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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반역 세력
삼하 15:7-12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삼하 15:7-12 / 압살롬은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4년을 보낸 후에 왕을 찾아가 이런 청을 드렸다. `제가 여호와께 전에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향 헤브론으로 내려가 그 서원을 이루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8) 제가 아람 족속의 나라 그술에서 살 때에, 여호와께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신다면 여호와께 아주 성대한 감사제물을 바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9) 다윗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겠다는 아들의 요청을 듣고 오히려 기뻐하며 조금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한 번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올 결재를 하였다. `잘 다녀오너라' 이리하여 압살롬이 이번에는 남쪽 헤브론으로 내려가 무서운 일을 또 꾸미게 되었다. 10) 그는 우선 예루살렘에서 극비리에 북쪽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속으로 부하들을 밀파하여 이렇게 알렸다. `누구든지 신호로 보내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되, 온 나라가 떠나가게 큰소리로 외쳐라.' 11)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도 200명의 유지들을 초청하여 대동하고 헤브론으로 내려갔는데, 그들은 압살롬의 거사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따라간 것뿐이었다. 12) 압살롬은 제물을 바치던 도중에도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길로로 사람을 보내어 아히도벨을 데려왔다. 그는 다윗의 훌륭한 참모였으나 다윗과 자기 손녀 밧세바의 사건에 분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참모까지 압살롬의 편이 되고, 그를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지자 압살롬의 반란 세력이 자연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4년여 동안 반역을 준비한 압살롬이 반역을 실행하고자 헤브론으로 내려가 아히도벨을 청합니다.
헤브론으로 가는 압살롬(7-9) 4년의 시간이 흘러 반역을 위한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압살롬은 하나님께 서원함이 있으므로 헤브론으로 가고자 한다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했던 곳인 그술에 있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일이라고 언급하므로 압살롬을 향한 애틋했던 다윗의 마음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과 서원이라는 종교적인 방법까지 이용하며 반역을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압살롬의 치밀한 계산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다윗의 초기 통치기반이 헤브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곳(2:1-4)이며 압살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3:1-3). 압살롬은 마치 다윗처럼 자신을 부각시키므로 왕위 찬탈을 위한 행보를 진행합니다.
압살롬의 반역(10-11) 압살롬의 왕위 찬탈을 위한 반역이 무르익자 미리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정탐을 보내고 나팔을 불면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지역마다 반역의 무리들이 선동하도록 전국적인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반역을 위한 초청인지도 모르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무려 200명의 인사들이 압살롬을 따라 헤브론으로 따라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들이 아닌 다윗 왕의 고위 관료들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이들은 왕자가 헤브론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 가는 길이기에 기꺼이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신료들을 분산시켰다고 보입니다.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상황을 만들 뿐만 아니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자신을 반대한다면 볼모로 잡아둘 계획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을 끌어들임(12) 압살롬이 제사를 드릴 때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길로에서 초청합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모사인데 예루살렘이 아닌 길로에서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예루살렘 중앙정치권에서 떠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후에 반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아히도벨이 기발한 모략을 압살롬에게 제시하며 결정적 도움을 주었음을 볼 때(16:20-23, 17:1-3) 압살롬은 그를 불러 자신의 반역을 위해 자신의 모사로 기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히도벨이 반역에 합류하므로 이 상황을 바라보는 우유부단한 사람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전략적 효과를 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 용 : 악한 자의 교활한 지혜로움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풍요란, 욕심과 필요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는 삶. 그 삶의 끝에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소망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멋진 내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 설 교 >
백성의 어리석음
지난 시간에는 반역을 위한 준비 작업에 철저했던 압살롬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압살롬은 반역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부지런함을 보였고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듣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압살롬이 백성들 편에 있음을 주지케 하였고 자신은 공의로 재판을 하는 사람임을 부각시켰으며 겸손과 사랑의 모습까지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압살롬의 행위를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으로 평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을 뿐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의 것이며, 또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압살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목사나 신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압살롬이 드디어 반역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서원을 했으니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거짓된 청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압살롬의 청을 허락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말하고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압살롬의 말에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압살롬의 마음을 좋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다윗을 속인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서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두루 보냅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에게 지시하기를 나팔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사 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고 실제 압살롬은 반역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13절에서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같은 반역은 이방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왕이 폭군이어서 견디다 못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고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반역은 현대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일들을 다들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 모두의 중심에는 최고 지도자라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실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반역을 사회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 역시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탐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존재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반역은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노려다는 도덕적인 비난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의 반역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일단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구출된 민족들이기에 그들의 바탕에는 ‘희생의 피’라고 하는 은혜가 깔려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은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계속 물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피의 은혜를 잊었을 때는 이미 이스라엘다움을 잊어버린 것이고, 이스라엘 내에서 누구라 할지라도 피의 은혜를 잊는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왕을 선택하시고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합니다. 그가 권력을 탐했든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반역을 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기억했다면 다윗 역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왕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다윗에게 반역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망각하고 있던 압살롬에게는 이미 하나님이라는 존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면 ‘내 욕망을 포기한 채 산다면 내 인생은 뭐냐?’