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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이왕이면 시원스럽게 쏵 - 내리면 좋겠구만 감질나게 오는 듯 마는 듯 뿌리고 갑니다. 한 주간 산행을 하면서 푸석푸석한 먼지 쌓인 길을 걸었는데 좀 나아졌을까 싶습니다. 여기는 그렇습니다. 청소는 고사하고 먼지라도 제대로 재워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다른 지방에는 좀 낫기를 바랍니다. 이 비가 지나가면 앞산은 더욱 푸르름이 짙어지리라 봅니다. 벚꽃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하얀 빛이 초록빛으로 더욱 싱그러워질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피어나야 할 꽃들은 많습니다. 봄은 이제 막 시작하였으니까요. 그렇게 계절의 여왕을 맞을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일단락될까 모르겠습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요. 더구나 나라 바깥은 여태 기세가 등등합니다. 특히 바다 건너 이웃나라는 이제 비로소 날개를 단 듯합니다. 이런 저런 말도 많지만 그 덕에 유독 지도자가 막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자기 권세 인기 붙잡으려다 백성 목숨 값을 떨어뜨렸습니다. 대가를 치르겠지요. 그나마 자존심 지키려고 다른 선진국들처럼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아서 하겠지요. 자기 하나의 자존심이 중한지 국민의 생명이 중한지 알아서 저울질할 것입니다. 나이 먹어도 치사하게 먹지는 말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퀸연아 - 싸이 - 방탄소년단 - 기생충, 이제 ‘코로나19’로도 날립니다. 어떻든 재난기본소득이나 빨리 받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이보다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ㅋㅋ. 아무튼 건강해야 그나마 받고 살지요. ^&^
2020년 4월 18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4-12주일설교(개와 돼지)
<기도의 힘>
서로 싸우며 지내자고 결혼하는 부부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좋아서, 최소한 서로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결혼합니다. 죽자 사자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시간이 좀 지나면 티격태격하며 사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하물며 그다지 깊은 감정도 없이 결혼했다면 닭살 돋는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산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저 무난하게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릅니다. 잠자리도 함께 하면서 사는데 왜 그렇게 싸우게 됩니까? 자연히 잠자리도 멀어지겠지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십상입니다. 부부인지 그저 동거인인지 모르게 됩니다. 자식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식도 없으면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자식조차 나 몰라라 하는 부모도 있기는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랑하며 살기도 짧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가 여삼추’라는 말도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산다든지 어렵고 힘들게 산다면 하루 사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투며 서로 원망하며 산다면 그 하루도 짧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만나면 싸운다, 그것이 딸 ‘대니얼’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만났다 하면 싸워요. 두 부부 역시 그러리라 짐작하며 삽니다. 아내에게 좋은 말 한번 건네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말 듣자고 말을 걸겠습니까? 그저 지나가듯 인사하는 정도가 다행스런 일입니다. 습관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애틋한 사랑으로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은 사업이라 할 수도 있고 작품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신경 쓰고 가꾸는 만큼 자라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훌륭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 부부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생각합니다. 결혼하면 행복한 생활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줄 압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부가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이야말로 환상이고 꿈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가꾸지 않으면 그대로 잡초가 되고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심리학자가 사랑의 유효기간을 1년 반으로 말했는데 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사랑을, 또 결혼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딸 하나를 데리고 삽니다. 남편 ‘토니’는 한창 잘 나가는 영업사원입니다. 그 덕에 분에 넘치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내 '엘리자베스'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바쁘지만 토니는 딸에 대하여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집안일에 대해서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회적 자리 넓히기와 고액 연봉 그리고 시간 나면 운동하여 몸 관리하는 것에 전념합니다. 아내에게는 다정하게 대하지를 못합니다. 괜스레 투정하듯 대합니다. 마음은 오직 밖에 있습니다. 이만한 집에 사는 것이 그냥 되는 일이냐고 큰소리칩니다. 자기에게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속된 말로 사람이 밥만 먹고삽니까? 자기는 고사하고 아비로써 딸에게라도 관심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주치면 싸움만 한다, 그게 원하던 결혼생활인가요? 당연히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남편이? 남편이라고 그것을 원해서 결혼했을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불편하고 잘못된 결혼생활을 부부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다른 어떤 존재가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서로를 물고 뜯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도 이야기하면 그 존재를 짐작합니다. 어느 날 매물로 내놓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만난 ‘클라라’부인이 그것을 깨우쳐줍니다. 여태 교회는 다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깊이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요? 그러면 남편과 싸울 시간은 있고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훼방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두 사람의 가정을 제멋대로 휘저으며 파괴하려 합니다. 가만두겠습니까? 그것을 원합니까? 당연히 그것을 원하지도 않고 원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싸워서 물리쳐야지요. 가만 지켜만 보고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우리가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러면요? 하나님께 구해야지요.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신 예수님께 맡겨야지요. 어떻게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전략을 짜야 합니다. 적과의 싸움이고 전쟁인데 무작정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제목이 ‘War Room'(작전실)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대답해줍니다.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사실 이것은 신자들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정하는 일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영화 ‘기도의 힘’(War Room)을 보았습니다.
