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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반여량은 아침 일찍 구궁산이 마주 보이는 맞은편 측산에 올라
구궁산을 바라보기에 여념 없었다.
구궁산... 묘한 산이었다.
양맥(陽脈)은 직선으로 내리 뻗어 굽이진 비탈길로 흘러간다.
비탈길 너머에는 또 다른 산이 있어 양맥을 이어받고, 그 옆은
깊이를 알수 없는 계곡들이 늘어섰다.
음기는 반여량이 보는 쪽에서 양맥 오른쪽으로 넓게 흐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그만 촌락(村落)이 형성되어 있다. 음기가
퍼져 있는 산에.
반여량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무들이었다.
산이란 자정능력(自淨能力)이 있어 음과 양의 기운을 고루 분
배하기 마련이다. 양기가 성한 양맥은 능선을 만들어 흰 바위
가 드러나게 하고, 음기가 성한 음맥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음
기를 흡수케 한다.
음기가 성한 땅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양목(陽木)이라 음기를 중화시키고, 그런 땅에서야
인간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촌락이 형성된 곳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베어내지 않았으면 저리 될 리가 없는
것을.
음양불화지(陰陽不和地)...'
음기가 유난히 강하고 양기가 약한 땅이었다.
저런 땅이라면 아무리 양순한 여인이라도 기질이 드세지기 마
련. 또한 사내는 음기에 치여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객지
(客地)에서 들어온 얌전한 여인이라도 두 달만 저곳에서 생활
하면 억척스럽게 변하리라.
일부러 음양불화지를 만들었다? 음기가 넘쳐 사내가 기운을 차
리지 못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분명한 것은 저 촌락에서 알지
못할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 바로 장주가 찾는 땅이요,
탈명화검을 죽인 사람들이 은거하고 있는 곳이다.
반여량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좌정(坐定)했다.
이른 새벽은 기를 읽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음기와 양기
의 배합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목소
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눈을 부릅떠 촌락을 응시했다. 머릿속을 텅 비우고 의념(意念)
을 이끌어 자연의 일부로 들어갔다.
자연과의 동화(同化).
육신도 자연이다. 고정된 생각을 버리고 자연의 기운을 전신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 양기가 센 소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자신
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오듯이, 기를 받아들인다는 생각조
차 없어야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느낌이 오는 대로 받아들
인다.
세상의 기운은 종류에 따라서 색깔이 다르다.
음기는 대체로 청색, 아니면 녹색을 띤다. 양기는 황색 아니면
적색이다. 아기를 못 낳는 부부가 남근석(男根石)에 지성을 드
린 후 아기를 낳았다면 틀림없이 음기나 양기를 얻었던 게다.
음기를 받았다면 딸을, 양기를 받았다면 아들을. 종종 딸만 낳
는 사람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리는데 그 위에 서린 기운을 잘
살펴야 한다.
지기(地氣)는 푸른색이다. 수기(水氣)는 지기와 반대로 황색이
다.
이런 기운들은 인체에 유익한 기운들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성질. 빛무리처럼 밝게 퍼져 있으면
좋은 기운이고, 뱀이 똬리를 틀듯이 둘둘 말려 있으면 인체에
해로운 기운이다.
"허억...!"
반여량은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다시 느껴진다. 악마적 기운, 살기(殺氣)였다.
감여가가 말하는 살기는 무인들이 말하는,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 드러나는 잔혹한 기운과는 의미가 달랐다.
자연이 내뿜는 사기(死氣)를 인간이 받아들여 다시 분출하는
것을 살기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죽음을 평안하게 받아들이는 사
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임종시에는 누구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특유의 기운을 내뿜는다. 이것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지 않고 이승을 떠도는데 감여가들은 이것을 잔여영기
(殘餘靈氣)라 부른다.
사람이 죽으면 고인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태우는 것은 인간에
게 해로운 잔여영기를 소멸시키는 방책이었다.
한을 품고 죽은 사람, 피살된 사람, 역병에 걸려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소멸되지 않은 잔여영기는 자연에 파고들어 죽은 기운, 사기
(死氣)를 형성한다.
'어쩐지 으스스해.'
사기를 느꼈기에 하는 말이다.
'어디 아파?'
'아니.'
'그런데 왜 얼굴이 썩은 돼지간처럼 그렇게 검어? 눈에는 핏발
도 서고 말야.'
