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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죽음보다 두려운 공포 (一) "어헛! 저럴 수가!" 정진결은 너무 놀란 듯 부르르 치를 떨었다. 미친 듯이 달려나가던 방효광을 단 일검에 베어 버린 흑의인은 두팔을 활짝 벌리고 야공을 향해 부르짖었다. 이아아아악...! 손에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박도(朴刀)를 들었고, 머리는 치렁 하니 길러 허리까지 늘어진 흑의인, 키가 무척 작고, 등이 굽 은 곱추였다. "공격하라!" 양대는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흑의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양대는 십인일조(十人一組)로 십방진(十方陣)을 수련한다. 각 기 순번을 매겼고, 순번에 따라 공격하는 부위도 다르다. 비화 당이 곽가장 사당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까지는 양대의 십 방진과 음대의 화화진(花花陣)이 크게 공헌했다. 십방진은 두 개로 분류되었다. 단순히 열 명이 일개조로 펼치면 소십방진(小十方陣), 소십방 진 자체가 일각(一角)을 담당하여 열 개의 십방진이 윤회하듯 돌아가면 대십방진(大方十陣). 소림사(小林寺)의 나한진(羅漢陣)을 본떠서 만들었으되, 나한 진이 봉(棒) 일색인데 반해 십방진은 개개인마다 지닌 병장기 가 각기 달랐다. 방위에 상응하여 가장 적절한 병기를 고른 까 닭이었다. 그렇기에 나한진보다 적은 인원으로 펼치면서도 그 에 상응하는 공격 효과를 가져왔다. 방효광이 빠진 아홉 명은 소십방진을 펼쳤다. 이방(離方)은 남쪽이다. 그는 두 눈을 노려야 한다. 눈이란 사물을 보는 기능을 가진 것, 제일 먼저 공격해야 할 곳이다. 당연히 병기는 손으로 쳐내는 화살, 솔수전(率手箭). 서쪽에 있는 자는 태방(兌方)이다. 그는 상대의 호흡을 뺏어야 한다. 솔수전이 눈을 노리고 날아간 사이에 그는 비검(飛劍)을 쳐낸다. 비검은 솔수전과 간발의 차이로 안면을 공격할 것이 다. 상대는 다급히 헛바람을 삭히며 연속적으로 이검을 쳐내야 한다. 어찌어찌하여 신법으로 솔수전을 피했다 할지라도 비검 에 이르러서는 검을 들어야 한다. 동쪽은 진방(震方)이다. 그는 하체를 노린다. 공격이 성공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물러서게 혹은 공중으로 띄우면 된다. 병 기는 쓸어버리는 데 적합한 대초자곤(大硝子棍). 상대가 공중으로 떠오르면 건(乾), 북서쪽에 위치한 당원이 기 다린다. 그는 공중으로 도약하여 상대의 옆머리를 공격한다. 역시 격중시킬 필요는 없다. 상대의 머리기 젖혀지게끔 만들면 성공이다. 병기는 위맹하게 쓸어 치는 낭아추(狼牙鎚). 감방(坎方), 북쪽에 있는 자도 떠오른다. 그가 공격하는 곳은 머리. 옆으로 젖혀진 머리를 가르기에는 아주 이상적이다. 공 중으로 도약하여 내리쳐야 하기 때문에 병기는 쌍수도(雙手 刀). 물러서도 갈 곳이 없다. 북쪽에서 허공을 점한다면 남쪽은 지상을 점한다. 남동쪽 손방(巽方)에 위치한 자는 회음혈(會陰穴)을 노리고 밑 에서 위로 쓸어 올린다. 물러서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병기 는 삼첨양인도(三尖兩人刀). 간방(艮方), 북동쪽에 있는 자는 상대의 병기를 제압한다. 당연히 진을 펼치는 십 인 중 가장 신법이 빨라야 하고 무공 또한 기괴하며 빨라야 한다. 병기는 상대의 병기를 제압하기에 적절한 호수구(護手鉤). 남서쪽 곤방(坤方)에 있는 자는 바싹 다가들어 배를 갈라야 한 다. 가름에는 도(刀), 파풍도(破風刀)를 손에 쥐었으며, 십방 진을 형성한 열 명 중 가장 무공이 신랄해야 한다. 팔괘방위(八卦方位)를 점한 여덟 명이 일시에 공격하면 피할 곳이 없어진다. 당연히 본신 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것이 다. 이때, 감방 위에 위치해 있던 양(陽), 이방 밑에 위치해 있던 음(陰)의 진가가 발휘된다. 양의 성질은 강(剛), 강(强), 고(高), 명(明)이며 능동적이고 남성적이다. 음(陰)의 성질은 유(柔), 약(弱), 저(底), 암 (暗)이며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다. 이 둘은 서로 전화(轉化)한다.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로...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장(消長), 교체(交替)하는 것이 타문파의 진법과 다른 점이었다. 병기는 검(劍)이다. 