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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미·중 패권 다툼에 일본의 부활까지…격화된 반도체 전쟁
중앙일보
입력 2023.05.23 00:10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운데)는 지난 1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삼성전자 등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 7개사 대표와 만났다. 마이크론이 5조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투자 유치를 끌어냈다. 연합뉴스
G7의 대중국 공조 강화에, 중국은 마이크론 구매 제재
정치·안보까지 얽힌 공급망 경쟁, 기술·외교가 승부처
반도체 전쟁의 시대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 반도체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한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도 재편 수순을 밟고 있다. 자체 기술력을 키워 해외 의존도를 낮추려는 중국의 행보를 미국은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 대중 압박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대응 수준을 높일수록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도 타격을 입는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일본 히로시마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반도체를 둘러싼 이런 지정학적 패권 다툼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상회의 후 발표한 66개 항목의 공동성명에는 각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압박하는 구체적 액션 플랜이 담겼다. 미국이 “G7 차원의 전례 없는 공조”라고 흡족함을 표시할 정도로 수위가 높았다. 각국은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탈 위험, 위험 요소 제거를 위한 제한적 조치)이라는 다소 완화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중국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못 박았다. 경제 보복과 희귀 자원 무기화 등 중국의 불공정한 경제적 강압에 맞서는 신규 플랫폼을 신설하고, 핵심 광물과 반도체·배터리 등 중요 물자의 안정적 공급망을 강화하는 파트너십도 구축하기로 했다. 또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에 쓰일 수 있는 첨단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규제 필요성도 언급했다.
당장 중국은 발끈했다. G7 공동성명이 나온 날 네트워크 보안을 문제 삼아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품의 구매를 중지시켰다. 표면화된 미·중 간 반도체 전쟁 이후 첫 대미 제재다. 그 여파는 물론 향후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가 마이크론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주목거리다. 지난 4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이 미국 반도체 구매 중지에 나설 경우 한국 반도체가 부족분을 채워주지 말 것을 바이든 정부가 한국 측에 요구했다고 보도했었다. 한국이 단기 반사이익을 얻기보다 중국이 자체 점유율을 높여 중국 반도체 기업의 부상을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한국으로선 중국의 굴기만큼 일본의 부활도 무섭다.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추락했지만 최근 정부 차원의 재건에 나서 일부 결실을 보고 있다. G7 개막 전날인 1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한자리에 모아 삼성전자 등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3곳으로부터 투자 약속을 받아냈다. 마이크론은 5조원을 들여 일본에서 차세대 D램을 생산할 계획이고, 삼성전자와 대만 TSMC도 일본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근간이다. 반도체의 경쟁력을 잃으면 한국의 미래도 없다. 기술 우위 확대는 기본이고 안보동맹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할 외교적 노력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