라는 반발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비록 은혜를 언급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차원에서의 은혜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은혜를 언급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은혜인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를 잊지 않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것을 말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은혜를 감사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이 성사되는 것을 은혜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완벽한 은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위치를 잊어버림으로서 교회 자체의 욕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여 정당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존재하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11-12절을 보면 “그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아무 뜻도 없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을 따르게 됩니다. 어쨌든 그도 다윗보다는 압살롬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압살롬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압살롬을 신뢰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참여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수준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압살롬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압살롬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의도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압살롬은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의도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로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반역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압살롬을 신뢰하였기에 압살롬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말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은혜를 말하되 은혜가 아닌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은혜라는 말만 강조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결국 그 사기(事機)를 알지 못한 채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을 나와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과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목사라고 해서 그의 말을 무작정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인품이라는 것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착한 일에 대해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품이나 착한 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바른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즉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복음을 알았다는 증거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품이나 착한 일 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비난 받을 인품을 가져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있다면 과연 그에게서 보이는 겉모습이나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라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윤리입니다. 은혜를 알기에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약자라고 해서 업신여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서 살펴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큰 예배당을 짓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말하면서 교회를 성장과 예배당 건축 등을 언급한다면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도 모른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복음이 아닌 길로 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살피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압살롬이 악한자입니까? 선한자입니까? 분명 악한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무작정 그를 따르는 것입니까? 그들 눈에는 압살롬은 왕의 자격이 있는 위대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선함과 그 행위로 인해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의 악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수준에 머무를까 염려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일에 도움을 얻고 있을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에게 허물이 있을 때 그 허물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숫자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교회의 재정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누가 복음을 전하든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에 두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를 살피면 됩니다. 그러면 그의 옳고 그름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께 행함을 강조하고 요구한다면 그의 의도를 의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탐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인품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목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실까요? 바로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제가 은혜를 말할 때마다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은혜다’라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모른 바가 아니니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은 살고 애굽의 군사는 죽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신 덕분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다음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은혜를 잘 아니까 다른 일을 맡기신 적이 있던가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은혜를 잘 안다고 해서 마치 은혜를 완벽히 깨닫고 은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압살롬처럼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는 잘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악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고마움도 잊어버린 채 나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고 그런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모이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뜻도 생각도 없이 그런 말에 동조하고 따르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신자의 위치에 굳건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
압살롬의 쿠테타
사무엘하 15:7-12
이스라엘 나라에 졸지에 왕이 둘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다윗왕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아들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현재 사람들의 호응도가 많은 쪽이 왕이라는 인식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꼭 다윗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다윗만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사람들은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점지해주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힘이 모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평소에 백성들이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다윗은 신자인데 다른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다윗은 성경에 준해서 주어진 왕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에 백성들은 전혀 그런 점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얼굴 돌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들이요 우리가 압살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현실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성경 현실을 벗어난 우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게 되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죄의 지배를 받고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러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인은 남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만의 현실을 따로 갖고 싶어했습니다. 동생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가인의 성질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성질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짜증날 문제입니다. 내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자들이 주변에 있게 되면 결국 내가 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삼키지 아니하면 삼킴을 당하는 구조라고 사람들은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말들을 하지 않습니다.
