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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복건성(福建省) 경산도(京山島)는 어족(魚族)이 풍부한 섬이
다.
사내들은 조상의 기질을 이어받아 게을렀고, 거칠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반면에 여인들은 고단한 일과를 숙명처럼 받아들였
다.
자맥질을 해서 해초(海草)를 따고, 조개를 잡고, 조금 풍족하
게 산다는 집에서는 농사일까지... 모두 여인네 차지였다. 섬
안에서 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은 여인이 도맡아 했다.
사내들은 배를 타고 나갔다.
섬 부근에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있지만 철을 잘 만난 경우로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들은 거친 폭풍우와 싸워가며 멀리 대
만해협(臺滿海峽)까지 나가 고기를 잡아들였다.
해왕제(海王祭)를 지내는 날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 좋았다.
"언제 먹는 거야?"
"쉿!"
"언제 먹는 거냐구?"
얼굴 가득히 창칼처럼 뻣뻣한 털로 뒤덮인 아버지는 무서운 눈
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언제나 온화하
시던 아버지도 해왕제를 지내는 기간 동안은 다시없는 폭군으
로 군림했다.
허락 없이 음식에 손을 대면 사흘 밤낮 동안 음침한 방에 갇혀
물 한모금 먹지 못한다. 열 살 때 경험했다. 제단에 손을 대면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은 다음 바닷가에 내팽개쳐진다. 열한 살
때 겪어보았다. 그럴 때면 그렇게 다정하던 이웃 사람들도 냉
랭한 시선을 던진다.
햇살이 따가운 바닷가, 맞아서 터진 상처에 짠물이 배어들고,
입술은 바짝 타들어간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
지 못하리라. 행여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이라도 먹는 날
에는...
삼 일을 그렇게 보내면 강인하다는 섬아이들도 거의 대부분 혼
절하고 만다. 그리고 그 중 절반은 깨어나지 못하고,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뗏목에 몸을 실어야 한다.
바다로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뗏목.
흔치는 않지만 해왕제를 지내는 동안 한두 번은 보게 되는 풍
경이었다.
그런 고통을 당했어도 다시 해왕제를 치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음식에 손을 대곤 했다. 너무 가난했고, 굶주렸다.
쿵닥! 쿵닥! 쨍쨍쨍...!
나이 열여섯이 되면서 해왕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출어(出漁)를 나가기 전 바다신을 모시는 의식에서 배필을 정
할 수 있는 기회로.
남자 나이 열여섯, 여자 나이 열넷.
그들은 해왕제를 지내는 삼 일 동안 화려한 전통 복장을 입은
채 마을 광장에 모여들어 춤을 춘다. 눈동자는 연신 다른 이성
(異性)을 흘깃거리지만 대부분 첫눈에 상대를 정하기 마련이
다.
뜻이 맞은 젊은 남녀는 서로의 팔목에 같은 색깔의 천을 묶어
상대가 정해졌음을 표시한다.
이러한 의식은 매우 엄격했다.
말을 주고받고, 같이 춤을 추는 것은 용납했지만 그 이상의 육
체적인 접촉은 절대 하지 못한다. 상대가 정해진 사람에게 지
분거려서도 안 된다. 만약 이러한 규율을 어긴다면 바닷가에
머리만 남기고 파묻히는 형벌을 당한다. 또한 그런 형벌을 당
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석수는 얼굴이 동그랗고 눈동자가 맑은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박꽃같이 하얀 이와 이슬 같은 눈동자는 정말 아름다웠
다. 작은 키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추는 갈매기 춤은 귀엽기 이
를 데 없었다. 관절이 없는 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팔목은 너무
희어서 지분(脂粉)이 묻어 나올 듯했다. 혼이 빨려드는 느낌이
랄까.
"내 이름은 석수야."
"석수?"
"왜?"
"푸훗! 말은 많이 들었어. 고기 길을 잘 안다며?"
"잘 알기는..."
