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령골은 예로부터 팔량치( 八良峙 :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예로부터 천연적 요새를 이루어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다. 해발고도는 553미터)로 부터 갈은고개(가랑고개)까지를 말한다. 팔령골은 공식적인 지명이라기 보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팔량치(우리들은 팔령재라 불렀다)를 넘어가면 전라북도 인월이고, 갈은고개를 넘으면 함양읍 난평리다. 팔령골은 죽림리(상죽, 내곡, 시목)와 구룡리(원구, 조동, 구만)의 6개 마을로 이뤄지고 6개의 마을은 다시 16개의자연부락으로 나뉜다.
<팔령골 전경 : 죽림리와 구룡리>
<상죽마을 유래>
무지기, 상수락이라고도 했는데 오봉산과 삼봉산 중턱 팔량치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상무조계(上舞鳥溪)와 하무조계(下舞鳥溪) 그리고 양지땀(陽村)의 세곳을 합친 마을의 이름이다. 무조계부락이라고 하였는데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에 죽림마을 위에 있다고 하여 상죽림이라 이르게 되었다.
'하무지기'에는 예전에 '무조초등학교'가 있었는데 학생수에 따라 본교가 되기도 하고 팔령초 분교가 되기도 하다가 결국 폐교가 되었다. 지금은 팔령마을에서 시작되는 '삼봉로' 가 시목까지 개설돼 통행하기에 편리해졌다. 마을 부근엔 인산관광농원(인산죽염과 인산황토방)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인산죽염을 구매하기도 하고 황토방에서 숙박하며 맑은 공기를 쐬며 송림 숲속을 걷기도 한다.
<내곡마을 유래>
오봉산 밑에 위치한 거리실(內谷)마을은 옛날 피란지라고 한다. 거리실, 자니실, 닭실, 곰실, 대실 등 실자가 붙은 곳은 피란지라고 하는데서 이르는 말일게다. 그렇다고 보면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긴 마을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리실은 본동과 아랫마을 바깥마을이 모여 내곡으로 되어있다.
<시목마을 유래>
감나무골(枾木)마을은 삼봉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양동과 시목 두개의 취락이 합쳐져 감나무골이라 한다. 이 마을은 원래 돌감나무가 십이삼그루 있었는데 그 중 두그루를 베고 집을 지어 취락이 형성되면서 감나무골이라 했는데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시목이라고 한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은 시목마을 위쪽엔 '두레공동체운동본부'와 '산머루 와인동굴'이 있어 많은 외지인들이 왕래하고 있다.
<원구(원구룡) 마을 유래>
원구룡(元九龍)마을은 옥녀봉 밑에서 구룡이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룡(九龍)이라 지었다고 한다. 구룡촌과 율목촌 두 마을을 합해서 원구룡 마을이라 부른다. 병자년 수해시에는 십여호가 홍수에 매몰되고 수십명이 사망하기도 한 마을이다.
그 후 마을이 반달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최초에 개척하여 취락을 이룬 것은 알 수 없으나 삼백여년 전 안악이씨가 입향하여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으며 청송심씨와 해주정씨가 입향하여 살고 있다.
원구 마을엔 지금은 폐교가 된 팔령초등학교가 있었다. 아직도 건물과 운동장이 남아 있어 해마다 5월이면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선후배들이 만나 옛 정을 나누고 있다.
<조동(대추지) 마을 유래>
대추지 마을이라고 부르는 조동(棗洞)마을은 팔령천을 사이에 두고 제한(蹄閒)마을과 조동마을을 합쳐서 이르는 이름이다. 제한은 옛날 제한역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역촌이였다. 조선시대 수동의 사근 도찰방에 딸린 역이며 중마(中馬)2필, 하등마(下等馬)8필, 역리 93명 역노 22명, 역비 5명이 있었으나 1896년(고종 33)에 폐지 되었다. 이곳 제한마을 뒤 제한재를 넘어서 오도재를 넘어 마천 하동 구례로 가는 길목이다.
그리고 옥녀봉 산밑에 구룡들이 있고 들의 아랫쪽에 위치한 대추지는 조선 초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추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대추지 즉 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로 마을 입구에 할개미라는 지명이 있고 할개미에는 어사 송덕비가 있다고 한다.
처음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성씨는 김해김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진양강씨 남원양씨가 제한마을에 입향하여 토대를 닦았다고 한다
지금은 '할개미'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가는 길'이 뚫려 '지안 마을' 뒤에 있는 '지안재'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에 선정돼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지안재 모습>
<구만 마을 유래>
구만동(九萬洞))마을과 대군동 마을은 가락국 구형왕께서 마천면 빈대골에서 구만대군을 거느리고 구만동으로 왔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구만(구만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할개미 위에 풍수지리학상으로 장군대좌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장군이 있으면 군사가 있어야 하니 구만 대군과 제한역의 지명이 정해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나와서 전설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아고 하는 설이다.
구만동은 구룡리의 맨 아래쪽에 위치한 삼십여호가살고 있는 한가한 산촌 소부락이다.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마을 부근의 전답에서 옛날의 기와조각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팔령천을 중심으로 양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구만에는 남원양씨가 이백여년 전부터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대군동에는 조성 숙종때 의령남씨가 의령에서 들어와 살았으며 함양박씨가 오래 전부터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이 마을 맨 아랫쪽에는 복골(西溪)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 함양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귀암괴석의 계곡에 물이 굽이치고 나무들이 울창한 곳에 이요정(二樂亭)이 서 있다. 세상을 슬퍼하고 숨어 지내면서 산과 물, 바위를 즐긴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호대(風乎臺)와 영귀암(詠歸岩)등 모두 정다운 이름으로 주말과 휴일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구만 마을 아래쪽엔 구룡저수지(구룡제)가 있고 이 곳에 댐을 건설하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잠정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구룡리에는 고등방골, 굴뱅이, 독종골, 딘재이, 밤나무징이, 봇골, 옥녀봉, 원터골, 음다래미, 절터골 등의 정다운 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