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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하록의 시들: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초대], [주행부적합개체군], [실업자]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하록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보며
총총 수놓듯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줌 숨
침묵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
우리 떨어지면 어딘가 닿기나 할지
나 절벽의 속살이 궁금해
우리 부딪히면 어딘가 금이나 갈지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애지 여름호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고, 경제가 바닥을 쳤을 때는 곧바로 기사회생의 기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일들에 대하여 최악의 위기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일이지만, 그러나 요즈음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사정과 입장을 생각해 보면 자꾸만 안타깝고 눈물이 난다. 우리가 응원하는 권투선수가 무차별적으로 맞고 있을 때는 실제의 권투선수보다 그 가족이나 친구들의 몸과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이 더 아프기 때문이다.
눈부시게 맑은 밤,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바라볼 때, 밤하늘의 별들을 수놓듯이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나는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내가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줌 숨”이었던 것이다.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나는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한줌 숨”을 쉬었다는 것은 나도 너보다 더욱더 큰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야”는 위로의 말이 될 것이고, “마음껏 울어봐, 나도 똑같은 마음이야”는 동의의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어떤 동의도 위로도 하지 못하고, “한줌 숨”을 움켜쥐었다는 것은 내가 더욱더 큰 절망, 즉,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한다. 침묵도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다. 막다른 골목을 뚫고 넘어가면 또다시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고, 막다른 골목을 뚫고 넘어가면 또다시 막다른 골목이 나타난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절망만이 나타난다.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이다.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그는 왜, “벼랑의 바닥이 궁금”하고, “절벽의 속살”이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벼랑은 깎아지른 듯 떠 있는 길을 말하고, 절벽은 아주 험한 천길 낭떠러지를 말한다. 벼랑은 조심조심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게 건너가야 하고, 절벽은 손은 위로 뻗고 발밑은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기어올라가야 한다. 벼랑은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가지 않는 것도 위험하다. 또한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것도 위험하고, 절벽을 기어올라가지 않는 것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아주 극소수의 자본가들만이 자본의 법칙을 들먹이며, 우리 젊은이들을 더없이 어렵고 위험한 벼랑길과 절벽길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의 바닥도 죽음이고, 절벽의 속살도 죽음이다.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뿐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하록 시인은 아주 젊고,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는 우리 젊은이들의 존재론적 고민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더 이상 좌고우면할 수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라고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눈 딱 감고 벼랑길을 건너가야 하고, 두 눈 딱 감고 절벽길을 기어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평등한 것이다.
시는 인간의 자기 찬양과 자기 위로의 최고급의 예술이며, 우리는 시가 있기 때문에 이 어렵고 힘든 현실을 살아간다. 시는 우리 인간들에게 삶의 의지와 용기를 북돋아주고,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믿으며, 모든 기적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록 시인의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는 우리 젊은 시인들의 존재론적 위기와 그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티없이 맑고 순수한 의지와 그 꿈이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는 시를 쓰며, 그 사랑의 언어로 수많은 별들을 쏘아올린다.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하록
오늘 보았던 눈 속의 연인은
갈라진 겨울로 떨어져
서로를 잊었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
나를 찾는 없는 소리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설원은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아름답고, 이 설원에서의 연인과의 데이트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설원의 만남은 은총이고 축복이며, 최고의 기쁨이고, 흥분 중의 흥분일 것이다. 설원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설원의 연인들은 그들의 이상낙원에서 미래의 아이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설원은 동토이고 불모지대이며, 이 기나긴 아픔과 시련을 이겨낼 힘이 없는 연인들에게는 다만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는 절망의 땅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보았던 눈 속의 연인은/ 갈라진 겨울로 떨어져/ 서로를 잊었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설원은 함정이고 유혹이지,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가 아니다. 요컨대 설원이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소위 ‘강자의 힘’, 즉, 수많은 안전장치와 보호장치가 있을 때 뿐인 것이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하록 시인의 가장 화려한 허장성세의 말장난이며, 이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싸늘하게 식은 얼음인간일 것이다. 그토록 다정했던 연인들도 서로 미련없이 헤어지면 얼음인간이 되고, 따라서 얼음인간이 되고나서야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라는 시구에서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불이고 불꽃이고, 이별은 눈보라이고 얼음이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연인들이 헤어지면 얼음인간이 되고, 이 얼음인간과 얼음인간들이 만나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시적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나에게는 다정한 이름이 없다는 것이 되고, “나를 찾는 없는 소리”는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이 시구들은 ‘나는 냉정한, 또는 싸늘한 사람이다’라거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은폐하기 위한 말장난이며 반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추운 설원 속의 맨발과 맨손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늘 혼자이고, 나를 찾는 다정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하록 시인의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는 그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겨울 산장’([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의 독백과 절규의 풍경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원은 동토이고, 마른 나무는 죽은 나무이고,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는 채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다 “쩌렁쩌렁 삭아가는” 이 21세기의 우리 젊은이들의 운명을 뜻한다.
