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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라엘과의 대화
라엘,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살할까요?
그것은 정신적인 것의 결여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운 좋게도 위협적이고 죄악감을 이끌어 내는 모든 낡은 신화를 파괴하는 일종의 물질주의가 확립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물질적으로 풍부한(적어도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나라들에서는)소비사회는 대중들이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소유문화는 지나치리만치 발달하였고 또 중시되고 있습니다. 즉 행복이란 어떤 것을 소유하느냐 않느냐에 직결되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 사실을 TV의 광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차를 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차를 소유하는 꿈을 파는 것이지요. 어떤 물건을 욕망의 대상으로서 이상화시키는 이미지는 마치 주택이나 자동차, 스테레오, 기타 등등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에 행복이 달려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여 사람들의 탐욕을 이끌어 냅니다. [소유]가[존재]보다 더 중요시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옛 신화와 죄악감을 불러일으키는 믿음들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전면적인 황폐뿐이지요.
황폐의 사막 경계 주위에는 머나먼 오아시스처럼 수많은 물건들이 가득 널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떠밀려 그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나는 차를 살테야, 그러면 행복하게 되겠지,,나는 집을 살꺼야. 그러면 행복하게 될꺼야...나는 휴가 때 모로코에 갈꺼야, 그러면 행복하게 될꺼야]
그래서 그들은 차를 사고 집을 사고 휴가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는 그것이 그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은 그렇지 않겠지요. 처음에 그들은 자랑으로 들뜨고 새로운 소유물을 과시하며 행복합니다. 그러다가 곧 그것에 익숙하게 되면 점차로 흥미는 사그라들고 기쁨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대상이 기쁨의 환상을 주는 사막의 경계선을 건너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장소를 헤매며 찾으러 다닙니다. 희망을 찾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정신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화도 신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악마에 대한 믿음도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단지 물질에의 숭배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은행구좌에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 있더라도 아무리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으로써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심각한 절망감은 젊은이들에게서 특히 현저한데 그 이유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 문제에 있어서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이가 들면 두뇌의 활동이 줄어들고 따라서 자신의 불행을 덜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나이가 들면 필연적으로 참을성도 더 생기게 되지요. 나아가 나이 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인생을 종말로 서서히 이끌어 가는 시간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려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반면에 젊은이들은 살기를 원할 때는 반드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자동적으로 생기는 권리가 아니라 개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유]의 문화를 [존재]의 문화로 대체함으로써 개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행복이란 창조되고 개발되며 양성되는 것임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존재]에 관한 인식을 본래의 합당한 자리에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 것도 전혀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의 안락함을 누려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존재]에 우선적으로 중점을 두어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것은 [소유]로부터 개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며 왜 자살이 자동차 사고나 암 또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에이즈보다도 젊은이들의 사망원인의 제 1위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전 세계에서 매시간 57명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매시간) 57명의 사람들이 인생을 끔찍하게 느끼고는 어느날 죽음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당신이 [존재]할 때는 다시는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소유]가 [존재]의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나는 차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차를 봐라! 멋지지 않아? 나의 집을 봐! 근사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느날 그는 자기가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공허한 빈 껍질이었 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야말로 순수한 정신이 신비적인 정신을 대치해야 할 시점입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특권을 느끼게 만들고 미지의 무한 속의 하나의 입자인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드는 그러한 정신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무한입니다. 공기 속의 분자, 행성의 작은 파편, 흙의 부스러기, 작은 돌 조각, 그리고 우리들의 육체-이런 것들의 사이에 차이점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다는 점이지요. 