"소문이 자자한데 뭘. 어른들이 그러시더라 석수가 말한 대로
배를 몰면 틀림없이 만선(滿船)한다고."
"나는 네가 좋은데..."
"푸훗! 바다 사내가 왜 이렇게 수줍어해? 여기서 석수의 청혼
을 거절할 여자는 아무도 없을걸."
"승낙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춘혜(春惠)는 불룩한 가슴을 밀착시킬 듯 바싹 다가왔다.
출어는 만선이었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물려 주었다.
'청어(靑魚)란 놈은 찬물을 좋아하는 놈이다. 삼 월 하순부터
수온(水溫)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깊은 바다에서 나와 찬 곳을
찾아 이동하지. 주로 해조(海藻)가 무성한 연안(沿岸)으로. 황
해(黃海)에서 많이 잡히지만 이곳은 대만도(臺滿島)가 있는 해
협이기 때문에 바닷물이 찬 편이라 많이들 몰려들지.'
'해수(海水)는 무겁다. 그래서 공기처럼 쉽게 데워지지 않는
다. 또한 한번 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다. 바다 사내들은 바
다에서 이런 진중함을 배우는 거야.'
'바다에는 십오만 종(種)이 넘는 고기들이 산다. 그놈들은 대
부분 따뜻한 곳에서 살지. 찬 곳을 좋아하는 놈은 드물어.'
고기가 이동하는 시기, 종류는 물론이고 깊이라든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시간등 모든 것을 그때그때 일러 주었다.
석수는 한지에 먹물 배어들 듯 모든 것을 익혀 나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만삭의 아내만 생각하면 손에 저절로 힘
이 들어갔다.
그해 겨울 아내는 바다신의 저주를 잉태한 아이를 생산해 냈
다.
쌍둥이.
하나는 사내였고, 또 하나는 계집아이였다.
"어허! 집안에 망조(亡兆)가 들려니. 어서 내다 버려!"
아버지는 바다신의 질책을 두려워하셨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이런 경우에는 적이었다.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우르르 몰려
들어 계집아이를 안아가 버렸다.
그 아이는 해왕제를 지내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내던져졌다.
"해왕이시여! 노여움을 푸소서."
마을 사람들이 읊조렸다.
"우리 잘못 만난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바다신이 노할 리 있
어?"
아내가 중얼거렸다.
아내는 생긴 모습처럼 힘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사내만 둘밖에 없는 집안인지라 그녀가 손댈 곳이 많았지만 일
이 벅찬지, 아니면 하기 싫어서인지 늘 일감이 밀려 있었다.
그것은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이나 바다 바람과 씨름하고 돌아와보면 마치 흉가에
들어선 듯 썰렁한 분위기에 만선의 기쁨도 울화로 변해 버렸
다.
"이게 뭐야? 고기를 말리지 않아서 다 썩어 버렸잖아! 집구석
에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흥!"
"뭐? 흥?"
쫘악...!
처음으로 한 손찌검.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망질로 굳은살이 배긴 투
박한 손바닥은 몽둥이에 가까웠다.
"왜 때렷! 니가 뭘 잘났다고 때리는 거야! 더 때려봐. 때려보
란 말야. 왜 못 때려. 때려 봐!"
바락바락 악을 쓰며 대드는 아내를 보는 순간, 석수는 아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발악이었다.
지옥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몸부림이었다. 그때,
"아미타불! 석수, 무슨 일이야?"
가홍(佳弘)이 문짝을 밀치고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몸이 약해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던 친구.
바다사내답지 않게 유난히 하얀 살색하며, 단정한 이목구비 때
문에 계집애라고 얼마나 놀림을 받았던지.
그는 석수가 용왕제에서 춘혜를 만났던 바로 그 날, 금산사(錦
山寺)로 출가(出家)했다. 법명(法名)이 도운(道雲)이라고 들었
는데. 그렇지 않아도 포구에 닿는 즉시 가홍이 집에 왔다는 소
식을 듣고 만나보려고 했는데.