사기가 깃든 곳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 곁에는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섬칫한 기분이 든
다. 사기가 인간에게 배어들어 살기로 정형화되기 때문이다.
반여량이 느끼는 기운은 바로 그런 기운이었다.
마을 전체를 휘감은 색은 검은색이었다. 사기였다. 그것도 잔
잔히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천둥 번개가 몰아치듯이 마구 꿈
틀거렸다. 조그만 분출구라도 있으면 거세게 뛰쳐나갈 기세였
다.
냄새도 맡아졌다. 오뉴월에 생선 썩는 비린내. 어제 저녁 먹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역한 냄새였다.
파아아아...!
분출구를 발견한 사기가 거세게 밀려들었다. 무형의 기운에 불
과하지만 같은 주율로 파고든 반여량은 좋은 분출구였다.
"헉!"
반여량은 화들짝 놀라 동기감응을 풀어 버렸다.
청붕성에서는 이 기운의 정체를 몰라 받아들였다.
어떠한 악기(惡氣)라도 이겨내는 것이 동기감응 아닌가. 그렇
게 하기 위해서 미친놈이 될지도 모르는 동기감응을 익히지 않
았던가. 뇌력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동기감응을 펼칠 수 없다.
무형의 생각을 형상화하여 마음을 지키고 사이한 기운을 몰아
내는 힘으로서 존재할때 비로소 동기감응을 펼칠 수 있다.
마음의 중심을 고정시키기 위해 번뇌와 싸웠던 나날이 며칠이
던가.
하루 십이 시진 동안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은 또 몇 번이나 느꼈던가. 눈으로 보는
기운은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골교처럼 찰싹 달라붙어 낮이
고 밤이고 괴롭히던 순간들.
스물네 살에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마음 속에 부동심이 굳건히 자리했다. 세상 어떠한 기운이라도
누를 수 있고, 읽어들일 수 있다. 비보감여를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마련된 셈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악마적 기운과 부딪치는 순간 부동심은 여지
없이 흔들렸다. 거센 물길에 휩쓸린 나뭇조각처럼 정처 없이
떠다녔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서... 느낀 기운이 약해서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악마적 기운의 본체다. 지파(支波)를 읽어도
그랬거늘 본체와 부딪친다면.
"하아... 하아...!"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아직도 몸을 어루만지듯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기운들.
"안 돼. 나는 상대가 안 돼. 저 흑색 기운은 사기(死氣). 다
죽는다. 저곳에 들어가면 다 죽어..."
반여량은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으응? 추풍이 말한 대로야. 나는 추풍처럼 감응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저곳이 음지라는 것은 첫눈에 알 수 있어. 확연해.
이상하군. 누가 나무를 베어 버렸을까?"
일행 중 오직 산귀만이 말할 자격이 있었다.
"껄껄껄! 기운이 어떻게 사람을 죽인다고 그래? 그냥 확 밀어
붙여 버리자구. 그까짓 놈들 쯤이야..."
정진결은 반여량을 몰랐다. 그렇기에 그런 소리를 서슴없이 했
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여태까지 많이 보아왔다. 최근
에는 기운만 읽고도 흑의인이 급습한다는 것을, 상대가 장춘이
라는 사실까지 정확히 읽어내지 않았는가.
"정말 방법이 없나?"
"없소."
"음...!"
윤명은 곤혹스런 침음성을 뱉어 냈다.
이제 다 오지 않았는가. 저곳, 눈에 빤히 보이는 촌락만 없애
버리면 곽가장 차기 장주는 따놓은 당상인데. 장주는 어쩌자고
공격 방법을 일러 주지 않았단 말인가.
윤명도 홍홍록록이란 작호를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싸움을 치
러왔다. 하지만 비수당을 급습하는 흑의인들은 그가 상대해온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이것
처럼 기가 질리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불을 지르면 어떨까?"
답답해서 해본 소리였다.
촌락이 있는 산은 삼십여 장에 걸쳐서 허허벌판이다. 하지만
촌락에 깃든 악마적 기운이 음의 정화라면, 불은 양의 정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은연중에 내포된 말이었다.
"..."
"제길!"
'장주님은 왜 이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은 거지? 몰랐나? 하기
는 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윤명은 장주에게 지시를 받지 않고는 공격을 감행할 자신이 없
었다. 비화당 무인 사백 명이 합류했지만 비수당 이백 명보다
도 약해 보이는 전력이 미덥지 않았다.
