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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를 쓰는가
신경림
내가 시 쓰는 일에 처음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였다. 추천을 받은 작품은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격으로 허물어진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며 먹고살 길을 찾아 거리에 나선 부녀자들로 넘쳤다.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었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서정시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못되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회의 속에서 서서히 시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이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의 헌책방이었다. 복개되기 전 청계천은 속칭 ‘나이아가라’라는 술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동대문이 가까워지면서 술집들은 헌책방으로 바뀌었고, 책방마다 깊은 서재에 숨어 있다가 먹을 것과 바뀌어 쏟아져나온 책들로 넘쳤다.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종일 이들 헌책방을 빈둥대는 것이 내 일과였다. 나는 여기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보아왔던 백석, 임화, 이용악 같은 시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 백남운, 전석담 같은 사회과학자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나처럼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는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들과 어울려다니며 책을 뒤지고 차와 술을 마시고 밤늦도록 떠들어댔다. 외국사람들을 흉내내 독서회 비슷한 것도 만들었으며, 금방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라도 할 듯 설쳐댔다. 나는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다. 시 따위 쓰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조차 하게 되면서 시에는 더욱 게을러졌다. 이때 어울려다니던 한 선배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겁이 많은 나는 일단 시골로 귀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여 년 시골살이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미 자식들 학비와 사업의 실패로 농토를 거의 팔아 없애 농삿거리도 제대로 없을 때였다. 봄이면 안마당에서 작약 뿌리를 캐어 팔아 양도(糧道)를 마련할 정도였다. 게다가 월급쟁이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갑자기 닥친 이런 가난에 당차게 맞설 위인이 되지 못했다. 시골집도 내가 마음 편히 지낼 곳이 못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하는 일 없이 부자가 마주앉아 밥만 한 사발씩 축내는 것에 짜증을 냈으며, 아버지는 할머니의 괄시를 내 탓으로 돌렸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무언가 큰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였다. 나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려면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시도도 해보았으나 단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자연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댐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따라가 보름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행상을 하는 친구를 좇아 여러 날 장을 떠돌기도 했다. 실제로 공사장에서 며칠 동안 짐을 져보기도 하고 광산에서 서기 노릇도 했으며 장사를 해보겠다고 신발 따위 물건을 떼어 돌아다녀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일이 너무 힘들어 내 밥벌이는 단명으로 끝났고, 이 무렵 내가 한 일 중 그래도 제법 일다운 일은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개인교습을 해서 잔돈푼을 버는 것 정도였다. 십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하는 일 없이 건달로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어 ‘또라이’ 소리도 예사로 들었다. 이때 나는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이 땅이 참으로 살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절감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세상을 다시 공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에 산다고는 하나 농촌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가령 봄이면 굶고 여름에도 점심은 건너뛰고 아침저녁을 죽으로 견디는 이웃들의 사정이 바로 내 사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바로 이웃 동네에는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은 되었으니, 그 동네는 온통 과부 천지였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한 사람이 여럿이고 또 그 보복으로 똑같이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동네 살면서 평생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사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그 무렵 내게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남이 아닌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그래도 그 십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같은 데 몇편의 시를 끼적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쓴 시들이 「눈길」 「그날」 등이다. 친구와 막 영어학원을 벌이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故) 김관식 시인한테서 함께 서울 올라가 다시 시를 써보자는 제의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도 내가 시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좌다. 그의 말에 별로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경하여 십여 년 만에 시를 썼으니 그것이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시에 호감을 가졌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접하지 않아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라는 투로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몇해 동안 「시골 큰집」 「원격지」 같은, 시골에 있으면서 언젠가 꼭 쓰겠다고 생각한 시들을 써나갔으니,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대화인만큼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농무(農舞)』(1973)의 시들이 이때 쓴 것들이다. 이 무렵 나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개념에도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시에서 제목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문에서 한자는 철저하게 배제했으며 외래어도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한글전용이나 순수 우리말을 지키자는 논지의 잡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된다라는 명제에 나는 한동안 충실했다. 또 시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작으나마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내 시는 반유신, 반군사독재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시는 그 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것이 드러나면 후배나 동료 들은 나를 문학주의자로 비판하고 매도했다. 나는 이 비판과 매도에 항시 약했다. 결국 내 시는 경직될 수밖에 없었고, 언제부턴가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지루하고 싫어졌다. 적어도 신명이 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었는데, 시 쓰는 일에 나는 전혀 신명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해서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 민요를 좋아하던 나는 열심히 민요를 찾아다녔고 민요와 관계되는 일도 했으며, 민요적 성격의 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한 시대 이전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 있는 말로 되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이 아니었는가 싶다.
『길』(1990)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민요는 우리 것’이라는 고지식한 논리에서 벗어나 배울 것은 배우되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배운 또 한 가지는 시 쓰기 역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행위라는 점이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고 만지기 위해 찾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시 쓰기란 점을 민요를 찾아다니는 마지막 단계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얘기할 때 남도 다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고 나만의 목소리를 내게 되며, 그것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시는 그 시대의 질문이요 대답이란 명제도 그랬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었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통일이나 노동 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어찌 오늘의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라는, 강풍처럼 몰아치던 일부 과격한 질타를 차단하니 시 쓰는 일에 비로소 신명이 났고, 시에 활기도 생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뿔』(2002)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명확하게 나의 길을 잡게 되었다. 결국 남이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지기 위해, 생각 속에서 현실 속에서 힘껏 내달려, 그것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내 시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시가 오늘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을 제약하는 여러 조건과 맞서는 일에도 등한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다. 민족이니 민중이니 민요니 하는 것들이 더이상은 내 시의 족쇄가 되지 않고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바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2008년 2월
신경림
*이 글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공저, 열화당 2004)에 실린 산문을 수정한 것이다.
* 신경림 시집 <낙타> 에 실린 시인의 산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