"어허! 석수,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는가? 때릴 데가 어디 있
다고 손찌검을 해."
가홍은 제법 의젓해졌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도 하얀 살색과 잘 어울렸고, 살이 붙어 두
두룩한 얼굴도 보기 좋았다. 또한 입고 있는 가사(袈裟)도 손
에든 묵주도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왔어."
석수는 치밀던 울화를 간신히 삼켜 버렸다.
"오랜만이지? 우리 어디 가서 곡차(穀茶)나 한 잔 걸칠까?"
"곡차? 그새 땡중이 된 거야?"
"이 사람이. 곡차라고 했잖아? 곡차."
"하하하!"
석수는 어느새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가홍의 손을 마주잡았
다.
한순배, 두 순배...
술잔이 거듭될수록 석수는 점점 취해갔다.
"커억! 정말 돌중이네. 절간에서 술만 먹었나 보지?"
"하하! 이제 겨우 한단지를 마셨는데 벌써 그렇게 취하나?"
기분 나쁜 날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석수는 오랜 지기와 술잔을 벗하면서도 아내를 때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다. 아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으면서부터다. 그 전에는 없는
힘이나마 쥐어짜 가며 살림을 일으켜 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
는가.
석수는 한 잔 술에 몸이 취하고, 두 잔 술에 마음까지 취해오
는 것을 느꼈다.
"끄윽! 그런가? 이제 한 단지밖에 안 먹었어?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취하지? 하하! 이거 몸까지 흔들리는데!"
"이거 안 되겠네. 오늘은 그만 들어가 자도록 해. 우리 남은
술은 내일 마시세나."
"끄윽!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너무 취했어."
석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이번 일만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내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
져 옛날 다정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내는 홍(弘)이를 재우는 중이었다.
깊은 꿈이라도 꾸는 듯 숨소리 한 올 흘리지 않고 새록새록 잠
든 아들. 태어나려면 혼자만 태어날 것이지.
"끄윽! 아까 미안했어."
"..."
"나 맹세할게."
"..."
"앞으로는 절대 손찌검하지 않을 거야."
"..."
"여보."
"꿀물이나 드세요. 술냄새가 너무 나요."
석수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서로를 아
껴주면서 다정하게.
아내는 그가 만취해서 돌아올줄 알았던지 탁자 위에 꿀물을 타
놓고 기다렸다. 얼마나 현숙한가. 이런 아내를 그까짓 고기 좀
말리지 않았다고 때리다니.
석수는 사랑의 정이 담뿍 담긴 꿀물을 기분좋게 들이켰다. 순
간,
"커억!"
뱃속에서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목구멍이 인두로 지진 듯 화
끈거렸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곧 창자를 토막치는 듯한 고통
으로 변해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쨍그렁...! 우당탕! 쿠웅....!
석수는 탁자를 짚고 반듯이 서려 했다. 하지만 자르르 마비된
육신은 미끄러지듯이 방바닥으로 엎어져 버렸다.
'여, 여보! 나 이상해!'
"꺼억! 꺼어억...!"
덜컹!
문이 열리며 코에 익은 바다 냄새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낯선
신발.
"아직 안 죽었어?"
"지독한 놈이라고 했잖아. 그것 봐. 내 말 듣기 잘했지? 이런
놈을 살려뒀다가는 두 발 뻗고 잠자지 못했을 거야."
"아이는?"
"벌써 죽었어."
'악몽이야, 이건 꿈이야.'
석수는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내와 가홍,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배는 준비된 거지?"
"그럼."
"금부처. 그거 진짜 맞지?"
"맞다니까. 이제 우리는 떵떵거리면서 사는 거야. 비린내는 영
원히 맡지 않아도 된다구. 아! 맡기는 맡아야겠다. 절에 있는
동안 어찌나 생선찜이 먹고 싶던지."
