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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또 어떤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반공이 무섭군요. 생각을 말
하면 바로 그대로 되니까요."
곽소연은 어제 일로 마음을 확실히 정했는지 뜨거운 눈빛을 흘
려왔다. 종류는 분명했다. 사랑의 열정. 반여량 자신이 한한에
게 보내던 눈길 그대로였다.
"허허! 소저도 그렇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산귀는 무수한 죽음을 보면서 힘이 빠진 듯했다.
그렇다. 그는 진정한 감여가다. 비록 동기감응을 인정하지 않
고, 안철주를 곤경에 몰아넣은 적이 있지만 그 역시 감여의 본
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감여가는 늘 죽음과 밀접하다. 하지만 삶의 일환으로 죽음이
끼여든 것뿐이지 죽음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좋은
묘혈을 골라 조상을 편안히 모신다는 생각은 간 곳이 없고, 오
로지 발복(發福)만을 염두에 둔 사람들을 개탄하는 사람중의
하나인 것이다.
하물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살육이 반가울 리 있겠는가.
그러나 반여량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미련한 사람들이군요. 어차피 죽기로 작정했으면서..."
"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무슨 말이에요?"
산귀와 곽소연이 각기 놀란 눈으로 반여량을 바라보았다.
"저들 말이오. 어차피 죽기로 작정했다면... 나 같으면 배에다
폭약을 설치해 놓겠소. 이런 급류에 휩쓸린다면 어차피 살지
못할터. 배만 가라앉히면 끝날 일을..."
"맙소사!"
곽소연은 화급히 눈을 들어 소선을 바라보았다.
맞았다. 흑의인들이 타고 온 배에는 유지(油脂)로 감싼 물건들
이 가득 실려 있다. 뜯어보지 않아도 폭약임이 분명했다.
"이 협곡의 넓이는 이십 장... 쇠줄 하나를 만들 수 있으면
둘, 셋도 만들 수 있겠지. 흑의인과 비수당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안팎으로 쇠줄을 설치하고... 그렇군. 저
절벽 위... 저기서 불화살을 날린다면..."
바위 덩어리를 생각하지 못했다. 바위를 굴렸으면 사람이 있다
는 증거가 아닌가.
"서, 설마 그렇게까지..."
산귀가 의미 없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바라보았
다. 역시 그의 중얼거림은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절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흑의인들... 그들은 각기 태양 같
은 불덩이를 한 움큼씩 쥔 채로 나타났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
다. 그들이 손에 든 불화살이 태양처럼.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줄도 다시 나타났다.
이건 반여량이 말한 것보다 배는 심했다. 쇠줄 다섯 개가 연이
어 설치돼 전복되지 않고 저 너머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
였다.
"이, 이게..."
산귀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꼼짝없는 죽음의 함정.
"어떻게 하면 좋죠?"
"후후후! 석수가 당했지. 이제는 진육이 당할 차례야. 그렇군.
그래서 사공이 필요했어. 장주... 장주는 너무 무서운 사람이
야."
함상이었다. 그는 석수를 편안하게 눕혀준 후, 뱃전에 기대 혈
전(血戰)을 벌이고 있는 진육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니? 환제갈,
어떻게 아버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곽소연이 아미를 파르르 떨면서 분노했다.
흑의인들이 혈조수의 살수 비기를 익혔다는 것은 이제 모든 사
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장을 나온 곽가장 무인들을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제일 먼저 공격당한 것뿐이다. 만약 다른 볼일이 있어, 먼저
나온 곽가장 무인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표적이 되었으리라.
재수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혈조수가 누군가. 과거 수많
은 악행을 저질러 혈조수란 말을 들으면 우는 아이도 뚝 그쳤
다 한다.
그런 사람의 후인들이 다시 나타났으면 당연히 제거해야 하는
게 곽가장 무인의 도리가 아닌가. 설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
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죽어야 한다.
곽소연의 짧은 말 속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
나,
"그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지. 왜냐하면..."
"안 되지. 그만하면 됐어."
윤명이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장주님을 모독하는 말은 참을 수 없어. 함상, 네가 장주님을
계속 모욕한다면 내 창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환제갈, 이제 좀 알았나? 네 소용가치는 협곡을 들어설 때부
터였어. 기습 계획을 추측하고 대처하는 것. 그런데 추풍이...
추풍? 하하하! 이거야 원... 작호를 불러 주려니 꼭 계집아이
를 부르는 것 같아서 영 껄끄럽네. 하하! 추풍이 네 역할을 대
신할 줄은 미처 몰랐지. 좋아. 아직 늦지 않았으니 네 머리를
활용해봐?"
