이 되고 14년 만에 33세에 세상을 떠난 불쌍한 철종(哲宗)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철종이 임금이 되지 않았으면 불행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박근혜가 대통령을 하지 않았으면 국민의 눈에 이처럼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마음속은 국민의 생각과 다르겠지만)
인생은 태어나서 100년안에 죽는 것은 정해진 사실인데
사는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을 행복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출세 돈 미모 사랑이 있다고 행복할까?
필자생각으로는 노숙자 생활을 해도 마음이 편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乞人言也可憐都承旨(걸인언야가련도승지)란 말이 있다.
요즘 같은 겨울에 광화문 옆에서 거적에 몸을 감은 거지가
추운새벽에 왕의 호출로 대궐로 들어가는 도승지를 보고
“참 불쌍하다”고 한 말이다.
물론 이말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을 꼬집는 말이지만---
몰락한 왕족 이원범(철종)이 임금으로 지목돼 왕위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일 사이에 결정되었다.
그 급박했던 4일간의 일들을 기록한 역사적 사료(使料)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왕실과 조정의 공식 문서인 “실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正史에서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철종의 봉영(奉迎·왕을 모시는) 책임을 맡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 관직)
정원용(鄭元容)이 쓴 “경산일록(經山日錄)”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있는 것을 자료로 이 글을 쓴다.
봉영(奉迎)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원용(鄭元容)이었다.
정원용(鄭元容)은 정조 7년에 태어나서 고종 10년까지 살았던 분이다.
정조(正祖)를 비롯해서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그리고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분의 왕을 모셨다.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선 19살 때부터 91세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70여 년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경산일록(經山日錄)”으로 개인의 일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쓴 일기일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정원용(鄭元容)이 남긴 “경산일록(經山日錄)”은 그의 증손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연세대학교에 기증된다.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정인보(鄭寅普)는 증조부(曾祖父) 정원용이 70여 년간 쓴 일기와 또 종조부(從祖父) 정기세(鄭基世)가 50년 동안 기록한 일기(日記) 15권 및 백부(伯父)인 정범조(鄭範朝)가 39년 동안 기록한 일기(日記) 19책을 모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기증한다.
독립 운동가이며 유학자인 정인보(鄭寅普)는 정제두(鄭齊斗)에서 시작된
강화 양명학파(陽明學派)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니 동래 정(鄭)씨 집안과 강화도가 맺은 인연은 참으로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2015.03.05. 경인일보 기사에
최근 장장식(張長植)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이 개인 소장자를 통해 두루마리 문서인 가칭 “덕완군 봉영기(德完君 奉迎記)”를 새롭게 발굴했다.
이 문서에는 철종이 강화도에서 한성(漢城)으로 올라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에 대한
새로운 내용이 포함돼 있어 당시 상황을 보다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됐다.
덕완군((德完君)은 이원범(李元範)이 왕이 되기 전 내려진 군호(君號)다.
“덕완군 봉영기(德完君 奉迎記)”에는 판중추부사 정원용을 비롯한 신하들은
제24대 헌종(憲宗)이 세상을 뜬 다음날인 1849년 6월 7일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지목을 받은 이원범(李元範)을 모시러 강화도에 급파됐다.
하지만 정작 이원범(李元範)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제23대 왕인 순조([純祖)의 비(妃)이며 당시 세력가
안동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이원범(李元範)의 유배지(流配地) 책임자인 강화유수도 이원범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원범(李元範)을 왕으로 모시러 그가 살고 있는 초가집(지금의 용흥궁(龍興宮)에
도착하니 집에서 세 명의 남자아이(왕족)에게 “누가 이원범”인지를 직접 물어야 했다.
이원범이 왕족이지만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에 유배 와서 평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원범, 즉 철종을 왕으로 모시는(봉영奉迎) 행렬은 문무백관과 왕실, 군사를 포함해 500여 명에 달했다.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한의 국보 제73호 “강화도행렬도”
(19세기)를 보면 강화 나루터에서 강화읍까지 이어지는 봉영(奉迎)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이원범(철종)은 강화도 갑곶나루에서 출발해 김포, 양천을 거쳐 한양 도성에 도착했고, 헌종(憲宗)이 세상을 뜬 지 나흘 만인 6월 9일 창덕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정말 “번갯불에 콩워 먹는다”는 이것을 두고 한말이다.
철종이 강화도에서 도성까지 120리(약 47.1㎞) 거리를 행차할 때 길목마다 백성들이
몰려 들었다.
철종이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을 물리치지 말라고 명하자, 백성들이 기뻐하며 서로 “성인(聖仁)이 나셨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배지에 갇힌 이원범(철종)이 하루아침에 조선을 책임지는 왕으로 지목된 것은 당시 실세인 외척 세도가문인 안동김씨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몰락한 왕족으로 허수아비 왕을 세워야 권력유지에는 제격이다.