당연히 검법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었고, 진법을 구성한 열 명 중 최장자들이기도 했다. 팔방을 점유하고 있는 자들의 허리에도 검이 매달려 있다. 하 지만 비화당 무인들은 검보다는 진법 구성에 필요한 여덟 병기 를 극치에 이르도록 익혔다. 지금이 좋은 실례였다. 방효광이 원래 맡은 방위는 건방. 원래 힘이 좋은 데다가, 무 공을 익히면서 중(重) 수법을 더한 탓에 그가 낭아추를 휘두르 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것을 음의 역할을 맡은 자가 대신해 휘둘렀다. "아아악...!" 흑의인의 입에서는 괴음(怪音)이 쉴새없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박도도 꽃밭에서 춤추는 나비처럼 너울거렸다. 쇄에엑...! 이건 아니다. 솔수전을 귀 밑으로 흘려보내고, 비검을 박도로 막아냈다. 대 초자곤은 오른발로 차버리고, 낭아추는 왼손으로 잡아 버렸다. 철추는 적편으로 돌아섰다. 머리를 갈라오는 쌍수도를 막은 것 이 바로 철추. 삼첨양인도는 옆으로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무 위로 끝나 버렸다. 박도를 제압하고자 달려든 호수구, 배를 가 르고자 바싹 다가선 파풍도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온 박도에 의해 역으로 당하고 말았다. 날카로운 칼바람, 그리고 터지는 비명, 괴음. 소리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목젖을 노리던 양방(兩方) 무인도 요행을 바라지 못했다. 남서쪽에서 시작해 북동쪽으로 한바퀴 빙글 돈 흑의인은 공중에 떠 있는 무인의 두 다리를 잘라 버렸 다. 실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일 대 십의 대결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십방 진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비화당의 몰락 을 예고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쐐에액! 쐐엑...! 검빛은 한 군데서 흐르지 않았다. 동에서, 서에서... 남에서, 북에서... 천지 사방에서 흑의인들 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혈조수의 살수 비기를 익히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야밤이고 저들은 흑의를 입고 있지 않은가. "아아악!" "커컥!" 처참한 비명은 비화당 무인에게서 압도적으로 많이 터져 나왔 다. "제길! 이거 완전히 당했군. 놈들은 싸우기 좋은 곳으로 우리 를 유인한 거야. 제길! 꼼짝없이 당했어. 이아앗!" 정진결은 독문병기 백척간을 꺼내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일심각도 간다. 최대한 빨리 베어야 한다. 진기의 흐름에 구 애받지 말고 알고 있는 무공 중 최고의 살초(殺招)를 전개해 라. 이 싸움은 누가 빨리 죽이느냐로 결정된다. 가잣!" 어느새 단창을 뽑아든 윤명이 한달음에 달려가 벌써 흑의인 두 명을 고꾸라트렸다. 한 명은 미간(眉間)에, 또 한 명은 인중 (人中)에 창을 맞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파앗...! 일심각 무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풍을 흘려냈다. 과연 일심각! 개개인이 일당의 대주급과 비등하다는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 었다. 전장에 뛰어들기 무섭게 흑의인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 나갔다. '싸우기 좋은 장소? 여기가? 살수들이 싸우기 좋은 곳은 지형 지물(地形地物)이 많은 곳인데...?' 함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활지에서 싸우는 것은 오히려 흑의인들에게 불리했다. 그것 이 바로 눈앞에 증명되고 있다. 비화당 무인들은 십방진을 재 정비하여 흑의인과 맞섰다. 개활지에서만 이런 현상이 가능하 다. 또 하나, 살수들에게 암격을 제외한 싸움이 얼마나 취약한 지는 일심각 무인들을 보면 안다. 수십 마리의 양 떼 속에 뛰 어든 성난 늑대, 꼭 그런 모습이었다. "넷! 넷이야." "뭐라고?" 함상은 느닷없이 들려온 모기만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오급산에서 읽은 기운... 그와 버금가는 자들이 네 명이야. 그중 한 명은 다른 세 명을 합친 것보다 오히려 강해." "으음...!" 