하록 시인은 2024년에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으로 등단한 신진 시인이지만, 그러나 이상李霜 시인 이후 대한민국의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너무나도 신선하고 압도적인 충격으로 인식시켜 준다.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만큼 시의 언어와 미술의 언어(색채)를 상호 중첩시키는 언어 사용능력과 함께, 그의 언어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사용하면서도 해학과 풍자, 또는 반어와 말놀이를 병치시키는 기법은 신기에 가깝고, 그리고 설원의 아름다움과 설원의 차가움(비정함)을 통해 존재론적 성찰을 해나가는 앎의 깊이는 하록 시인이 이상 시인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증명해준다.
하록 시인의 등단작,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 이외에는 그 어느 지면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전작 시집({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이며, 그 신선한 충격과 감동은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하록 시인의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는 아주 짧고 간결하면서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촌철살인의 언어들도 살아 있고, 더없이 맑고 투명하고 따뜻한 언어들도 살아 있다. 어느 누구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언어들도 살아 있고, 현대문명사회의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성찰의 언어들도 살아 있다. 요컨대 이 언어철학과 삶의 철학이 하록 시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천재는 언제, 어느 때나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가며, 그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으로 시를 쓴다. 하록 시인은 우회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말하고, 자기 자신의 붉디붉은 피로 쓴다.
초대
하록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땅이 나를 부른다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
빛도 나만큼 화려하지 못할 거야
겨울처럼 강한 내가 달려들 거야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기다리니까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호머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를 최하 천민으로 혹평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인데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전쟁을 혐오하고 평화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 선과 악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따라서 ‘전쟁’에만 강조점을 둔 헤라클레이토스마저도 ‘성악설’에만 함몰된 판단력의 어릿광대라고 할 수가 있다.
낮에는 신사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밤에는 건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낮에는 악마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밤에는 천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처럼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 역할을 달리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시간과 장소와 위치와 그 입장에 따라서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생은 연극무대와도 같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일인다역의 주연배우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사의 가면을 쓰고 악마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건달의 가면을 쓰고 신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천사의 역할과 악마의 역할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고, 신사의 역할과 건달의 역할, 또는 적과 동지의 역할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다.
파우스트가 착하고 선한 것만도 아니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악하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지킬 박사가 착하고 선한 것만도 아니고, 하이드가 악하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신사와 건달, 천사와 악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우리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나눈 것이지, 애초부터 그 사람들이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이 도덕인 것인 부도덕이 있기 때문이고, 법률이 법률인 것은 수많은 범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의 존재 근거는 부도덕이고, 법률의 존재 근거는 불법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같이 착하고 선량하면 도덕과 법률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록 시인의 [초대]는 선악을 떠나 있으며, 무시무시한 익살극이자 너무나도 섬뜩하고 오싹한 잔혹극 놀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등은 금기어이며,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말만을 들어도 소름이 오싹 돋고 밥맛을 잃어버린다. 하록 시인은 왜, 무엇 때문에 그처럼 상냥하고 친절한 웃음으로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을 초대하고 그 무슨 잔혹극 놀이를 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은 꿈이고, 꿈이 있으면 그 어떤 고통과 굴욕도 다 참고 견딜 수가 있다. 황제의 목을 베기 전에 충성부터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꿈이 있으면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꿈은 ‘역발산기개세’, 즉, 모든 고귀하고 위대한 기적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죽었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만이 살아 남았다. 학문의 진보와 산업의 발달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악마)을 위한 것이었고, 그 최종 목표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박탈하고 기계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이제는 인간의 꿈도 낭만도 다 사라졌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못한 파우스트, 혹은 지킬 박사의 후예들이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라고, 그 악마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상하이의 ‘스파트 팜’은 여의도 면적의 대여섯 배 크기이며, 파종에서부터 수확까지, 사시사철 농사를 짓고 최고의 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최첨단 농업시설이며, 우리 인간들의 노동력이 거의 필요없다고 한다. 모든 일자리들을 기계가 다 빼앗고 우리 젊은이들은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으니까 땅이 부르고,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을 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채 꽃이 피기도 전에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라는 독백은 무시무시한 익살극이자 너무나도 섬뜩하고 오싹한 잔혹극 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지러울 정도로 땅이 부른다는 것은 죽음의 유혹이자 손짓이고,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는 살아 있는 내가 곧 만나게 될 ‘나의 유령’임을 뜻하게 된다. 유령은 해골바가지이고, 해골바가지는 하얗고, 그 어떤 빛도 해골바가지만큼 화려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유령은 모든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는 것을 뜻하고, 그 어떤 불모성의 겨울보다도 더 강하고 튼튼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록 시인의 [초대]는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의 무시무시한 익살극이며,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모든 공포를 극복한 유령놀이로의 [초대]를 뜻한다.