그러므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자신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갖는 특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삶이 고통인 사람들,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멍한 모습을 보는 사람들, 대형 승용차와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살이 그들의 따분함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사람이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는 죽음을 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탄생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우리가 [존재]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원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와 입자들이 매순간 물질계로 환원됨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겪든 언젠가는 의식이 없는 무기물질의 상태로 돌아가는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가 올 동안 인생이라고 하는 이 여행을 한껏 강렬하게 즐기도록 해야 합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아주 불안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불행했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히 없었으며, 신변이 안전하지도 못했고 병원도 보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무서운 야만의 세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사회의 건설이라는 미래에의 특별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신념은 젊은이들이 재발견하고 재건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회가 막 눈을 뜨려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니지요. 그러기는커녕 우리는 지금 행선 간 혹은 은하 간 문명을 건설하고 있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15세 또는 16세의 나이라면 언젠가 다른 행성을 방문하고 다른 문명세계와 은하 간 혹은 행성 간 유대를 창출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우 흥분해 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 생각인가요! 참으로 매혹적인 일이지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듯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이 새로운 정신세계, 인류에게 너무나 중대한 세계의 새벽을 볼 수 있는 희망을 주세요.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종교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원시적 종교는 아닙니다.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종교적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낡아빠진 퇴폐적인 옛 종교를 재발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말이 아니지요! 그게 아니라 이 말은 새로운 종교, 즉 인간의 종교를 뜻합니다. 라틴어로 [Religere]란 무엇인가에, 예를 들면 자연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우리 눈앞에 태동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태학적 동향, 다양한 아시아 종교들의 혼합, 미국의 전통적인 사람들과 인디언 원주민들을 연결하는 고리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불현 듯 나무에서 식물에서 동물에서 행성에서 해와 달의 운행에서 무언가를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세계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정신세계이며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악마와 신으로써 만들어 낸 정신세계가 아니지요. 오늘날 아무도 더 이상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젊은이들이 제일 원하지 않지요. 그들이 옳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신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정신세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모든 것]이 되는 세계이지요. 사람은 무한이며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에 연결되며 나아가 별들과 행성 그리고 무한에 연결되어 있는 세계 말입니다!
지구상에서는 57명의 사람들이 시시각각 자살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사건이지요. 그러나 언론에서는 결코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가끔씩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집단자살하게 되면 정말 시끌벅적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자살할 바에야 다른 사람과 함께 자살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외로움은 덜해질 테니까요.
우리가 웃으며 살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침대에서 차안에서 집에서 또 어디에서건 외로움에 떨며 자살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 실제로 자살의 결행을 시작하고 있겠지요. 한 사람이 자살하거나 집단적으로 자살하거나 모두 똑 같이 극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들의 선택에 의해 모두 함께 죽기를 결정했을 때 언론은 그 사건을 포착하고 그것을 즉시 [이단종파]또는 소수종교의 문제점으로 연결 짓습니다.
물론 이런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종교문헌들의 모든 내용을 조사할 검열위원회의 설립을 개인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모든 문헌들이 그 속에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때로는 자살의 충동에 밀어 넣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지 심각하게 고찰해 보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지요. 거듭 말하거니와 그 대상은 모든 종교 문헌이여야 하며 이단종파나 철학적 소수파들의 문헌만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지구상에서 종교 중 의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는 그것을 [인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모든 종교는 그 문헌이 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금지되어야 합니다. 자, 우리는 언제 쯤 유엔과 국제인권위원회가 주관하는 검열위원회를 갖게 될까요?
기독교와 회교의 문헌 즉, 성서를 한번 보세요. 당신은 그 속에서 인종주의와 불관용 그리고 폭력을 선동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소수파의 문헌 뿐 아니라 다수파의 문헌도 검열해야 합니다!
두 개의 저울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문헌들은 정당하게 검사되어야 합니다. 어느 종교의 문헌이 인권에 배치되는 행위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종교가 검열을 거부한다면 그 종교는 엄정하고 명확하게 금지시켜야 합니다. 모든 종교문헌들 즉, 성서나 코란 일지라도 동일하게 다루어져야합니다. 만약 인권에 배치되는 문장들이 검열 받고 삭제, 말살되지 않는다면 이런 책들은 진열대에서 제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검열 원칙은 다수파이든 소수파이든 모든 종교 운동에 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특정 종교를 조장하는 문헌, 인종차별과 성적 차별 그리고 폭력과 무의식들 조장하는 문헌들이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위원회의 설립을 주장해 왔습니다만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내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불평등은 그만 됐습니다. 모든 사람은 균등해야 합니다. 인권의 존중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각자는 어떤 종교 또는 철학의 틀 안에서 자기의 개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양파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종교이든 듀란씨의 배꼽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종교이든 관계없습니다. 왜 안됩니까! 이런 생각이 인권에 배치되는 점은 전혀 없습니다.