그 사람들이 누구라고 굳이 지목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무인지경을 누비듯 비화당 무인들을 베어내는 중 이니까. 뚜렷이 부각되는 놀라운 절공들. 함상이나 학구에게 자연 위축감을 느끼게 만드는 무공이었다. 그 중에서도 곱추 괴인의 무공은 더욱 놀라웠다. 곱추... 그는 미친 황소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며 갈대밭을 쓸 어버리듯이 비화당 무인을 베어냈다. 빠르다빠르다 하지만 이 토록 빠른 도법이 존재할 줄이야. "저자였어. 저자가 살기를 뿜어 냈어. 탈명화검을 죽인 자... 저자야." 반여량은 활활 타는 눈으로 곱추괴인을 응시했다. "인간이... 인간이 사기를 뿜어내다니... 저건 살기가 아니야. 사기야. 죽은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시기(屍氣)야." 반여량의 음성은 눈동자와는 전혀 달랐다. 눈은 불타오르고 있 으되 음성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참담함이 배어 나왔다. 학 구와 함상은 어떻게 한 인간의 몸에서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이 동시에 흘러나오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음...! 추풍의 말이 옳아. 준비들 해라." 곱추 괴인은 겹겹이 둘러싸인 인의 장막을 비단폭 찢듯이 쫘악 찢어버리며 일로 돌진해 오는 중이었다. 이상했다. 그의 곁에는 정진결이 있다. 윤명도 있다. 일심각 무인들도 거 침없이 흑의인들을 베어내고 있다. 그러나 곱추 흑의인은 일절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보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추풍 반 여량뿐이었다. 길을 막지 마라. 막으면 죽는다. 그는 많은 무인들에게 암시를 심어 주었다. 비화당 무인들이 소십방진으로 맞섰지만 가을 가랑잎처럼 나풀 거릴 뿐이다. 그의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의미 했다. 그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내며 반여량을 향해 일로 직진해 왔다. "추풍, 자네 원한 산 것 있나?" "...?" "그렇지 않고서야 저놈이 자네를 노리는 이유가 뭐야?" 학구는 정녕 사기니, 생기니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 간사는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있고, 죽이고자 하는 자는 그만 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 다. 비화당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끼아아악...!" 괴인의 기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만 갔다. 촤르르륵...! 정진결은 백척간의 낚싯줄로 흑의인 한 명의 목을 휘감아 잡아 당겼다. 그의 목은 잘 간 보검으로 베어낸 듯 깨끗이 절단되었 다. 뒤에서 덮쳐드는 흑의인은 낚싯대 손잡이를 뒤로 쭉 빼 복 부를 강타하고, 다시 탄력을 이용하여 옆에서 덮쳐드는 흑의인 을 백척간 끝으로 힘껏 찔렀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검, 편, 창, 봉 등 무수한 병기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백척간. 열일곱 살에 곽가장에 입문하여 장장 삼 십 년이나 수련한 간법(竿法)이다. 전장에 뛰어들어 죽인 흑의인은 벌써 십여 명에 달했다. 그는 잠시 여유를 찾아 전황을 살펴보았다. 음대는 고전이었다. 화화진을 펼친 쪽은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쪽은 도살당하듯 순식간에 쓰러져갔다. 십방진이 강력한 살공(殺攻)으로 적을 일시에 제거하는 진법이 라면 음대의 화화진은 부드럽고 음유했다. 의술이 신묘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신의(神醫)라 한다. 또한 그들은 전설적인 신의 화타(華陀)나 편작(扁鵲)에 비유되기도 한다. 꽃도 그렇다. 꽃에도 신의가 있다. 사람들은 꽃의 생명 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에게 사절군자(四絶君子)라는 작호를 주 었다. 사절군자 고우중(高芋仲). 시(詩), 서(書), 화(畵), 화(花)가 뛰어난 경지에 다다라 뭇사 람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사람. 