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존자의 일기 - 범라스님 편역본]
사까족들의 위엄과 자존심
'모든 일이 생겨날 때
주변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한다면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邪見;사견)이 된다.'
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옛날에 생긴 것들을
다시 돌이켜서 보여 주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주변 원인들과
함께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교단인 승가에
비구(빅쿠)가 되러오는 사람들을
사까 뽁띠야, 즉 석가의 종족이라고 부른다.
태어난 종족이 사까(釋迦;석가)족이 아니어도
이 이름을 받을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사까라는 이름이 두 번 겹친 사람이다.
많은 다른 이들과 같이
교단을 이끌어 가는 이로서
사까왕족일 뿐만 아니라.
태어난 종족 역시 사까왕족이다.
마가다국, 꼬살라국 등 큰 나라들처럼,
우리 사까족의 나라에는
한 사람의 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의 권력을
어느 한 사람만이 장악하거나 소유하지 않고,
우리사까족 모두가 가지고 있다.
사까족의 남자와 여자 모두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이며 왕의 권속들이다.
사까족에게는
조상님과 부모님의 끝없는 공덕이 들어 있다.
이 종족의 선조들이 베푼 공덕은
대대로 아들과 손자들에 이어서 칭찬을 받아왔다.
'이 지구의 시작 초기
마하 삼마다
(이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
최초의 왕으로 선출된 분으로,
고따마 부처님의 보디삳타생애이다)
대왕으로부터
이 종족은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까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것은
옥까까 대왕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옥까까라는 이름의 세 번째 대왕은 말할 때
그의 입에서 밝은 빛이 퍼져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옥까까 대왕에게는 왕비가 다섯 분 이었다.
큰 왕비는
네 명의 왕자와 다섯 공주를 낳고 돌아가셨다.
큰 왕비가 돌아가시자
옥까까 대왕은
다른 왕비를 첫 번째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새 왕비는 나이가 매우 젊었으며,
모습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그 왕비에게서 어린 왕자가 태어나자
대왕은 그 아기를 보는 순간 기쁨이 넘쳐서 말했다.
"이 아기 왕자를 위해서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말하라."
왕비는 자기 친척들과 의논한 다음
대왕이 돌아가시면 왕위를 물려줄 것을 원했다.
옥까까 대왕은
자기의 성급한 말 한 마디 때문에
큰 후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 왕비에게 말했다.
"이런 나쁜 여자 같으니라구!
나의 다른 아들들에게 나쁜 생각을 품지 말라."
그러나
새 왕비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약속대로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했다.
대왕은
다른 왕자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짐작하고,
왕자들을 그 나라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코끼리와 말, 수레와 대신들을 딸려 보내면서
부왕은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다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고 나라를 다스리라고 당부했다.
왕자들은 부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 나라에서 떠나갔다.
왕자들을 따라 다섯 누이도 함께 떠나갔다.
왕자들을 모실
많은 사람들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왕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른 왕들의 땅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자유롭게 나라를 세우려고
히마완따 산을 향해서 갔다.
그때 '까삘라'라는
대수행자가 히마완따 산 아래에 있는
연못 근처의 작은 초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까삘라 대수행자는
'봉마살라'라는 지혜로
땅의 이익과 허물, 좋고 나쁜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도시를 세울 땅을 찾아다니던
왕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들이여!
사자와 호랑이들에게 쫓겨
머리털을 세우고 달아나던
사슴과 산돼지들이 이곳에 이르면
사자와 호랑이에게
도리어 으르렁거리며 의기양양해 한다.
큰 뱀과 고양이가 따라와서
그 뱀과 고양이에게 도리어 위협을 한다.
왕자들도 이 초막이 있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
그리하여
까삘라 대수행자가 있던 곳에 도시를 세우고
'까삘라 왓따'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도시를 세우고 집을 지은 다음,
함께 따라온 대신들은
왕자들에게 결혼할 것을 권했다.
대신들이 결혼을 권하자 왕자들은 말했다.
"대신들이여!
우리 왕자들은 종족이 비슷한
훌륭한 왕의 공주들을 찾을 수 없다.
또 누이인 공주들도
그들과 같은 훌륭한 왕의 아들을 만날 수 없다.
종족이
훌륭하지 않은 이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 쪽이 깨끗하지 못할 것이며,
훌륭한 혈통이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이들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왕자들은
종족의 깨끗함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여
공주들과 짝이 되었으며
가장 큰누이를
어머니와 같이 모시고 지극히 존경하며 지냈다.
그 말을 들은 옥까까 대왕은
마음이 흡족하고 기쁨에 넘쳐 말했다.
"사까와따 보꾸마라!
오, 여러분!
왕자들이 종족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이끌어 가는구려!"
이렇게
옥까까 대왕이
마가다어로 읊었던 말에 의해
그들을 사까 종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사까족들은
국회라고 부르는 모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사까족의 남자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기들의 생각이나 바람을
자유롭게 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펴 보이고
여러 사람의 지원이나 찬성을 받으면
법으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의견은
자기 생각과 같거나 다르거나 상관없이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어 결정되고,
그 후에는
함께 손을 잡고 추진하는 것이
우리 사까족 남자들의 힘이다.
이 모임을 주재하고, 그 결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왕이라고 불렀다.
다른 이들은
무역, 농업 등 각기 자기 일을 하면서 지냈다.
이러한 사까족들은 말라족들과 매우 비슷했다.
말라족들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나라를 다스렸고
그 책임을 맡는 동안만 왕이라고 불렀다.
차례가 아닌 이들은
마을과 도시를 오가면서
무역이나 장사를 하며 지냈다.