최근 나는 TV에서 한 여자가 [모세파]로 불리는 소수종파에 의해 한쪽 팔이 절단 당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이제 팔 대신 쇠갈고리를 한쪽 어깨에 매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무서운 일이 생기는가요? 이런 타락의 근원은 어딘가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양심을 마비시키는 이러한 종파가 존재하는 한, 또 다른 [모세]가 불쌍한 어느 여자가 자기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그 여자의 팔다리를 절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런 종파에서는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잘 못 해석하거나 교묘하게 변형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이미 먼 옛날에 그 신빙성을 잃어버린 것들이지요. 예를 들자면 [만약 너의 오른팔이 죄를 범하면 그것을 잘라 버려라] 따위의 성서의 문장입니다. 이런 구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교리문답에 내보냄으로써 우리는 어느 날 [성서는 진리다]라고 사람들에게 주장하는 자들을 자신도 모르게 키우고 있는 셈입니다. 종교 문헌의 구절들을 그대로 믿음으로써 그들은 특정 예언자 또는 하늘로부터의 특정 메신저를 추종할 지도 모르고 또 무슨 짓이든지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라엘리안들이 가진 권리는 다릅니다. 라엘리안은 이런 메시지를 갖고 있지요. [언제나 당신의 양심에 따르라, 비록 엘로힘이라도 혹은 가이드나 당신의 메신저 또는 예언자 일지라도 당신의 양심이나 인권에 배치되는 것을 요구할 때는 그를 따라서는 안된다. 그의 말을 듣지도 말고 실행하지도 말라!] 이것이 바로 독특한 점입니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종교,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철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 그런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기자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모든 회원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고 공동사회에 들어가서 자신을 울타리 뒤에 스스로 가두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는 그 울타리를 통해서만 대화할 수 있고 이런 대화조차도 가끔씩 밖에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는 전혀 교통 할 수도 없는 그런 종파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들은 이런 종류의 단체를 추적하느라 야단법석을 떨 것입니다. 그런 종파는 끔찍한 것이므로 당신네의 행위는 정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파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수세기 동안 공인 받아 왔지요.
나는 지금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수도원, 승원, 수녀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명의 듀란씨가 무브먼트를 창설하고 자기의 배꼽을 찬양하도록 설교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공동사회를 구성하여 그와 함께 울타리 속에 들어간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야! 이런 건 금지시켜야만 돼!]라고 떠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동의합니다. 그것은 금지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자면 다른 모든 종교적 수도원을 예외 없이 금지시켜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검열위원회를 만들어 인권이 일시에 존중되도록 합시다.
나는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모든 문헌들이 이와 같은 검열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데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메시지에 쓰여진 모든 것이 인권을 존중하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혹시라도 메시지의 어떤 문장이 인권존중의 법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 부분을 지금 즉시 삭제하시오!]
메시지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인터뷰의 첫머리에 이미 대답했지요. [보라, 느끼라, 그대는 스스로를 인식하는 무한의 한 조각이다.] 별들과 행성들과 그리고 나무들과 또 동물들과 일체임을 느껴보세요! 일종의 신앙심과도 같은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보세요.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연결되는 느낌이며 우리 몸 속의 세포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는 느낌, 그리고 우리의 이웃, 멀리 있는 형제들 우리 주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또 우주와 대양과 달 그밖에 모든 것들과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모든 것과 연결되는 느낌을 갖고 살아갈 욕구를 갖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을 소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죽기를 소망하는 때는 모든 것이 공허해질 때입니다!
