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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수로(水路), 열혈(熱穴)의 의미는
(一)
"어떻게 지세만 보고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곽소연은 서재에서 동기감응을 직접 시연해 봤음에도 묻지 않
을 수 없었다.
반여량은 될 수 있는 대로 곽소연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
다. 갈등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끈끈한 열기를 느
꼈기 때문이다. 그토록 받아보고 싶었던 눈길. 만약 한한이 이
런 눈으로 응시해 주었다면.
"사람 말이 들리지 않아요?"
곽소연은 어느새 옛날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갓 잡아 올린 잉
어처럼 팔딱거렸다.
"감여를 너무 어렵게 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요."
반여량은 어둑해지는 바깥 경치를 감상하며 입을 열었다.
"흔히들 양택을 지을 때, 집 뒤에 산이 있으면 좋다하여 그런
지형을 찾소. 산이 없는 곳이라면 가산(假山)이라도 만들지.
하지만 어느산이나 다 좋은 것은 아니오. 산이 집을 들여다보
는 형상, 봉우리가 뾰족한, 산 경사가 급한 산은 좋지 않소.
이유를 생각해 보시오."
"얼굴 좀 돌리고 말할 수 없어요?"
반여량의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머리는 누런 무명천으로 질끈 묶고, 옷은 서민들이 여름에 즐
겨 입는 삼베옷이었다. 허리에는 요대(腰帶) 대신에 짚으로 엮
어 만든 새끼줄. 더군다나 신발을 신지 않고 살아 딱딱한 굳은
살로 가득해진 두 발은 흙먼지로 제 살색을 잃어 버렸다.
곽소연이 생각하는 남자는 이런 남자가 아니었다. 깨끗하고,
미남이고, 학식 높고... 반여량은 그런 사내와는 닮은 구석이
한군데도 없었다. 곽가장에서 처음 됐을 때는 그래도 사람 같
았는데. 여인 하나가 곁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토록 큰 것일
까?
"휴우! 좋아요. 그 이유가 뭐죠?"
"..."
"모른다고 했잖아요!"
곽소연은 소리를 꽥 하니 질렀다. 하지만 그 음성이 무척이나
싱그럽고 맑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
다.
"산이 집을 들여다보는 형상은... 쉽게 생각하시오. 남이 내
집을 들여다본다."
"기분 나쁘겠군요."
"그래서 그런 곳에 지은 집은 도둑이 많이 든다고 했소."
"푸훗! 그럴 듯하네요. 그럼 봉우리가 뾰족한 산은요?"
"불안하지, 특히 밤이 되면 더욱 마음이 불안해지지. 거기에
내[川]까지 있어 물소리가 들린다..."
"그렇겠군요."
"경사가 완만하지 못한 산은 언제라도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이오. 산사태가 일어나면 요행히 목숨을 잃지 않는다 할지라
도 그 동안 모아놓은 모든 재산이 함몰되지. 그래서 그런 곳에
지은 집은 재산이 늘지 않는다고 했소. 감여란 모든 것이 일상
생활에서 시작되었소. 지세를 보고 이치를 따지면 모든 것이
쉽소."
반여량의 말은 순풍에 돛단 듯 부드러웠다.
하지만 산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금 반여량이 하고 있는 말은 감여에 통달하고 달관한 사람들
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쉽게 생각하라.
어떻게 쉽겠는가. 산기슭에 있는 사람에게 천하를 논하라는 것
과 무엇이 다를까. 천하를 말하려면 그것을 볼 만한 위치에 서
야 한다.
거봉(巨峰)에 올라 세상을 눈 아래 굽어보는 사람만이 어쩌고
저쩌고 말할 수 있다.
감여를 쉽게 풀이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산귀도 말해줄 수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이제 이십 중반을
넘어선 젊은이가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놀라워서였
다. 아무리 동기감응을 익혔다 해도 감여를 보는 눈이 이 정도
에 이를 줄이야.
