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69
12월9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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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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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10mHNx5cNE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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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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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_mQNfeDeN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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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주변인인데도 외롭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일까요? ‘경계에 선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고 천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보다 낮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레스트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지만 하늘의 가장 낮은 곳보다 낮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언자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친구들이 생깁니다. 그 친구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를 그 경계선에서 합니다.
요즘 읽은 책,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러 온 경계인으로서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모습을 김 신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을 떠나 한국에 왔지만 한국에서도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소외감은 익숙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스파게티’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마피아’라고 불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나를 ‘촌놈’이라 불렀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투오밥’(백인)이라 불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90년대 초, 눈이 내리는 일요일이었다. 성당 앞마당에 축제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밴드 연습이 한창이었고 한복을 입은 몇몇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의 리듬은 하얀 눈발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할머니를 한 분 모시고 내게 왔다. 사제에게 축복받고 싶어 하는 할머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외국 신부한테서는 축복받기 싫네’하고 어깨를 돌리셨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여러 지역에서 겪었던 일이라 적응할 때가 됐는데도 말이다.
집에 돌아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국인, 순례 그리고 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보면서 ‘외국 사람’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의 얼굴, 눈, 피부색은 한국 사람과 다르구나. 나는 이 땅에서 아직은 ‘손님’에 불과하구나.’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내 턱수염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서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의 전통이 있어 젊은 사람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네. 수염을 깎아요.’ 나는 곧 답을 드렸다. ‘네, 깎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수염을 깎았다. 사실 내심 멋진 수염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수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국 문화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김 신부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거나 통장에 거액의 돈을 가지지 않고서는 취득할 수 없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노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한국에 함께 온 마우로 신부님과 나는 한국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사실 난 쌀 요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먹어본 김치는 신맛이 강했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양념들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맛이었다. 특히 찌개와 떡은 너무 낯설었다.
세네갈에서 봉사할 때 나이 드신 선교사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이 나라 언어가 배우기 쉽다고 할 것이고, 사람들도 너무 착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보내신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언어가 너무 어렵다고 할 것이고, 음식도 맛없고 이 민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맛이 없다고 느꼈구나.’ 그 말씀을 떠올린 후 한국 음식들을 사서 맛보며,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국 음식의 참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음식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고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쌀밥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밥을 전해주는 신부가 됐다. 정말 먹기 힘들었던 음식 두 가지였던 ‘찌개와 떡’은? 내가 지금 가장 잘 만드는 요리는 ‘김치찌개’다. 노숙인 친구들도, 함께 사는 신부님들도 내 솜씨를 인정해준다. 그리고 특별한 날, 떡이 빠지면 섭섭하다. 나는 같이 환갑을 맞은 노숙인들과 환갑잔치를 함께 했는데, 무엇보다 많은 분과 떡을 나누어 먹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3년 넘게 노모와 형제들, 조카들을 보지 못한 김 신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도 한국의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조금은 열심히 따르는 우리가 모두 어느 정도 겪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겸손한 이들이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경계지역엔 아무나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비가 없어 학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자들과 공부반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직도 이탈리아 국적으로 한국에서 주변인으로 느끼면서도 열심히 한국의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려는 중이었습니다. 처음엔 영어만 가르쳤는데 그다음엔 수학, 국어, 농구 교실, 기타 교실, 영화 감상 교실 등도 운영했습니다. 봉사자 40명이 모였고 총 72명의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이러는 사이 아이들도 외국인 신부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신부님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1996년의 무더운 여름, 나눔 교실 아이들이 학부모를 대동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감사패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감사패에는 72명 아이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고 중앙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목련마을 청소년 나눔 교실 지도 신부로서 정열과 성의를 다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72명의 뜻이 담긴 이 패를 드립니다.’ 신부님은 감사패를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맑게 웃던 아이들, 마음 한편에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자리했구나. 머리를 맞대고 나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오래 생각했구나.’
김용규 님의 책 『나답게 사는 지혜는 숲에 있다』에서 숲에도 경계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숲과 바다, 혹은 숲과 도시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가려면 경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열려 있기에 자유롭습니다. 이 경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커다란 나무보다는 작은 관목들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한 부드러운 가지를 좋아하는 고라니나 산토끼, 이빨을 수시로 갈아야 하는 들쥐나 설치류들도 많습니다. 사람들도 산나물 등을 채취하기 위해 많이 드나듭니다. 그리하여 이 경계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가시를 지닌다고 합니다. 자신을 동물들에게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이 동물들과 덤불들은 서로 도와가며 이 경계지역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합니다.