고집 센 남편이 아내보고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혹은 용서해주세요”라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편의 내부에는 권력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작용하는 현실만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런 권력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죄인의 입장에서 왕으로 삼았고, 당연히 죽을 자의 입장에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왕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고 왕 앞에서 죽어 마땅한 자가 될 때만 그 왕이 우리를 살려주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고 죽을 자라는 조건 하에 참된 현실적 왕과 결합이 됩니다.
다윗은 바로 날때부터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부름받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다윗을 달리 생각한 겁니다. 평소에 백성들의 마음 속에 성경 말씀 휘감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력으로 휘감겨 있다는 증거가 디는 겁니다. 자기 속에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즉 7 귀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누구를 봐도 자기처럼 현실을 그런 식으로 본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간 역사를 그냥 폐기처분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현장 보전하십니다. 과거의 사건이 그대로 후대에서 연속되고 이어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동일산 성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후대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공개하십니다. 그 사건을 그대로 담아서 모든 인류의 몸 안에 작용하는 원리와 능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왕의 시대에서 이러한 원칙이 필히 되풀이 되어 현실 위로 퍼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지배받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서, 혹은 죽어야 될 자로서 간주하는 법을 우리는 태어나면서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교회 내부에 이런 권력자들이 설치댑니다. 여기에 비해서 마태복음 20:25-2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 하에 헤브론에서 자신의 왕됨을 선언하게 됩니다. 권력이란 실상 인간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6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참새나 들풀이 권력에 관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길러주십니다. 그들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길러주시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어줍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인간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질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되는 권력을 맛본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보고 다시 권력이 없는 곳으로 곱게 밀리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을 낳습니다. 하지만 진정 자신이 죄인이며 현재 자신은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함을 아는 자라면 압살롬의 권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의 마음 속에는 온통 성경 말씀으로 칭칭 감겨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서 권력욕을 빼어버리게 하옵소서.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출처: https://crossvillage.tistory.com/239 [십자가마을:티스토리]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
삼하 15:10 /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5장입니다. 사무엘기하 15장 10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두루 보내어 이르되,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 하라, 하니라.
저는 오늘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부귀영화를 원하는 마음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에게 반역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외치는 압살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압살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다르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부귀영화를 원합니다. 남들이 좋은 집에 사는 것을 보면 나도 그런 집에 살고 싶고, 남들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나도 먹고 싶고, 남들이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나도 입고 싶고, 남들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보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십계명의 마지막 항목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는 말씀에 걸리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원하고,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면에서 우리는 꼭 남들을 부러워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꼭 남의 것을 탐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영광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부와 재산, 그리고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하고, 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누구나 원하고 있는 부귀영화를 “왕관”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누구나 빛나는 왕관을 원합니다. 여기 혹시, 나는 아니라고, 나는 더 가난해지고 싶고, 더 못살고 싶고, 더 고생하고 싶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압살롬의 왕관을 향한 갈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빛난 왕관을 얻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왕관을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4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 왕처럼 군림하였도다. 너희가 군림하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배부르고 부유하며 왕처럼 군림하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서신을 쓰면서, 그들이 지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왕국에서 군림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 바란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자신 또한 주님과 함께, 성도들과 함께 군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군림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군림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군림할 것인가, 그 시점에 대하여는 지금이 아니라, 장차 임할 주님의 왕국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8장 17,18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광을 받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황금 길을 밟으며, 찬란한 새 예루살렘 도성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 오늘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완전한 죽음으로 넘겨지는 삶입니다. 내가 완전히 부인되며,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며, 오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만이 사시며 드러나시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완전히 연합하며,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 장차 임할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영광을 원하며, 영원한 부귀영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처럼, 십자가 없는 왕관은 없습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습니다. 낮아짐 없는 높아짐이 없으며, 어두운 밤이 없는 찬란한 아침이 없으며, 죽음 없는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이 땅에서 70년, 80년 동안 누리는 잠시 잠깐의 싸구려 부요함이 아니라,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부요함을 원합니다. 이 땅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는 달성하기 힘들고, 오히려 거짓되게 남을 속이거나, 또는 남을 짓누르고 피해를 주면서 달성해야하는 저질적인 부요함 말고, 정직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고품격의 영원한 부요함을 원합니다.
