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를 완전히 닫으면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이 차단되어서, 말하자면 작업실 전체가 넓은 암실인 셈이다. 그리고 두 개의 방 가운데 하나는 라이트박스와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이고, 다른 하나는 서재이자 작품 보관실로 쓰이고 있었다. 수많은 필름과 서적, 자료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스피커며 앰프 등이 주인이 음악 감상을 즐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남은 공간에는 바로 얼마 전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이 기대어져 있었다.그다지 넓지 않은 방에 제법 많은 물건들이 놓여있지만, 모두가 자기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지럽지가 않다. 사무실 주인의 깔끔한 분위기만큼이나 단정한 실내 풍경이다. 며칠 전에 읽은 그의 책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사진들과, 간결하되 힘 있는 글이 나로 하여금 단숨에 읽게 만든 책이었다. 「시간의 빛」이 그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강운구 선생님 작업실로 향하는 나는 긴장되어 있었다. 대 선배 사진가를 취재하고 촬영하기란 그리 마음 편안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간에서 ‘어서와’하며 어깨를 두들겨주는 손길에 따뜻함과 평안함이 온몸에 퍼진다. 그의 따스한 마음이 내게 옮겨진 것일까.
광화문에 있는 스무 평쯤 되는 아파트를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암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엌의 싱크대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는 전지 크기의 인화지가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암실용 싱크대가 들어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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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빛’의 표지 | |
대학교 때 이미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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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강운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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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시간의 빛」 출판을 축하드려요. 선생님께서는 원래 영문학을 전공하셨지요? 그런데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사진작가야. 학생인데도 일반인들과 함께 한 아마추어 사진 서클에 입회해서 활동했어. 그때는 지금처럼 프로페셔널이 있던 시대가 아니쟎아? 작품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아마추어였지. 인상사진을 하던 사진관의 사진가들만 프로페셔널이지. 우리나라 사진은 아마추어 사진으로 출발했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지. 그때 나는 대학생으로서 사진작가들이 활동하는 서클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전람회도 하고, 임응식 선생님께서 주도한 창작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돼서 전국 규모의 회원전 등에도 출품했거든. 그러니 명실 공히 사진작가지. 학교 다닐 때는 취미로 했던 거지만 재미가 있고, 이걸로 밥벌이를 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졸업할 때 마침 조선일보에서 견습기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서 사진기자가 된 거지.
대학교 3학년 때 선생님 말씀대로 아마추어 사진가가 되시기 이전에는 사진을 안 하셨는가요?
그전에는 여행하고 등산하면서 사진 열심히 찍고, 관찰 열심히 하면서 사진의 기능이나 중요성을 인식했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사진반 서클이 있었어. 그 당시 나한테는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반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사진반 친구들과 어울리고 카메라를 빌려서 찍어보면서 사진하고 접촉을 했었지. |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내 카메라가 생겼어. 그 전에는 빌려서 찍었고. 그 당시는 집집마다 카메라가 있는 게 아니고, 소풍 갈 때나 빌려달라면 서로 간에 빌려주고 그러던 시대였지. 전화도 집집마다 없어서 옆집으로 전화 걸러 가기도 하고, 옆집에서 전화 받으라고 소리 지르면 달려가서 받기도 하고 그런 시대였으니까.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요? 선물 받으셨어요?아버지 졸라서 산 거지, 뭐…. 그런 귀한 걸 선물 받을 수나 있었나?산문과 사진이 한데 어울린 책이번 「시간의 빛」은 몇 권 째 사진집인가요? 맨 처음 내신 책이 아마 「경주 남산」이었죠? 사진집을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내가 쓴 산문하고 사진하고 함께 엮은 것은 「시간의 빛」이 처음이지. 시사저널에 2000년 9월부터 2002년 5월까지 격주로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엮은 거지. 그 외에 어떤 책은 사진작품만 실었고, 또 어떤 책은 다른 사람이 글을 쓰고 내가 사진만 찍기도 했어. 그래서 「시간의 빛」까지 모두 일곱 권의 사진집을 냈어. 그리고 아직도 일곱, 여덟 권 분량의 원고가 더 있어. 전에 잡지 「샘이 깊은 물」에 ‘이 마을, 이 식구’라는 칼럼을 연재했어. 농촌의 여러 상황을 다룬 글과 사진을 직접 레이 아웃해서 십 년 간 연재를 했는데 그 양이 굉장히 많아. 잡지로서는 최장기 연재야. 글 사오십 매에 사진 열다섯장되는 칼럼이었는데, 일년이면 사오백 매고 십 년이면 사오천 매가 되니까, 사진까지 하면 책으로 일곱, 여덟 권되는 분량이지. 요즘 출판사에서 일부분만, 한 두 권의 책으로 내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고 있지만, 전부를 출판할 수 없어서 미루고 있어.인터뷰 중 간간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갱지로 된 수첩에 연필로 메모하는 그의 옆얼굴을 보니, 아직 봄인데도 그의 얼굴과 손은 이미 구리 빛이다. 한 달에 두 차례 지방 촬영을 다닌 결과다. 그는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서 현장을 누비는 젊은 사진가다.