"함상, 천광탄을 쏘아라. 지금 상황을 모두 전달할수 있겠나?"
"곤란하오."
함상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곤란해? 천광탄은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
"먼저... 천광탄을 육안으르 식별할 수 있는 거리는 육십 리에
불과하오. 곽가장 분타가 있는 건창성까지는 사백이십 리. 건
창분타에서 천광탄을 터트린다면 모를까."
"제길! 결국 누군가 건창분타로 가야 한단 말 아닌가."
난감했다. 어떠한 고초를 다 겪으며 지나온 협곡이던가. 그곳
을 다시 오가야 한다니. 비화당주 정진결은 협곡에 아무도 없
다고 말했다. 협곡에서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놀란 듯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협곡
에 아무도 없다는 것.
"어허! 그냥 공격하자니까 그러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뭐가 보인다는 거야? 껄껄! 무인은 검만 믿으면 되지
또 뭐를 믿는다고..."
정진결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윤명은 울컥 울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자신있으면 어디 공격해 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
러나 결과가 뻔하지 않는가. 반여량이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안 되는 일에 그렇지 않아도 시원찮은 전력을 소모시
킬 수는 없었다.
"상영(常英), 네가 가라. 급류를 따라가는 길이니까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오고 가는데 칠주야(七晝夜) 준다. 그 안에 갔
다 와."
"존명!"
일심각 무인 중 키가 유난히 크고 몸이 빼빼 마른 무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각주! 그럼 여기서 칠주야나 무료하게 지낸단 말야? 나, 백척
간은 그렇게 못 하겠어. 이거야 원 계집애들하고 노닥거리는
게 낫지, 무슨 사내들이 간덩이라고는 조막만해서..."
"정당주, 말 다했나?"
윤명의 얼굴이 차게 굳고, 눈가가 좁혀졌다. 살기가 일었다는
증거였다. 여기서 눈가의 잔주름이 꿈틀하면 여지없이 단창이
쏘아진 것은 널리 알려진 고벽(古癖)이지 않은가.
"뭐? 정당주? 말 다했냐? 어린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껄껄! 한
수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지. 젖비린내 나는 놈."
정진결은 두어 걸음 물러서며 청죽간(靑竹竿)을 쑥 내밀었다.
일명 백척간이라고도 불려지는 청죽간은 청죽으로 만든 낚싯대
였다.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강태공(姜太公)을 흠모하여
위빈지기(渭濱之器)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니. 그가 독문
병기로 낚싯대를 택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길이가 일곱 척으로, 낚싯대치고는 조금 작은 낚싯대. 하지만
백척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곽가장 제조각주(製造閣主)
만수일귀(萬手一鬼)는 일곱 척의 청죽을 조차(租借:오늘날의
닐) 형태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낚싯줄에는 사금(砂金)을 먹여
웬만한 보검으로도 끊어지지 않았다.
정진결, 그의 외호(外號)는 병기에서 따온 별칭이었다.
"후후후!"
윤명은 잘게 웃었다.
곽가장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지만 세 여서들만 못했
다. 장주가 여서들에게 독문무공인 삼혼검법 전부를 전수하여
탈태환골(脫胎換骨) 시켰다는 사실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점을 빤히 알면서도 정진결이 백척간을 꺼내
든 것은 이 기회에 자신의 입지를 좀더 높여 보자는 속셈이리
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싸움이 안 된다. 아랫사람들은 그
렇다해도 처체 곽소연이 있지 않은가. 마음 여린 그녀가 공격
을 앞두고 분란이 일어나는 모습을 방관할 리 없다. 정진결은
이런 점을 믿고 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왜들 이러세요? 지금이 싸우실 때에요?"
곽소연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정진결과 윤명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금은 서로가 힘을 합쳐도 어렵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들..."
"정진결! 후훗! 어린놈이라는 말... 기억해 두겠다. 너는...
내가 이번 싸움에서 죽기를 바라야 할 거야."
"껄껄껄! 망나니 같은 놈... 오 소저,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가
겠소. 그 동안 저 친구들에게 치마나 입혀 주구려. 푸하하핫!"
'응?'
윤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늙은 너구리라 할지라도 이만하면 물러서야 한다. 하지
만 계속 다그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속셈이 또 있다는 말
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다니.
