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NBA 입단, 19세에 슬램덩크 챔피언 등극, 20세에 레이커스의 간판스타로 등록, 21세에 NBA를 정복. 코비 브라이언트는 NBA 선수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육체와 재능을 물려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집중적인 농구 교육을 받았다. 성장 과정이 곧 선수로서의 성장을 의미했던 그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1978년 8월 23일 태어났다. 코비라는 이름은 일본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이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코비의 부모는 발음이 괜찮다는 이유 만으로 이런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유별난 아이에게 주어진 유별난 이름이었다. 코비는 어렸을 적부터 그의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가 농구하는 것을 보았고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아버지의 동작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는 8살 때 체육관의 스프링 보드를 밟고 점프해 백덩크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걷기 시작하면서 농구의 동작을 따라하다
코비의 아버지 조는 NBA 선수 출신이다. 조 브라이언트는 1975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됐고 다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기록상으로 보자면 그의 전성기는 11.6득점, 5.4 리바운드의 성적을 올린 1980-81시즌이다. 그러나 그의 NBA 이력을 더욱 빛내주는 것은 파이날까지 진출했던 1976-77시즌일 것이다. 비록 우승은 블레이저스에 양보해야 했지만.
1984년 조 브라이언트는 NBA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당시의 나이는 30세로서 은퇴가 빠른 셈이었다. 조 브라이언트는 유럽 프로 리그에서 선수로 계속 뛸 것을 결심하고 코비 일가는 이탈리아로 이주하게 된다.
외국 이민 생활은 가족들을 더욱 뭉치게 하는 법이다. 의지할 수 있는 곳이 가족들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 브라이언트는 이탈리아에서 선수로서 승승장구 하는 한편 코비에게 농구의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손을 번갈아가며 드리블 하는 법, 박스 아웃하는 법, 리바운드하면서 몸 싸움하는 법 등. 또한 NBA 슈퍼스타들의 플레이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주며 세세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코비는 아버지를 통해 줄리어스 어빙의 ‘플라잉 덩크’, 매직 존슨의 ‘노룩패스’, 하킴 올라주원의 ‘페이드 어웨이 슛’ 등 당대 최고 플레이를 배울 수가 있었다. 코비는 때때로 아버지 조의 팀 동료와 원 온 원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의 나이 겨우 11살이었고 가끔은 이길때도 있었다.
코비의 가족은 19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미국 전역은 마이클 조던이라는 슈퍼 스타 덕분에 엄청난 농구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코비는 메리언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열세살의 나이임에도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체격 그리고 전 NBA 선수였던 아버지에게서 특별 지도를 받은 그의 농구 실력은 아무도 쫓아오기 힘든 수준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비 혼자의 힘으로 약팀에 속하던 메리언을 단시간 내에 강팀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1992-93 시즌 코비는 평균 18득점을 기록하는 동시에 최고의 리바운더로 자리잡았다. 팀이 큰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더라도 코비는 호쾌한 덩크와 완벽한 노룩패스를 구사함으로써 감독과 관중들 그리고 상대 선수들의 입이 쩍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오프 시즌에 코비는 오로지 두 가지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학교공부와 농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기진맥진 할 때까지 달리기를 했고, 웨이트에 몰두했으며 남은 대부분의 시간을 코트에서 보냈다. 고교 1년 여름방학 때부터 그는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와 대등하게 원 온 원을 벌일 수 있었다.
월트 체임벌린을 앞선 고교 통산 기록
고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코비는 신장 194cm의 일류 가드로 성장해 있었다. 메리언고교에서 그는 한 게임 평균 22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16승 6패라는 좋은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의 명성은 필라델피아시는 물론 펜실바니아 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코비는 1995-96 시즌 메리언 고교를 ‘펜실바니아 주 클래스 AAAA’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포트라이트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4년간 메리언에서 기록한 통산 득점 2,883점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월트 체임벌린(2,359득점)을 앞선 것이었다.그는 맥도날드 올 어메리칸 팀에 선정되었고, USA투데이를 포함해 수도 없이 많은 스포츠 매체에 의해 고교대표팀 선수로 꼽혔다.
이후 코비의 일거수 일투족은 언론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대학으로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NBA로 곧장 진출할 것인가가 집중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코비에게 대학 진학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그는 평균 B학점 이상을 유지했다. SAT(수학능력점수)도 1,080점이어서 NCAA에 속한 명문대 진학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그러나 NBA 직행은 다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만을 졸업하고 NBA에 직행한 선수는 모제스 말론, 대릴 도킨스, 빌 윌러비, 숀 켐프, 그리고 케빈 가네트 정도였다. 그에게 결정적인 용기를 준 사람은 케빈 가네트였다. 1995년 팀버울브즈에 입단한 가네트는 곧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올스타 선발 가능성도 점쳐질만큼 화려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코비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가 해냈다면 나도 할수 있지 않을까?”
그는 NBA 입단 선언을 한 이후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와 계약(약 1천만 달러-120억)을 맺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 브랜드가 아니던 아디다스를 선택한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이미 정상의 위치에 있는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선호하는 스포츠 전문 에이전시를 선택하지 않고 연예인전문 에이전시인 ‘윌리암 모리스’와 계약을 맺었다. 연예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모리스사와 계약한 최초의 농구 선수가 된 것이다.
