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30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눈을 만든 이의 바라봄 》
시 94:1~23
〈 착한 한국 사람들 〉
요즘 한국이 세계적으로 방방 뜨고 있는 중입니다.
유사이래 최고의 정점을 찍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보면 이른바 ‘국뽕’ 쇼츠나 동영상이 많습니다.
한국의 화장실 문화, 한국 치안의 우수성, 한국인의 도덕성 자랑이 한참입니다.
그 중에서도 귀중한 물건을 공원 벤치에 놓고 떠났는데, “다음날 가보니 그대로 있더라!”
또 택배 기사들이 카고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배달하는데 아무도 손을 안 댄다.
심지어 택배 물건을 인도에 늘어놓고 배달하는 데도 안전하다.
“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유의 쇼츠나 동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아심이 하나 돋아납니다. “한국인의 도덕성이 그렇게도 빼어난가?”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들,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인이 이렇게 착하게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폐쇄회로카메라(CCTV)가 전국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CCTV 사각지대가 거의 없습니다. 한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가 다 잡아냅니다.
남의 것에 손을 댔다가는 여지없이 찍혀서 적발됩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인은 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보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주시하면, 행동을 조심합니다.
한국의 폐쇄회로 망을 전국에 다 되어있습니다.
개인의 사생활 침해 문제가 있지만, 치안 수준과 도덕성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눈이 있습니다.
시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누구 이야기입니까? 창조 하나님입니다.
☞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행동을 보고 계신다는 선포입니다!
〈 첫째, 통찰하시는 하나님 〉
시편 94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3가지의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첫째 “통찰하시는 하나님”
둘째 “심판하시는 하나님”
셋째 “맡아주시는 하나님”
첫째 “통찰하시는 하나님”
오늘 설교 제목이 《 눈을 만든 이의 바라봄 》입니다.
시편 94장에서 시인은 외칩니다.
“악인은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그리고 악을 자행한다”
이들에게 선포합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못하겠느냐,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못하겠느냐”
시적으로 빼어난 한 마디입니다.
돌을 깎아서 온갖 형상을 만드는 석수장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품들은 듣지 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모양만 있지요.
그러나 사람을 지으신 분이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 저와 여러분들은 듣고, 봅니다.
듣고 보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10절에서도 예리하게 선포합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우리를 교훈하는 하나님의 지식, 교훈할 때만 쓰이지 않습니다. 징벌 때도 쓰입니다.
가르칠 때 썼던 그 지식, 징벌 때도 쓰이는 양날의 검입니다.
바라보시는 분, 교훈하시는 분, 징벌하시는 분,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통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합니다.
눈, 귀, 교훈으로 통찰하시는데, 우리의 마음까지 하나님은 통찰하십니다.
시 94: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사람의 생각은 말과 행동과 습관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행동과 습관을 보고계신 하나님!
우리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우리를 통찰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 둘째 심판하시는 하나님 〉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통찰하심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합니다.
그런 이들을 성경은 ‘악인’이라 합니다.
시 94:3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이러한 악인을 향해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께 복수를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소서”(1절)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2절)
구약성경 시편에는 시편 94장을 비롯하여 이러한 탄원 시가 꽤 많습니다.
“하나님,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왜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인이 대박을 터뜨립니까?”
이렇게 부르짖을 때, 주후 5세기 어거스틴이 한 마디 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미움을 가져라!”
이때부터 죄인과 죄에 대해서 한층 더 깊은 심사숙고가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법언으로 발전했습니다.
근데요, 어떻게 죄인은 사랑하면서 그 죄인의 죄만 ‘똑’ 떼어내어 미워할 수 있습니까?
한때 저는 이것은 말장난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죄와 죄인을 분리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이 단 한명도 없게 됩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100% 죄인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십니다.
어거스틴은 모순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진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요, 죄인 중에서 진짜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이 있습니다.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성령 모독죄’입니다.
“모든 죄는 다 용서받고 사함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한 죄는 영원히 사함이 없다!”
이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일까요?
실정법상 흉악범이나 사형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령 모독죄는 끝까지 “나는 의인이다”라고 고집하는 자입니다.
성령께서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하는데, “나는 아니다” 했으니 성령 모독죄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서 끝까지 사함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이들 더러 있습니다.
“나만큼 깨끗하게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은 그런 자를 심판하십니다.
〈 셋째 맡아주시는 하나님 〉
첫째 “통찰하시는 하나님”
둘째 “심판하시는 하나님”
셋째 “맡아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맡아 주신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맡기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무엇을 맡깁니까? 먼저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의 생명, 나의 시간, 나의 소유, 나의 달란트 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내가 위태로울 때, 내가 미끄러질 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시편 94장에 입각하여 맡겨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악인을 향한 분노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자기 옳음’의 확신으로 주변을 몰아가는 자를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얼마나 화가 치솟습니까? 한바탕 뒤잽이를 하고 싶은 욕망이 차오릅니다.
그때 그 분노, 그것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직시하십니다.
악인은 악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갚으심입니다.
내가 직접 나설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자기의 옳음에 빠져서 한치도 못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때 분노를 직접 발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도에게 정말 화가 솟구치게 하는 사람은, 면전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악인으로 분류해 놓은 사람입니다.
끝까지 ‘나는 옳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성령 모독죄인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정말 자기 절제가 힘듭니다.
이때, “맡아주시는 하나님”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 맺음 〉
오늘 설교제목이 《 눈을 만든 이의 바라봄 》입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 12절의 말씀으로 맺고자 합니다.
시 94:12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에 합당한 징벌을 내리십니다.
그 징벌을 감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장하는 자가 있습니다.
성령 모독죄입니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고 자기 죄를 자복하니 복이 있는 자입니다.
신앙은, 넘어지지 않는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쳐 쓰러질 때, 나를 받쳐주는 창조주의 손길을 자각하는 은혜입니다.
신앙은, 넘어졌다가 주님의 붙잡아주심으로 다시 일어서는 힘입니다.
신앙은, 분노조차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입니다.
우리가 혈과 육의 힘으로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마다 자신만이 아는 부족한 지점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통찰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맡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