"아! 여보!"
아내는 그렇게 친구의 품에 안겼다.
"하악! 당신을 갖고 싶어?"
"으음! 안 돼. 오늘 낮에도 가졌잖아. 그리고 여기서는 찝찝해
서 싫어. 저놈을 치워 버리고 뭍에 나가서... 실컷..."
"커억! 커억...!"
석수는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연놈을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식이 죽었다
는 생각도 잊어 버렸다. 몸을 산산조각으로 찢어대는 고통이
영혼까지 조각내려는 순간이었다.
가홍은 석수의 안면을 발로 짓뭉갰다.
"이놈이 너를 가졌단 말이지?"
"바보같이 왜 그래? 그 날, 먼저 청혼했으면 되었잖아?"
"후후! 나는 내 자신을 잘 알아. 이런 곳에서는 힘이 좋은 놈
들이 바다 사내라고 칭송 받아. 당연히 남편감으로도 그런 놈
들이 인기지. 머리는 텅 빈 돌대가리들이."
코뼈를 으스러트린 가홍은 비로소 만족했는지 석수의 육신을
안아 들었다.
"끄응! 더럽게 무겁네."
"그래도 힘 하나는 좋았어."
"뭐? 그럼 나는?"
"무지막지하게 힘만 좋으면 뭘해? 당신은 여자를 알어. 어떡하
면 흥분하는지. 당신에게 안겨 있으면... 숨이 막혀."
아내는 실수를 변명하려는 듯 급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가홍은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빨리 처리하자."
석수는 바다에 던져졌다. 그가 던져지기 전, '풍덩' 하는 소리
가 큼지막하게 울린 것으로 보아 아들 홍아가 먼저 던져진 것
같았다.
"깨어났는가? 무려 보름간이나 누워 있었다."
'여기는 어디...? 지옥...?'
석수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육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듯 의지는 있으되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해망산(海忘散)은 지독한 독이지. 하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것
은 아냐.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를 살렸다. 우리가 너를 발견
했을 때는 독에 중독된 지 이틀이나 지난 후였어. 해망산에 중
독되고도 이틀이나 버틴 정신력. 우리는 이것을 높이 샀다."
'무슨 소리? 그럼 내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바위에 부딪히고 쓸려서 몸이 엉망이다. 앞으로도 보름은 이
대로 있어야 할 거야. 갑갑하더라도 참아라. 재생(再生)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지."
'재생...? 내가 산다. 다시 산다. 산다...'
그로부터 보름 동안 석수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목소리를 들
었다.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고, 복수심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하지만 음색(音色)만은 무척 듣기 편했다.
"누구요? 당신은?"
보름이 지났을 때, 석수는 그 동안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을 처
음으로 보았다. 전신을 칭칭 동여맸던 무명천이 풀리고, 부서
진 코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코 부분에 고정시켜놨던 막대가
치워진 후에.
"나는 동종관이라 하네. 남들은 동어구천이라 말하지."
"석수라 합니다."
석수는 정중히 예를 올렸다. 동어구천이란 말뜻도, 동종관이라
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도 알아듣지 못했다. 무림은 전혀 몰랐
으니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해망산에 중독 당했으면 그만한 은원이 있
을 테니까. 자네의 몸은 정상이야. 그만 가 보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석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저놈을 치워 버리고 뭍에 나가서...실컷 가져.'
뭍, 뭍... 육지.
광활한 중원 대륙에서 두 연놈이 어디 숨어 있는지 어떻게 찾
는단 말인가. 섬에서 한 번도 나와 본 적이 없는데...
"도움이 필요한가?"
"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찾을 만한 단서는?"
"중. 그리고 여자..."
석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춘혜와 가홍
의 이름하며 생김새, 버릇까지.
"허허! 이거야말로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으라는 격이구먼.
자네 중원이 얼마나 넓은지 아나?"
