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람들은 기대와 흥분보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AI가 너무 빠르게 인간 생활에 들어옴을 피부로 느끼면서부터.. 그전에는 기계가 사람이 할 일을 도와주는 것이려니 했는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제와 보니 기계가 사람을 콘트롤하는 것이, 사람이 기계를 돕는 것 같은 느낌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이다.
의사보다 MRI 결과를 기다릴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과속이나 신호등을 위반했다며 씨씨티비 사진으로 보내오는 벌금형 메일을 보면 에이아이 감시 속에 살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치안은 경찰 로봇이 맡을 것이고, 전쟁은 전쟁 로봇이 할 것이다.
이와같은 에이아이를 보며 우리를 돌아보면
과거에는 자연에 대한 공포, 중세에는 신에 대한 공포 그리고 현대에는 기계인 에이아이에 대한 공포가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이와같은 절대적인 공포에 절망하지 않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살아왔으니 그것이 종교다.
과거의 종교는 샤머니즘이라 이름하고, 중세는 종교라 했는데, 현대 역시 종교라 하면 왠지 에이아이에게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편 과거와 중세와 현대는 신호등 불처럼 구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섞여 있다.
새 해가 되면 점을 보고 절에 가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점을 보고 절에 가는 것으로 점점 강압적으로 다가오는 에이아이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잘못된 판단일 수 있지만..
이웃종교인 교회는 튼튼히 견딜 것 같은데, 성당은 흔들릴 것 같고, 절은 무너질 것 같다.
유비무환이라고 지금부터 종교 집안은 특히 불교는 에이아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할 때가 아닌지.
참선하는 이들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은 습관적으로 절에 다는 것 같다.
부모 따라, 친구 따라, 스님 따라 절에 가는 것으로 스스로 가는 게 아니라 '따라' 가는 게 절이다 보니..
받는 것이라면 모를까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게 별로 없다.
이래서는 에이아이 시대에 견디기 어렵다. 해서 마음 자세가 바뀌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절맛을 느끼는 것.
절에 가면 주로 하는 게 예불과 축원으로 불보살님께 예를 올리는 것이 예불이요, 그곳에 온 이들에게 스님이 올리는 축원이 그것이다.
절맛이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는 예불이나 축원 시간에 그저 따라만 해도 세상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재울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예불을 올리면서 짜릿한 맛을 느끼고, 축원을 들으면서도 짜릿짜릿한 맛을 느껴야만 한다.
그래야 더 큰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 이때 느끼는 짜릿한 맛을 절맛이라 한다.
절에가면 이것 저것 일을 시킨다.
전에는 안할 수 없어 하는 척 했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일에 참여하면서 짜릿한 절맛을 느껴야만 한다.
살다보면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스트레스가 드물지만 닥친다. 그럴 경우 무엇을 해야 할까..
절에서는 삼천배를 시킨다. 삼천배하면 일반인들은 성철큰스님을 연상하지만..
그전부터 집안에 커다란 우환이 생기면 불자들은 절에 가서 삼천배를 종종 했다.
성철스님은 앞으로 삼천배가 더욱 필요한 시기가 올 것임을 알고 장려한 것이다.
그런데 삼천배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한라산 백록담 등산이나 일반 그랜드 캐넌 등산보다 훨씬 어렵다.
오죽하면 삼천배를 너끈히 하는 이들을 '절꾼'이라 할까.
지금 중년을 넘긴 이들은 그나마 에이아이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행복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라고 있는 청소년과 아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각 종교는 그들에게 대처법을 가르쳐야만 하리라.
불교는 절맛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야만 하고, 절꾼들 역시 많아져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 '따라' 옆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K-문화가 세계에 전해지듯 성철스님이 장려한 삼천배가 미국과 세계에 전해져
많은 젊은이들이 스트레스를 극복하며 행복한 날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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