선생님께서는 커피를 무척 좋아하신다. 그래서 여기 오면 맛있는 커피를 얻어 마실 수 있겠거니 하고 기대를 하고 왔는데 몇 십 분이 지나도 커피 내놓을 생각을 안 하신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전화를 들더니 누구에겐가 ‘지금 손님 왔으니, 커피 좀 사 가지고 와.’ 하신다. 조금 지나자 사진가 서헌강 씨와 다른 후배 한 사람이 어디선가 커피를 사 들고 들어선다. 손수 끓인 커피는 아니지만 맛있다. 방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기 속에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집은 어느 책입니까? 「우연 또는 필연」이지. 1994년에 「우연 또는 필연」 전람회를 열면서 낸 사진집이지. 그전에는 한 번도 개인전을 한 적이 없어. 1976년에 「내설악 너와집」이라는 사진집을 내긴 했지만, 그것은 내설악에 있는 ‘너와집’이라는 특정한 테마를 다룬 책이고, 내 작업을 광범하게 보여주는 그런 책은 아니었거든. 1994년에 첫 전람회를 하고 작품집을 내면서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의 내 작품의 기본적인 골격을 거기서 다 다루었지.
1960년대 중반부터 이미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선 선생님께서 첫 전시를 연 것이 1994년이라구요? 요즘은 대학 갖나온 사람도 전시를 하는 세상인데….
잘났건 못났건 간에 나는 프로페셔널이고, 나의 생각과 주관이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돈을 주고 갤러리를 빌리거나 자비 출판하는 것에는 염두에 없었어. 진정한 프로라면 어느 갤러리에서 전람회를 하라고 초대를 해줘야 될 것이고, 출판사에서 인세를 받고 상업적인 출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사진이 시원치 않더라도 의욕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일년에 몇 번이라도 전람회를 할 수 있는 나라야, 우리나라는…. 나는 그걸 부정하는 사람이지. 자기 스스로 전람회를 하기보다는 어떤 제도를 거쳐서 전람회나 책이 나와야된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94년에와서 |
드디어 전람회를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계기가 됐지.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거지.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는 개인전의 숫자도 적고 전람회를 한 시기도 굉장히 늦지. 60년대에 사진을 시작한 셈치고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전람회를 한 셈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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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빛’ 에 소개된 강운구 선생의 작품 |
한국의 자연에 대한 관조「시간의 빛」이라는 제호가 너무 인상적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시적인 제호를 붙이셨는지요.시간이라는 것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시간에는 초 단위도 있고, 하루 단위도 있고, 한 해 단위도 있는데, 「시간의 빛」에서는 편의상 네 계절로 나누어 각 계절의 풍경을 따라가는 거거든. 계절이라는 말의 다른 의미가 시간이 될 수가 있지.사실은 선생님과의 인터뷰 약속을 잡아 놓고 「시간의 빛」을 읽었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나는 책 읽는데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룻밤 새에 다 읽어버렸다. 그는 「시간의 빛」이 네 계절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자연에 대한 관조와 삶에 대한 철학이 드러나 있다.
‘메밀갈이... 성질이 깔끔한 농부나 이처럼 정취 있는 풍경을 만든다. 그런 풍경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자양분이 되어왔다. (기계농사로 이런 풍경이 드물어서) 풍경이 달라지면 마침내 사람도 달라진다.’는 대목에서 그는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하는 지를 말한다.
‘이력’으로 삼기 위해 구걸하듯 꼭대기나 탐하는 ‘피크베거’를 꼬집어 야단치며 삶의 자세를 가르친다. 그 가르침으로 나도 산에 오르면 정상을 정복하기보다는 산을 느끼고자 한다. 물이 물줄기의 크기에 따라서 어떻게 소리가 달라지는 가에 귀 기울이고, 새들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산수유가 활짝 피었을 때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지 등을 관찰하게 되었다.