해악을 끼치면서도 스스로는 해악을 행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런 사람이란 소수파를 손가락질하고 그들을 반(反)종파 캠페인으로 공격하며 반종파[마녀사냥]을 선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해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들이 여론을 선동함으로써 구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소위 불행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남들과 달라 질 수 있는 권리를 (이건 사실 권리가 아니라 달라질 의무입니다만) 외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우리의 정신세계와 신념의 독창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매순간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며 이미 길어져 있는 자살자의 리스트를 더욱 길게 만들 뿐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에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사들의 설교와 악마 그리고 모든 터무니없는 말에 질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新)반종파 운동 또는 반개성 운동이 개성개발 운동에 비난을 퍼붓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건 세상이 거꾸로 되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돌아 버린 것입니다!
더욱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물론 단독 자살을 말합니다. 집단자살은 바로 종파로 몰리니까요) 하도록 선동해야만 합니까? 아니면 그 대신에 삶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 주어야만 합니까? 개성개발, 정신적 모임, 무언가를 믿는 모임, 외계인이든 지구인이든 아니면 손가락 끝에 살고 있다는 작은 사람이든 무엇을 믿는 모임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믿고 그것이 삶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흥분시키고 심장을 뛰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경우를 말해 보겠습니다. 나는 사후의 생명을 믿지도 않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젊은이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어서 불행해진 나머지 스스로를 총으로 쏘는 것보다 신을 믿고 행복해 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스스로를 끝장내는 젊은이들은 어떤 이단종파나 운동에 빠져 그 속에 죄수처럼 갇혀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헤어 날 수 없는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풀어 주고 가서 보게 해야 합니다! 이 작은 행성에 남아 있는 최후의 모험은 정신의 모험입니다.
이것은 환상적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정글에 아프리카에 또는 지구의 끝에 가서 탐험하고 발견하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거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사기충천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람들 즉, 우리 조상들인 식민주의자들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으며 미지의 흉측한 야수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열정과 희망이 공포심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그런 모험은 이제 끝났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장소는 탐험되어 버렸지요. 그러나 다른 행성의 장소들은 아직 충분히 가보지도 못했고 탐험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모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모험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에는 운전대를 잡고 시속 200km로 달리면서 스피드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안되지요. 도로 곳곳에는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고 과속은 금지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야성의 꿈] [진창에 빠지지 않는 성능]등의 문구로 차를 팔고 있습니다. TV에서 그런 선전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속도제한은 시속 100km인데 엔진은 200~300마력이나 되고 40년전의 차가 달리는 것과 똑같은 시속으로 달려야 한다니 웃기는 일이지요! 이제 더 이상의 모험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지요. 모든 스포츠 또한 조절되고 있습니다. 보호장치에다 헬멧트....아무도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쓴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유일한 모험은 정신의 모험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세계 여행사를 세울 꿈을 꾸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정신적인 수렵여행을 떠날 수 있고 멀리 탐험에 나설 수 있지요.
하루는 과학지상주의자가 되고 하루는 불교도가 되고 또 하루는 유태교도 회교도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변화하고 보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나고 조사해 보는 것은 매혹적인 일입니다. 이러는 동안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어느날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라엘리안 무브먼트일 수도 있지요. 당신은 모든 곳을 가서 둘러보고 다른 믿음들과 어깨를 비비며 자신을 풍족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에게 [종파도깨비]의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니 주의하세요!
발견의 모험을 가로막는 것은 당신의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끝은 자살입니다. 더 이상 희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지요. [미래가 없으면 죽음 뿐 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가세요, 가서 보세요, 가서 소수 종파와 섞여 보세요, 가서 그들을 만나 보세요, 며칠간 기독교도가 되고 며칠간은 유대교도가 되고 또 며칠간은 회교도가 되어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 보세요.]라고 사람들을 격려한다고 해 봅시다. 이건 정말 멋진 일이 아닙니까? 환상적이지요! 비록 약간의 비정상적인 집단을 만날 위험이 있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런 것이 더 모험적이지요. 우리가 위험이 없는 사회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입에도 키스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균이 옮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는 숨도 쉬지 못할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인생입니다. 산다는 것은 위험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성적이 되어야 하겠지요. 가령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나눌 때는 콘돔을 사용한다든지 도로를 건너기 전에는 좌우를 살핀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정신이상자보다 더 멍청하게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보행등이 파란 불일 때 길을 건너더라도 위험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제 길을 건널 수도 없습니다. 자, 내가 더 이상 길조차 건널 수 없다면 -자살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위험 그 자체입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나로 하여금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강요합니다. 모든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살하면 됩니다. 그것으로써 나는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이 이렇다면 거꾸로 된 것이지요. 자, 젊은이들을 격려하여 위험을 경험하게 합시다. 다른 사람과 섞이고 시험해 보고 살아가게 합시다. 삶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실업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람들은 좋은 학력을 갖추기 위해 공부, 공부 또 공부에 내몰립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업이지요.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더욱 심한 절망감을 줍니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동안 공부한 결과가 혼자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멋진 졸업증서를 자랑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 인가요!