인간은 이미 모두가 다 죽었고, 유령들만이 살아 남아, 무서운 잔혹극을 그 어떤 희극보다도 더 즐겁고 유쾌하게 연출해낸다. 괴테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서, 또는 스티븐슨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통해서 그처럼 무서운 잔혹극 놀이를 했지만, 이제 하록 시인은 그 어떠한 대역도 없이 몸소 이처럼 무시무시한 익살극과 잔혹극 놀이를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유령들의 세계이며, 그 어떠한 악마의 역할도 다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메피스토텔레스이든, 하이드이든, 파우스트이든, 지킬 박사이든, 흡혈귀이든, 진시황이든, 양귀비이든, 춘향이든, 이도령이든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주행부적합개체군
하록
달보다 태양에게 말을 망설이는 것은
이어질 새벽보다 이어질 낮에 뜬눈들이 많기 때문일까
저물어가는 것은 아침의 꽁무니를 좇아오는데
많은 귀들이 쳐다보면 너는 숨고 싶니 뽐내고 싶니
나는 말소되고 싶어
번쩍
하고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밀레니엄 세대란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며,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말한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공지능, 자율주행과 로봇 등이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의 희망과 행복에 기여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문명이 고도화되고 디지털 산업이 발전함에 따른 이익은 극소수의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우리 젊은이들은 그 디지털 기기에 사로잡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직장도 없고, 집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을 계획도 없다. 오직 너무나도 밝고 눈부신 태양이 싫어서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하고 싶은 이방인, 또는 ‘백년 동안의 암흑’과도 같은 지하생활자의 삶을 살아간다.
밀레니엄 세대는 태양보다 달을 더 좋아하고, 어느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달보다 태양을 더 싫어하는 것은 밝은 대낮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만큼 자기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말조심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도 싫지만 새벽보다 ‘뜬눈들’이 더 많은 대낮이 더 싫고, 저물어가는 것들이 또다시 아침의 꽁무니를 좋아가는 것도 보기 싫다. “많은 귀들이 쳐다보면 너는 숨고 싶니 뽐내고 싶니”는 [주행부적합개체군]의 한 증상이며, 그 집단적인 광기에 가깝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타인들과 말을 섞으며 자기 자신의 자랑과 그 우월에의 의지를 확인하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수많은 학교의 입학과 졸업, 문학, 역사, 철학, 정치, 경제, 사회의 경연대회와 그 시상식 등----. 요컨대 이러한 생존경쟁의 장이 없으면 그 어떤 사회도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는 대부분이 아침 까치도, 닭도 아니고, 황소도 아니며, 다만 올빼미와 박쥐, 또는 땅밑의 두더쥐처럼 존재론적 고민과 우울을 파먹고 살아간다. 나는 야행성 올빼미이고, 박쥐이며, 그 무엇보다도 주행성 동물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땅밑의 두더쥐이다.
이 밀레니엄 세대의 [주행부적합개체군]은 디지털 산업의 암적인 종양이며, 그 증상은 ‘만인 대 만인의 적대감’을 부추기고, 그 모든 사회성을 다 파괴시키며, 자기 자신과 인간의 모든 미래를 다 삭제한다.