감여는 직관(直觀)과 경험이 고루 갖추어져야 대성한다.
반여량처럼 뛰어난 직관을 가진 젊은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거기에 경험까지 가미한 감여가는 손꼽을 만큼
적었다.
산귀가 동기감응을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었다. 동기감응은 직관이었다. 직관만으로 과연 산세
와 방위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반여량의 직관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고, 산
세를 보는 안목은 평생을 감여로 살아 온 자신을 능가했다. 단
지 산세의 옆모습과 그 앞에 흐르는 강만을 보고 반도수를 알
아맞히지 않았는가. 일 단면을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논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적한 바가 틀
렸다면.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간답니다."
함상이 어눌한 음성으로 말해왔다.
그는 청붕성을 나온 다음부터 거의 말을 잊고 살았다.
진육과 석수로부터 용수의 일을 전해듣고 난 다음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까지 했다.
"나는 여동생을 만났어."
"여동생이 있었나?"
"여동생? 동생이 정대원이야?"
함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심각 무인들이 용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장십랑의 모
든 것도 알고 있을 터. 죽었으리라.
'지금까지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원수...'
함상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진육이나 석수에
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눈빛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진육과 석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윤명은 청붕분타의 사건이 있어서인지 건창성을 십 리 앞두고
조용한 마을을 찾아들었다.
고즈넉한 마을은 저녁밥을 짓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
고, 나무 타는 냄새를 향기롭게 풍겨 냈다.
"추, 추풍이라는 작호가 마음에 드나? 그래, 그 감응인가 뭔가
에 여기는 안전하다고 느껴지나?"
윤명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점
을 본인 스스로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지만.
"그건 내 일이 아닌 것 같소."
"뭐? 푸훗! 푸하하핫!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건방진 놈."
반여량은 윤명의 성격을 파악했다. 그는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그런 사람이었다.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청붕성을 벗어나면서부터. 그는 마
치 일심각 무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부인( 因:포로)이나
되는 듯 하찮게 취급했다.
반여량은 쓸데없는 일에 심기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
버렸다.
순간, 윤명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하하! 언젠가 네 놈 버릇을 고쳐줄 날이 있을 게다. 겨우
땅이나 봐주고 다니는 놈이 천방지축 설쳐대기는..."
윤명은 말고삐를 확 낚아채며 말을 몰아 갔다.
비수당 무인들의 고초가 가장 심했다.
그들은 마을에 도착해서도 편한 거처를 얻지 못하고 마을 외곽
을 둥글게 에워쌌다.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를 흑의인들의 급
습에 대응하고자 함이었다.
마을 공터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는 일심각 무인
들이 차지했다. 마을에서 단 하나뿐인 공동우물과도 거리가 가
장 가까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오게나. 사람 사는 마을에서까지 한뎃잠을 잔대서야 말이
되는가. 하룻밤쯤 방을 빌려줄 사람이 있을 거네."
산귀는 마을을 한번 쑥 둘러보고 그 중 가장 큼직한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방(西方)에 구릉이 있다. 태산(兌山:서방45도 이내에 산지,
언덕 등이 있을 때 쓰는 풍수용어). 태택(兌宅)이군.'
반여량은 습관대로 저택을 훑어보며 산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북쪽에 나무가 있다. 서쪽으로 뻗은 작은 길은 인위적으로 없
앤 듯하며, 역시 그쪽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도 베어 버렸다.
감여가의 도움을 받은 저택이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그런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봉창이 난 방향을 보니 채광(採光)이 약간 밝은 정도... 이것
이 태산을 이고 사는 집의 채광법이다. 빛이 약간 밝으면 거주
하는 사람들이 화합하고 단란하다. 그러나 너무 밝으면 집안
실권을 아내에게 빼앗겨 버린다.
"어서 오십시오."
오십 줄에 접어든 주인 내외는 극진하게 마중했다.