김하종 신부는 고향을 떠나 한국인이 되어 한국에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한국 국적을 한국에 온 지 2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받게 되었습니다. 법무부에서 특별 공로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두 명 중 한 명에 뽑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지역에 머물며 어쩌면 숲 한가운데에서 함께 몰려다니지만 결국은 외로운 인간관계가 아닌 겸손한 작은 이들을 보호하는 작은 가시덤불이 되어 더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을 연결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단절되는 아픔도 있지만 결국 그 경계까지 도달한 겸손하고 작은 사람들과 공생관계를 맺는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 몸에서 난 가장 큰 사람이면서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은 예언자직을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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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1-15 :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 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이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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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바로 엘리야’ 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였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7장에 있는 다음 대화에 연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마태 17,1-9) 체험하고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엘리야가 정말로 왔는가? 왔다면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는 말은, “저희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성경의 예언은 어찌 된 것입니까? 엘리야가 이미 왔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성경의 예언대로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나온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엘리야는 예언대로 이미 왔고,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라는 뜻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뜻인데,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대화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당한 고난이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 대해서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메시아께서 겪으실 고난을 미리 겪음으로써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보여 준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뜻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구약시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것은, 신약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9절-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9-10)>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은, “신약시대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 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뜻합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아직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의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직접 구원하시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위대한 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받은 박해와 당신이 받고 있는 박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박해한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는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세례자 요한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대부분 하느님께 충성(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요한 16,2) 그렇지만 어떻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막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하고 막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 것과 같은 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하늘나라를 빼앗지 못합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를 거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박해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 마지막 예언자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 마지막 예언자로서 신약시대를 준비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이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은 구원받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안다면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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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낙엽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꽃과 낙엽이라는 시입니다. “꽃이 말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낙엽이 말했다. 사랑의 끝은 먼 이별이라고./ 꽃이 말했다. 사랑한다면 꺾어서 소유하라고 낙엽이 말했다. 꽃잎이 마르면 낙엽보다 진한 그리움만 남는다고./ 꽃이 말했다. 사랑은 영원한 꽃을 피울 것이라고 낙엽이 말했다. 사랑이 뜨거운 것은 이별이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꽃이 말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낙엽이 말했다. 이제 나를 즈려밟고 가세요.” 화려한 꽃으로 사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엽이 되어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실패한 많은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 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많은 사람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10년간 서울대교구를 이끌었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이임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교구장 재직 중에 보람 있었던 일 3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당시에 교구청에 있었습니다. 교황 방한 준비는 제게도 기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조성이었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헌신적인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이 우리나라에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의 장례를 치룰 수 있었던 것 이라고 합니다. 장례를 준비하면서 추기경님의 빈 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족함 때문에 상처 받은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부족했지만 열심히 살았던 사제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낙엽처럼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떠나는 뒷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한문으로 ‘宗敎’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로 'Religion'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다시 풀어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이 또한 풀어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된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엉킨 실타래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비움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비움은 ‘회개’와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을 정하고, 순위를 정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양심을 따라서 살았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였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순위를 정해서 시험을 치르듯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과 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협력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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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하늘나라와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나라가 폭행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율법 해석으로 하느님의 통치에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려 그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태 23,13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나라를 거절하였음을 증언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하늘나라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불순종과, 하늘나라의 온전한 도래의 방해를 나타냅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95면 참조)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올바름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영토나 체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아픔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과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다른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가슴에 품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홍승의, 『푸른 물고기』, 4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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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잃어버린 나의 한 짝>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광야에서 고행을 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정의를 위해 순교한 위대한 세례자 요한이 하늘 나라에서는 작은 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하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제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신약의 시대가 예수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우리를 위대한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더 낮은 곳으로 임하기를 다짐하도록 합시다.
잃어버린 나의 한 쪽은 어디에 있을까?
찬미 예수님! 며칠 전 오랜만에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청소, 빨래, 정리 등등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데 가끔씩 너무 바쁠 때는 우렁 처자는 안돼지만 우렁 로봇이라도 한 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옷장을 정리하던 중, 짝 없는 양말 세 짝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아마 빨래하다가 어딘가 흘렸나 봅니다.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 걸레처럼 방바닥과 창틀을 닦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버렸습니다.