"시간을 길게 잡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냐. 그런 면에
서... 우리가 도와줄 부분이 있는 것 같구먼."
"도와주십시오."
석수는 간절히 도움을 원했다.
석수는 둔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정대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빠른 속도로 소화해냈다.
학문, 무공...
거기에 바다에서 배운 섬세함과 생활방식을 보태니 독특한 그
만의 방법이 창출되었다.
바다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교만함도 질색한다. 나약함은
더더욱 용서하지 않는다. 조각배로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강인
한 정신만을 인정한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을 때, 석수의 이름자 앞에는 정건(靜乾)
이라는 작호가 따라붙고, 공(公)의 칭호를 받았다.
십팔 년 동안 무려 아홉 세가의 모든 것을 캐냈으니.
* * *
석수는 강물 속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 한 모금을 얼마나 오래 유지시키는가에 수공의 모든 것이
달렸다. 정대에서 온갖 기법(技法)을 배울 때, 가장 빨리 익혔
으면서도 흥미 있었던 것이 바로 수공.
극도를 앞으로 쪽 내뻗고 천천히 범선 주위를 헤쳐나갔다.
강물 속은 수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이 주는 압력은 오공이 터질 듯 거셌고, 솜방망이처럼 부드
럽게 몸을 두들겨 대는 흐름은 철퇴를 맞는 충격으로 다가왔
다.
파아앗!
움직임이 보였다.
커다란 물고기 두 마리가 유유히 헤엄쳐오는 형상.
석수는 몸을 수직으로 세워 물 속 깊숙이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두 무릎을 굽혔다 힘껏 펴자 그의 몸은 빨랫줄
처럼 쭈욱 위로 솟구쳐 올랐다.
퍼억!
꼬치처럼 꿰어지는 흑의인. 순간적으로 요동치는 몸부림이 손
끝에 전달되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물을 붉게 물
들였지만, 너무도 빠른 급류는 곧 이색적인 색깔을 흩뜨려 버
렸다.
처어억...!
물살이 급격히 갈라지며 익히 봤던 병기가 머리를 쳐왔다.
분수자(分水刺), 물 속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병기.
반면에 석수가 가진 극도는 운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또한
도(刀) 끝에는 흑의인이 꿰어 있지 않은가.
석수는 창대를 동아줄 삼아 위로 기어올랐다. 창끝에 꿰인 흑
의인이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밑으로 딸려왔지만 석수도 그
만큼 위로 솟구칠 수 있었다.
파아앗!
흑의인의 분수자가 발끝을 스쳐지났다. 그가 몸을 돌리려면 최
소한 두어 번의 발길질이 있어야 한다.
석수는 병기를 놓아 버리고 수직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동시에
몸을 돌려 흑의인과 정면으로 맞섰다. 역시 그는 몸을 돌리기
위해 급히 발길질을 하는 중이었다. 반쯤 돌아섰을까.
석수는 두 손으로 흑의인의 두 발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발로
흑의인의 아랫도리를 힘껏 내질렀다.
꼬르륵...!
흑의인은 다급히 입을 벌렸다. 비명을 내지르려는 의사는 없었
겠지만 아픔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
석수는 발을 잡아당기는 탄력으로 흑의인의 머리 위까지 올라
가 머리를 홱 비틀어 버렸다.
우둑!
물 속에서도 목뼈 부러지는 경쾌한 소리는 똑같았다.
"푸훗!'
석수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숨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순간, 그의 눈이 더 이상 확대될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화끈한 충격!
그 옛날 당했던 바로 그 뜨거움이었다.
석수는 황급히 머리를 뒤로하고 물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물 밖으로 잠시 비친 그의 두 발은... 그 중 한 발은 무릎부터
잘려나가 붉은 핏물을 분수처럼 뿜어냈다.
푸욱!
다시 배에 전달되는 통증.
흑의인은 두 명뿐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흑
의인만 네 명. 아까의 배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춘혜... 가홍... 홍아.'
