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번째 편지 -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동영상을 보고 나서
봄이 왔습니다. 오늘이 봄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이 봄을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신가요?
저는 겨울의 끄트머리인 지난주, 장례식장을 두 번 다녀왔습니다. 한 분은 외삼촌이셨고, 또 한 분은 친구 아버님이셨습니다. 외삼촌은 팔십 후반, 친구 아버님은 구십 후반까지 사셨습니다.
요즘은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앨범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틀어 줍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5분 남짓 짧은 동영상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그 동영상은 반복되고 있어 앉아있는 동안 계속 눈길이 갔습니다.
저는 두 분의 동영상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 동영상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본인 행사에 관한 사진입니다. 돌 사진, 입학 사진, 결혼사진, 직장 행사 사진, 자녀 결혼사진, 환갑 칠순 팔순 사진 등 일생을 살며 겪었던 주요 행사 사진이 시간 흐름을 따라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가족사진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같이 찍은 사진, 좀 자라서는 형제들과 찍은 사진, 결혼해서는 배우자와 찍은 사진, 자녀와 찍은 사진들이 줄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손주를 안은 사진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우리를 쳐다봅니다.
세 번째는 여행 사진입니다. 사진의 대부분은 이런 사진입니다. 특히 외국의 명승지를 찾아가서 찍은 사진은 멋진 포즈와 함께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사진의 양으로 보나 사진 속의 표정으로 보나 여행 사진이 그의 삶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날짜로 치면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외국을 여행한 날 수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사진만 보고 있으면 그분은 해외여행만 하고 사신 분 같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애썼던 시간들의 사진은 많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직장 시절이 우리 삶의 대부분인데 그에 관한 사진은 왜 적은 것일까요? 물론 대단한 업적을 이룬 분들은 그런 사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은 65세에 은퇴를 하고 수십 년을 더 삽니다. 그동안 그의 카메라 렌즈는 공부나 일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가족과 여행입니다.
저를 돌이켜봐도 검찰에서 일할 때는 행사에 관한 사진이 제법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여행 사진이 주종을 이룹니다. 지금도 공부하고 일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진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진을 찍히고 삽니다. 우리가 스스로 찍히기를 희망하는 사진은 그 사진들 중에 일부입니다. 장례식장 사진 동영상에는 그런 사진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앨범에는 그가 소중하게 여긴 사진만 넣었을 테니까요. 그것이 아날로그이든 디지털이든 모두 <취사> 선택의 과정을 거칩니다.
우리가 <취>한 사진은 개인 행사, 가족, 해외여행 사진이었고, <사>한 사진은 그저 형식적으로 찍힌 사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공부하던 사진, 직장 시절 일하던 사진은 선택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여긴 것이 무엇인지는 이 사진 앨범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지한 사진 보다 밝고 경쾌한 사진들이 많았고, 의미 있는 사진 보다 재미난 사진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의미 있었던 시절, 또 그 의미를 추구했던 시절 사진들은 왜 선택받지 못했을까요? 그 시절은 우리의 재미난 삶을 만들기 위한 불쏘시개에 불과하였을까요? 그 시절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아니었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전에는 의미 있는 삶 자체를 장작불이라 생각했지만 요즘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요일 저녁 동네 친구 몇몇과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두 인생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 인생은 오십 중반에 꽤 재산을 모으고 은퇴한 다음 여행만 하고 산다고 했습니다. 석 달에 두 번은 해외여행을 하는 것 같고, 한번 떠나면 두 주는 머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인생은 오십 중반에 병원을 접고 재산을 정리한 다음 선교 활동을 떠난 치과 의사의 삶이었습니다. 어느 인생이 옳은지 더 나은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들이 선택한 인생일 뿐입니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 2시까지 유튜브 알고리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많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중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어 10번 이상을 들은 곡이 있습니다.
싱어게인 시즌 3에 나온 25호 가수 강성희가 부른 임재범의 <살아야지>입니다. 처음 들은 노래인데 가사말이 이 밤 저의 심정과 너무도 맞닿아 있습니다.
<산다는 건 참 고단한 일이지/ 지치고 지쳐서 걸을 수 없으니/ 어디쯤인지 무엇을 찾는지/ 헤매고 헤매다 어딜 가려는지>
늘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언제는 찾은 것 같아 그 길로 달음박질합니다. 그러나 막상 가보면 막다른 길이거나 낭떠러지입니다. 헤매고 헤맵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꿈은 버리고 두발은 딱 붙이고/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면 되는데>
꿈을 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대신 두발은 딱 붙이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숨지 말고 세상과 어울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반항심이 생깁니다.
<가끔씩 그리운 내 진짜 인생이/ 아프고 아파서 참을 수가 없는 나/ 살아야지 삶이 다 그렇지/ 춥고 아프고 위태로운 거지>
제 마음을 읽었나 봅니다. 삶이 따뜻하고 건강하고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또 진짜 인생은 무엇일까요? 노래는 저를 이렇게 위로하며 끝이 납니다.
<날개 못 펴고 접어진 내 인생이/ 서럽고 서러워 자꾸 화가 나는 나/ 살아야지 삶이 다 그렇지/ 작고 외롭고 흔들리는 거지>
이제 날개도 반쯤은 부러져 아무리 애를 써도 펴지지 않고 그런 내가 이유 없이 서럽고 화가 나지만 살아야 합니다. 겨울 끝자락의 밤은 이리 청승맞지만 봄날이 밝아 오면 작고 외롭고 흔들리더라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고 해맑게 웃으며 삶을 반가이 맞이할 것입니다.
봄이니까요.
여러분의 봄은 여러분의 인생에 무어라 속삭이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3.18.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