저는 또 영광을 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눈치를 잘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춰서 겨우 가질 수 있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 새 사라져버릴 그런 천박한 일시적인 영광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원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또 성경 속에 기록되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사 가운데 앞서간 놀라운 믿음의 성도들 앞에서 받을 수 있는, 그리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놀랍고 놀라운 영광을 원합니다. 저는 이러한 영원한 부귀영화를 얻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신실하게 따라갈 때, 반드시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고, 모든 오해와 비방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과 보상을 사모합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늘 우리가 받는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너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 저는 정말 영원한 영광을 얻기 원합니다.
또한 저는 저의 자녀들이 이러한 영광을 얻기를 원하며, 반드시 그 길로 저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가르치는 우리교회의 모든 믿음의 학생들과 자녀들이 이러한 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이 땅에서의 보물과 하늘에서의 보물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기에, 한 가지를 포기하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았든지,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새롭게 열어주셔서, 우리가 마땅히 사모해야 하며, 갈망해야 하는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왕관을 차지하려 한 압살롬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인 다윗 왕이 자신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낮아지며, 자신의 죄를 돌이키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세워주시고, 높여주시고, 자연스럽게 왕좌를 이어받게 될 시간까지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였고, 오히려 반역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힘으로 왕관을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 압살롬의 반역의 시작
그러면 지금부터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4장 25-27절을 보시겠습니다.
25 그러나 온 이스라엘 안에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렇게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더라.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더라.
26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그가 머리털을 깎되 해마다 연말에 깎았더라.) 그가 머리를 깎을 때에 그의 머리털을 달아 보니 왕의 무게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에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태어났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그녀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요즘말로 말하면 꽃미남이었고, 훈남이었습니다. 그의 머릿결이 또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헤어스타일 또한 아주 멋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약 2.2kg정도 나가는 머리털을 이발하였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딸의 이름을 자신의 누이동생의 이름과 똑같이 다말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딸을 볼 때마다, 자신의 누이동생 다말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딸 다말 역시 아빠를 닮아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외모에 대하여는 흠이 없을 정도로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잘생겨서 교만해지느니 차라리 못생겨서 겸손한 것이 낫습니다. 물론 잘생겼는데 겸손하기까지 하다면 더 좋을 것이지만, 흠이 없어서 거만해지느니 차라리 흠이 많아서 낮아지고 주님께 언제나 겸손히 무릎을 꿇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6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이 일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과 자기 앞에 달려갈 자 오십 명을 예비하니라.
2 압살롬이 일찍 일어나 성문 길 옆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분쟁거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도시 출신이냐? 하여 그가 말하기를, 주의 종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의 하나에 속하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들이 선하고 바르다마는 네 말을 들을 사람을 왕께서 임명하지 아니하셨다, 하고
4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어 청원이나 사정이 있는 모든 사람이 내게로 올 때에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5 어떤 사람이라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경의를 표하려 하면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라.
6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온 이스라엘에게 압살롬이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니라.
