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이 복인가?(마5:1-12)
갈등
1. 어느 집의 거실 한쪽에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그 안에 트로피와 상장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받았던 상. 학생 때의 상. 회사에서 인정받았던 흔적들. 이상한 것은 그것들이 진열장에 있지 않고 상자 안에 있었습니다. 이 집을 방문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어요.“왜 이 상장과 트로피를 꺼내놓지 않으세요?”그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그땐 자랑스럽고 중요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그냥 넣어둬도 되더라고요.”경쟁하며 성장할 때는 그 상과 트로피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상이“내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증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복 같던 것들이 조용히 상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 메시지입니다. 주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상과 트로피 이야기를 했는데“복은 얼마나 가는 걸까요?”“사라지는 것도 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우리는 은근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은 계속 있어야 하고. 눈에 보여야 하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 잘 풀릴 때는 괜찮지만, 어느 순간 그‘증거’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집니다.“내가 뭘 잘못했나?”“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건가?”“이제 나는 복 없는 인생인가?”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입을 여셨습니다. 사람들은 기대했을 겁니다.
2. “복 받는 방법.”“다시 잘되는 길.”“잃어버린 복을 회복하는 공식.”등요. 예수님의 첫 말씀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수님은“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어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요? 울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어찌 복이 있나요? 사람들이 알고 있던 복의 목록에 전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을 진열장에 올려놓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아직 괜찮네! 예수님은 그 진열장을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비어 있는 마음을 보시고. 무너진 마음을 보시고. 갈망하는 마음을 보시며
당시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이“복이 있다.”(마카리오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매우 짧습니다. 긴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팔복을 말씀하시고, 이것에 대한 해석과 답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질문만 또렷해졌습니다.“복은 우리가 쌓아두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것인가?”“예수님은 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복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갈등 심화
3.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의 방향이‘내면의 결핍’에서‘삶의 대가’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긍휼은 보기 좋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면 시간과 물질을 내야 하고. 마음을 써야 하고. 때로는 이용당할 수도 있어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해“복이 있다”(마카리오스)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을 듣던 사람들은“그러면 내가 너무 손해 아닌가?”“적당히 선을 지키는 게 낫지 않나?”주님은“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속과 겉이 다른 삶. 말과 행동이 다른 삶. 신앙과 현실이 분리된 삶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중성 덕분에 편하게 살아갑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눈 감고. 넘어갑니다. 예수님은 그‘적당함’을 내려놓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너무 불리해지지 않습니까?”예수님은“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셨어요. 화평은 갈등을 피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화평은 갈등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불편한 말을 해야 하고. 오해를 감수해야 하고. 양쪽 모두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4. 예수님은 이런 것에서 조용히 빠져 있지 않고, 중간에 서는 사람을 복 있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현실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조용히 믿고 살면 안 되나?”예수님은 나아가“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어요.“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이것은 단지 어떤‘상태’나‘태도’만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손해와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조롱당하고,
배척당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복이라(마카리오스) 부르셨습니다.“이게 정말 복이라면, 우리는 진정 이런 복을 원하고 있습니까?”
11절,“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복은 원하지만
이런 길은 피하고 싶고. 하나님 나라는 좋지만 대가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갈라집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옳은 것 같은데, 나는 이 길을 정말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다.”그 복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 여전히 복이라 부를 수 있나? 천국 때문에 이 땅에서 손해를 봐야 한다면 여전히 나는 따를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이 정의하신 복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팔복이 복인가요?”
실마리
5. 예수님은 산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형편을 바꾸겠다고 약속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곧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곧 웃게 될 것이다”라고도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상황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결과’가 아니라‘어떤 자리에 있느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을 이렇게 확인합니다. 결과가 나왔는가? 형편이 달라졌는가? 상황이 나아졌는가? 예수님은 그 기준을 아예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이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가?
그의 마음이 무엇을 향해 열려 있는가? 그는 누구를 필요로 하는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스스로 구원 불가) 애통하는 사람은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깨어진 현실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대로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복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고 왜 복인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방법도 주지 않으셨고, 공식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6. 왜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이해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불러주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설명보다 먼저 선언으로 다가옵니다.“이런 사람이 복 있다.”이제 질문이 조금 달라집니다. 복은 정말 상황의 변화일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일까? 복은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결과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먼저 불러주시는 정체성일까? 예수님은 상자 안에 들어간 트로피를 꺼내 보지 않으시고, 진열장을 하나하나 점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지금 그 자리에서, 너는 복 있다.”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이렇게까지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이 정도는 감당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만약 그랬다면 팔복은 복음이 아닙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조건표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대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예수님은‘기준’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팔복을 읽을 때 자꾸 이렇게 바꿔서 듣습니다.“긍휼히 여기면 복 받는다.”“마음이 청결해야 복 받는다.”
7.“박해까지 견뎌야 진짜 신앙이다.”예수님은 사람들을 줄 세우기 위해 팔복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이미 손해 보면서도 긍휼을 선택한 사람들. 이미 불편해도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이미 미움받아도 정의를 내려놓지 않은 사람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향해“너희는 실패자가 아니다”“너희는 잘못된 길 위에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보상’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려운 복들을 말씀하시면서 당장의 보상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만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지금 이 선택 때문에 네 인생이 손해처럼 보일지라도, 너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지 않다.”“사람들이 보기엔 어리석어 보여도, 너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예수님은 이 길이 쉬운 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길이 헛된 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제시
8. 팔복을 끝까지 듣고 나면 이것을 발견합니다. 이 복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우리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며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 가르쳐주신 마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 수 있습니까? 주님과 같이 미움받는 길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가르쳐주신 이 복을 살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을 설명하시지 않으셨어요. 복 있는 자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스승들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오셨고, 세상의 죄 앞에서 애통하셨고, 끝까지 온유하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마음이 가장 청결하셨기에 죄인으로 정죄받으셨어요. 참된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팔복은 이렇게 바뀝니다.“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살았다.”우리가 이 복을 감당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복의 길을 끝까지 걸으셔서 천국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9. 예수님은 팔복을 명령으로 주시지 않고 선언으로 주셨습니다.“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사랑하는 여러분, 팔복은 우리가 증명해야 할 삶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증하신 하나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을 쟁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기대
10.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나누며 질문했습니다.“팔복이 복인가?”상황만 보면 복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택만 보면 손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복은 내가 쌓아 올린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불러주신 자리라고. 팔복의 약속은 먼 훗날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천국이 그들의 것이다.”고 선언하셨어요.
미래형이 아니라 지금의 선언입니다. 지금 내가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있다면, 지금 불편한 선택 앞에서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지금 세상과 다른 길 위에 서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너는 복 있다.”팔복은 더 잘 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선언을 믿고, 이 복을 받아 사는 사람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도록 이 시간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