코비는 고교 졸업 무도회에 팝 가수이자 텔레비전 시트콤 ‘모이샤’의 스타인 브랜디와 함께 나타나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둘의 모습은 엄청나게 모여든 사진기자들에 의해 잡지와 주간지 그리고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코비가 이렇게 미리부터 유명세를 치렀던 이유는 앞으로 NBA 무대에서 그의 엄청난 성장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6년 NBA 드래프트를 앞두고 코비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팀은 그의 홈타운 연고지인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와 LA 레이커스였다. 드래프트 1위 지명권을 갖고 있는 식서스는 이미 필라델피아에서 상당한 지명도와 팬을 갖고 있는 코비를 영입하고 싶어했다. 레이커스 구단 부사장인 제리 웨스트도 코비의 잠재적인 능력을 인정해 LA로 끌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레이커스의 지명권은 27번째였고 코비를 데려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레이커스 입단과 함께 LA의 부촌에 진입
결국 드래프트 당일 식서스는 알렌 아이버슨을 선택하고 코비는 13번째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코비가 샬럿의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은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트레이드의 가능성이 소문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호네츠는 애초부터 코비를 트레이드용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던 팀은 당연히 레이커스였고 뛰어난 득점력을 자랑하던 유고 용병 블레이드 디박을 내주면서 코비를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코비로서는 대환영이었다. 거대 도시 LA는 기후가 좋은 곳일 뿐만 아니라 레이커스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젊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코비의 입단과 함께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은 샤킬 오닐이 올랜도 매직에서 레이커스로 이적해 왔다는 것이다. NBA 코트에서 수십년간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제리 웨스트는 코비와 오닐이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팀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코비는 레이커스와 3년간 350만 달러(42억)의 연봉계약을 맺게 된다. 18세의 고졸 학력 소년이 연간 14억의 고소득자가 된 것이다. 코비의 권유에 의해 조 브라이언트 일가는 모두 LA로 이주를 해왔다. 그는 온 가족이 같이 살 수 있도록 LA의 부촌으로 손꼽히는 퍼시픽 팰리세이드에 저택을 구입했다. 톰 크루즈와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비롯해 손꼽히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러나 그가 결코 돈을 헤프게 쓰는 편은 아니었다. 젊은 팬들과의 인터넷 채팅에서 그는 버는 돈을 어떻게 쓸 계획이냐는 질문을 받는 적이 있다. 그는 “은행에 넣어 두겠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탈리아 리그에게 용병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절약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함부로 돈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96-97 시즌을 앞두고 언론들은 NBA 무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선수 코비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쉴새없이 NBA 코트에 서게 된 소감에 대해 질문했다. 코비는 순진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코트에서 닉 반 엑셀이나 에디 존스 같은 선수와 플레이 해보고 싶다. 그들에게 배울 기회를 갖는다는 일이 무척 기다려진다.”
그의 의욕이 너무 넘쳐서였을까? 시즌 개막 전 시범 경기에서 그는 부상을 당해 시즌 개막 전까지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코비가 NBA 시즌 코트를 처음으로 밟았던 것은 11월 3일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와의 경기였다. 비록 유일하게 시도했던 슛은 블록을 당하고, 턴오버를 한 개 기록했지만. 출전 시간이 6분 밖에는 되지 않았던 이 경기가 그의 첫 데뷔전이었다. 두 번째로 출전했던 호네츠와의 경기에서도 3개의 턴오버를 기록하고 7분동안 코트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총 9게임 동안 겨우 59분 밖에는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레이커스의 열번째 경기인 피닉스와의 대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출장 시간은 14분에 불과했지만 3점슛 4개를 기록하면서 16득점을 만들어냈다. 에디 존스(18득점)에 이어 팀 내 2위의 기록이었다. 이후 그의 출장 시간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실수는 많았지만 서서히 NBA 코트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줄리어스 어빙 앞에서 꿈을 이루다.
1997년 NBA 올스타에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루키 게임과 슬램덩크 챔피언십에 참가하기 위해 클리블랜드를 찾았다. 슬램덩크 대회는 그가 어렸을적부터 꿈꾸어 오던 무대였다.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와 함께 식서스에서 활약했던 줄리어스 어빙처럼 멋진 덩크 묘기를 NBA 무대에서 한번 실현시켜 보는 것이 그의 오랜 소원이었다. 바로 그 줄리어스 어빙이 심사위원으로 지켜보고 있는 슬램덩크 대회에서 그는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켜 덩크하는 고난도 묘기를 선보여 우승을 차지했다. 50점만점에 49점.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NBA 입단 두 번째 시즌 그는 팬 투표에 의해 올스타전의 선발로 선출이 된다. NBA 역사상 가장 어린 19세의 올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NBA 입단 3년 차인 98-99 시즌에 그는 한 게임 평균 20득점을 올리며 레이커스의 간판급 선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99-00 시즌 NBA 3년차 이력의 소유자로서 NBA 올 세컨드 팀과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큰 영광은 이번 시즌 NBA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물론 NBA 우승에 이르기까지 부상을 극복해야 하는 고통이 뒤따랐지만 결국 그는 NBA에서 오를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코비는 아직 21세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 마이클 조던을 비롯해 그의 선배들이 앞서 이룩해 놓은 성과와 업적이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NBA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미지수이지만 그의 농구에 대한 열정이 계속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농구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훈련에 대한 집요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최고의 선수가 될 생각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플레이하는가? 모든 선수들이 최고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고가 되고싶다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코트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 최고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