윤명은 눈앞에 닥친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마음
은 살상이 전혀 없는 훈련에서만 가능했다. 지금은 피가 튀고
있지 않은가. 팔다리가 잘려 허공을 날고, 진한 피를 흘리
고... 결코 담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 중에 하나이리라.
삶을 달관한 초인(超人)이거나,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완벽하
거나.
"그 전에 하나만 묻겠소. 진육의 과거를 알고 있소?"
함상 역시 윤명의 태도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사건의
전모를 깨달은 듯했다.
"왜 묻나?"
"묻고 싶소."
모든 사람은 정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과거와는 일절 단절되
고 만다. 그것은 사공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육이나 석
수가 함상의 과거를 모르듯이 함상도 그들의 과거를 몰랐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석수가 수공의 달인이라는 점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었다.
사실 사공의 무공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익히고 있
는 무공이라야 위급지경에서 몸을 뺄 수 있는 호신무공 정도가
고작이었다. 흑의인과 겨룬다면 간신히 두 명을 상대할 수 있
을까?
함상은 자신의 무공이 가장 높은 줄 알았다. 이십칠파도의 도
결이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져도 괜찮았다. 그러나 석수가
보여준 수공은.. 그는 물 속에서 흑의인 여섯 명을 해치웠다.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진육도 그럴 것이다.
장주가 무엇 때문에 대주만 죽이고 사공을 살려두었을까? 의문
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공이 지닌 개인적인 특기. 이번 여행
에서, 아니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
문이리라. 그럼 장주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견
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장주도 신이 아닌 인
간인데.
"몰라."
윤명의 대답은 간단했다.
"천애사시 동목의 과거는 아시오?"
"몰라."
"그럼 정건 석수의 과거는? 그가 어떻게 해서 수공의 달인이
되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소?"
"그거야 나보다 정대의 소관 아닌가. 지금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알... 겠소."
함상은 품에서 천광탄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푸르릉...! 퍼엉!
아름다운 묵빛 구름. 버섯 모양으로 둥그렇게 말려진 구름 조
각이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서서히 형체를 잃어갔다.
'내 이름은 당일상(唐逸翔)이야.'
'뭐! 그럼 네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천당문(四川唐門)으로 서
신을 한 장 보내 줘. 후회한다고... 죄송하다고...'
배를 타기 전에 나룻터에서 한 말. 진육은 죽음을 예감한 모양
이다.
함상은 암울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악명이 자자했던 당일상이라 해도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기적이 없는 한.
써걱!
진육은 막 흑의인 한 명을 베어 꼬꾸라트렸다.
그가 입고 있는 백색 무복은 혈의로 변해버린 지 벌써 오래 전
이었다. 피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무복 덕분에 그의 근
육질 몸매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는 천광탄이 터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모양이 두 개, 난관이 두 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간격이 매우 좁다는 것은 위기가 바로 지척에 다가왔다는 사실
을 말해주고, 맨 위에 구슬 같은 구름 한 개는 진육 자신에게
보내는 밀마라는 뜻이다.
신음을 터트리며 앞을 바라보자 지척까지 다가온 쇠줄이 보였
다.
그는 처음 보았다. 흑의인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바람에 고개를
돌릴 여력이 없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진육은 급히 범선을 바라보았다.
함상이 보인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흑의인들이 타고 온 소선
과 쇠줄을 가리켰다.
"학구!"
"왜?"
능공십자 학구가 옆구리를 베어오는 흑의인을 힘들게 베어내며
응답해왔다.
"이놈들을 내게서 떼어 줘."
"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나도 죽겠는데."
십팔 대 오십의 싸움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대여섯 명 대 이십
여 명의 싸움이 되었다. 피아(彼我)를 합쳐 무려 사십여 명이
나 강물속에 육신이 잠겨 버렸다. 싸움에 이골난 비수당 무인
들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버티지도 못했으리라.
학구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곧 신법을 펼쳐 진육의 등뒤에
내려섰다.
싸아악...!
내려서자마자 검날 한 개가 짓쳐왔다.
흑의인들의 검법은 매우 단순했다. 그들이 노리는 사대요혈은
격하기가 쉽지 않은 부위였다. 팔다리에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의인들은 꾸준히 사대요혈만 노리고 짓쳐왔다. 그만
큼 허점이 많이 생기고... 죽는 것은 필연이었다. 하지만 검날
이 육신을 베는 그 짧은 순간에 흑의인들의 검은 예정된 곳을
베어 낸다. 극통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독한 수련을 거친 경
우에만 날릴 수 있는 필살검법.
