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관찰사는 대구에 감영을 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조선전기에는 감영이라는 것은 없고 대부분순력지가 감영되는 이동제체였다.
임진왜란을 거치고 나라가 안정을 취하자 감영이 새롭게 대두 되는데 순력 보다는 유영제제로 굳어갔다.
기본적인 감영의 체제는 조선후기에 완전히 정착이 되었다 생각된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관찰사의 순력의 길은 남아 있는 관찰사비가 얄려주지만 도로의 발달과 산업화로 인해 碑가 이동 되면서 관찰사의 순력을 차츰 잃어 가고 있다.
울산에는 몇 군데 선정비군이 있는데 언양향교와 울산 동헌 , 그리고 병마사가 있었던 병영에 선정비가 있고
만호 진성이 있는 곳에 선정비가 있다.
울산 동헌에 대부분 도호부사의 선정비가 있지만 관찰사비는 없는데 그러면 관찰사가 울산에 오면 어떻게 부사가 처신 했을까를 생각하면 공장(일종의 명함)을 보내서 누구라고 밝히든가 아니면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언양향교에 관찰사가 지나가 가니 울산 도호부사는 위와 같이 하였을것으로 생각된다.
언앙향교에는 관찰사 비 중에 주목하는 인물은 박문수 인데 우리가 아는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명성에 비해 암행어사비는 전국에 1좌만 남아 있었다.
쉽게 말해서 소설과 연속극이 암행어사 박문수를 많이 띄운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남아 있는 박문수 관찰사 비는 통도사, 양산향교, 언양향교, 문경 점촌 에 남아 있는데, 영조 때 경상 감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 당시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왜 언양이 관찰사의 순력도에 포함 되었는지 추정하면 보면 경주, 언양, 양산,동래 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도사와 작괘천, 반구대가 있어 그러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유는 명승이 있기에 벼슬아치들의 관광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즉 통도사와 반구데 중간에 위치하여 중간 기착지가 언양인것으로 보이는데 관찰사가 순력을 하면 최소 40-50명이
움직이는데 그 비용과 수행원의 음식 그리고 잠자리와 관광지 에 필요한 기녀가 을 동원 하기 쉬운 장소가 언양현이기에
관찰사들이 언양현이 많이 온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통도사는 청류동천이 있어 명승이 유명하여 숙식이 용이로움으로 인해 많은 승려들이 괴로웠을것으로 생각된다.
언양은 숙박보다는 경주에서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이 쉽게 사람을 부르거나 잠을 자기 위한 장소가 가깝기에 물자의 조달 등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언양은 반구대 외에도 작괘천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풍류와 시회를 즐겼기에 그 주위에 있는 언양현은 곤욕을 치렀을것으로 생각된다.
조선후기에는 다행히 많은 순력이 없었지만, 조선전기에는 순력을 하는 곳이 감영이기에 지방의 벼슬아치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것으로 보인다.
관찰사의 다른 명칭은 남아 있는 비석으로 추정하면 보면 어려개가 보이는데 순상국, 순찰사.,도찰사, 도순찰사, 감사 등이었는데 강원도에 다른 명칭이 발견되었는데. 도순사라는 명칭이 보여 관찰사의 명칭은 다양하다고 생각된다.
여러 관찰사 중에 남아 있는 선정비로 순력도를 알아 보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김명진의 선정비가 제격이다.
대구(김명진)--순흥-상주---현풍--곤양--함양-- 창녕-함안-경산-청도-김천-영천--남해--선산-문경새재
위의 순력도의 년도가 정확하지 않아 언제 인지 알 수 없지만 김명진의 경상도 관찰사는 1888년이었기에 이 당시의 봄과 가을로 생각된다.
문경새재에 비가 있는 것은 관찰사로 임명되어 오는 길에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순서를 보면
문경새재---순흥을 지나--상주--대구로 왔을것이고
그 다음은
경산--영천 --청도 -창녕
함양--곤양--남해로 이어진다고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알수 없다.
김천으로 가서 함양으로 갈 수 있다고도 본다.
언양에 있는 관찰사비는 순력의 길 중 관광지로 가는 기착지 겸도 되고 민정을 살피는 것도 된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울산 동헌에도 관찰사 비가 있었지만 깨뜨리던가 아니면 묻었다고도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