[주행부적합개체군]은 편집병 환자이자 분열증 환자이다. 외상성 심리적 장애로 인한 그의 대인기피증은 사회적 부적응의 가장 심각한 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밝은 대낮을 싫어하고 오직 밀폐된 공간만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편집병 환자이고, 다른 한편, 어쩌다 두더쥐처럼 대낮에 나오면 자기 자신의 집과 갈 곳을 잃어버리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져서 더 이상의 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고착증 환자이자 끊임없이 육체의 쇠퇴와 과거로의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퇴행증의 환자에 불과하다.
하록 시인의 [주행부적합개체군]은 새로운 초신성의 거대한 은하군단이며, 그 파괴력은 태양계의 전체보다도 수십 만 배는 더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수천 억 도의 수천 억 배, 수천 억 배의 수천 억 배의 폭발력----. 그 중심의 한 가운데에서 하록 시인은 “나는 말소되고 싶어// 번쩍/ 하고” 우주폭발의 단추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나홀로족의 증가’는 [주행부적합개체군]의 증가로 이어지고, 전대미문의 대위기, 즉, 초신성의 거대한 은하군단의 대폭발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실업자
하록
눈치를 보고
말을 고르고
앓다가 덮고
숨죽여 울고
남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찌꺼기와 명랑의 껍데기
풀린 채 묶인 의자
그보다 신중했던 구두들
그마저도 아쉬운
갇힌 땅의 낙엽들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자기 땅과 자기 집이 없으면 타인의 말과 명령에 복종을 하게 되고, 그리고, 너무나도 비굴하고 비참하게 눈칫밥을 먹게 된다. 자기 땅이라는 것은 나의 직업과 밥벌이가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자기 집이라는 것은 내가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언제, 어느 때나 꿈을 꾸며 달콤한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업자는 그 옛날의 농경사회에서의 자기 땅과 그 힘찬 일터가 없다는 것과도 같고, 따라서 타인의 말과 명령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길조차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주인이 되는 것은 명령해야 되는 것이고, 노예가 되는 것은 복종해야 되는 것이다. 노예가 되는 것은 쉽지만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렵고, 복종하는 것은 쉽지만 명령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미래의 운명과 그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러나 하록 시인의 [실업자]는 주인(명령자)은커녕, 노예, 즉, 복종하는 자로서의 일자리마저도 빼앗기고 “그마저도 아쉬운/ 갇힌 땅의 낙엽들”이라는 시구에서처럼, 하루 하루가 힘들고, 최저생활의 밑바닥에서 굶어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뜻한다.
사장과 전무와 상급자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골라야 한다. 그들의 말 한 마디에 끙끙 앓고 숨죽여 울었지만, 그러나 “남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찌꺼기와 명랑의 껍데기”뿐이었던 것이다. “풀린 채 묶인 의자”는 묶여 있지 않아도 밥그릇(일터)에 묶여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그보다 신중했던 구두들”은 자유자재로운 일꾼의 삶이 아닌, 그 일터의 충견忠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가난한 자유인이 더 행복할까, 배 부른 노예(직장인)가 더 행복할까? 제아무리 찾아도 힘찬 일터가 없고 생계가 막막하면 배 부른 노예가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고, 비록 가난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힘찬 일터가 있고 먹고 살 걱정이 없으면 그 어떤 인간의 명령이나 간섭이 없는 자유인의 삶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배부른 노예의 삶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고, 가난한 자유인의 삶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의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은 자유와 선택의 문제라고 역설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젊은이들의 삶의 문제는 자유와 선택이 아닌, 모든 가능성이 제거된 생존의 벼랑끝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자유는 최하천민의 자유가 되고, 선택은 이 세상과의 이별, 즉, 자살에의 길이 된다.
탄생은 축복이고, 과거는 아름답다. 현재는 꿈과 낭만으로 나날이 즐겁고 기쁘고, 미래는 더욱더 아름답고 행복한 지상낙원으로 다가온다.
아아, “그마저도 아쉬운/ 갇힌 땅의 낙엽들”이여!
부디 부디 그 좌절과 절망의 땅을 갈아엎고 ‘인간 중의 인간’인 우리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애지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