사태는 오히려 윤명,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정진결이
부득불 공격을 개시하겠다니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고 놈의 말대로 치마나 입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상영, 너는 지금 즉시 출발해라."
윤명은 정진결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명을 내렸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어린놈이 되게 말을 안 듣네. 할 수 없
지. 어린놈 받아라. 장주님의 전서다."
정진결은 품속에서 곱게 접힌 서신 한 통을 꺼내 땅바닥에 홱
던져주었다. 그것을 곽소연이 집어 윤명에게 가져왔다.
"저부, 화 푸세요."
"..."
윤명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던지면서 장주의 서신을 빼
앗다시피 받아들었다.
- 명(命).
모든 권한을 비화당주 백척간 정진결에게 위임한다.
곽가장 모든 무인은 비화당주의 명에 절대 복종하라.
장주 곽모전.
윤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신을 받을 때부터 들기 시작하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아니, 비화당주가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 들었던 불안감이다.
장주는 왜 이런 명을 내렸을까. 차기 장주가 있는데...
"우리 일심각은... 비화당주의 명을 받는다."
이윽고 윤명의 입에서 차마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 떨어졌다.
'너구리... 장주의 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야 서신을 보여
줘! 나를 비웃고 싶었다 이거지. 좋아, 이 일은 장에 돌아가면
반드시 셈 해주지.'
윤명은 장주의 서신을 북북 찢어 버렸다.
능공십자 학구는 신발을 벗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비
수당원 세 명과 함상도 맨발이 되어 땅을 디뎠다. 반여량을 흉
내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맨발로 걷는 것. 이것은 전장
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터득한 본능 중 하나
였다. 예민한 촉각, 그리고 소리 제거.
"껄껄껄! 그 동안 감여가와 어울리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
이지? 왜 그래? 산길을 맨발로 걷겠다는 거야? 껄껄! 다 좋아.
하지만 짐이 되었다 싶으면... 굶어 죽을지언정 썩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비수당원들이니 잘 알아서 하겠지?"
정진결이 비웃으며 지나갔다.
학구 일행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결과는 싸움이 벌어지면 나타나리라. 비화당주의 일신 무
공이 높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비화당원들까지 높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실전 경험이 빈약하다. 비화당주도
집단과 집단이 어우러진 싸움터에 서본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비웃을 수 있는 게다.
"함상, 석수는 어떻게 할 거야?"
학구는 함상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꼈다. 그가 준
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함상 역시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
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경험이 미숙한 자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처지가 같다. 곽가장에서는 별로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사이였지만, 지금은 오래 전부터 친근했
던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오 소저와 산귀가 돌봐 주기로 했어."
"추풍은? 같이 가나?"
"후후후!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돌보겠다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무엇이 겁나나?"
"위험할 텐데..."
학구는 진정으로 걱정했다.
자신들보다는 십 년이나 어리고, 살아온 세계가 전혀 다르지만
그와 지내온 나날은 친동생 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
에는 단지 '이런 놈도 있구나' 하는 감정에서 그쳤지만, 오행
상극이 얽혔다고 하는 그 산에서 굳이 죽음을 볼 필요없이 돌
아가자는 말을 들었때는 벅찬 감정이 들끓었다. 그 죽음이 누
구의 즉음인가, 전부 비수당의 몫이 아니던가.
"위험하지. 하지만 만류하지는 않았네. 그가 나서주는 것이 우
리의 희생을 줄이는 길일지도 몰라."
"그건 그렇지만... 문이(文易), 한사(韓獅), 오덕(吳德). 너희
들은 추풍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써라."
"후후! 대주, 걱정 마십시오."
"내 몸이나 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진 빚은 갚겠습니
다."
겨우 살아 남은 세 명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숲속에도 비수당원은 당주와 아적만이 남아 있다. 살아남은 사
람들은 겨우 여섯 명. 비수당은 일도 아닌 것 같던 이번 여행
에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함상, 동목이 숲속에 있다."
"뭐!"
"쉿!"
학구는 비화당과 일심각의 동태를 살피며 나직이 소곤거렸다.
"얼굴이 반쪽이더라. 다행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보이고."
"그럼 비수당주님도 숲속에 있단 말야? 돌아왔어?"
함상의 음성도 귓속말처럼 나직했다.