학구는 몸을 우측으로 틀며 번개같이 흑의인의 목을 따내 버렸
다. 역시 흑의인의 검은 죽음 다음에도 이어졌다. 검을 부딪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차앙!
목을 따내고 되돌아 온 검이 흑의인의 검을 막아냈다. 쾌속(快
速)에는 자신이 있기에 상대 검법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스르르 무너지는 흑의인.
"나, 간다."
진육은 학구가 응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흑의
인들이 타고 왔던 배,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명만 남아 지키고
있는 배를 향해서.
파르르륵...!
진육이 배에 내려서기 전,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우모침 한 무
더기가 혹의인을 덮쳤다.
흑의인은 황급히 피풍의(披風衣)를 휘둘러 우모침을 쳐냈다.
그러나 그 잠시 동안 흑의인의 눈은 가죽 피풍의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죽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쑤욱!
배를 헤집고 들어온 검날. 배를 지키고 있던 흑의인은 변변하
게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런! 맙소사."
누런 유지를 들춰내자 검은 화약이 가득 나타났다. 냄새만 맡
아봐도 폭발성이 얼마나 지독한지 익히 짐작되었다. 만약 이것
이 터지면... 소선 열 척에 이와 똑같은 폭약이 실렸다면 그야
말로 천번지복(天쑹地覆)의 폭발력을 보이리라.
진육은 찰나의 시간도 두지 않고 진각(震脚)을 떨쳐 배 밑바닥
에 구멍을 냈다.
쿠웅! 꽈직! 쿠우우...!
바닥이 뚫리며 급류가 사정없이 뿜어져나왔다.
순간 진육은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치며 성명병기 십이강환을
일제히 떨쳐냈다.
고오오오...!
하나는 허공으로, 하나는 수평으로, 또 하나는 쪽 앞으로 나가
다 뚝 떨어지고... 한 손에서 나왔으되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짓
쳐가는 십이강환. 그만큼 강환을 날리는 속도가 빨랐다는 이야
기가 된다.
"헉! 저것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십팔나포술(十八拿捕術)."
윤명은 헛바람을 내지르고 말았다.
십팔나포술은 사람을 살상하는 무공이 아니었다. 각종 약물을
취급하는 당문이니만치 독물(毒物)도 채집할 때가 있고, 그것
이 독사나 독충인 경우를 대비해 손대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방
법이 필요했다.
십팔나포술은 그래서 탄생했다.
독물을 잡는 방법 열여덟 가지.
진육이 사용한 십이강환술은 분명히 당문 십팔나포술의 변형이
었다. 당문이 철망(鐵網)을 사용하는데 반해 진육은 강환을 사
용한 차이만 달랐다.
"지, 진육이 당문 출신?"
윤명은 한 사내를 떠올렸다.
그는 이십칠파도라는 놈과 함께 가장 현상금이 많은 이대 악인
중 한 명이었다. 관군을 무려 칠십여 명이나 죽인 대살성. 당
문의 반도(叛徒)로 전 무림의 공적(公適)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당일상이라 했는데.
'아무리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일심각을 사용하지 마라.
비수당이 전멸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 배를 타고 간다면 수
전(水戰)이 예상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일심각은 나서지
마라. 사공과 비수당이 난관을 뚫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뚫을 것이니. 일심각주의 임무는 추풍을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차후 명령은 구궁산에서 받게 될 것
이다.'
청붕분타에서 장주로부터 받은 서신 내용이었다.
그렇다. 장주는 진육이 당문 출신임을 알고 있었다. 석수가 수
공의 달인이라는 것도. 정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극소수 중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니.
그럼 함상이나 동목은 어떤 사연을 지닌 놈일까?
윤명은 함상에게로 눈을 돌렸다.
꽈직! 퍼억! 쿠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점점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소선들. 배 밑
바닥에 강환을 맞은 소선은 여지없이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소선 열 척을 전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십팔나포술은 한꺼번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독물의 특성에
맞게 열여덟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하도록 창안되었
다. 당연히 모든 기술적 요소가 철망에 맞도록 고안되었다.
진육이 임기응변으로 십팔나포술을 십이강환에 응용시켰지만
그 위력은 현저히 뒤떨어졌다.
강환에 침몰된 소선들은 흑의인이 타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비수당 무인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곳 뿐이었다. 조금이라
도 여유가 있는 배에서는 여지없이 강환을 쳐내고 말았다. 그
래도 일거에 다섯 척을 침몰시킨 게 어디인가.
진육은 다시 한 번 몸을 비틀며 흑의인이 타고 있는 배로 뛰어
내렸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비트는 그의 신법은 너무도
영활하여 그야말로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니며 하늘이 떠나가
라 포효하는 표범을 연상시켰다.