그 말라족과 달리
우리 사까족은 한 가지가 특별했다.
나의 백부님인 숟도다나께서
모임을 주재하는 책임과
나라를 다스리는 힘을 얻었을 때
사까족 모두의 일치된 지지를 얻었고,
따라서
왕의 권위를 평생 유지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그를
특별히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 덕을 칭송했다.
나와 함께 비구가 된 받디야도
숟도다나 대왕 아래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던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종족 혈통에 관한 것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공덕을 말하는 것은
선한 이들이
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자만,
이 사까 혈족에
부처님,
그분께서 직접 포함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공덕과 위엄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까족들은
브라만(제사를 지내는 사제계급)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브라만들의 베다(경전)에도 예배하지 않는다.
그들의 예배는 브라만들의
전통과 풍습에 의해 내려오는 것일 뿐이다.
사까족 모두가 중요히 여겨 존중하고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오직 숟도다나 대왕뿐이었다.
또 우리 사까족 모두의 예배를 받는 이는
우리 종족의 공덕과 위엄을
이끌어 나가는 '오다나'형제들뿐으로,
그 다섯 형제들 중
첫째가 숟도다나,
다음이 숟꼬다나, 도또다나, 아미또다나이며,
마지막이 누이 아미따이다.
숟도다나 대왕은
부처님이 되신 싯달타와 난다 왕자의 부왕이시다.
싯달타 태자는
마하 마야 왕비께서 낳으셨으며,
난다 왕자는
동생인 마하 빠자빠띠 고따미께서 낳으셨다.
룸비니 동산에서 싯달타 태자를 낳으신 후
왕비께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동생인 고따미께서
직접 태자에게 젖을 먹여 키우셨다.
둘째인 숫꼬다나 사까께서는
마하나마와
아누루다 존자 형제분의 부친이시다.
나는 네 번째 아미또다나의 아들이다.
우리 교단이 번성했을 때
같이 지내는 대중들과
맞지 아니하여 잠깐 문제를 일으켰던
때이사 비구는
숟도다나 대왕의 막내 누이인 아미따의 아들이다.
우리 사촌들 중에서는
마하나마만 싯달타 태자보다 위이고
난다, 아누루다, 때이사와
나 아난다는 그분의 동생이 된다.
우리 교단 안에는
많은 이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여자분들이 계신다.
마음 씀씀이와 신심이 장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등
여러 가지에 모범을 보이시는 여제자분들도 계신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께서도
그처럼 이름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존경할 뿐 아니라,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에 모범을 보이시는 분으로
교단 전체가 존경을 드리는 상가의 큰어머님이시다.
마야 왕비께서 남기신 어린 왕자를
그분은 직접 자기 젖을 먹여 키우셨다.
그분이 낳은 난다 왕자는 유모에게 맡기고,
싯달타 태자에게
어떤 위험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으며
날마다 몇 차례씩
씻기고 향수를 뿌리는 정성을 들이셨다.
스스로 먹고 마실 수 있을 나이가 되었어도
유모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좋은 것을
찾아 먹이고 입혀야만 만족해 하셨다.
태자가 점점 커서 어른이 되었어도
어머니의 사랑은 마르지 않고 항상 넘쳐흘렀다.
나이 29세가 될 때까지
그분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린 아들이며 옥동자 금동자로만 생각되어
어머니로서 보호하고 사랑하셨다.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으로
큰 왕자인 싯달타 태자와 작은 왕자인 난다를
같이 사랑하시는 것에는 의심이 없었으나,
단 한 가지 생모가 없다는 마음에
난다 왕자보다 큰 왕자를 더욱 사랑하셨다.
그것만으로도
형님 싯달타 태자는
세간의 부귀와 사치를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히 누릴 수 있었다.
사람이 원하고 좋아하는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들을
즐기는 것을 깜마 오욕락이라 한다.
그 깜마 오욕락을 형님께서는
가지가지 안 갖춘 것이 없을 정도로
모두 갖추어 받으시고 즐기셨다.
태자에게
자비와 연민심이 가득했던 부왕과 왕비는
그를 위해
여름 궁전, 우기 궁전, 겨울 궁전 등
계절에 알맞는
세 개의 궁전을 지어 생활하게 하였으며,
그 부귀의 주인 싯달타 태자는
계절에 맞추어 그 세 곳에서
야소다라 공주를
비롯한 많은 궁녀들과 함께 지내셨다.
남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들로 이루어진
악대를 거느리고 즐겁고 아름다운 소리를 즐겼다.
비오는 계절인 우기에는
넉 달 내내 궁정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출가를 위해
깜마 오욕락을 분명히 끊지 않았을 때,
그분께서는 골고루 깊이깊이
구족하게 갖추어서 즐기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이러한 호사를 받는 기회를 가진 이가
그분만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왕자나
거부 장자의 아들들도 그처럼 즐겼다.
그 시대에
오욕락을 즐기는 이들은
각각 그들 능력대로 대문을 닫고서 한껏 즐겼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
괴롭고 힘든 고행을 행하였다.
지나치게 쾌락을 즐기는 것과
지나친 고행을 행하는 양쪽 끝으로,
있는 힘껏 달려가는 시대였다.
싯달타 태자는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고
번성하는 사까족의 왕자로
인생의 아침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즐기며 보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왕자들의 책임과 의무인
나라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법,
나라를 다스리는 법,
그리고 모든 분야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야 했다.
나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취미였던 무역 일을 배웠다.
이 일을 배우고 나서는
언제나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까삘라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에 이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 말라국이었다.
그들은 우리 왕족들과 많이 비슷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친구도 말라국의 왕자인 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