오늘날과 같은 위험을 배제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완벽한 무책임감에 빠져 있습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 타인, 기타 외적 요소가 나의 재정을 보장해 주고 나의 의료보험을 책임지며 모든 것은 나의 외부로부터 오며,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것이 바로 위험입니다.
당신은 재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즉, 백만장자들의 80%이상이 아무런 학력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흥미롭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들이 학교에 가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동안만큼만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지면 가능한 한 즉시 학교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모험은 시작하는 것이지요!
위험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모험을 결심하지요. 예를 들자면 무한궤도차로 눈 속을 달리는 기계를 발명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스키 차가 탄생된 것이지요! 봄바디어 데 발코트씨를 보고 갑자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오늘 날 그의 회사가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린 대기업이지만 그의 사업은 위험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을 타고 눈 속을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험을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이 창조하고 발명하고 모험을 걸 일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나 말인가요? 나는 젊은이들에게 모험을 하도록 격려하고 또한 종교적 소수파와 만나는 모험도 해보고 다른 종교들을 체험해 보라고 장려합니다. 나는 또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독립할 수 있고 스스로의 직업을 창조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갖기를 결심함으로써 모험을 해 보도록 격려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직업을 창조하는 일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가능합니다. 퀘벡에 최초로 도착했던 퀘벡인들은 [우리는 직업을 원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풀 속으로 나아가 전나무를 잘라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의료보험도 없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잘 대처했습니다. 보세요.
오늘날 이 나라가 얼마나 멋진 곳이 되어 있는가를! 그들은 고향을 떠나 어느 곳이든지 다른 땅으로 가는 모험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책임을 졌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매달 대기업의 출근부에 오르는 일보다 더 자극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 주일 내내 따분하기 짝이 없는 교사의 강의를 듣고 있어야 하는 젊은이들, 한 주일 내내 지루한 수강표를 쫒아 다녀야 하는 젊은이들, 한 주일 내내 지겨운 부모와 같이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졸업증서를 받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또는 얼마 후에는 실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그들이 왜 어느 날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지 나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불현 듯 이렇게 자문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잠깐! 이젠 그만 됐어. 난 여행을 떠날거야. 나는 나가서 세상을 둘러보고 종교적 소수파와도 만나보고 내 인생의 뼈대를 세울 철학적 기틀을 찾아내기 위하여 철학 공부도 좀 해야겠어. 그런 나에게 삶의 의지를 주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존재하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이해 할 수 있게 해 줄거야. 그러면 내 마음이 가벼워지겠지. 난 집을 떠날거야. 나 자신을 내가 맡고, 내 직업을 창조할거야! 회사를 세우고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개념을 발명할거야. 나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거야]
위험을 무릅쓰는 사회를 재창조해 봅시다. 물론 이것은 위험하지요! 집에 눌러 앉아서는 위험을 무릅쓸 일이 없습니다. 매주일 회사의 출근부에 체크하는 것으로써는 모험할 일이 없습니다. 하기야 사실 [모가지(해고)]당하는 위험이 있기는 합니다만...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지 않고 밖으로 나가 어디서든 우리 손과 머리, 가슴 그리고 마음으로 무언가를 할 때는 넘어져서 머리를 깰 위험이 물론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멋진 일이지요! 우리가 넘어질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면 전혀 걷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걷는 모험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만약 넘어진다면 되게 운이 없는 거지요!