지금 압살롬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요? 먼저 다윗 왕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만약 자신의 여동생을 위하여 암논을 정의롭게 처벌하여주었더라면, 압살롬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암논을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만, 한 편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이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린 기간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4절 뒷부분에서 압살롬은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면서, 다윗 왕이 실행하지 않았던 정의를 자기가 실행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압살롬의 마음에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컸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놓고는 2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압 장군을 통해 겨우 왕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후계자 자격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이룰 수 있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단순한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도 없이 멋진 외모를 가진 왕의 아들이 자신의 사정에 대하여 편을 들어주고, 또 5절 말씀처럼,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할 때, 얼른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면서 입을 맞추는 아주 친절하고도 따듯한 겉모양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서 떠나고, 압살롬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라는 고린도후서 11장 14절 말씀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압살롬이 자신을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나타낸 것처럼,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정의로운 말과 따듯한 사랑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살인자이며, 백성들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야망을 사랑하는 자이며, 결코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한 반역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의 흠 잡을 곳 없는 용모와 빼어난 말재주와 뛰어난 연기력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정의로운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 따듯한 사랑의 권면을 한다고 해서, 또 때로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을 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춘 압살롬처럼 겸손한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 주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입니다. 우리는 가짜가 되지 말고,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압살롬이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가지고 애통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진짜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암논을 용서하고 다윗도 용서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진짜 겸손한 사람이었다면, 왕이 외면하는 기간 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의 시간을 묵묵히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결국 속이는 자였으며, 교만한 반역자였고, 자신의 유익과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는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떤 이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 우리 자신이 육신 가운데 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모습입니다.
** 사십 년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7-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7 사십 년 뒤에 압살롬이 왕께 이르되, 내가 주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내가 가서 헤브론에서 내 서원을 갚게 하소서.
8 왕의 종이 시리아의 그술에 머물렀을 때에 서원하여 말하기를, 만일 주께서 참으로 나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가시면 내가 주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매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이에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그러나 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두루 보내어 이르되,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 하라, 하니라.
압살롬은 이제 반역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위하여 헤브론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거짓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과 서원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긍휼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처럼 믿음의 모양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의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육신도 성령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고백이나, 믿음의 삶을 흉내 내는 연기자 같은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버리고 포기하며, 참되게 돌이키고, 드리고 섬기면서 진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7절 말씀에서 “사십 년 뒤에”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셨습니까? 네, 잠시 이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전 기간이 30세부터 70세까지 총 40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잠시 사무엘기하 5장 4,5절을 보시겠습니다.
4 다윗이 삼십 세에 통치하기 시작하여 사십 년 동안 통치하되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통치하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였더라.
다윗이 이스라엘 통치한 기간이 총 40년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기하 15장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십 년 뒤에”라는 기간은 압살롬이 반역을 준비한 기간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압살롬이 40년간 반역을 준비해 버리면, 다윗의 통치는 이미 끝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에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다고 판단한 NIV성경역본과 한글개역성경의 편집자들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어성경에 기록된 40년을, 제멋대로 4년이라고 고쳐놓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압살롬이 반역을 4년 동안 준비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여주셨고, 또 보존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도와 성경의 오류를 제거할 필요가 없이, 성경은 그 자체로 오류가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근거가 없는 미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시험이나, 심판이나, 검증이나, 재판이나, 통치의 기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노아의 홍수 때에 사십 일 밤낮으로 비가 내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사십일 동안 시내 산에 머물렀고, 엘리야는 밤낮 사십일을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십일을 금식하셨고, 또 부활하신 이후에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가나안 땅을 탐지한 기간이 사십일이었고,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광야를 돌았던 기간이 사십년이었습니다.