<심판>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남아본들 어떤 삶이 다가올까 그것을 생각한 것일까요? 분명 찾아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긴 취조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또 다시 치 떨리는 기억들을 주워 모아야 하나?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하지? 저들은 뭐라고 떠들어댈까? 마약쟁이가 이번에는 복수심에 열불이 났다고 떠들지도 모릅니다. 십중팔구 그럴 것입니다. 내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기나 할까? 그럴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가에서도 내 탓이나 하고 있는데 관심이나 가질까? 그저 친정식구와 내 변호사나 편 들어주겠지. 대부분은 관심도 없으리라. 다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나?
과거는 끊임없이 한 사람의 인생을 붙잡고 갑니다. 정작 본인은 잊고 산다 하더라도 행여 무슨 계기만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수집합니다. 자잘한 사건까지 불러들입니다. 그것도 자기 쪽에서 유리하게 조합합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공격하지요. 본인에게는 아픔이기에 진작 잊고 사는 것인데 다시 불러내니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도집니다. 전보다 더 아프고 힘들게 됩니다. 아무리 변명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그냥 사실로만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상대방에게는 과거의 사실이 그냥 공격 목표물이 되거나 공격용 무기가 될 뿐입니다.
남편은 전에 마약 밀매업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수감생활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치고 나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소위 개과천선 바르게 일반 사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그래도 옛날 동료들과의 만남도 가집니다. 아내인 ‘카티아’도 어린 아들도 남편의 옛 친구들을 잘 모릅니다. 카티아는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했습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서로 무척 사랑했으니 출감을 기다렸다가 그 날에 당장 결혼식을 치릅니다. 그렇게 아들도 낳고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행복한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약은 말 그대로 먼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임신한 동생을 만나려 아들을 맡기고 자동차를 빌리려 남편 가게로 갑니다. 자동차 열쇠를 받아 나오는데 가게 앞에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세워둡니다. 새 것 같은데 그냥 두고 가는 것 같아 주의를 줍니다. 자물쇠를 채우지 않으면 도난당할 수 있어요. 힐끗 돌아보며 말해줍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되었습니다. 동생을 만나 이야기하고 자동차를 돌려주려 가게로 옵니다. 그런데 가게 앞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 차가 못 갑니다. 이상하다 싶어 차에서 내려 가게를 향해 달려갑니다. 경찰들이 쫓아오며 막습니다. 막무가내로 가게 근처까지 달려갑니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
하루아침에 인생이 날아갔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한 아들, 모두가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가만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수사 협조를 해야 합니다. 범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아프고 견딜 수 없습니다. 이따금 했던 마약을 다시 찾아 흡입합니다. 남편의 과거 경력이 있으니 경찰은 혹시나 해서 가택수사를 합니다. 그리고 조금 남은 마약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카티아가 쓰고 남은 것입니다. 양이 얼마 안 되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합니다.
원한을 산 일도 없고 마약 관계 일도 오래 전의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변호사와 아무리 궁리해도 있을 법한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인종차별을 주장하고 있는 나치 잔당의 소행이라고. 맞습니다. 남편은 이방인입니다. 자국 내에 숨어있는 몹쓸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이 붙잡혔습니다. 바로 그 단체 소속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재판이 열립니다. 범인의 아버지까지 범인인 아들의 소행에 대하여 증언을 해줍니다. 아들이지만 세계관이 너무 다르기에 인정해줄 수 없답니다. 아비도 아들의 잘못된 소행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마땅히 교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죄입니다. 확고부동한 증거가 없을 경우 판결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내려야 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해합니다. 재판으로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카티아에게는 기막힐 일입니다. 춤을 추며 풀려나는 살인자들, 한 가정을 날려버리고 한 인생을 말아먹은 저 범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변호사가 다독입니다. 상고하겠다고. 또 다시 그 기나긴 시간을 법정에서 과거를 들쑤셔대며 싸워야 하는가? 더 이상 내 인생을 얼마나 짓밟아야 하나,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측 증인으로 나섰던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들의 행선지를 확인합니다. 똑같이 날려버릴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 왜 생각을 바꾸었는지 생각해본 것입니다. 영화 ‘심판’(In the Fade)를 보았습니다. 2017년 작품이네요.