라엘, 학교에 대해서는요?
현재 학교에서는 강의표에 따라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학생들이 그것을 수료했을 즈음에는 모든 것이 구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이 이해하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과과정도 10년 전의 것이어서 더 이상 고용시장이나 회사의 요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기계 등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모든 것들을 배우는 데 시간을 쏟고 있는 동안에 연구자들은 음성으로 작동하는, 키보드 없는 컴퓨터를 고안하고 있지요. 키보드를 사용해서 하는 일은 곧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전혀 쓸모없게 되겠지요!
왜 이렇게 되나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일, 이전에 행해졌던 일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미래에 행해질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을 알 수가 없지요. 이것이 위험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위험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이 위험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스포츠의 위험, 사랑의 위험 또 에이즈도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위험입니다. 위험이란 의식에의 도전입니다.
나는 라엘리안 무브먼트 회원들 중 에이즈 감염자가 카톨릭 신자들의 감염자 비율의 4분의 1도 안된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는 중에도 항상 깨어 있고 또 조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나갈 때 항상 모자를 쓴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점입니다. 나는 이 말을 20년 동안 해 왔습니다. 나는 [콘돔을 착용하라]고 언제나 말하곤 하지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아, 콘돔은 불편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무도 에이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미 그것이 퍼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라엘리안들은 그것을 알 특권을 누렸습니다.
모험을 하세요. 삶이란 바로 모험입니다! 에이즈에 걸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결코 사랑을 나누지 않든지 또는 콘돔을 사용하든지 해야겠지요? 결코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말로 하기는 쉽습니다만...그건 바로 교황이 하는 말입니다. 그는 [금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5세나 16세의 젊은이들은 그 육체 내부에 화산을 품고 있습니다. 진짜로 폭발하는 후지산과 같지요!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금욕하라! 좋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손발을 침대에 꽁꽁 묶어 두면 되겠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봅시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미래에 존재하게 될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보호하도록 때로는 지나치게 보호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은 훨씬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미래 사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러한 위험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위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험이란 실제로 아름답고 자극적인 것이니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무줄에 발을 묶고 높은데서 뛰어내릴까요? (번지점프) 왜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을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거대한 파도 속을 항해할까요?
왜냐하면 사람은 이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에 모험을 걸 때 비로소 인생의 참 맛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탄생 자체가 위험입니다. 임신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큰 위험이지요. 사정된 작은 정충이 죽을 확률과 생존할 확률의 비는 3억대 1입니다. 생존한 하나의 정충이 지금 우리 자신, 우리의 존재를 실현한 것이지요.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3억대 1의 생존확률을 뚫고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이렇게 뚫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임신과 탄생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었는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재에의 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사회에서의 투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우리의 두뇌와 마음을 자극하고 삶에의 동기를 부여하는 어떤 것을 찾는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의료보험과 실업수당의 혜택이나 누리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라면 의자에 눌러 앉아 정년퇴직이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나는 젊은이들이 자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겠습니다.
다행히 삶의 의지를 지켜 주는 다른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약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마약을 복용하지 마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마약보다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줘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생에서 아무런 자극도 찾지 못한다면 마약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 자신 또한 인생에서 아무 자극적인 일이 없다면 마약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인생이란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약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절제(切除)와 할례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몸을 절단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이 짓은 아프리카에서 퀘벡에서 프랑스에서 도처에서 전통과 종교를 존중한다는 구실 하에 수백만의 소년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매일 자행되고 있습니다. 거의 아무도 여기에 간섭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어려서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신체를 잘라 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입니다.