사무엘기상을 열었던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재판한 기간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며 모독하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습니다. 또한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기간도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압살롬은 사십 년 뒤에 반역을 시도하고자 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사십 년은 바로 소년 다윗이 처음 사무엘로부터 기름을 받은 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사울 왕보다는 믿음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전쟁 영웅,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을 더 따르게 된 그 해로부터 사십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와 년도는 반역을 하고자 하는 압살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저버린 다윗 왕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실 때가 되었다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 아히도벨
우리는 또한 이 모든 일에서 압살롬을 도왔던 한 무서운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희생물을 드릴 때에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조언자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도시 곧 길로에서 청하여 오니라. 압살롬과 함께하는 백성이 계속해서 불어났으므로 그 음모가 커졌더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조언자였던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압살롬의 반역 음모에 가담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 아히도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6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당시에 아히도벨이 베푼 조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여쭙는 것과 같았으니 아히도벨의 모든 조언이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아히도벨의 조언과 계략에 대한 평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조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여쭙고 응답을 받는 것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뛰어났는가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삼국지로 말하자면 제갈공명보다 높은 수준의 지략가라고 할 수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사람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7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또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이 밤에 내가 일어나 다윗을 추격하며
2 그가 피곤하고 손이 약할 때에 그를 습격하여 그를 무섭게 하리니 그리하면 그와 함께 있는 온 백성이 도망하리이다. 내가 다윗 왕만 치고
3 온 백성을 왕에게 다시 데려오리니 왕이 찾는 그 사람을 붙잡으면 모두가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니이다. 그리하면 온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매
여기서 아히도벨은 자신이 직접 만 이천 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다윗 왕만 기습으로 치고 빠지겠다고 압살롬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의 모든 전력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는 최상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것은 아히도벨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갈 정도로 적극적으로 다윗 왕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지략가답게 조언을 내고, 작전을 짜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일텐데, 직접 가서 다윗 왕을 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3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마아가 사람의 손자요, 아하스배의 아들인 엘리블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우리는 여기에서 아히도벨의 아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바로 엘리암입니다. 이 이름, 엘리암을 기억하시면서 사무엘기하 11장 3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관해 물어보게 하였더니 한 사람이 이르되, 이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
네, 이제 우리는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구성하여 다윗 왕을 치려하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간음하였던 여인인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죽였던 헷 족속 우리야가 바로 아히도벨의 손주 사위였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집안과 가문에 이러한 비극을 가져온 다윗 왕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아히도벨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다윗은 정말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친구이면서, 스파이 첩자로 압살롬의 편에 붙었던 후새를 통하여 아히도벨의 계략을 막으셨습니다. 후새는 지금 다윗 왕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전사들이며, 심지어 지금은 새끼를 빼앗긴 곰들처럼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만 이천 명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를 모아, 새로운 왕이신 압살롬 왕께서 직접 지휘하실 때, 더욱 완전한 승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다윗 왕에게 소식을 보내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 압살롬의 죽음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무성한 가지들 밑으로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하늘과 땅 사이에 들리고 그 밑에 있던 노새는 가버렸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그의 자랑 중 하나였던 수려한 머리털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의 큰 키와 수려한 머리털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자랑거리였지만, 결국 그것이 그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상수리나무에 꼼짝없이 매달리게 된 그는 요압 장군의 창을 맞고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랑과 교만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
또한 잠언 18장 12절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멸망에 앞서 사람의 마음의 거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
정의사회구현과 사랑의 통치를 외쳤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이 잘생기고 매력 있던, 친절하고 따듯해 보였던 청년 압살롬은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그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오직 겸손하게 주님이 긍휼을 구하였더라면, 자연스럽게 왕의 후계자로서, 차기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결론 - 겸손과 높이심
오늘 우리는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압살롬은 왕관을 원했지만 결국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 왕관은 어쩌면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였고, 그가 반역을 위하여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였던 모든 모습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거짓되고 교만하게 반역을 통헤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베드로전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당장 높아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낮추시고, 영원히 높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삼일 밤낮으로 차가운 돌무덤에 머물러 계신 이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처럼, 승천하신 이후에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무릎이 꿇려지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게 될 그 영광의 왕좌에 앉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낮추시되, 철저히 낮추시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내가 아니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우리를 낮추시고, 더 낮추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자신의 강한 손으로 누르시는 목적은, 우리를 말할 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높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치 요셉이 하루아침에 감옥 밑바닥에서, 온 이집트 제국의 통치자가 된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단숨에 높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르시고 낮추실 때,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눈동자처럼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제가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외친다면, 주님께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우리를 위로하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을 이용한 압살롬의 음모
삼하 15:7-12
압살롬이 사년동안 민심을 모은후에 헤브론으로 가게된다. 다윗왕에게 거짓 이유를 말하며 헤브론으로 가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정탐을 동원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사람에게 나팔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전하게한다. 이스라엘의 고위간부 200명은 아무것도 모르고 압살롬의 청함에 헤브론에 모였으며 압살롬이 음모가 강해짐에따라 압살롬에게 돌아오는 백성 또한 많아진다.