진육이 내린 배에는 흑의인 세 명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
대하는 비수당 무인은 한 명. 비수당 무인은 전신이 난도질되
기 일보직전이었다.
꽈직!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진각을 떨쳐 배에 구멍을 낸 진육은
재차 신형을 뽑아올려 다른 배로 뛰쳐나갔다.
푸아악...!
하늘에서 불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흑의인들도 이번 싸움만큼은 자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니까 지
금까지 불화살을 쏘지 않고 기다렸겠지. 아무리 목숨을 도외시
한다 하지만 되도록 희생을 줄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리
라.
배 아래 상황을 봐서 정 안 되겠으면 같이 폭사시킨다. 그리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진육이 배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
자 다급한 마음에 불화살을 쏘아낸 듯했다.
배에 타고 있던 흑의인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흑의인 한 명은 계속 비수당 무인을 상대하고, 협공을 가하던
두 명이 몸을 빼 공격을 가해 왔다.
'제길! 대응하면 늦는다.'
진육은 공격해 오는 흑의인을 무시하고 다른 배로 뛰쳐나갔다.
파악! 퍼억...!
옆구리 어림과 허벅지에서 말 못할 통증이 치밀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이검(二劍)이나 맞은 것이다. 그러나 예정한 대로 또
다른 배에 내려설 수 있었다.
쾅! 꽈지직...!
배에 구멍이 뚫리며 물이 솟구쳐 오르는 순간, 사태를 짐작한
흑의인 다섯 명이 그를 빙 둘러싸며 협공을 가해왔다.
"비켯!"
진육은 품에서 되는 대로 암기를 꺼내 흩뿌렸다. 그것이 우모
침인지, 유엽도인지 판가름할 정신도 없었다.
쉬익!
허공으로 솟구친 진육. 그러나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불화
살 한대가 꼬치 꿰듯이 복부를 관통했다.
'제길! 이제 두 척 남았는데...'
쿵!
진육은 거칠게 뱃전으로 나뒹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을, 팔을, 다리를 베어 오는 검날. 진육은 이미 대항할 힘
을 잃은 상태였다. 복부를 관통한 불화살은 창자를 태워 버렸
을 뿐만 아니라 화독(火毒)까지 침투시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내력을 끌어올리는 것
이 아니라 잠력(潛力)을 폭발시키는 방법뿐이다.
"학구!"
마지막 힘을 다해 부른 이름, 다행히 응답이 있었다.
"진공을 구하라!"
능공십자 학구는 이제 세 명만 남은 비수당원에게 빽 고함을
지르며 소선과 소선 사이를 날듯이 건너뛰었다.
진공(眞公)...
우모우 진육을 최대한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정대의 국주와 비수당 대주는 신분상 같은 위치였다. 그러나
비수당 무인들의 자존심은 다른 대주나 국주를 인정하지 않았
다. 그것은 일심각 부대주 삼화일지 최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
이제는 진공이라 불렀다. 진국주라 부르지도 않고 진공이라고.
비수당과 같은 혈인(血人)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무공의
높낮이는 상관하지 않았다. 투혼(鬪魂). 오직 그것만이 비수당
무인들이 인정하는 진정한 무인의 표상이었다.
"오지마! 배, 배를 침몰시켜!"
학구는 잠시 걸음을 멈춘 듯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정했는
지 마지막 남은 소선 한 척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퍼억! 파파팟...!
육신을 꿰뚫는 검날들.
진육은 잘게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굳어지
기 시작한 육신은 웃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피우웃...!
불화살이 날아온다. 하늘을 새까맣게, 아니지 새빨갛게 물들이
며 화살 무더기가 날아온다. 능공십자 학구는 틀림없이 남은
한 척을 파손했으리라.
'어차피 한 사람의 죽음은 있어야 해.'
진육은 화약 더미를 몸으로 감싸안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신 진기를 이끌어 올렸다.
퍼억, 퍼억, 퍼억...!
등을 헤집어 버리는 검날. 흑의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말문이
굳어버린 듯 입을 열 줄 몰랐다.
"타아앗...!"
진육은 일시에 전신 세맥(細脈)을 터트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만, 한 번만 움직일 수 있으면 된다. 그는 화약 더미를 끌어안
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나 허공에도 그가 갈 곳은 없었
다. 하늘을 새까맣게 메운 불화살이 그의 몸을 화신(火神)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꽈아앙...!
육신이 산산조각 나 천지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곳은 바로 쇠줄이 설치된 곳, 범선은 유유히 협곡을 지나쳤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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