양말은 한 쪽만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오른쪽 양말은 왼쪽 양말에게, 왼쪽 양말은 오른쪽 양말에게 “너 없으면 못 산다”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양말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부부도 그렇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남편 없으면 못 산다고 했던 아내가 언젠가부터 아들 혹은 딸 없으면 못산다고 합니다. 남편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자식들이 다른 사람 만나 떠나고 나면 허전함을 감출 수 없어 하다가, 그제야 다시 남편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은 남의 편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고 말하나 봅니다. 평생 함께 나의 한 쪽인 남편이 있어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혹은 나의 한 쪽, 아내가 있어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곪아터진 마음으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외롭게 지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거치고 나면 남편이 제일 좋은 친구 같다고 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고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그리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노년을 맞는 분들은 참 복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부부 사이도 양말처럼 한 짝이 없어지면 너무 쉽게 버리고 다시 사고 또 버리고 있는 우리 사는 세상의 모습이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셨습니다. 과거 구약을 없애 버리고 새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약속을 토대로 새로운 약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구약 없이는 신약이 없고, 신약은 구약을 통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양쪽 양말과 같은 그러나 둘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하느님의 사랑이죠!
그런데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경계에 놓여 있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시죠?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광야에서 은둔자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겸손하게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를 칭하며 작은 자로 자처한 세례자 요한! 그리고 심지어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한 세례자 요한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의아한 표현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그 만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구약이 마감되고 하늘의 예수님께서 땅으로 내려 오심으로써 이 땅에 바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 땅에 도래한 하늘 나라, 새로운 시대에 살아가는 이는 가장 작은 이라도 구약의 사람보다 더 낫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시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구약 시대의 사람은 작고, 신약 시대의 사람은 크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각 사람의 구원은 각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신약의 시대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한다면 구약의 충실한 이들보다 작은 자라 불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폭력을 쓰는 자들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외적 폭력으로 말미암아 매 맞고, 쓰러지고, 십자가에 달려서 무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인 예수님은 폭력으로 빼앗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 36)
하지만 폭력 앞에 무참하게 죽어 가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것으로 폭력을 넘어 사랑의 하늘 나라를 지금 여기에 성취하였고 우리 모두를 그 나라에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가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듯이 수난과 부활은 양말의 두 쪽처럼 없어서는 안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말의 두 쪽처럼 “너 없으면 못사는 사이, 너 죽으면 나도 죽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없으면 못하는 사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었듯이 그렇게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양말의 두 쪽이 서로 똑 같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똑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폭행처럼,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처럼 그런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저는 양말의 다른 쪽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듯이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분의 사랑의 부르심에, 그분의 십자가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예”하고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도록 합시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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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안내자와 그리스도인의 역할>
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내리십니다. 처음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입니다.
첫 부분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둘째 부분 곧,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인물입니까? 복음에서 알려주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그 어떤 예언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시기로 예언된 엘리야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맞이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면,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얼마나 더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저 같은 니나노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진작 포기해야할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안내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안내자로서 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내자로서 지녀야할 모습, 자세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안내를 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안내자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안내자입니다. 미사와 성사집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 입니다.
어제부터 성탄 판공성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해실안에서 고해성사를 청하는 분들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주고, 죄를 용서하는 사죄경을 염해줍니다.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격려해 주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실제, 성실하게 성사에 임하는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의 물로 목욕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해실을 나섭니다.
그런데, 사제로서 제가 그렇게 신자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질 수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구원해 주면서도 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예수님께 인도해 주면서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 ‘안내자로서는 충실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충실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안내자로서 제가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할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후면, 여러분들이 인도한 예비신자 분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 성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안내자로서, 쉬는 교우들에게 다가갔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전해주고, 교회로 인도해 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내자로서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은 그렇게 잘 인도해주면서도, 정작 여러분스스로는 안내하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멀어지고,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도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약에 마지막 예언자요, 하느님 보시기에 훌륭한 일을 한 인물이라도, 우리가 얻은 지위, 곧 하느님 자녀라는 칭호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심지어는 예수님께 까지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훌륭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준 그리스도인이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성을 갖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의 가능성은 명확하지가 않고 좀 에매 모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인도했지만, 스스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헤로데에서 죽음을 당하여 순교했지만, 순교 의미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참된 순교의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교만으로 똘똘 뭉친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입니다. 구원이 명확하고, 구원받는 다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보다 덜 위대하지 않을까 감히, 교만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분입니다. 비록, 안내자로서 충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안내자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혹, 안내자로서 구원을 받더라도 명확하지 않음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알려준 세례자 요한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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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첫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참으로 좋은 뜻으로 시작했고, 순수하게, 열심히, 소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의 권력단체가 되어버린 이들을 본 적이 있을까요?
