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큐슈 - 혼슈 섬에 있는 시모노세키에 다녀온 게 지난 3월초의 일이다. 이제야 여행기를 쓴다. 5박 6일의 긴 여행길에서 가장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다. 여행사를 따라갔더라며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는 여행길이 되었을텐데, 시모노세키를 찾기 두 달여 전,패키지 여행으로 큐슈에 3박 4일을 다녀온 터라 자유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런데, 나름 자신감을 갖고 떠난 여행이었으나, 시모노세키 여행을 돌이켜 보면, 매우 고단해서 커피 한잔이 그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 될 것이다.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하카타역으로 이동했다. 공항에서 하카타까지 버스로 2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하카타역에서 JR을 타고 고쿠라역까지 이동했다. 한국에서 미리 구입해왔던 큐슈 5일 기차 자유이용권으로는 고쿠라까지밖에 사용이 불가능했다. 시모노세키는 큐슈섬에서 바다를 하나 건너 혼슈 섬에 있기 때문에 그곳까지는 기차 이용이 불가했던 것. 위의 사진처럼 큐슈와 혼슈 섬은 칸몬대교가 놓여있어서 승용차나 자전거, 전철 또는 도보로 건널 수는 있다. 우리는 시모노세키까지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모지코항에서 시모노세키 가라토항까지 배로 5분이면 된다는데, 지하철은 50분쯤 걸린 것 같다. 말이 전철이지, 마치 우리나라 무궁화 열차를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철 안에 화장실도 있었으며. 네명이서 마주 앉을 수 있도록 좌석 배치가 되어있다. 큐슈에서 혼슈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전철이 시골길을 한 참 달리더니 바다위를 건너 시모노세키 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시모노세키는 매우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부산에서 배(국제여객선)를 타면 하루밤 만에 시모노세키에 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여행길을 선택하는 게 시모노세키로의 여행길은 훨씬 효율적일 것 같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오래 오래 바다를 내다보며 날아가는 갈매기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우주와 자연을 사유하면서 여유있는 여행을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우리는 시모노세키에서 아카미신궁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 셋을 위해 미리 차를 예약해 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물어 버스표 구입하는 곳을 찾아갔다. 시모노세키에서 하루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1일 승차권(720엔, 우리돈 8,000원 정도)을 구하여 버스를 기다렸다. 아카미신궁행 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으나. 헤매려고 선택한 자유여행이었니, 묻고 또 묻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간절히 열망하며 기다리면 기다림의 끝점엔 붉은 빛 열매가 있는지도 모른다. 버스에서 귀를 쫑긋하며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이느라 초긴장이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이지만, 잘못 내려서 헤멜수는 없는 일이니, "아카미신궁"이라는 다섯 글자만 들리길 고대하며 초조한 시간이 20분쯤 흐르고, 우리는 아카미 신궁 앞에 내릴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에머라드빛 지붕에 빨간 신궁. 말 그대로 신의 궁전이다.
12세기 때, 시모노세키에서 다노우라 전투가 있었다. 안토쿠 덴노(1178~1185, 일본의 왕)의 외가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외할머니는 여덟살 된 덴노(일왕)을 용궁으로 함께가자고 손을 이끌고 바다에 투신한 일이 있었다. 이 아카미신궁은 덴노 왕과 외가를 기리는 곳이다. 붉은 색은 슬픔 혹은 용궁을 상징한다.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게 신사이다. 일본에 800개가 넘는 신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신사에나 붉은 색 도리이를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붉은 도리이가 줄은 이어 서 있는 곳도 있어서 좀 으아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른 신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색 색조가 이 신궁에는 더 많이 쓰인 것 같다. 신궁을 보려면 계단을 많이 올라가야 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또 계단, 계단. 그래서 그런지 신궁에서 내려다 보이는 맞은 편 간몬해협이 바닷빛이 더욱 바다빛으로 띈다. 붉은 색과 초록색의 보색관계 때문인지, 칸몬해협의 바다는 초록과 짙은 초록을 더하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사진을 마치 파랑색에 햇빛 반짝이는 하늘 빛으로 보이니 카메라 렌즈가 요술을 부리나 보다.
그날 따라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의 의미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마침 그곳에서
일본 전통 혼례가 올려지고 있어서 이채로와 보였다. 신부가 머리에 쓴 계란 모양의 모자며 모자를 썼으면서도
빨간 양산을 쓰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카미 신궁도 결혼식 풍경도 한국에 없는 이색적인 모습이라
카메라에 담으면서 지구촌 이웃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른 모습들을 들여다 보며, 한국의 익숙했던 일상들을
잠시 잊어본다. 어깨를 누르고 있던 몇가지 고민스러운 짐들도 모두 잊은 채 그냥 나를 낯선 풍경 속에서 잊어본다.
그게 여행의 참 맛이리라.
