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게 쪽팔렸던 지게차 운전!!
그 놈의 호기심과 일명 ‘개폼’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대형 덤프트럭 운전, 이왕이면 가장 힘들고 난해하기로 이름난 차를 끌어보겠다며 풀카(fullcar)까지 경험했다. 하지만 운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참이나 뒤에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출구전략을 모색했던 모양이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과거 가스판매업을 했던 경험 때문인지, ‘LPG 용기’ 제작이 급 땡겼다. 마침 거래처였던 의왕시의 한 가스통 제조회사(신성공업?)에 ‘지게차 기사’로 취업했다.
돌이켜 보면 이 또한 호기심과 개폼의 또 다른 형태의 하나였다. 회사의 규모는 150여명이 일하는 전형적인 중소기업이었다. 가스용기 제작을 위해선 철판 다루는 일이 기본이었다. 지게차는 필수였다. 크고 작은 지게차 3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게차 면허를 가진 사람은 달랑 혼자였다. 관청엔 1대만 신고하고 실제론 3대를 운행했다. 지게차도 법적으론 ‘중장비(重裝備)’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면허소지자를 반드시 채용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흔한 면허지만 당시에는 귀했다.
출근 첫날, 사장님으로부터 회사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현장으로 배치됐다. 그러면서 면허소지자란 이유로 지게차를 능숙하게 다루는 직원을 조수(?)로 붙여주었다. 지게차의 임무는 다양했다. 용기 제작의 특성상 원자재인 철판을 풀카나 트레일러에서 하철하여 공정에 맞춰 이곳저곳으로 신속하게 옮겨주는 게 주요 일과였다. 초기엔 조수와 공장장의 배려(?)로 지게차의 동선이 어떻게 되는지 익히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코딱지(?) 만한 공장임에도 공정은 드럽게 복잡했다.
그간 덤프트럭에 골재를 싣고 레미콘 공장에 도착하면 정해진 장소에 덤프를 들면 땡이었고, 컨테이너나 철강을 운반할 때도 일정 장소에 도착하면 알아서 지게차가 달려와 화물을 말끔하게 처리해 주던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트레일러가 공장에 들어오면 지게차가 잽싸게 붙어 철판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간 지게차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철판을 내려주던 일이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도로 숙련된 리프트 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면허증 소지자라는 이유로 조수로부터 간단한 교육(?)만 받고 철판을 내리다 땅바닥으로 와르르 내동댕이쳐진 적이 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회사에선 심각하게 봤다. 철판을 제자리로 운반(수습)하려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사고(?)친 현장을 찾아 힘을 거들어야 했다. 회사에서는 손실로 여겼다. 시간만 넉넉하면 정확히 처리할 수 있다고 보였지만, 시간이 돈이자 경쟁력인 회사에선 결코 기다려주지 않았다. 트레일러에 실려 온 철판을 10~15분이면 뚝딱 해치워야만 했다.
사고 친 이후, 조수가 기사를 하고 난 사실상 조수 역할을 했다. 5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도 조수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흉내도 내지 못했다. 더구나 조수 뿐 아니라 공장의 노동자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들 지게차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조수를 포함해 다들 면허증만 없을 뿐이지, 실제론 지게차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베테랑들이었다. 대안이 없었다. 기가 빠져 조수만 따라 댕겼다. 지게차의 기본적인 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기름 넣어주는 일 조차 모두 내가 했다.
사실 그런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개뿔도 없었다. 그렇게 보름은 그냥 흘러갔다. 조금씩 동선이 들어왔다. 철판을 다루는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회사에서 기대하는 수준엔 한참 모자랐다. 철판을 내리고 올리는 것 정도는 나름 능숙해졌지만 철판을 리프트에 올려놓고 공장 내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단계까지는 한두 해로도 부족해 보였다. 갈등하기 시작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명색이 면허를 가지고 취업했는데, 스타일이 말이 아니었다.
폼생폼사라고, 밥값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미치고 팔짝뛸 일이었다. 게다가 직원들이 “아니, 면허증 있는 사람 맞느냐?”고 물어올 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쪽팔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지게차 면허를 딸 때 필기(1차 시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실력으로 패스하고, 실기(2차 시험)는 달랑 30분 연습하고 취득했다. 실전에 약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선, ‘면허증 소지자는 당연히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관념이 강했던 듯했다.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거 이른바 ‘돌팔이 전기 기술자’로 살 때가 생각났다. 실제 자격증 소지자는 실전에서 약하다는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인정하기로 했다. 실전이 약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현장경험을 계속 늘려가기로 다짐했다. 속상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조수를 보필하면서 경험을 쌓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퇴사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스승(?)을 잃은 난 충격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회사에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알아서 처리하란다. 하늘이 노래졌다. 불안한 마음이 그득했지만 묘책이 없었다. 맡을 수밖에 없었다. 철판을 내리고 올리는 데는 능숙했지만, 여전히 공장 내부를 휘젓고 다니기엔 역부족이었다. 조심조심 하다 보니 공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궁여지책으로 회사에선 지게차를 잘 다루는 한사람을 선정하여 지게차 운전만 하도록 조치했다. 채용공고를 냈으니 직원이 충원될 때까지 나에겐 ‘대타 지게차 기사’가 하던 일을 좀 해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졸지에 자리가 바뀔 판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간 제대로 지게차 운전을 못해 이런 사달이 난 만큼, 미안한 마음에 승낙하고 말았다. 그렇게 ‘LPG 용기’를 직접 제작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철판을 옮기는 일부터 용기형태로 둥글게 마는 일, 용접하는 일, 페인팅 하는 일, 밸브 설치하는 일 등 제작공정에 따라 조수역할을 했다. 하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충원되는 직원은 없었다. 이상했다. 이러다 가스통 만드는 노동자로 지속하는 건 아닐까? 슬슬 불안해졌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이름만 걸어둔 지게차 기사라고. 당장 사장님에게 달려갔다. 돌직구가 날아왔다. 그대로 있는 게 생산성이 높으니 현장에 있으란다. 속된말로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현장에서 일하고, 지게차 운전에 능숙한 이는 그에 맞게 일하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된다나. 순간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간 미안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거부했다. 사고발생시, 책임져야 하는 것도 싫었지만, 나의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간 가장 난해하다는 풀카를 가지고 전국을 누비던 내가 그깟 지게차 운전 경험이 미천하여 현장 노동자로 대체된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과감하게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취업해서 회사에 누(累)를 끼친 것 같아 그간 받았던 월급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출·퇴근하면서 봤던 ‘레커(견인차) 기사 모집’ 현수막이 떠올랐다. 전화를 걸었다. 면허증만 있으면 바로 채용하겠단다. 지게차 기사에서 레커차 기사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