"전부 죽었다. 숲속에는 단 세 사람만 있어."
"그럴 수가!"
"우리 뒤를 따라올 거야. 일심각과 비화당에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유는 나도 몰라."
"알았어."
함상과 학구는 등에 간단한 바랑을 짊어졌다. 이래야 한다. 야
습은 되도록 간단한 복장으로 감행해야 한다. 행여 숲길에 걸
리적거리는 것이 있으면 아무리 귀중한 보옥이라도 버려야 한
다. 야습에 성공하고 싶으면.
그런데 비화당 무인들은 술추렴하기에 바빴다. 의기(義氣)를
북돋우려는 생각이었다. 아니다. 술이란 약(藥)보다 독(毒)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이 그랬다.
"상상할 수 없는 강적을 앞에 놓고 술추렴을 하는 것은 내 목
을 떼어가라는 말과 진배없는데. 비화당주는 적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어. 한바탕 드잡이질만 하면 싸움이 끝날 줄로 착각하
고 있어. 무식하지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닌데."
학구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비화당주는 오히려 긴장하고 있어. 그
는 정말 싸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야."
함상은 아무 걱정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화당은 성격이 탁 트였다는 무인만 간추려 놓은 곳이다. 그
런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백척간은 받아들
이지 않았다.
'무인은 항시 긴장해야 합니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해악.
마셔서는 안 됩니다.'
'하하! 원래 체질이 술에는 약해서...'
그들은 모두 비화당에 머물지 못했다. 사내라면 청탁불문(淸濁
不問)하고 두주불사(斗酒不辭)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
다. 그런 기질들을 가진 사내들이 모인 곳이라 한두 잔 술에
취기(醉氣)를 느낄 리 없었다. 그는 죽음이 무엇이란 것을 알
기에 수하들이 죽기 전, 그토록 즐기던 술이나마 한 모금씩 먹
고 가라고 술추렴을 베푼 것이다.
"앞으로가 걱정이군. 일심각주와 사이가 틀어졌으니."
"그건 그래. 하필이면 일심각주에게..."
함상은 정대의 국주인 관계로 정진결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는 절대 흑심(黑心)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설혹 그런 마
음을 지녔다면 안으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낼 사람이었다.
일심각주에게 백척간을 빼든 것은 그의 욱! 하고 치받치는 성
격 때문이었지 다른 뜻이 있지는 않았다. 누가 자신을 면전에
서 무시한다면 일심각주가 아니라 장주라 할지라도 악악거리며
대들었으리라.
장주의 서신을 늦게 전한 것은 오로지 윤명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장주는 모든 일의 결정권을 정진결에게 주었지만 어떻게 장주
의 사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랴. 그의 체면도 살려주고, 일
도 원만히 풀어가는 길은 같이 상의해서 움직이는 것. 그런데
미련하게 윤명이 결정권을 가지려 한 것이다.
함상은 정진결이라는 사람을 알기에 지난 일을 추론할 수 있었
다.
"괜찮겠지. 모두 곽가장 사람이니까. 그보다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끌 생각해. 살아야 하니까."
사사사삭...!
숲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혹여 풀잎에 옷깃이라도 쓸릴까봐
극히 조심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맹이고, 마른 나뭇가지
도 밟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비수당과 일심각이 그토록 무시하는 비화당이지만 그들 역시
곽가장의 정예무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강서성 전역에 걸친
사십여 분타에서 추리고 추린 무인들. 곽가장에서만 힘을 쓰지
못했지 강서무림계에서는 가장 폭급한 무인들로 정평이 나 있
는 터였다.
병장기를 불끈 쥔 손에는 힘이 가득했고, 두 눈은 고리눈처럼
홉떠져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연상시켰다.
제일 선두는 함상과 학구가 맡았다.
그들은 흑의인들과 가장 많은 접전을 치렀기에 공격습성을 잘
파악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두 번째는 일심각 무인들.
기습을 당했을 때, 가장 유효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강한
무공이지 않겠는가. 윤명은 이를 악물며 정진결의 명을 받아들
였다.
말이야 좋지만 속셈은 극명했다. 비수당과 일심각이 기습을 받
으면 비화당이 일거에 정리하겠다는... 일종의 미끼였다.
'능구렁이, 장에 들어가서 보자.'
윤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수하들이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합류했어도 벌써
합류했어야 할 놈들이.