"쉿! 어서 들어가세. 눈이 많아."
산귀가 한 눈을 찔끔 감아 보였다.
"허허! 고맙습니다. 방을 빌려주신다니... 그럼 하룻밤 신세지
겠습니다. 일행이 좀 많은데..."
"마음놓고 쉬시지요. 다행히 방이 여러 개 있습니다."
주인장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햇볕에 검게 그을려
건강해 보였다. 그것뿐이면 평범한 농군으로 치부하고 말았으
리라. 한쪽 귀퉁이에 놓인 죽장(竹杖). 분명히 감여가들이 산
행을 할 때 짚고다니는 죽장이었다.
'원방파 감여가...'
말이 쉬워 일만여 명이지 강서성 전역에 펼쳐 있는 그들의 눈
과 귀는 확실히 놀라웠다.
"낯선 사람들이 서해(西海) 곳곳에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부
는 배도 매입(買入)하고 있는 것이... 강을 봉쇄하는 모양입니
다."
삼공과 능공십자, 그리고 산귀와 반여량은 헌원대(軒轅大)라고
이름을 밝힌 저택 주인과 더불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내용
을 주고 받았다. 어차피 이제는 모든 정보를 산귀에게 의존해
야 하는 이상 알고 있는 정보는 모두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곽소연만은 대화에서 제외시켰다.
그녀는 이번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일심각주 윤명
과는 저부, 처제 사이이지 않은가.
헌원대의 부인이 곽소연을 데리고 연못 구경을 나간 사이 재빨
리 주고받은 말들이었다.
"음...! 구궁산을 가봐야 안다 이 말이지. 추풍, 자네가 읽은
그 악마적인 기운이라는 것. 만약 사람이 그런 기운을 지녔다
면... 어떤가? 우리 중 누가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학구가 한 말이었다.
"후후! 말도 안 되죠. 만약 사람이 그런 기운을 지녔다면...
미안하지만 삼공 전부가 연수해도 상대가 안 됩니다."
"일심각주는?"
반여량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백부하, 청붕분타 뒷산에 나타났던 무인보다 세 배는 강합니
다."
"제길!"
어지간해서는 낯빛을 고치지 않는 학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
들었다. 그와 비수당은 제일 먼저 검을 부딪쳐야 하지 않는가.
"헌원대, 구공산에 모인 흑의인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삼백여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까지 죽인 흑의인들을 전부 합친 숫자와 비슷했다. 어디서
혈조수의 살수 비기를 익힌 살귀들이 그렇게 많이 출몰한단 말
인가.
삼백 명 대 오십여 명, 화약을 지고 섶으로 뛰어드는 격이었
다.
"절망하기는 이릅니다."
함상이 말했다.
그는 누이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말만 간략하게 토해 놓고
는 깊은 침묵을 지킨 채 대화를 듣기만 했다.
"곽 소저... 장주가 자신의 막내딸을 사지에 몰아넣을 리 없
죠. 분명히 장주에게 또 다른 복안이 있습니다. 비수당 무인
이십여 명과 일심각 무인 삼십 명만으로 그들을 치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공격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그
들이 혈조수의 후인이란 사실은 벌써 장주의 귀에 들어갔을 것
이네."
"그렇겠죠."
진육이 대답했다.
"장주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하라고는 하지 않겠지. 나는
그렇다 치세. 원방파의 정보력을 무력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소리 소문 없이 혈조수의 후인들을 제거한다? 그런 일을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 좋네. 그건 그렇다 치세. 하지
만 정대의 눈과 귀는 왜 막아 버리는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
을 것이네."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모든 의견이 통합된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
리에 모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할 습격을 계속 받으면서 음기를 따라가는 일뿐이
었다.
"넣어둬."
반여량은 진육이 내미는 가죽주머니를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안에는 쇠붙이가 들어있는지 찰랑거리는 소리도 들
렸다.