순원왕후(純元王后)는 권력 실세인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철종이 왕이된후 3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다.
“철종이야기”(2006)를 쓴 향토사학자 김경준 씨는
“헌종(憲宗)이 숨을 거둔 직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음 왕이 될 사람(이원범)의 이름이 적힌 문서를 내놓았고,
그다음 이원범을 왕을 모시러 가는 절차가 물 흐르듯 계획대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조선 역사에서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즉위한 세조(世祖)와 철종(哲宗)을 왕위에 올린 두 가지 일로
당시 조정의 기강이 안동김씨에 의해 극도로 문란했음을 의미한다.
누동궁(樓洞宮)자리에 기와집이 들어 섰는데 기와집들도 흘리고 있어
철종이 태어난 누동궁은 흔적도 없다.
역사보다 눈앞에 이익이 우선이다.
▲강화도령
철종(哲宗)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화도령”이다.
그러나 철종이 강화도에 머문 기간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철종이 태어난 곳은 현 종로구 익선동이다.
철종은 임금이 된후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익선동에 아버지 전계군의 사당을
크게 짓고 “누동궁(樓洞宮)”이라 이름 하였다.
지금은 사진에서처럼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어 한옥이 들어 서 있다.
지금은 그나마 남아 있던 “누동궁길”이라는 이름조차 도로명 주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흔적조차 없어 역사에 무관심한 정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강화도령”은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기에 “허수아비 왕” 노릇을 했다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는 말이다.
철종은 왕이 되기 전까지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시골촌놈”이라는
인식이 유독 강하다. 이 때문에 왕으로서의 철종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측면이
크다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직계(直系)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철종이 왕이 되자 신분세탁을 위해 자료들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恩彦君)의 집안에 관한 문적(文蹟)을 모조리 없애(洗草파기)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훗날 구설을 막기 위하여
그 초고(草稿)를 없애던 일을 말한다.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恩彦君)에 관한 기록들을 물로 씻어서
글자를 없애 버리라고 한 것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역적 집안의 후손이 왕이 된 뒷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철종의 강화도 시절(이원범)의 정사(正史)의 기록은 없고 강화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철종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백성과 가장 가까이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세금 문제 등 나라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이기도 했다.
▲철종의 가계(家系)
위에 철종의 가계도(家系圖)를 필자가 정리해 본 것이다
철종(이원범)은 사도세자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의 손자다.
사도세자에게는 적자(適子)인 정조(正租)외에 후궁에서 낳은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은전군(恩全君) 등 서자(庶子) 셋이 있었다.
혈통상 은언군(恩彦君)은 정조(正租)의 이복동생이다.
둘째 은신군은 영조 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
셋째 은전군도 정조 원년(1775) 3월에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이유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정조의 반대파인 노론(老論) 벽파(僻派)는
정조(正祖)가 왕이 되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고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관련자를 처형하면서도 이복동생 은언군만은 제주도로 유배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기었으나, 정조 사후(死後) 순조(純祖)가 왕이 되던 해(1801)에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가 청(淸)나라의 천주교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함께 처형당했다(신유박해(辛酉迫害).
은언군의 자식 중 막내인 전계군(全溪君)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그중 막내가 이원범(철종)이다.
상계군 원경(常溪君 元慶)·경응·원범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제24대 헌종(憲宗)이 후사가 없음을 알고 헌종 10년(1844)
중인(中人) 출신 민진용(閔晉鏞)이 상계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상계군은 능지처참 당하고 전계군은 사약을 받아 죽는다.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이경응 이원범(철종) 두 형제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이원범의 나이 14살이었다.
이원범은 왕족이긴 해도 임금이 될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고,
또 아버지 전계군도 왕족으로 살면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원범 형제는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 전해진 것이다.
▲철종의 교육수준
철종을 무식한 임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능한 임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규 교육적인 면에서 다른 왕들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철종이 소학(小學)과 통감(通鑑)을 익혔다고 하니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일자 무식쟁이는
아니다
소학(小學)은
송나라 주자(朱子)의 제자인 유자징(劉子澄)이 주자(朱子)의 지시에 따라 만든 책이다.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修身書)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修養)을 위한 격언(格言), 충신(忠信)·효자(孝子)의
역사적 내용을 모은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이다.
통감(通鑑)은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약칭이다
책 내용은 정치와 역대의 위정자(爲政者)에게서 귀감을 삼는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 주(周) 나라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에 이르기까지
1백 13왕 1천 3백 6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내용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붓글씨는 철종이 쓴 어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太平佳氣人有樂 祥瑞凞凞日至來(태평가기인유락 상서희희일지래)
태평(太平)하고 아름다운 기운(氣運)의 사람이 즐거워 하니
복되고 길한 일이 날마다 찾아오네
의 뜻이다.
염자보민(念玆保民)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두툼한 필획(筆劃)으로 느리게 넉넉하게 썼으며 정중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글씨다.