곽모천은 강경도 일색인 곽가장의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로 많 은 문인(文人)들을 초빙하여 공경(公卿)으로 모셨다. 그들은 무공을 모른다. 그러나 당주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 고,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청아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사절군자 고우중도 당시 장주에게 초빙되어온 사람 중 한 명이 었다. "대우가 너무 과합니다." "하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본장에 머물러 주신다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하하! 저희들이야 검을 든 놈들이라 풍류(風流)를 알겠습니 까? 살기가 짙어질까 우려됩니다. 저희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십시오." "허허허! 그럼 꽃이 필요하겠군요." "꽃이요?" "꽃처럼 사람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습니다." 곽모천이 고우중에게 바란 것이었다. 고우중은 그 날, 자신이 가꾸어야할 장원으로 안내되었다. "지금은 황량합니다. 이곳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고 싶은 데... 내년이면 볼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촉급합니다. 꽃이란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저 그 런 꽃을 보려면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죠. 올 가을이면 맑 고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리는 국화꽃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 다." "...?" "국화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봄에 피는 것을 춘국(春菊), 여 름에 피는 것을 하국(夏菊), 가을에 피는 것을 한국(寒菊)이라 합니다. 색깔도 다양합니다. 흰색, 노란색, 붉은색, 자주색... 그 중에서 황국(黃菊)을 으뜸으로 칩니다. 많은 꽃들 중에서 으뜸을 알아보는 눈. 그런 눈을 가지려면 사오 년은 족히 걸립 니다." "그렇군요." "장원의 조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적한 곳에서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것이 어울리는 놈도 있고, 뭇꽃들과 어울려 피는 것이 좋은 놈도 있습니다. 또한 곁에 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색깔은 어떤 꽃이 어울리는지, 크기는... 이런 것까지 배합을 하자면 십 년 세월로도 모자랍니다. 허허허! 그 래서 장원은 연륜이라는 겁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야 제 모양 을 갖추고 품위를 드러냅니다." 장주는 장원을 가끔 들렀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오 년이 지날 무렵, 장주 는 화원(花園)에 파묻혀 지냈다. 꽃의 모양을 감상하고, 향기 를 음미하고, 피고 지는 생명력을 즐겼다. 어느 날, 정진결은 장주가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화원으로 달 려갔다. 한여름이었고, 무공을 수련하던 중이라 웃통을 벗어붙 인 상태. 그는 땀이 줄줄 흐르는 상체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 았다. 화원에는 크고 화려한 작약(芍藥)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허어! 꽃을 대할 때는 그만한 예의를 갖추라고 일렀는데..." "죄송합니다. 지금은 무공 수련 중입니다." "그런가? 자, 이리 와서 보게. 이놈이 작약이란 놈이야." "알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정진결은 강한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꽃이나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럴 시간이면 무 공 일초라도 더 수련하겠다.