"천광탄과 배류시(背柳矢)라는 암기야. 위급한 경우에 사용
해."
"하하! 괜찮습니다. 암기는 사용할 줄도 모르고, 사용하고 싶
은 생각도..."
"고집 부리지마. 천광탄을 쏘아 올리는 법은 워낙 복잡해서 하
루 아침에 배울 수 없다. 또 너는 곽가장 식솔이 아니니 그런
용도로 사용해서도 안 돼. 내가 이것을 준 것은 몸이나 지키라
는 의도야. 천광탄은 신호용이지만 근거리에서 사람을 겨냥하
고 터트리면 크게 다친다. 배류시는 내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사용하려고 아껴 두었던 마지막 호신기병(護身兵器).
대롱을 꺼내면 손잡이에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을 게다. 하나를
누를 때마다 우모침 한 무더기가 살포된다. 사람이 날리는 것
보다 배는 빨라. 하지만 단 세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
"그런 것이라면 더욱..."
"혹, 살아남는다면... 다시는 무림 일에 끼여들지 마라."
진육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반여량이 처음으로 만진 병기요, 암기였다.
"물도 산처럼 잘 아는가?"
"강서성에는 유독 수룡(水龍)이 많습니다. 사부님을 따라 여러
곳을 다녀봤죠."
"그럼 서하는 어떤가? 서하에서도 습격이 있을 것 같은가?"
"건창에서부터 백오십 리가 문제입니다. 수로(水路)도 넓고 흐
름이 완만하여 급습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죠. 그곳만 벗어나면
태평산을 탈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될 겁니다."
백오십 리라고 해봐야 육지로는 이틀 거리지만 수로에서는 하
루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흑의인들이 범선을 매입했다니 수전
(水戰)이 벌어질 건 자명하고."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허허허! 이 나이만큼 살아보면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네. 다만 할 일이 남아서..."
산귀는 근심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처음 볼 때는 그냥 문자깨나 아는 유생(儒生)처럼 보이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경륜에 감탄을 터
트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하! 아직도 할 일이 남았습니까?"
"남았지. 자네가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네. 전에도 말했지만 나
는 이번 여행을 따라 올 때, 동기감응 감여의 허점을 파악하고
싶었네. 하지만 이제는 다르네. 원방 감여에 동기감응을 접목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라
네."
"글쎄요..."
"원방 감여의 산법(算法)은 고도의 정밀성을 지녔다네. 동기감
응의 요체를 풀 수만 있다면 가능할 텐데."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네. 동기감응은 익힌 사람마저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이 많으니까."
"많이 아셨군요."
"형체만 잡았을 뿐이지."
산귀는 감파의 총수답게 감여를 보는 눈이 색달라 어느 정도
깊숙이 깨달은 것 같았다.
"우리 둘만 있으니까 편하게 말할래. 괜찮지?"
밤늦게 찾아온 곽소연은 다짜고짜 하대말로 말문을 열었다.
"고민 많이 했어.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물론 지금도 한한이
란 여자밖에 관심 없다는 것 잘 알아. 정말 예뻤어. 같은 여자
가 봐도 감탄할 만큼. 나, 노력할 거야. 해도 돼?"
"큰언니가 미쳤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소."
"싫어.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그런 말밖에 못하는 거야? 사
람 마음을 그렇게 몰라?"
"나는 올해 스물한 살. 혼인해야 할 나이야. 곽가장의 여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부와 권력이 보장되거든. 아무 의미도
없지? 그럴 거야. 나도 그런 사람들은 싫더라. 순수하게 나만
사랑하는 사내를 만나고 싶어."
"곽 소저."
"그냥 소연이라고 부르면 안 돼?"
"감여가는 부평초처럼 떠도는 사람들이오. 한곳에 안주하지를
못하지."
"안 하면 되잖아. 그까짓 감여... 미안 감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단지 내 말은... 음...! 우리가 평생 먹고 살 것은 아
버님이 장만해 주실 거야. 우리는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잖
아."
