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일러' 혜안"(慧眼)이라 하는지 아는가.!
사과를 보고 사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가진 영양분과 , 종류를 알고 종류에 따라 각 사과를
품평하여 적정히 관리하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
혜안이 없으면 사과의 영양분을 측량할 줄 모르며 보관도 할 줄을 모른다.
심안(心眼), 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지혜, 지혜는 마음을 닦을 때만 보아지고 열린다.
천안통(天眼通)이란 뭘까.?
부처님만 가지시고 특별한 수행자만 터득한 것이 천안통이 아니다.
남의 아픔을 볼줄 알고 남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내는 사람이면 천안통을 가진 사람이다.
알고 보면, 우리모두는 순수한 천안통을 가진 수승한 사람들이다.
다만 알고도, 자기 기만에 빠저 자기도 묵인하며 남도 묵인하며 살아가고 있어 망각하고 있을뿐이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 눈을 가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가지고도 모르고 산다.
자기 창조를 하라, 창조를 하고 사는 사람은 고통이 따라도 행복한 사람이고. 남의 기존에 끌려 의식이 경직되고, 자유롭지 못하면 불행한 삶이 되는 것이다. /
석가부처님께서 염려하는 것 가운데..
당신의 가르침을 부처님 입장에서 헤아리려는 노력보다 자기 입장에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있다.
그런 현상을 말세라고도 부를 만큼 매우 염려스러운 것으로 본다.
불교의 무아론을 들은 인도의 힌두교에서 비판하길.. "무아라면.. 사자가 병아리를 낳을 수도 있겠군요^^" 했다는데..
당시 상좌부에서 어떻게 반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내가 그 말을 들었더라면..
"당신은 이미 병아리를 낳았군요." 했으리라.
본 뜻을 분명히 알면서 상황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을 방편이라 하는데..
그런 방편이 본 뜻을 왜곡하여 바른 길을 헤매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길이 아닌지..
아함경에는 삼명이라 하여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이 나온다.. 그 뜻은..
삼명〔tri-vidya(산스크리트어), ti-vijjā(팔리어)〕은 붓다나 아라한이 가지는
숙명지명(宿命智明) · 천안지명(天眼智明) · 누진지명(漏盡智明)을 말한다.
지명(智明)이란 vindati(√vij, to know)에서 파생된 명사로 ‘꿰뚫어 앎’이라는 의미다.
각각 전생을 보고, 내생을 보고, 현생에서 번뇌를 모두 끊을 수 있는 지혜이다.
삼명은 천안지 · 숙명지 · 누진지라고 부르며, 숙명통(宿命通) · 천안통(天眼通) · 누진통(漏盡通)이라고도 한다.
① 천안지명: 자기나 다른 사람의 미래 세상에 대한 일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본다. / 백과사전
이라 하여
천안통은 사람들의 미래를 보는 눈이요, 지혜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것을 "수행자만 터득하는 게 아니고, 남의 고통을 보고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을 천안통.. "이라 하여
자기만의 설명으로 둔갑시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천안통은 수행의 과보로 남겨두고, 남의 고통을 함께 하면서 고통을 해쳐 나아가는 자를 보살이라 하듯..
보살행으로 설명하면 낫지 않을까..
밖에 나가면 그저 보고 만나는 게 고통을 겪는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아도 덤덤하게 지나친다.
보살이라면 그런 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리라. 그들의 고통이 바로 자기 고통으로 느껴지기에..
범죄와 전쟁이라고 하는 데..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 가운데 범죄를 즐기는 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그들의 형편이, 상황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하고 있다.
보살이라면 그들을 어떻게 대할까?.
범죄자를 내치지 못하는 의리의 형사를 드라마에서 만나면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비록 보살행은 당장 하지 못하지만 보살 마음은 우리 공통의 마음처럼 자리하고 있음이다.
그것은 천안이 아니다.
그것은 보살의 마음이요 보살의 눈이다.
숙명통이나 천안통이 삼명에 있는 이유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 역시 고통스러운 삶에서 허우적이는 것을 환히 보아..
그런 자신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지금 여기서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토록 함이다.
하여 지금 여기서 고통이 없는 누진의 능력[누진통]을 깨치라고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나온다.
육안이란 불교에서는 중생이라 불리는 보통 사람의 보는 능력으로.. 일반인이 보는 능력이다.
천안은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하늘의 신이 보는 능력이듯, 전생과 내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천안의 신들은 욕탐이 문제임을 분명히 알지만 스스로 욕탐을 멸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욕탐이 일으키는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다.
신들의 노여움이 나오는 이유다.
혜안과 법안은 설명이 순일하지 않으니..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그 수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굳이 설명하면
혜안까지는 나와 너, 세계가 분별되어 있는 존재 세계에서 주체인 내가 보는 능력으로..
괴로움은 욕탐에서 생기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스스로는 욕탐을 멸하려 하고, 상대에게는 욕탐을 줄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법안은 주체가 있지만 실은 주체인 나는 없다는 욕탐을 멸한 무아를 알고 보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법안 수준에 이르면 내가 행하지만 내가 없음을 알아 나에게 거의 걸림이 없다.
삼학이라 하여 계학, 정학, 혜학이라 하는데.. 이때 혜학은 무아와 공을 설명하고 있으니..
법안을.. 더 나아가 불안까지 포함하고 있는 게 된다.
불안은 '부처는 부처만이 본다'라고 하듯.. 부처만이 보는 능력으로..
부처가 아닌 우리는 설명 조차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능력이라 하겠는데.. 억지로 말하면
욕탐이 없어 내가 없는 무아인 가운데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고 있다.
즉 부처님은 자아가 없이 행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마치 자아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처님이 80세에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부처 스스로는 오고 감이 없다고 하신다.
불안이 되면 스스로는 일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가 저절로 일어나 언행이 온통 자비행이다.
무엇을 일러' 혜안"(慧眼)이라 하는지 아는가.!
사과를 보고 사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가진 영양분과 , 종류를 알고 종류에 따라 각 사과를
품평하여 적정히 관리하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
혜안이 없으면 사과의 영양분을 측량할 줄 모르며 보관도 할 줄을 모른다.
심안(心眼), 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지혜, 지혜는 마음을 닦을 때만 보아지고 열린다. /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즉시 모든 지식을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일반적인 것에 식상한 사람들을 깨우려다 보니 더욱더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
의도는 알지만 그 효과는 좋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르게 올라가면서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야지..
앞을 잘 모른다고 아는 길마저 삐딱하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과나 해삼, 너구리 영양분을 측정하는 어느 연구소에 취직해 그 성분을 정확히 측정하는 직원이 되면..
당신은 혜안이 생겼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과학자는 수행자가 되어 닦으면 천안통이, 혜안이 열릴 수 있지만..
과학자는 혜안을 가진 자가 아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