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장주는 그런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놈은 모란과 흡사해. 그런데 다르단 말야. 어디가 다른 줄 아는가? 쯧쯧! 모란은 나무고, 이놈은 풀이지. 모란은 겨울에 도 살아있지만 이놈은 뿌리만 남기고 죽었다가 이듬해 새싹을 돋아내지. 재미있는 것은 꽃이 피는 순서야. 이놈은 꼭 모란이 지고 난 다음에나 꽃망울을 터뜨리거든." 한쪽에서 잔가지를 자르던 사절군자 고우중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장주 곽모천의 화훼(花卉)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 다. 모두 관심이었다. 꽃에 대한 관심... "..." 정진결은 바빴다. 한가하게 화담(花談)이나 나눌 겨를이 없었 다. 그의 머릿속에는 삼혼검법의 오의를 백척간에 접목시키는 것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놈들은 햇볕에 민감하지. 해가 뜨면 봉오리를 열고, 해가 지면 봉오리를 닫아." "장주 할말이..." 정진결은 용건을 빨리 듣고 싶었다. 백척간이 지닌 특성상 쾌, 환, 중을 가미한다는 게 여간 어렵 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불현듯 묘한 착상을 얻었다. 백척간을 간으로 보지 말고 각종 병기로 보면 어떨까? 찌를 때 는 창으로, 후려칠 때는 봉으로, 낚싯줄을 던질 때는 비사(飛 ), 잡아당길 때는 비조(飛 ). 그러면 삼혼검법의 모든 묘용 이 담기지 않겠는가. 그는 아침부터 새롭게 얻은 착상을 병기 에 심는 중이었다. "그런데 말야. 햇볕에 민감하지 않은 놈들도 있거든." 사정군자 고우중의 낯빛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햇볕에 민감 하지 않는 꽃이라니. "여기 있군, 바로 이놈들이야. 이리 와. 이리 와서 봐." 곽모천은 꽃들을 헤집고 작은 풀더미를 가리켰다. "이놈은 햇볕 대신에 다른 것에 민감하지." 쉬익! 날아가던 파리 한 마리가 장주의 손에 걸려들었다. "잘봐. 두 눈 부릅뜨고 쳐다봐야 해." 장주는 정진결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파리를 작은 풀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연약하게만 보이던 풀더미가 와락 움 츠러들며 파리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날개까지 흐물거리게 녹여버린 후 깊숙이 빨아들였다. "잘 봤나? 끈끈이주걱이란 놈이야. 칠월에 흰색 꽃을 피우지. 이놈을 잘 봐. 잎이 어디에서 나오나? 뿌리야. 뿌리에서 잎을 뻗어내. 파리를 녹여 버린 것은 여기... 이 붉은색 털이야. 여 기서 파리를 녹여버리는 액이 흘러나와." 신기한 풀이었다. 하지만 무공밖에는 관심없는 정진결에게는 담담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이런 풀이나 보라고 불렀 단 말인가. "음대가 지금 수련하는 진법이 무엇이지?" "십방진을 수련 중입니다." "오늘부터는 이 진으로 바꿔. 이놈을 보고 연구한 거지. 진법 의 묘용은 정중동(靜中動). 막히는 곳이 있을 때마다 지금 본 광경을 생각해. 가만히 있던 놈들이 어떻게 날개 달린 파리를 잡아챘는지. 우선 신법이 빨라야겠지. 하지만 상대의 무공이 높다면... 신법이 빠른 놈을 잡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게 이거야. 진법 이름은... 화화진으로 하지." 사절군자 고우중은 그 날 장원을 떠났다. 화화진은 스물다섯 명이 한조로 편성된다. 병기는 혈적자(血適子). 가느다란 은사(銀絲)에 매달린 날카로 운 톱니가 한꺼번에 던져지는 모습은 끈끈이주걱의 붉은 섬모 (纖毛)가 파리를 낚아채는 모습과 흡사했다. 파리를 단숨에 녹 여버리는 액은 독(毒)으로 대신했다. 스물다섯 명... 신법이 아무리 영활한 무인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부드럽지만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갈수 없는 절대 사진(死陣). 흑의인들은 음대와 비슷한 수로 몰아붙였다. 또한 음대원들이 진을 펼치지 못하도룩 중간의 맥점을 파고들었다. 화화진을 잘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음대에 비하면 양대는 나은 편이었다. 그들은 흑의인들과 비슷한 세를 유지했다. 적이 삶을 도의시한 공격을 펼치고 있지만 양대원들의 십방진도 만만치 않았다. 문 제는 가공할 정도로 살검을 쏟아놓는 네 명. 그 중에서도 특히 곱추 괴인. "타앗!" 정진결은 우렁찬 고함을 토해내며 신형을 허공에 띄웠다. 