"소저, 밤이 늦었소."
곽소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반여량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희망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 쉽게 말하는 것 아냐."
"호의는 고맙소. 하지만 내게는 오직 한 여인뿐이오."
"호호호...! 이미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여자?"
"곽 소저!"
곽소연은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사슴처럼 커다랗고 순박한
눈가에는 맑은 이슬까지 맺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는 마
음의 결심을 굳혔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웃옷 매듭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소저!"
반여량은 깜짝 늘라 곽소연의 팔목을 황망히 움켜잡았다.
그 날, 자신의 앞에서 스스럼없이 목욕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럴 것이다. 곽가장이라는 울 안에서만
지낸 곽소연은 자신같이 이색적인 사내에게 흥미를 느꼈으리
라.
일순간이다.
냉정을 회복하면, 아니 이번 여행만 끝나면 언제 만났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히 잊게 될 게다.
한때의 불장난, 사랑이란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
니지 않는가.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내면서 정을 쌓고, 잘잘못을
모두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이 생겼을 때 사랑한다 말하는 것
이 아닌가.
반여량은 자신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한한과 같이 지낸 세월이 많았기에, 첫 느낌이
너무 강렬하여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반공!"
곽소연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와락 껴안아왔다.
이것 또한 반여량이 예상했던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얼떨결에
곽소연을 안아 버린 형상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그가 여인을 안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흑!"
곽소연은 무엇이 서러운지 울음부터 터뜨렸다.
"소, 소저. 제발..."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있을게."
봄품 냄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봄풀처럼 향기로운 내음이 흘
러나와 코를 간질였다. 구름이다. 구름처럼 포근한 가슴... 살
포시 심장을 압박했다.
한참 동안을 안겨 있던 곽소연은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나, 우습지?"
반여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마 그녀의 가슴에 모진 못질
을 할수가 없었다.
"괜찮아. 기다리지 뭐. 이 일 때문에 일부러 멀리하지만 마."
곽소연은 품에서 빠져나와 눈물로 얼룩진 볼을 훔쳤다.
'한한...'
반여량은 지겹게도 한한이 또 떠올랐다. 지금 눈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이 있건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였다.
새초롬한 얼굴이 아닌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그 얼굴은 반여
량이 보았던 어떤 얼굴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한한의...
* * *
총 길이 일만 팔천구백 리의 장강(長江).
사하는 장강의 지류(支流)에 불과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
을 만큼 넓게 펼쳐진 강폭을 보다 보면 마치 강이 아니라 바다
를 보는 듯했다.
물살은 잔잔했다. 약간이라도 바람이 불면 물살이 강안에 부딪
히며 일구어낸 물보라로 인해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다는 곳이
지만, 오늘은 흐드러지게 늘어진 수양버들이 선명히 보였다.
날씨도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해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
었다. 배를 타기에는 아주 이상적인 날씨였다.
반여량 일행은 진시정(辰時正)이 되어서야 건창성 포구(浦口)
에 당도했다.
어쩐 일인지 윤명은 서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기도 했고, 달리 보면 수려한 풍관을
감상하는 듯도 했다.
건창분타주가 수하를 대동하고 포구에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그는 이미 범선 한 척과 소선 다섯 척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
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힘으로만 장정
서넛을 몰아붙일 정도로 기력이 왕성해 보였다.
"건창분타주 진중(陳中)입니다."
윤명은 흐트러짐이 전혀 없는 진중한 예절을 받았지만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그쳤다.
"배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내해."
"존명!"
진중은 불쾌한 낯빛 한 번 띠지 않고 몸을 돌려 강가에 늘어서
있는 범선으로 걸어갔다.
"승선하십시오."
이번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윤명은 거만하게 찬웃음을 보내고는 범선에 걸쳐진 교각(橋脚)
을 걸어 올라갔다.