<협곡을 지나 구궁산에 이르면 일심각 무인들 절반을 추려서
정찰을 보내라. 그 사이, 다음 행동을 지시하겠다.>
내키지 않았다. 윤명은 자신의 세력이 분산되는 것을 가장 싫
어했다. 하지만 장주의 명령이니. 그들은 감전(甘甸)이 이끌었
고, 곧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코빼기조차 볼 수 없다니.
윤명은 일심각 무인 열네 명만으로도 비화당 정도는 자신있었
다. 비화당 전체를 감싸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막상 비화당과
싸움이 벌어진다고 가정하면 이십 대 일도 넘는 절대적인 열세
였다. 하지만 무인들에게 숫자 개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쥐새
끼 이십 마리가 달려든다고 호랑이를 어쩔 수 있느냐 말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숲에 들어오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는
오직 눈앞의 적, 흑의인들을 전심전력으로 상대해야 한다.
사사사삭...!
함상과 석수는 빠른 속도로 나갔다.
그들 뒤에는 반여량이 따라붙으며 특유의 감각을 최대한 열었
고, 다시 반여량의 주위에는 비수당 무인 세 명이 바싹 밀착되
었다.
"음! 시신...!"
숲에 들어서서 삼십 장쯤 나아갔을 때, 반여량의 입에서 처음
으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신이라 했나?"
학구의 반응이 제일 기민했다.
"음! 시신이 맞소.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럼..."
"썩는 냄새가 그렇소."
"크큭!"
갑자기 학구가 숨을 죽이며 웃기 시작했다.
"왜...?"
"큭큭큭! 아니,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말야. 감여가가
되려면 코도 개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끄응...! 무인이란 사람이 신경을 어디다 쓰는 거요? 썩는 냄
새가 풍기면 먼저 알아차려야지."
반여량은 악의 없는 농담인 줄 잘 알기에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 여유 있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사실 반여량은 아침녘에 느꼈던 악마적 기운을 생각
하고 바싹 긴장한 상태였다.
"후후후! 그런가? 좋다. 그럼 하나만 묻자. 시신이 어디쯤 있
지?"
"이십 장만 더 가면..."
"푸훗!"
이번에 웃은 사람은 함상이었다.
그는 협곡의 혈전 이후로 어느 정도 마음에 평화를 찾은 듯했
다.
"그것 봐. 이십 장 밖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게 정상이야, 못
맡는게 정상이야?"
학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가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무섭게 긴장하고 있었다. 당주로부
터 일심각 무인들이 죽었다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바로 전면
이십 장 앞에서 최초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야영
지(野營地)로부터 오십 장이라 했으니, 반여량이 정확하게 읽
은 것이다.
"문이, 한수, 오덕! 준비해라."
비수당원들의 신법이 갑자기 영활해졌다. 그들은 전신 진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반여량을 둥굴게 에워쌌다.
'놈들은 제일 먼저 나를 공격할 거요.'
'그렇게 단정짓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
'후후후! 이유를 말하라... 감응을 말하라는 것과 같은 소리인
데 그건 못하겠소. 후후! 사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소. 촬
관(撮觀)하라. 느낌을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 자체를 받아들
여라. 동기감응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요.'
'그럼 자네를 제일 먼저 죽이려 한다는 것도...'
'오늘 아침에 읽은 기운... 엄청난 살기였소. 생기와 살기는
극성. 생기는 사기를 다독거리는 반면 사기는 생기를 흡수하려
는 성질이 있소. 삶은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데 죽음은 삶을 끌
어당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지. 휴우! 어쩌면 지금 걷는 길이
마지막일 수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다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비화당이나 일심각은 어떤 마음인지 몰라도 비수당원들은 오로
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추풍을 보호하라는 장
주의 명령도 절대 절명의 과제였다. 은원을 떠나서 맡은 바 임
무는 철저히 완수하는 것이 비수당의 명예이니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흑의인들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 환히 안다는 것. 어찌된 영문인지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사대사혈만 공격하는 검법에도 익숙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데에는 적어도 대여섯 명씩은 베어야 했으니까.
"시신이다."
함상이 자그마한 소리를 발하며 전방을 가리켰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김사합니다
포근한 밤 되세요...
즐~~~감!
고맙습니다
즐감합니다.
즐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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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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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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