곱추괴인과는 삼 장 거리, 백척간으로 단숨에 공격할수 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목에 흑의인 두 명을 백척 간으로 쓸어 버리고, 기세를 계속 이어 곱추괴인의 목을 휘감 아 갔다. "까아아악...!" 곱추 괴인이 엉거주춤 멈춰 서며 눈길을 돌렸다. '헉! 눈동자가 시뻘겋다. 악마의 눈길...!' 정진결은 잠시나마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수많은 상 대와 싸웠고, 개중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무공이 고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 곱추놈만큼 기분을 더럽게 하는 놈은 단연 코 없었다. '이게 무슨 추태... 놈과 나의 거리는 십 장. 놈은 단병(短 兵), 나는 장병(長兵)...' 상대와 겨루면서 무기의 이점을 생각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아 니다.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무의식에서 떠오른 느낌 일 뿐이다. 정진결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 랐다. "까이아악....!" 다시 괴성이 터지며 곱추괴인의 손에 들린 박도가 춤을 줬다. 아! 은사가 잘려나간다. 청죽에 한철(寒鐵)을 입혀 날카로운 보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청죽이 마디마디 떨어져 나간다. 그 리고 시뻘건 눈동자는... 정진결은 삼 장 거리가 이렇게 가까울 줄은 미처 몰랐다. 서걱! "헉! 커어억!" 육신이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움찔 놀랐다. 왼팔을 팔꿈치에 서부터 자르고 들어와 복부를 베고, 다시 오른팔 손목 부근을 잘라 버린 박도는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갔다. '이, 이게 아냐. 이렇게 허무하게...' 정진결은 눈을 부릅떠 천천히 구릉 위로 걸어가는 곱추괴인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서서히... 땅을 향해 고개를 떨궜 다. 정진결의 죽음으로 상황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비수당 같으면 분노로 치를 떨 판인데, 비화당은 그렇지 못했 다. 그들은 크게 사기(士氣)가 저하되어 병기를 놀리는 수법이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흑의인들의 수괴들인 듯한 세 명은 비화당을 거침없이 요리하 고, 검향을 일심각 무인에게 돌렸다. '치잇! 저놈들은 개개인이 나보다 하수가 아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윤명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 뛰어들기 직전에도 그들의 무공을 엿보았지만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접해 보니 그게 아니었 다. 흑의인 세 명은 하나같이 무공이 절제되었고, 물 흐르듯 유유했다. 검을 맞부딪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필승의 자신 이 서지 않는 것을... 윤명은 애써 그들을 피하며 다른 흑의인들만 죽여 나갔다. 그러고 보면 비수당 음대는 대단한 놈들이다. 일심각 무인들은 결코 음대주에 못지 않은 무공을 익혔다. 하 지만 이건 아예 어른과 어린아이가 싸우는 격이지 않은가. 적 수가 없으리라 자신하던 지신조차도 검을 부딪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을. 비수당 음대주 파가자 황보청은 이런 놈들과 부딪쳤다. 비록 그는 백부하 강변의 고혼이 되고 말았지만 이 세 놈 중 두 놈 과 부딪쳤다는 것만으로 투혼을 높이 살 일이다. 더군다나 그 는 이놈들 중 한놈에게 상처까지 입히지 않았는가. 지척에서 싸웠지만 소리없이 벌어진 암격들이라 황보청이 어떤 공격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윤명이 보기에는 암격할 틈도 없는 놈들인데. 비수당 음대, 양대... 하나같이 놀라운 놈들.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짓밟고 짓밟아도 다시 피어나는 놈들. 그들에 비하 면 일심각은 온실의 화초였다. 무공이 높으면서도 추풍낙엽처 럼 쓰러져가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 '제길!