아카미신궁에서 나는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아헤맸었다.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는 조선통신사 기념비를 보고 싶어서였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본 왕을 기리는 아카미신궁보다는 나와 핏줄을 나누었을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
였는지? 한국에서 미리 가져간 사진을 보며, 이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더니, 해답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아카미신궁 정문을 내려와 신호등을 건너면 간몬해협 바다다. 그 곳에 작은 공원이 있고,
바닷가에 녹슨 닻이 보인다. 닻에 매달려 있는 닻줄도..... 붉은 색 아카미신궁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과는 대
조적으로 그곳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나와 함께 여행을 갔던 두 친구들도 바다 사진을 찍겠다고 어디로 가버
리고, 그곳을 덩그마니 혼자 둘러보았다.
조선통신사... 조선은 선조 40년(1607년)부터 순조 11년(1811년)까지 사절단의 이름으로 12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초청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때마다 일본은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마다, 위의 아카미신궁에 숙소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미신궁과 조선통신사를 하나로 묶어서 글을 써도 좋으리라.
일본은 조선의 통신사들을 마을마다 데리고 다니며 극진히 대접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룩한 선진문물을 마음껏 조선 사절단에게 뽑내며, 일본이 쓴 비용이 600억이 넘을 정도로 그들은 힘을 과시했고, 조선과의 화친을 갈망하는 것으로 보였다. 조선의 사절단들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내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 때마다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닻을 단단히 묶어두었던 게 바로 위의 사진의 닻이다. 이미 녹이 슬어버린 것일망정 일본은 잘 보존하고 있었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빈번한 침략과 일제 강점기 때의 점령도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이 조선을 개화시키고 잘 이끌고자했던 하나의 몸짓이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어쨌든, 정치 외교적으로 매우 귀한 유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 두 명이 통신사들의 닻 앞에서 바다를 보며 왼쪽 손을 높이 쳐들고 있다. 주먹을 꽉 쥔채..... 그들은 일본 바다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가슴 속으로 외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서 한국인들일텐데.....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여행을 왔는지? 묻고 싶었다.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대한의 젊은이가 되자고 다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앞날에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비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아마도 칸몬해협과 칸몬대교 그리고, 아카미신궁에서 길을 건너 5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가라토시장을 찾아갈른지도 모른다. 가라토시장. 시모노세키 여행자들이 꼭 가봐야하고 맛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상륙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일본측에서 세웠는지, 왼쪽부터 글을 읽는 우리들의 습관대로 통신비를 살펴보니, 일어-한국어-중국어-영어 순서로 기념비를 세운 취지를 써놓았다."일본과 조선과의 평화 외교 - 선린우호를 위해 이 비를 세운다"고 쓰여있었다.
2016년 5월에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항 부근에서도 조선통신사비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는 " 모진 풍랑에 목숨을 잃은 모든 조선 통신사들의 넋을 위로한다"고 씌여있었다. 함께 대마도 여행에 동행했던 문우는 내게 말했었다. "청나라로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웃으면서 가고,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은 울면서 간대요. 그만큼 쓰시마섬으로 가는 뱃길이 험악했다고 하네요" 왕명으로 목숨을 바쳐가면서 일본을 방문헸던 조선통신사들. 순조때 마지막 통신사가 대마도를 방문한 것으로 공식적인 통신사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가 파견했던 조선통신사 중에 통신사 부사로 왔던 김성일(동인)의 주장 - 일본은 전혀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으니, 안심할 것과 민심을 교란시키지 말게 하라 -을 따랐던 선조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발굽과 조총에 조선은 피에 물들었었다. 조선통신사 정사로 갔던 황윤길(서인)은 왜적의 침입이 염려되니 이에 대비해야한다는 주장은 무시되었다.
복어가 많이 잡혀서 복어요리가 유명한 곳이 시모노세키다. 그곳에 마스코트가 복어인 모양이다. 시모노세키 거리를 걷다보면, 맨혼 뚜껑에도 복어가 그려져 있다. 시모노세키에는 일본 최대의 수족관이 있다고 들었다. 153m의 가이코 유메타워, 복어요리와 성게알, 고래고기, 아귀요리도 유명하다. 조선통신사비를 보고 가라토 시장에 들러 초밥과 새우튀김으로 점심을 먹었으나, 오래 오래 기다려서야 가보고 싶은 성하마을(초후마을)을 보고나니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초후마을에서 숙소까지 가는 버스 배차 간격은 드문 드문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길에서 다 보낸 탓에 저녁 늦게야 숙소에 도착했지만,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편의점에서 삶은 계란과 샌드위치, 컵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1월 여행사에서 준비했던 저녁식탁 - 호텔 부페가 그립기만하다. 일본 식당들은 초저녁에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식사 시간을 놓친 여행자들은.
초후마을과 가라토시장 여행 스케치는 다음에 올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