사년만에 압살롬은 무슨 음모를 꾸몄나? 압살롬은 민심을 모으기위해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며 철저하게 준비한것으로 보인다.
압살롬은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떠나는 이유를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이루러 간다고 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한 이유가 무엇일까? 압살롬은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을 아주 잘 알며 다윗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알고있다. 다윗은 여호와를 섬기는일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긍정적이며 절대로 반대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어떤 방법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가? 민심을 동원하는 방법이다. 4년간 백성에게 자신이 재판장이되면 백성의 편이 되겠다는 음모와 계략을 펼쳤다.
압살롬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 지혜로움이 악한 계획에 사용되는것은 매우 무서운일이다. 왜 압살롬의 지혜가 악한것에 사용되었을까? 압살롬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찾아볼수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무서워)하는 모습이 전혀없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복수와 미움과 증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큰 불만이 꽉 차있다. 마음에있는 생각들은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는대 그 가운데 하나님의 filtering 이 없으면 자제하지 못하며 그대로 표현되게된다. 압살롬 마음에 있는 그 악한것들이 행동으로 보여지기 시작한같다.
민심을 이용한 압살롬의 반란의 계획을 다윗은 왜 막지 못했을까? 4년이란 긴 시간을 압살롬의 좋지못한 행실들은 다윗에게 전해졌을것이고 다윗도 알았을텐데… 자신의 아들의 움직임에 다윗은 왜 저지하지 못했을까? 암논사건으로 다윗은 압살롬에 대한 관심을 끊고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압살롬의 대한 사랑과 기대치가 아직도 남아있기에 압살롬의 행동을 방관하였을까?
헤브론으로 모이게한 압살롬의 계획는 무엇일까? 헤브론은 매우 귀중한 의미를 갖고있는 곳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곳이며 왕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는 상징적으로 백성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곳이라 할수있다.
순진한 백성들을 동원해서 반란을 계획하는 압살롬의 모습에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위한 속샘이 보인다. 자신이 계획한 악한일들을 성취하기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과 청함을 받은 고위간직 200명까지 동원시키며 일을 저지르는 압살롬의 철저한 음모가 무섭기만하다.
이 압살롬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려는 것 일까? 지금 너(나)는 압살롬을 나쁜인간으로 보고있겠지… 그리고 저런 인간은 곧 심판을 받을거야 라며 생각하겠지? 라고 하신다. 혹시 나에게는 압살롬처럼 철저하게 계획됬으며 아주 악하지는 않지만 남을 이용하면서 나의 이익 또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마음은 있지않나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겉으로는 도와주며 같은 편인것처럼 행동하며 속으로는 내가 챙길것 챙기려는 나의 모습이 혹시 있지 않나 두렵고 떨린다. 압살롬은 하나님과 백성과 고위간직들을 동원했지만 나는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나의 유익과 목적을 청취하려는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게된다.