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지.' "무(舞)!" 윤명은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며 단창을 떨쳤다. 일심각 무인 중 가장 키가 큰 상영을 베고 다른 먹이를 찾던 흑의인은 눈에 이채를 발했다. 섬전처럼 빠른 창공(槍功)! 그는 곧 검을 마주 쳤다. 노리는 곳은 사대사혈. 그런 점에서 는 그의 검도 다른 흑의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달랐다. 그는 동귀어진 같은 미련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오가던 길은 눈을 감고도 가듯이 그의 검은 일체의 격식을 배제한 살인검(殺人劍)이었다. 빨랐다. 이 점도 달랐 다. 윤명 역시 빠름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무 다음에 이어지는 섬 (閃)은 오로지 빠름만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섬!" 윤명의 단창이 서너 개로 쭈욱 불어나며 흑의인의 전신요혈을 짓쳐갔다. 환(幻)과는 틀렸다. 환은 초식의 변화이기에 공격점 이 하나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명의 단창은 너무 빠르게 내지르기에 잠깐 착시현상(錯視現狀)이 일어나 창날이 서너 개 로 보인 것. 당연히 모두가 진창(眞槍)이요, 공격점도 여러 곳 이었다. 흑의인의 몸이 옆으로 비틀거렸다. 언뜻 보면 발을 헛디딘 것 같았다. 그러나 때가 아주 절묘해서 단창은 옆구리를 스쳐 지 나고 말았다. 순간, 기회가 닿았다는 듯 장문혈을 노려 오는 검날. '헉! 이건 도기룡이다!' 자신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신법. 상대가 물러서면 나아가고, 짓쳐오면 물러선다. 바로 능공십자 학구의 독문신법이었다. 윤명은 자신의 창법이 빗나갔다는 것보다 상대가 곽가장의 무 공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리고 그런 놀람은 작 은 허점으로, 작은 허점은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졌다. 파앗! 장문혈을 노리던 검이 수직으로 꺾여 올려지며 다시 가슴 앞 화합혈을 베어왔다. "크윽!" "각주!" 누군가 놀란 외침을 터트리고, 급속히 날아오는 듯했다. 쉬익! 고개 숙인 뒤꼭지로 전달되는 무서운 예기에 윤명은 마지막 순 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타(打)! 그렇다. 타(打)! 윤명은 무너지는 신형을 유지한 채 곧바로 마지막 절초 타를 전개했 다. 단창 두 개로 땅을 쑤시고 그 탄력을 이용해 앞으로 뛰쳐 나갔다. 상대를 죽이는 최후의 절초가 구명초(救命招)로 사용 되다니. 파아앗...! 이번에는 얼굴이다. 빌어먹을 틀림없이 동자료를 노리겠지. 죽일놈들... 윤명을 뒤따라 바짝 다가선 흑의인은 끝장을 보겠다는 듯 검을 사각(斜角)으로 비껴쳤다. 그 솜씨 또한 지극히 빨랐고, 자연 스러웠다. 이 점이 다른 흑의인들과 확실히 다르다. 자연스럽다는 것. 흑 의인들이 사대요혈만 치는 것은 동귀어진을 노린 짓만은 아니 다. 알 수는 없지만 독특한 검법이다. 운용체계가 자연스럽게 사대요혈로 흘러들 뿐이다. 이놈은 오의를 제대로 깨달았고, 다른 놈들은 아직 미숙하다는 차이다. 윤명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를 질끈 악물고 전력을 다해 단창을 찔렀다. 왼손에 들린 창은 몽둥이처럼 위 에서 아래로 후려쳤고, 오른손에 든 단창으로는 초식 섬을 펼 쳤다. 까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단창 가운데가 싹둑 잘려나갔다. 그리 고도 예기를 멈추지 않은 검기는 예측대로 동자료를 베어왔다. '헉! 끝...' 까앙! 다시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쇳소리. 윤명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흑의인의 검을 막아 준사람은? 유우(柳盂)! 네가...! "각주! 안 되겠습니다. 일단 물러...크윽!" 유우는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흑의인의 일검에 회음혈에서 아 랫배까지 쭈욱 갈라지고 말았다. 미련한 놈! 싸움 중에는 절대 한눈을 팔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 거늘. 한눈을 팔지 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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