성경 마태복음 7 : 6 2020년 04월 12일
설교 : 개와 돼지 김종우 목사
사람과 가장 가까이 하는 반려동물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이 개일 것입니다. 애칭으로는 바둑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바둑이는 이름대로 바둑처럼 흑백이든지 두 색깔이 몸에 큰 점으로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개는 오래도록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왔습니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단순히 귀여워서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대하여 말도 많았습니다. 우리 잘 아는 여름 보양식으로 많이 사용하였지요. 하도 말들이 많아서 식용 사용이 줄기는 한 것 같은데 드러내지는 않아도 여전히 식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함께 친구처럼 지내다가 때가 되면 잡아먹는다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 고양이도 반려동물이기는 한데 잡아먹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고양이 잡아먹는다고 누가 뭐라 할까요?
음식 자체에 대한 거부감 말고도 또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한창 신앙이 자라갈 때였고 성경을 탐독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연히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도 보이던 때였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음식으로서는 피하라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레 11 : 2 - 3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짐승 중 먹을 만한 것은 굽이 있어 쪽발이어야 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7절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성경을 제대로 읽고 나서는 사실 돼지고기 먹는 것조차도 꺼려졌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더욱 하나님 말씀에 신뢰가 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괜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으니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괜히 마음에 짐이 됩니다. 까짓것 그것 없어도 먹을 것 많은데 뭐하려 마음 찌르며 꼭 그것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또 한편 내가 이러할진대 유대인이라면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개는 쪽발도 아니고 새김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먹을 수 없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달리 말씀하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옵니다. 거기에는 땅의 각종 짐승과 날짐승이 있었습니다. 행 11 : 7 - 8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당연한 반응이지요. 그런데 다시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9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하나님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먹는 것에 대하여 한결 자유스럽게 대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골 2 : 16 -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달리 말하면 생활에 쓰잘 데 없는 것들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 하시는 분부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 그림자를 밟고서 이러쿵저러쿵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질책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말 그대로 율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문자대로의 하나님 명령서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말라 하면 가지 않아야 하고 먹지 말라 하면 먹지 않아야 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하셨으니 그들은 우상을 결코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기념을 위한 단조차도 세우면 의심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요단 이편에 이미 기업을 받았던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자기네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요단 가에다 아주 커다란 단을 쌓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수 22 : 11 - 12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왜 싸우려했지요? 우상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오해였지요. 물론 나중에 그 오해는 풀립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파간의 경계와 유대를 상기하자는 뜻에서 세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상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 경우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구약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문자대로의 하나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그 세부 항목만도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예로 얼마큼은 걸어도 되고 얼마 이상은 걸어서는 안 된다 하는 규정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요. 행 1 :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안식일에 갈만한 거리라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시대가 바뀌어 그 속뜻을 알아야 하는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주셨지요. 유대인들이 특히 예수님에 대하여 이를 갈며 미워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문자 하나라도 어김없이 지키려고 목숨까지도 겁니다. 그런데 자기네는 목숨을 걸며 지키려는 안식일을 그들이 보기에는 촌닭 같은 한 젊은이가 우습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고 자기네 지켜온 전통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 12 :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율법의 문자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인이 친히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우선입니다.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할!
이러한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 :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우리 또한 그런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문자대로만 보려는 경향입니다. 물론 문자대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육적인 것과 더불어 영적인 부분입니다. 아니 사실은 영적인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 6 : 6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영적인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를 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경고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4 : 37 - 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먼 옛날 노아 때의 홍수 사건이 마지막 때 일어날 사건을 대비한 교훈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를 대비하여 노아 때의 사건을 새롭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잘 배우고 깨닫고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과 노아 때의 홍수 사건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 육적 이스라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관심은 그 많은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생들입니다.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지요.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이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목자를 택하여 말씀을 주시고 당신의 역사를 땅에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데 순종해야 할 목자가 하나님을 등집니다. 배도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목자를 택하십니다. 그 목자로 나라를 세우게 하고 온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배반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나님을 등집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고난에 빠지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해주십사 애원합니다. 구원 - 반역 - 심판 - 구원 --- 이 사건이 반복됩니다. 