조직적이 되고, 체계가 잡혀가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왜냐면 그 모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위해서 이 한생 바치겠다고 큰 뜻을 품어 공부를 시작하고, 세상에 나섰는데, 집단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그들만의 생각과 분위기에 묻혀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또 권력이 되다 보니까 이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겠지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늘 나라의 수호자와 전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는 범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여자들 가운데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라고 높이 사시는데 요한은 ‘회개’를 외친 인물이었습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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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어느 날 한 신부님이 눈병에 걸려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신부님을 진찰하고는 “신부님! 이것은 약을 먹는 것보다는 연꽃 향기를 눈에 쏘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곧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으로 돌아온 신부님은 성당 옆에 있던 연못으로 가서 연꽃 봉오리에 눈을 댄 채 향기를 쏘였습니다.
그런데 연꽃이 바람에 흔들려 눈을 맞추기 힘들어서 연대를 붙잡아 눈에 댔죠. 그때 연못을 돌보던 한 어르신이 신부님을 향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야, 이 도둑놈아!”
신부님은 깜짝 놀랐지만 차분하게 어르신에게 말했습니다.
“영감님, 왜 저더러 도둑놈이라고 하십니까? 연꽃을 꺾은 것도 아닌데요.”
그러나 그 어르신은 계속해서 신부님에게 “나쁜 놈!, 도둑놈 이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도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 남자가 연못으로 가까이 오더니 연꽃 줄기를 뚝뚝 잘라서 한 다발이나 가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르신은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멀거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니, 어르신! 저는 연꽃을 꺽지도 않고 향기만 조금 맡았을 뿐인데도 도둑이라고 소리소리 치시더니만, 저 사람은 연꽃을 저렇게 다발로 꺾어 가는데도 그에게는 왜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까?”
그러자 영감님이 대답했다.
“너는 신부잖아!”
(한상현 편, 『현자들의 철학우화』, 이가출판사, 2001, p16-17)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문득 옛날 읽은 신부와 연못지기에 관한 우화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받았죠.
그리고 어떤 이는 - 신부나 선교사들이라고 예를 들어도 되고 - 세례자 요한처럼 복음을 지금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 나라를 지키는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저는 능주공소라는 작은 신설 공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신설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직 건물도 없어서 길가의 1층 가게자리를 월세로 빌려 임시로 성당과 잠자리를 마련해서 작은 공소를 시작하고 있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작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간혹 누군가 문을 살짝 밀어봅니다. 열려 있는지 안 열려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죠. 그러다 열려 있으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아이고, 신경 쓰지 마세요. 나 그냥 잠시 앉아서 기도하고 갈랍니다.” 하고는 감실 앞에 앉아서 한참을 조용히 기도하고는 가시는 분들이 있죠.
교회를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 이들이 그들이 아닌가합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하느님 앞에 앉아 있는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이. 그러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하루 그 작은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나라의 큰 사람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저희가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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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방치하고나 빼앗겨도 안 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 1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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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거나 폭행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이오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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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11,12)
<폭행의 참 의미!>
예수님께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주 큰 예언자이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며,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른 별개의 나라도 아니요, 유토피아적인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요, 지금 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그리고 우리가 실행해야 할 '하느님의 뜻'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뜻대로 내 좋을대로 살고 있다는 의미로...
지금 여기에서 기뻐 감사하지 않고, 평화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의미로...
서로 용서하지 않고, 서로 화해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폭행을 멈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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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늘나라>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하려한다네
차지할 수 있다면
하늘나라가 아니거늘
오로지 주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나라이기에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한다네
빼앗을 수 있다면
하늘나라가 아니거늘
오로지 나누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나라이기에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지배하려한다네
지배할 수 있다면
하늘나라가 아니거늘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나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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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방학을 마칠 때쯤 되면, 학생들은 집에서 방학 숙제를 하느라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밀린 방학 숙제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일기 쓰기’였습니다. 일기의 장점이 많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문장력이 좋아지고, 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강압적으로 쓰는 일기라서 그런지 항상 일기 쓰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자신의 고칠 점을 하나씩 적어나가면서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는데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실천을 통해서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면서, 늘 뒤로 미루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특히 주님의 일을 지금 당장 행하는 우리가 될 때, 후회하지 않는 삶 그리고 가장 행복한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광야에서 살았고 그의 말을 들으러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갔습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이 본 요한은 바로 예언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며, 요한은 예언자 중에서도 보통 예언자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언명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광야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훌륭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제자들, 그들을 도와 초대교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믿음을 같이 했던 교우들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지금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인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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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드러났지만, 우리나라 양궁은 세계 1위가 분명합니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다는 것보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선발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유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동이(東夷)라는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활쏘기를 많이 해서일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훈련에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꿈틀대는 방 안에 가둬져 다리를 타고 뱀이 기어오르는 섬뜩함을 참아내고, 뜬눈으로 꼬박 3일을 버티기도 한답니다. 이런 극기 훈련을 하는 이유는 경기 중에 일어날 모든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활을 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많은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외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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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예수님께서 하늘이셨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제 욕심과 탐욕,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먹질이나 욕설만이 폭력이 아니랍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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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주 하느님!>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빛이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정의가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당신의 천국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바로 그러하셨나이다
내가
하느님의 될 때
온전한 치유가
온전한 참나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망
단 하나 이것 뿐이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2021.12.8.