소선은 비수당 무인들 것이었다. 사공도 없었다. 대신 소선 뒷
자리에는 활과 화살이 그득했다. 작지만 빠르기는 범선의 두
배. 혹여 있을 기습에 대비한 자구책(自救策)이었다.
비수당 무인들은 신속하게 승선했다. 수전(水戰)이라면 이미
혈육로에서 터득한 바 있지 않은가. 중원에서 벌어지는 싸움
중 온갖 상황을 가정한 혈육로 수전에서 겪은 난관(難關)만 모
두 일흔네 가지 였지 않은가.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범선이 닻을 올렸다.
이미 소선은 멀리 강심(江心)에 나가 둥글게 포진(布陣)한 후
였다.
"이상한데? 왜 아무 기척도 없지?"
진육이 뚫어지게 사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후후! 기다려지나?"
석수 역시 사방을 예의 주시하며 진육의 말을 받았다.
"올 것이면 빨리 오는 게 낫지."
"그러지마. 학구가 불쌍하잖아."
"내 생각은 달라. 이번에 만약 학구가 살아 돌아간다면 그는
거인이 될 거야. 절대 꺾이지 않는 거인."
이번에 말한 사람은 함상이었다.
그는 뱃전에 주저앉아 묵묵히 도해(圖解)를 그렸다. 남창부에
서부터 지금까지의 길, 격전이 일어난 지역, 또 대주와 누이동
생이 죽은 청붕성, 모든 경로를 점검해 나갔다.
누구도 무엇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환제갈... 살아 돌아온 공명이 그런 일을 할 때는 모종의 생각
이 있어서일 테니까.
"돛을 내려라!"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완만하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
는 중이었다. 반여량이 예상했던 일백오십 리. 그 안에서는 어
떠한 기습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이상한데? 추풍이 틀릴 때도 있나?"
"당연하지."
함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도해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감여가야 무인이 아니란 말이지. 추풍이 말한 기습 위치
는 감여가로서 본 것. 육지에서라면 몰라도 물에서는... 아마
능공십자도 나와 같은 생각일걸? 그는 혈육로를 거쳤으니까.그
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어디가 기습하기 가장 좋은지."
"섦! 그런가?"
석수는 일부러 어깨를 추스르며 우스운 표정을 지었다.
함상의 안색이 너무 경직된 까닭이었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삼환진의 머리를 맡길 만큼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자가 부동심
(不動心)을 잃었다는 것은 중요했다. 그러나 함상은 여전히 도
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우르릉...! 꾸릉!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거센 울림이 강안(江岸) 절벽 위에서
울려나왔다. 범선이 막 급류로 진입할 때였다. 양쪽 절벽이 이
십 리에 걸쳐 이어져 있으며, 그 절경이 무척 빼어나다 하여
이삼협(吏三峽)이라 부르는 곳.
"제길! 바위닷!"
진육이 대경실색하여 절벽 위로 화살을 겨눴다. 그러나 위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을 새까맣게 메
운 바윗덩어리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모습만 가득했다.
풍덩! 쏴아악...! 풍덩!
절벽 위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바윗덩어리는 급류에서도 흔들림
이 없다는 범선조차 일격에 박살을 낼 만큼 컸다. 하물며 소선
은 바위가 강에 떨어지며 퍼트린 파랑(波浪)만으로도 휘청거렸
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건창분타주 진중이 고른 사공들은 하
나같이 사하에서만 잔뼈가 굵은 뱃사람 중 뱃사람이라는 것.
"이 새끼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사공들은 느닷없는 바위 공세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지만 노련
한 사공들답게 노를 놓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여지없이 급류
에 휩쓸려 절벽에 부딪히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꽈아아아...!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급류는 더욱 급해졌다. 넓은 강물이
좁은 협곡으로 밀려들면서 형성해 낸 급류. 하물며 지금은 급
류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저, 저것!"
석수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토해냈다.
진로(進路)가 막혔다.