계획을 세우며 일들을 처리할때 나의 이익을 얻기위해 하나님을 내세우며 주위에 아는 사람의 이름들을 이용하지 않겠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보시고 주위에 계신분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피해보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
망명하는 다윗
삼하 15:13-37
인심(人心)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다는 사환의 말을 듣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으므로 예루살렘성에서 싸우면 많은 인명(人命)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전략상 도피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이렇게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카이젤은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키우지 말라, 높은 희망은 높은 절망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마음만 믿고 압살롬과 대화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하나님을 의존하여야겠지만 그러나 자녀들과의 교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압살롬의 반심(叛心)은 대화의 부재에 원인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1. 다윗의 조처(13-23절)
압살롬이 반심(叛心)을 품은 것을 안 다윗은 왜 방어하려 하지 않고 피했습니까? 왜 용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해결방법을 취한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채찍이심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순간 다윗은 우리아의 사건을 회상하며 그 죄악 때문에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삼하12:11)라는 말씀대로 올 것이 왔음을 깨닫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죄악에 대한 형벌을 달게 받으려는 복종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싸워서 재화를 조절하거나 대적할 사항이 아님을 느꼈던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싸워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당하지 않게 하려는 지도자로서의 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2) 다윗과 함께 한 자들
압살롬은 말과 병거를 타고 올 때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을 붙들기 위하여 추종자들에게 함께 살고 함께 죽자는 뜻으로 도보로 피난하여 자신을 낮추었습니다.(전10:7) 또 후궁 10명만 남겨두고 권속을 데리고 갔습니다. 사람이라면 언제나 갑작스런 재난에서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10명을 남겨둔 것은 강탈자들이 그들에게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피난길에 백성들은 물론 블레셋 출신 600명이나 되었다고 한 것은 (18절) 유대교의 신봉자들로 다윗의 덕망과 경건성에 감화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블레셋인들의 지도자였던 잇대와 대화(19-22절)
다윗은 쫓기는 자기의 처지를 설명하여 이제라도 네 동포들을 이끌고 돌아가도록 잇대에게 권했습니다. 그것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선의(善意)도 있었겠지만 반면 충성심을 시험해 보고저 하는 일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20절) 한 것은 자기의 고충보다 남의 고통을 더 생각한 다윗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잇대는 결단코 다윗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던, 죽든지 살든지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는 역경 중에서도 우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충의와 사랑의 강도가 최고로 높은 것이 곧 그리스도만을 따르려는 신앙인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나를 살리려 하신 그 사랑에 끌려 그를 사랑하는 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요1서4:9절) 또 악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천민으로 하락한 것을 보고 백성들이 통곡했습니다.(23절) 그들은 다윗이 이스라엘 건설을 위해 어떤 고생을 했고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았기에 도피하는 다윗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울고 말았을 것입니다.
2. 제사장 사독에게 말한 다윗의 요구(24-29절)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시는 곳이었으므로 언약궤의 향방에 민심이 쏠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기를 원했으니 그러면서 그는 환도(還都)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다윗은 언약궤의 안전을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천막으로 끌고 다니며 어지럽히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독에게 성으로 매어 갈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안전이나 번영보다 교회의 안전과 번영을 더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법궤가 성전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환궁하여 왕위에 복직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을 더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서 자신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합니다. 히스기야 왕도 자신의 건강과 회복을 바라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사38:22절참조)
(3) 다윗은 자신의 당면한 불행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알고 매우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26절에서 징계 받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판단대로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압살롬과는 전혀 달리 야심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대체로 이런 심정으로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사독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냄(27-29절)
다윗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가 끝나면 왕위에 다시 복귀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사독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 그곳의 36세를 알려주도록 당부하였습니다.
3. 기드온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올라간 다윗(30-37절)
(1) 다윗은 그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수줍은 얼굴로 슬피 울며 맨발로 죄수처럼 걸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한 괴로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줍니다.
그때의 다윗의 심정이 예레미야 애가 3:1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그의 죄가 항상 그 앞에 있었지만(시51:3) 지금처럼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독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울지 않았는데 그때의 마음 상처가 얼마나 무거운 고통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시38:4) 다윗이 울 때 그의 고통과 슬픔에 감동되어 따르는 모든 백성도 함께 울었습니다.(30절)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사랑의 공명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합니다. 죄인들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함께 우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울때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함께 했었습니다.(대하32:26절 참조)
(2)후새의 도움(31-37절)
다윗 왕에게 충격적인 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모반에 합류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다윗임금의 모사였습니다.(삼하15:12절) 그 정보는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다윗은 아히도벨을 대적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에게 그의 모사를 어리석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31절)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습니다.(32절) 그렇습니다. 기도는 교회의 원수들의 모략을 파괴하는 좋은 무기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왔습니다. 다윗은 후새가 군인으로 다윗을 돕는 것보다는 궁에 들어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도록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협조하도록 투입시켰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서 다윗에게 충성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실패케 하는데 주역을 맡아 소임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