기교도 부리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조선 왕실의 품격이 나타나는 글씨다.
상당히 잘쓴 글씨라 할 수 있으며
왕이 된 기간 14년 사이에 글씨 연습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복원된 어진
복원되기 전 불탄 어진
▲철종의 어진(御眞)
철종 12년(1861) 도화서에서 그린 “철종 어진(哲宗 御眞·보물 제1492호)”이다
군복을 입은 조선 임금의 초상화로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원본은 6.25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3분의1 가량이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1987년 당시 한국전통미술인회 회장 최광수 박사에 의해 복원됐다.
위의 어진은 복원 되기 전 불에탄 원본 사진이고
밑에 어진은 복원된 것이다.
▲철종의 외갓집
강화도에는 철종의 외갓집도 있다
철종이 왕이 되고 나서 4년 후에 지었다고 한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군은 강화도에 유배 왔다가 그곳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철종의 외삼촌은 대를 이을 손을 남기지 못해서 원범에게는 외사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변변하게 내세울 외가 쪽 사람도 없었다.
▲철종(哲宗)의 후사(後嗣)는?
철종(哲宗)의 비(妃)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이다.
안동김씨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임금의 장인(국구國舅)으로서 정권을 장악,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철종(哲宗)은 왕비를 비롯하여 7명의 후궁들로부터 왕자 5명과 옹주(딸) 한 명을 낳았다.
그러나 왕자들의 명이 유난히 짧아서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겨우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그 딸이 바로 “영혜옹주”로
그나마 남은 딸도 어려서부터 몹시 허약했는데, 그 딸이 바로 14살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는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을 갔지만 몹시 허약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불과 석 달 만에 사망하였다.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철종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원군이 기회를 노려 아들 명복을 고종(高宗)으로 세운 것이다.
▲철종이 살던 옛 초가집 용흥궁(龍興宮)
용흥궁(龍興宮)은 철종이 “이원범”으로 살던 옛 초가집이다.
정원용의 “경산일록”에서는
철종은 14세부터 왕위에 오르게 되는 19세까지 5년간 이 집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원래 초가집이었던 것을 임금이 된 후 지금의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용이 일어난 궁”이라는 뜻의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임금의 집으로 격상(格上)시켰다.
전문가들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類型)에 따라 지어진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지은 지 150년이 된 용흥궁이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몇 십 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덕분이었다. 50여 년 전만 해도 용흥궁에는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철종의 첫사랑 봉이(鳳伊) 처녀
철종(원범)은 유배된 신분으로 강화 유수부의 감시를 받고 있는 부자유 상태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는 17,8세 청년은 봉이(鳳伊 양순이로도 알려짐)
처녀를 알게 되어 상처받은 가슴에 위로를 받는다.
철종(원범)은 왕이 되어 강화를 떠나면서 강화도 땅을 밟지 못할 줄도 모르고
봉이(鳳伊) 처녀에게 꼭 데리러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것이 이루지 못할 강화도령의 첫사랑이다.
철종은 왕이 되고 나서도 봉이(鳳伊)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생소한 궁중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만큼 자유롭게 지냈던 강화도 시절에 대한 향수에다
연인에 대한 상사병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슬쩍 대비마마께 봉이(鳳伊)를 궁으로 데려오면 안 되겠느냐고 해 보았지만 궁중의 법도가 상민(常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싸늘한 답변이었다.
그후 얼마뒤에 석연치 않은 봉이 처녀의 죽음이 전해진다.
철종은 봉이 처녀를 잊지 못해 상사병이 걸려 황토방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결국 철종은 삶의 희망을 잃고 술과 후궁들에게 빠진다.
안동 김씨는 자기들의 세도정치를 위해 철종이 주색에 빠지는 것을 바랬다.
결국 철종은 과도한 음주와 성생활로 인해 폐결핵에 걸렸고,
절제를 잃고 주색(酒色)을 계속했기에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잦은 성생활로 정액을 도가 넘치게 내보내면 “방로상(房勞傷)”이 오게 된다.
“방로상(房勞傷)”은 신장의 정기가 부족해져 성교하지 않고도 정액이 저절로
흘러내리고 밤에 잘 때 식은땀을 흘리며 목이 마르고 허리가 아픈 증상이 나타난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맑지 않으며 귀에서 소리가 나고 가슴이 뛰며
열이 달아오르고 몸이 마르는 음허화동(陰虛火動) 상태가 된다.
내분비 기능이 실조되고 면역기능이 떨어져 각종 병증이 나타나고
조로(早老)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태다.
철종은 말년에 그런 상태였다고 짐작이 된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철종이 왕이 안 되고 강화도에서 더벅머리 총각으로 농사짓고 나무하고
봉이와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살았으면
조선 제25대왕 “철종(哲宗)”이라는 이름은 없어도
33세보다 훨씬 오래 살지 않을까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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