어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주 하느님께 받은 참 좋은 선물의 기도문입니다. 너무 좋은 선물이라 다시 자랑하고픈 마음에 어제는 강론 맨 끝에 인용했지만 오늘은 다시 강론 맨 처음에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선물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21세기 가톨릭 교회는 물론 전 세계에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은 프란치스코 제266대 교황님일 것입니다. 거의 매일 주옥같은 말씀을 주신 교황님은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저는 교황님 강론보다 깊고 단순하고 보편적이고 본질적이고 명료한 강론을 접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또 교황님만큼 부지런하고 바쁜 지도자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12,2-6일 까지는 제35차 키프로스와 그리스를 방문했습니다. 이번 방문때 강론들 역시 얼마나 깊고 감동적이었던지요!
모든 날이 그러해야겠지만 특히 대림시기는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깨어 기다리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늘 깨어 있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불안을 몰아냅니다. 걱정을 몰아냅니다. 아쉬움을 몰아냅니다. 부러움을 몰아냅니다. 저절로 시편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끊임없는 기도를 위해 호흡에 맞춰 반복할 기도할 성구, 만트라를 소개합니다. 숨을 들이마쉬면서 “오소서”, 숨을 내쉬면서 “주 하느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뜻의 아람어 마라나타도 좋습니다. 바로 “오소서, 주 하느님!”은 앞서 소개한 제가 선물받은 기도문이기에 추천합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주님을 현존하게, 활동하게 만듭니다. 저절로 깨어 있게 되고 깨끗한 마음, 깨달음이 이어집니다. 깨어 있음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유혹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 하리라.”
주님을 본받아 때로 면담고백 상담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생각될 때는 저도 형제자매들의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곤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물러나는 두려움의 어둠이요 하느님 현존 안에서의 삶입니다. 주님이 함께 할 때 내외적 변화를 상징하는 다음 말씀입니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끊임없는 기도의 은총이 오늘 복음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늘 깨어 기도중에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미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래서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오늘 지금 여기서 끊임없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하루종일 내내 숨쉴 때 마다 “오소서, 주 하느님!” 호흡에 맞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절로 내적 변화(정화와 성화)와 더불어 내적 치유의 구원이 뒤따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이래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형 무형의 박해와 유혹들입니다. 물질주의, 상대주의, 금전만능주의, 세속주의, 소비주의등 하늘 나라를 무력화 시키려는 유혹들의 침투는 얼마나 집요한지요! 이래서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것보다 하늘 나라 수호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할 재림한 엘리야임을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의 은총으로 과거의 ‘향수(鄕愁;nostalgia)’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희망과 힘을 새롭게 하여 오시는 주님을 향해 마중 나가도록 합시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4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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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AJV8RHLL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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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 12)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들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다시 묻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 나라가
되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되는 깨어 있는
대림의 아침이다.
사랑과 폭행
감사와 폭력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폭행을 당해도
하늘 나라는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
적나라한
역사 속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들의
광기어린
모습이다.
하늘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다.
준비하고
기다린다.
폭행을 바꾸는
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선물이 되듯
기다림이
성탄이 된다.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밥이 되어주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아프게 반성한다.
폭행을
치유하는
반성의
밥이다.
폭행의
허기짐을
멈추게 하는
기다림의
사랑이다.
사랑을 딛고
일어서는
사랑이다.
삶의 자세를
고치는 것이
준비하는 삶이다.
함부로 살았던
삶이 소중한
하늘 나라를
대하듯 소중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뀌는
기쁨이다.
폭행을 벗고
기다림을
가짜를 벗고
하늘 나라를
사랑할 일이다.
폭행과 탐욕을
치유하는
하늘 나라의
사랑법은
깨끗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하늘 나라에서는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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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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