‘목장에서 조선소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악을 듣고 사료를 먹으러 온다’는 대목에서 그 음악이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3막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주로 흑백 사진을 발표해오셨는데 컬러사진은 이것이 처음인가요? 의뢰를 받지 않고 내가 원해서 하는 작품은 흑백이고, 잡지에 게재하는 작품은 컬러지. ‘샘이 깊은 물’처럼 대중매체와 합작하는 것은 매체의 속성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컬러로 작업하는 거야. 「경주 남산」,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능으로 가는 길」도 모두 컬러고.개인 작업으로 흑백사진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흑백이 더 깊이가 있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지.선생님께서는 가장 한국적인 사진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가장’ 한국적인 사진가 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아시아의 한쪽에 있는 작은 땅에 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풍토,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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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강운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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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한국적, 또는 한국성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한국성’은 어느 시점에서 무슨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아주 다양하게 논의 될 수 있지. 그래서 한국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형화된 답은 있을 수 없어. 가령 바지저고리 입고 갓을 쓰면 한국적이고, 젊은이들이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미국적이냐는 문제지. 두 풍경이 거리감은 있지만 모두 한국의 현실이고 다분히 한국적인 것이야. 한국적, 혹은 한국성은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지.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 이갑철 사진가의 「충돌과 반동」 전시에서 굿이나 무당 사진 등에서 드러난 넋, 혼령, 신들림 등은 지극히 한국적인 거야. 그리고 그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성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그런데 나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에 동의 할 수 없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글이나 사진 작업은 한국적이거나 세계적인 것을 위해 외국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지는 않아. 이 땅에 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작업하는 것일 뿐이지. 그러니 나에게 세계는 아예 관심 밖이야.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는 아냐. 외국의 문물을 막아야 한다든지 우리 것이 최고라든지, 뭐 그런 건 아냐. 내 작업의 울림이 국외까지 미쳐서 외국 사람들이 봐준다면 좋은 일이고, 그걸 막을 이유는 없어. 그러나 처음부터 외국 사람들한테 보여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작업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건 아마 외국 사람들도 마찬가질 거야. 한국 사람을 염두에 두고 소설 쓰고 사진 찍는 사람이 있겠어? |
미국이나 프랑스 사람의 힘이 흘러 넘쳐서 밀물처럼 변방으로 밀려와서 본토보다도 더 우세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쪽에선 어떻게 하는지 경도되어 가지고 서양 사람이 한 거니까, 유명한 사람이 한 거니까 더 좋을 것이다, 하며 끊임없이 큰 나라에서 어떻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거든. 나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생각하고 나누어서 같이 느끼고 싶은 거지. 그게 내 작품인 거지.긴 얘기의 길이만큼 방안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무엇인가를 회상하듯 끝말을 맺는 그의 눈빛에서 그간의 외롭고 힘든 작업 여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번 「시간의 빛」이나 그 이전의 많은 매체들에 발표한 글들도 그렇고, 선생님은 사진가이지만 글 솜씨가 아주
뛰어나신 사진가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나는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글은 가장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야. 그래서 사진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글 쓰기를 기본으로 해야 돼. 물론 사진가는 자신의 전문적인 분야인 사진을 프로페셔널하게 해야겠지. 나의 문장은 어렵지가 않아. 어렵고 요란한 말로써만 고담준론을 하는 게 아냐. 쉬운 말로도 얼마든지 깊고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 할 수 있지.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요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글 쓰기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사진가 전부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사진을 미술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기회가 있으면 글 쓰기도 열심히 해야지.
그는 글을 잘 쓴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 금수강산에 꽃이 없다면 봄은 무엇으로 오나, ’ 산수유 꽃 무리는 이 땅이 이른 봄에 꾸는 꿈이다.‘ 같은 문구를 보면, 그것은 차라리 한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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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인 조각가 이영학 선생이 만들어준 강운구 선생의 흉상이 작업실 한쪽에 있다 |
“진정한 작가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어야… ”지금까지 사진계의 전면에는 여간해서 나서지 않으셨는데, 성격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가요?성격이기도 하고 그렇게 된 이유도 있어. 나는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또, 진정한 작가는 외톨이로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해. 여기저기 패지어 다니거나, 머리 수 하나 더 채워서 휩쓸리는 것은 작가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서 학생 때는 몇몇 서클의 회원이었지만, 내 생각이 정리되고 난 후부터는 어디의 회원도 아니야. 작가는 혼자 작업하고 스스로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도매금으로 휩쓸리고 싶지 않아. 그래서 춥고 배고프지만 혼자 버티는…, 그런 거지.선생님, 혹시 그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안 하신 건가요?그건 뭐 관계없고…. 1994년에 「우연 또는 필연」, 1998년에는 「모든 앙금」, 그리고 2000년에 「마을 삼부작」 등 세 차례 개인전을 여셨는데, 혹 올해쯤 또 한 차례 개인전을 여실 계획은 없으신 가요?글쎄, 누가 하자고 하면, 그 때 생각해봐야지. 선생님께서는 사진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 일반에 높은 인지도를 갖고 계시고, 팬들도 많은데요. 젊은 사진가들에게 선배로서 한 말씀 들려주시겠어요? 빵장수가 빵장수들을 위해서 빵을 구워 팔지는 않아. 일반사람들이 맛이나 밥으로 사먹는단 말야. 다시 말하면 불특정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거지. 사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전람회나 사진집을 보면 우리 나라의 많은 사진가들은 사진가를 위한 사진을 하고 사진계 안에서만 의사소통을 하려고 해. 그런데 사진이라는 매체는 소설이나 시, 그림과 같은 지적인 활동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기에 좋은 매체거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해서 널리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하지.다소 우둔하게 들릴지도 모를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시는 선생님의 태도에서 현자의 풍모를 느낀다. 짧은 시간으로는 그의 깊은 얘기를 듣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의 빛’의 봄, ‘춘란의 향’에 ‘이 세상은 험해서 자태 귀하고 향내 좋은 것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 향내나는 고귀한 사람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보면 죄다 몰려가서 숨막히게 한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 인터뷰로 인하여 행여 내가 그런 우를 범한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방을 나섰다. 거리에는 벌써 이름 봄날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 취재 / 백지순 (사진가, 포테이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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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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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들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