석수는 죽은 자식과 비정한 아내, 탐욕으로 얼룩진 친구를 떠
올렸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한(恨)이었다. 한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조그만 감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을 바탕으로 산다면
어떤 난관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석수는 아직 춘혜와 가홍을 찾지 못한 상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골을 뒤흔들었다.
사르륵...!
부드럽게 물속을 헤치는 분수자, 하지만 빠르기는 결코 부드럽
지 않았다.
- 수공의 요체는 물의 성질. 순응하면 빠르고, 역행하면 느리
다. 순응하면 강하고, 역행하면 약해진다. 신법(身法)의 운용
도 물의 성질을 따라야 할 터...
석수는 물살에 몸을 맡기며 범선 쪽으로 흘러갔다.
분수자 네 개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싹 따라붙었다.
범선 가까이 다가갔을 때, 등뒤를 쫓는 분수자가 옷깃에 닿았
다 싶을 때, 석수는 머리를 뒤로하고 급히 신형을 눕혔다.
찌이이익...!
옷이 찢어지며 분수자에 긁힌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러나 이
순간, 물 속에서 신형을 한 바퀴 뒤집은 석수는 앞을 스쳐가는
흑의인의 등을 향해 바위도 부순다는 뇌천권(雷千拳)을 휘둘렀
다.
퍼억!
흑의인의 등이 활대처럼 꺾였다. 등뼈가 박살났으니 분명 즉
사.
석수는 지체치 않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분수자를 움켜잡았
다.
파아악...!
왼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피보라를 흘리며 급류에 휘말려 버린 왼팔. 그러나 쳐다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급속하게 찾아오는 현
기증을 감당할 틈도 없었다.
써걱!
왼팔을 자르고 지나가는 흑의인의 목젖에 분수자를 갖다댔다.
그것으로 족했다. 뭍에서라면 고개를 젖혀 피했으련만 물 속에
서는 그런 행동 하나까지 제약당한다.
석수는 모험을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육신은 더 이상 물 속에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면
으로 올라가면 그 틈을 놓칠 상대들이 아니었다. 지겨운 놈들.
어디서 이따위 놈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단 말인가. 혈조수의 살
수 비기라. 혈조수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나.
석수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현상은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 팔을 잃었고, 다른 팔은 분수자를 잡고 있다. 또 다리 하나
도 없으니 오직 오른 다리 하나만으로 유영(遊泳)해야 한다.
잔잔한 물속에서도 힘든 일이었다.
파아앗! 파앗...!
흑의인들은 양 옆에서 동시에 분수자를 쳐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분수자가 막 옆구리를 꿰려는 순간, 오른발을 앞으로 힘껏 내
뻗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뒤로 조금 떠밀려 내려갔다. 됐
다. 이제 지척에서 흑의인 두 명의 측면을 보고 있다.
석수는 분수자로 물살을 갈랐다.
"시간이 꽤 됐지?"
산귀는 석수가 들어간 강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 색깔과 전혀 다른 붉은색이 솟구쳐 나오다 이내 흐트러져
버리는가 하면 다시 흘러나온다. 검은 무복을 입은 시신도 잠
시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시신도 곧 가라앉았다. 무심한 강
물은 주는 먹이를 마다하지 않고 꿀꺽꿀꺽 삼켜댔다.
푸악!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며 석수가 뛰쳐나왔다.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잃은 상태. 그
런 몸으로 급류를 헤치고 다시 위로 올라왔다는 자체가 기적이
었다.
"이제는 모르겠어. 배 밑에 놈들이 또 있다면..."
석수는 그 말을 끝으로 혼절해 버렸다.
"정말 대단한 친구들이야. 이 정도 되는 친구들이 버티고 있으
니 곽가장이 성세를 구가하지."
뚜벅! 뚜벅...!
거칠게 걸어온 함상이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발라주었
다.
그가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도해는 깨끗이 지워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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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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