배가 나아가는 앞길에는 커다란 쇠줄이 협곡을 가로질러 세워
져 있었다. 앞만 아니라 뒤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쳐 올 때는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쇠줄에 퇴로마
저 차단당했다.
"배가 견뎌낼까?"
"미친놈! 견뎌낼 것 같으면 뭐하러 고생하며 설치하냐?"
툭 쏘아붙였지만 진육 역시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꼼짝없이 함정에 걸리고 말았다.
'일심각주는...?'
황급히 일심각주가 있는 곳을 돌아본 진육은 너무 어이없어 다
급함조차 잊어 버리고 말았다.
윤명, 그는 이토록 위급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며 술맛을 음미하는 듯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바윗
덩이도, 배의 진로와 퇴로를 가로막은 쇠줄도 아예 보지 못한
듯했다.
'조그만 놈이 배포 하나는...'
진육은 미워하는 사람이지만 진정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쏴아아아...!
소선 한 척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쏜살같이 쇠줄에 부딪혀갔
다.
그리고,
퍼어엉!
소선은 쇠줄에 부딪힌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혀 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 소선에 타고 있던 비수당 무인 다섯 명은 일
제히 허공으로 날아 쇠줄을 움켜잡았다.
그들의 머리까지 꿀꺽 삼켜 버리는 급류.
비수당 무인들은 각기 병장기를 꺼내들고 한 곳을 집중적으로
강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른 팔목만한 쇠줄이 끊어지겠는
가.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일 뿐 아니라 목숨까지 버리는 미련
한 짓이었다.
나머지 소선들은 떨어지는 바윗덩이를 피하면서 대기 중이었으
나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족히 반 장은 솟구치는 것이 금방이
라도 전복 될 것 같았다.
범선을 모는 사공들은 솜씨가 비상했다.
그들은 급류를 헤치며 한 치 한 치 앞으로 나아갔다. 설사 앞
에 지옥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은 진퇴양난
(進退兩難),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저, 저것! 부딪친다! 피햇!"
진육이 고함을 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아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없는 범선은 힘껏 쇠줄과 부딪치며
한차례 거센 요동을 쳤다. 그런데, 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
어졌다.
범선마저 전복시켜 버릴 것 같던 굵은 쇠줄이 힘없이 끊겨져
나가는게 아닌가. 그렇다. 비수당 무인들은 약간의 균열을 바
란 것이다.
쇠줄은 그들의 뜻대로 균열이 갔고, 물에 밀리는 힘과 범선이
나아가는 힘이 충돌하며 생긴 또 다른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범선과 쇠줄이 부딪치며 만들어낸 파장 속에 무인
다섯 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을 잘 아는 사람들이군."
사공 중 누군가 중얼거린 소리였다.
꾸우우욱...!
비수당 무인을 삼켜 버린 강물은 여전히 거세게 흘렀다.
쉬익! 쉬이익!
화살이 벌떼처럼 날아가고 날아왔다.
이번에는 정면 승부였다.
보기만 해도 지겨운 흑의인들이 다섯 명씩 소선 십여 척에 나
눠타고 급류를 따라 떠내려왔다.
이제 비수당의 남은 인원은 열아홉 명뿐. 그들만으로 흑의인
오십여 명과 싸우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각주, 비수당의 전멸을 바라시오?"
진육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고함질렀다.
묵묵부답.
윤명은 빙그레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건배
(乾杯)? 이거 미친놈 아닌가. 아무리 평소에 으르렁거리던 앙
숙 관계라해도 같은 곽가장 무인들인데.
쉬익!
진육은 윤명에게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을 읽었다.
일심각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흑의인 오십 명은 오로지 비수당 혼자만의 힘으로 막아내야 한
다.
그는 신형을 날려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물
속에 잠기기 직전, 배에서 가지고 나온 널빤지를 던져 발판을
만든 그는 오른발로 가볍게 찍어차며 재차 날아올랐다.