2백만명의 어린 소녀들이 매년 절제(클리토리스의 제거를 뜻함. 그 결과로 성적 기쁨의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됨) 또는 봉합(음순을 꿰메는 것, 분비물을 배출할 작은 통로를 남기게 되지만 후에 결혼하게 되면 그 입구가 너무나 좁기 때문에 남편의 삽입에 여자는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됨)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일생동안을 불우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체절단은 우리 주위에 가까이에서 매일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권존중 원칙에는 본인의 동의 없이는 신체절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신체절단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아기나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더욱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몸은 그 모든 부분이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심각한 의학적 경우 외에는 어떤 종류의 신체절단도 금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짓은 아프리카 문화와 관계있을 뿐이야], [흑인들의 원시적인 풍습이란!] 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리하여 백인들의 잠재의식적인 인종 파별주의가 강화됩니다. 우리의 분명한 양심으로는 절제를 혐오합니다. 사실 그것은 끔찍한 짓이지요. 절제에 반대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할례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어린 소년에게 그 의견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성기의 표피 끝단을 잘라 버리는 짓은 어떤가요?
[할례반대] 캠페인을 시작합시다. 어린이가 선택하지 않은 신체절단, 의학적 필요성(즉, 표피 감염의 경우 등)에 근거하지 않은 신체절단에 반대합시다. 할례는 왜 비난받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할례가 거대 종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장래에 이 주제를 갖고 큰 집회를 열어 목청을 높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할례반대. 절제 반대, 모든 종류의 신체절단 반대] 종교적 이유로 행하는 할례에 반대합니다.
나는 여기서 앞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 문헌들을 시급히 검열해야 합니다. 이 경우는 유대교가 해당되겠는데 유대교의 경전은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끔찍한 행위를 권장해 왔으며, 이 전적으로 야만적인 짓은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그 종교의식을 선택하지도 않은 어린 소년들에게 우리 주변에서 매일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과 사회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이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하늘로부터 온 존재들이 놀라는 모험을 감행한 그 행성 위에 사는 특별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생명체들을 창조했습니다. 그것은 모험이었으며 모험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모험이었지요! 우리는 바로 그 모험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들은 어느 날 그들 자신의 이미지대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인류도 머지않아 또 다른 행성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모험이며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는 가슴 벅찬 위험입니다.
우리를 창조한 존재들은 실재합니다. 그들은 하늘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고 있지요. 우리의 창조자 엘로힘, 이 외계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진보되어 있어 그들의 지식과 지혜는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작은 행성 위에 행복의 모든 요소들과 함께 우리 인류를 심었습니다. 그들의 창조물들과 함께 우리는 정원의 장미꽃처럼 활짝 피어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우주의 수많은 조각들처럼 자라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구위에서의 생명창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아니,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어른, 어린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이 누구인지 망각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 같군요. 사회조직의 모든 요소는 인생이 얼마나 특별한가, 지구에서의 생명창조가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망각하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엘로힘의 귀환을 이해하는 것, 인류창조의 의미를 돌이켜보고 이해하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해와 믿음은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는 진화론을 믿고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지 이해하겠군요) 또 우리는 인자하고 전능하며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고 자신의 성기를 만졌다고 해서 지옥불에 우리를 구우려고 준비하고 있는 악마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아마 자살하기를 소원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메시지가 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존재들이 지구상에서 자신의 모습대로 생명을 창조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느낄 능력을 가진 당신들을 창조했다. 그대들 인간들이여, 자신을 보라.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보라. 지구상의 그 짧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무한의 작은 파편들이 모여 당신과 같은 생명체가 태어 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하면 당신은 자신을 살찌우고 엘로힘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대들이 지겨운 인생을 살도록 교육받고 자살이나 생각한다면 혹은 끊임없이 죽고 싶다고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대들의 인생은 끔찍스러운 것이 되리라]
반면에 만약 우리가 행복하고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상을 받기에 합당한 경우 영원한 삶도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원의 생명을 바랍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지요. 지상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란 단순한 세포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무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야기 할 때 나는 단순히 스스로를 표현하는 무한이 아닙니다. 이 무한은 그 주위에 있는 무한의 다른 조각들에 대하여도 또한 이야기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그대는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살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는 언젠가 영원한 무한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유일한 특권은 인식하는 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실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의식과 삶의 행복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 메시지를 읽어라.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읽기 전에 마약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해하고 있다. 가장 황홀한 마약은 인식이라는 마약, 진리를 보고 찬탄할 수 있는 두뇌라는 마약임을. 그대가 진정 현재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인간성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렇다면 메시지를 읽으세요!]
(아포칼립스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