그 축소판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삿 3 :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래서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하나님이 이웃나라를 들어 심판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다시 구원자를 보내주시고 등등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은 그러한 육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옛날 육적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육적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교훈이 되지요. 그렇다면 그 때 육적인 사건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이제는 영적인 사건들로 나타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도 그냥 육적인 말씀이나 문자적인 뜻으로만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그 넘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것을 알아야 했는데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들이 과연 영생을 얻으리라 생각하였을까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만 깨달았습니다. 요 6 : 68 - 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아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마 7 :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아멘! 거룩한 것은 진주로 개는 돼지와 비견되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뜻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눈에 보이는 진주나 개 또는 돼지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유지요. 흔히 사람을 짐승으로 빗대어 말합니다. ‘여우같은 놈’ ‘곰 같이 미련하기는’ ‘황소 같이 힘이 세구만’ ‘사자 같이 사납기는’ 등등 아주 많습니다. 때로는 좋게도, 때로는 나쁘게도 사용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사용하셨습니다. 마 10 :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에는 동물이 넷이나 등장합니다. 나름대로 다 뜻이 있고 다르지요. 그렇다면 앞의 개와 돼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 하신 것을 보면 결코 좋은 뜻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 거룩한 것, 진주를 보도록 합니다. 거룩한 것은 너무 모호하니 먼저 진주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진주가 어디 나오지요?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십니다. 마 13 : 45 - 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바로 앞에서는 보화로 말씀하시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그리고 값진 진주, 같은 뜻을 전하고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잠 3 :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무엇이 진주보다도 귀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잠 4 : 6 - 8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찌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씀에서 보면 지혜가 인격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언에서 말씀하는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 적용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못된 짓을 하면 개에 비유합니다. 세 가지가 나오는데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개 같은 놈, 개만도 못한 놈, 개보다 더한 놈이 있습니다. 이 중 누가 가장 못된 사람입니까? 사실 주인에게 충실한 개 즉 충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하고 충실해도 우리는 결코 개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개와 사람은 존재 자체가 다릅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먹는 것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개처럼 먹는다, 또는 돼지처럼 먹는다, 라는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 동물입니다. 죄송하지만 옛날 시골에서 어린 아기가 마루에 똥을 싸면 마당에 엎드려 있던 누렁이를 부릅니다. 그러면 날래 뛰어와서 깨끗이 먹어 치웁니다. 따로 청소할 필요가 없지요.
제 아내가 돼지고기 좋아해도 제주산 돼지고기라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요? 오래 전 제주도에 가서 돼지 키우는 것을 보았거든요. 지금은 그런 집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람들 용변 보는 뒷간에 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용변을 보면 아래서 돼지가 기다렸다가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똥을 먹은 돼지라고 안 먹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주산 똥 돼지가 제일 맛있다는 거 알지요? 이제는 옛날이야기지만 개고기도 다른 애완견이나 무슨 훈련 받은 개들보다 시골에서 막 키운 앞에서 예를 든 아기들 똥 먹고 산 개들이 맛있다는 거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아무튼 아무리 좋아도 또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는 결코 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개는 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개나 돼지는 눈에 보이는 동물들이 아닙니다. 그러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요. 진주가, 진주가 아니고 보화가, 보화가 아니듯 개가, 개가 아니고 돼지가, 돼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사 56 : 9 - 11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여기 개가 뭐라 합니까? 바로 몰지각한 목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을 주면 그들, 몰각한 목자들이 거룩하게 사용할까요? 그럴 것이면 ‘몰각한 목자들’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빌 3 :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 행악하는 자들 그리고 손할례당, 모두 같은 계열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할례 받아야 한다고 율법을 고수하는 자들, 다시 말해서 문자에 얽매인 자들입니다. 옛것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을 미혹하는 목자들입니다. 성경대로 표현하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잘 아는 대로 ‘이사야’는 구약의 예언서입니다. 그 예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신약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룬 것을 빌립보서에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다시 봅니다.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그러지요.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자꾸 대립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율법과 문자에 매인 자들이고 사람의 계명으로 백성을 가르치던 자들입니다. 눅 16 : 14 - 15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자기 이만 도모하며 대접받기만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는 몰각한 목자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주보다 귀하고 어떤 보화로도 견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는 그 말씀을 ‘지혜’로 표현합니다. 잠 3 :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몰각한 목자들이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 전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참 뜻을 가르쳐주나 듣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네 생각과 다르다고 비난하고 짓밟고 핍박합니다. 결국은 자기네 권세로 붙잡아다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지요. 이제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자들로 하나님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혈통으로 이어오던 육적인 이스라엘이 그래서 끝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소위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바로 신약입니다.
그렇게 2천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어 신약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천국의 비밀이 열려지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계시 받은 자의 말씀에 거역하는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니 율법에 매인 자들이 자기 기반을 빼앗길까 두려워 예수님을 축출하였듯이 오늘날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귀한 말씀을 줄 수는 없습니다. 발로 밟고 상하게 한답니다. 묵은 포도주에 매인 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주를 찾아 구해야 하고 찾으면 잘 간수해야 합니다. 개나 돼지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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