그가 내려선 곳은 능공십자의 소선.
학구는 눈이 시뻘개져 연신 화살을 날리는 중이었다.
"뭐하러 왔어?"
"그런 소리 마라. 우리는 모두 곽가장 식솔이야."
"미친놈!"
학구는 이렇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감정이나 속셈이 묻은
말은 여간해서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지금 얼마나 곤경에 처
했으면 이런 말까지 흘려낼까.
진육은 울컥 가슴이 미어졌다.
"어떻게 뚫을 거야?"
"방법이 없어. 범선을 보호하는 게 목적인 이상... 우리는 죽
는다. 진육, 생각은 고맙다만 돌아가라. 괜한 개죽음 당하지
말고."
"미친놈. 돌아가려면 오지도 않았다."
진육은 되는대로 활 하나를 집어들고 살을 메겼다.
이제 소선과 소선 간의 간격은 서로의 용모까지 알아볼 수 있
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흑의인들은 차분했다. 검을 뽑아들고
뚫어지게 이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노려보는 사람은 각각 달랐
다. 그들은 이미 상대를 정했고, 전처럼 동귀어진의 살검을 휘
둘러 오리라.
"봐라. 살은 이렇게 날리는 거야."
쉬익!
진육의 손에서 화살이 날았다.
그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화살을 날려 버림과 동시에 다
른 살을 집어들고 재차 쏘았다. 탁탁탁...! 그렇게 네 번. 두
번째 화살까지 쳐낸 흑의인은 세 번째와 네 번째 화살을 쳐내
지 못하고 소선 한귀퉁이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눈과 가슴
에는 화살이 깊숙이 박혀 부르르 떨렸다.
"네 놈이 암기의 달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좋은 솜씨. 하
지만 비수당 무공도 만만치 않아."
학구는 화살 두 대를 한 번에 메겨서 날렸다.
쉬익! 쉬익!
번개처럼 날아가는 화살.
흑의인이 화살 중간어림을 검으로 베어냈지만 검력(劍力)을 무
시하고 짓쳐들어간 화살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진육이 쾌(快)를 선보였다면, 학구는 중(重)을 선보였다.
쾌, 환, 중. 곽가장 삼혼검법의 진수를 이들은 완벽히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무공이 전보다 진일보 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길!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진육이 씩 웃으며 다시 살을 메겼다.
"곽가장을 떠나오기 전에 당주님과 비무를 했지."
"혈향봉님과? 그래서?"
쉬익! 탁탁! 쉬익... 탁!
"졌어.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곤 했
어. 그래서 깨달은 건데... 나는 너무 쾌검에 치중했어. 미풍
(微風)인 셈이지. 아무리 빨라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무거움을 싣기 시작했군."
"그래. 나는 이제 강풍(强風)이야!"
쉬익! 탁탁탁!
그들은 대화를 더 나누지 못했다.
학구가 마지막 화살을 날려 흑의인의 머리를 부순 것이 끝이었
다. 이미 코와 코가 부딪칠 만큼 가까이 머리를 맞댄 소선들은
바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차앗!"
"타앗!"
비수당과 흑의인은 일제히 상대를 향해 날아올랐다.
"나 같으면 두어 명쯤 물 속으로 공격시키겠어."
"허허! 물 속으로 말인가? 이런 급류 속을?"
"자맥질에 능한 사람 두어 명이면 뱃전에 구멍을 뚫는 것은 일
도 아니죠."
반여량은 격전을 바라보며 감여와 무공이 틀리다는 것을 절감
했다.
이런 곳에서 기습을 하다니. 흑의인들이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지형까지 선택할 줄은 미처 몰랐
다.
"무인들에게는 자맥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 수공(水功)이라
한다. 수공의 달인들. 살수들이 꼭 익혀야 할 살수비기 중 하
나지."
석수였다.
그는 반여량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황급히
극도를 움켜잡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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