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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선택과 결단(히11:23-29)-2020.6.14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도 있고, 내가 선택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신앙도 선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말이지요. 즉, 대충 크리스천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분명한 크리스천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선택과 결단입니다. 선택을 잘하고 결단을 잘하면 됩니다. 선택은 결단의 전 단계입니다.
결단을 위해 선택이 필요합니다. 선택은 현명했으나 결단이 미련할 때가 있고, 선택은 미련했으나 결단이 현명할 때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현명한 선택과 현명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현명한 선택과 결단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팁을 하나 말씀드리면, 선택은 집중이 필요하고, 결단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기도 하고 갈등을 겪습니다. 물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고, 부모님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한번의 선택으로 내일이 결정되고 장래가 결정되며, 평생이 결정되고 영원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어떤 결정은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고 힘들고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선택도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선택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한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 있고, 망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은 한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에덴을 잃었고, 에서는 장자권을 잃었으며, 아간은 가족과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울왕은 왕국을 잃었고, 부자청년은 영생을 잃었으며, 가룟유다는 예수를 잃었습니다. 또한 빌라도 총독과 벨릭스는 영생의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선택에 관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명암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선택한 롯은 소돔성이 멸망할 때 간신히 구원을 받았지만, 영적인 눈으로 선택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선택으로 이스라엘 민족사를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입니다. 그는 탁월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새롭게 쓴 인물입니다.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간과 기회입니다. 이른바 타이밍과 찬스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이밍과 찬스를 놓쳐서 재물을 잃고, 건강을 잃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도 잃고, 영생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탁월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찬스에 강하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습니다. 기회포착을 잘한다는 이야기지요. 우리가 매일 지어먹는 밥도 타이밍을 놓치면 낭패를 당합니다. 밥이 설어서 못 먹기도 하고, 태워서 먹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죽이 되기도 합니다.
탁월한 선택은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영적 선택입니다. 모세는 영적으로 탁월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기로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고, 용기 있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의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적인 판단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리고 교회의 덕이 되는가? 또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가의 여부를 가장 먼저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당연히 불신자들의 시선도 배려해야 합니다. 이런 원리에 집중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택의 폭은 쉽고 가벼워집니다.
우리는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때로 우리가 기대하는 최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차선을 선택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지혜로운 차선이 무리한 최선보다 낫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인디언 부족들은 그들의 딸이 성숙해지면 옥수수 밭으로 데려가 교육을 시킨답니다. 지정된 밭고랑에 자기 딸을 세우고 앞만 향해 가게 합니다. 다만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한번 본 옥수수는 다시 보지 못하게 하면서 제일 좋은 옥수수를 하나 따도록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옥수수를 따지 못하고 밭고랑 끝까지 오고 만답니다.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띄어도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지요.
이 과정을 통해 인디언들은 자기 딸들에게 남편을 잘 고르라고 교훈 한답니다. 때로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이미 우리는 가장 좋은 선택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습니다. 두 마리가 모두 마음에 들어도 한 마리만 잡아야 합니다. 두 마리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중에 차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입니다. 인생은 동가숙서가식 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모세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1) 바로 왕과 하나님 사이에서(믿음의 대상)
바로 왕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는 믿음의 대상에 관한 선택입니다. 누구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섬길 것이냐의 선택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모세는 어떤 고민이나 갈등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바로 왕은 거의 신적인 존재였지요. 그러나 모세의 시선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했습니다(24절). 바로 왕을 거절한 것이지요.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밍과 찬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선택은 집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선택했으면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로의 궁궐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좋은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그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한마디로 바로 왕과 하나님 사이에서 그는 망설이거나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신앙의 대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모였던 친모 밑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교육받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기 신분에 대해 선택할 시간만 조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가 바로 왕을 거절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주저하는지 아십니까? 답을 알면서도 결단의 순간에 주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잘못된 선택인줄 알면서도 바로 왕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만큼 선택과 결단이 어려운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선택은 집중이 필요하고, 결단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또한 양쪽 다 택할 수도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고후6:14). 모세의 시종으로서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여호수아는 임종직전에 유언적인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이방신이든지 하나님이든지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길 것을 택한다면 지금 당장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확실한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결단할 때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토기장이는 진흙의 반죽상태가 가장 좋을 때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빚어냅니다. 굳어버리면 원하는 모양을 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갈멜산 전투의 영웅 엘리야의 외침을 기억하십니까? 엘리야가 모든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모세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 지체 없이 결단한 것입니다.
(2) 왕궁과 왕국 사이에서(믿음의 과정)
바로 왕궁이 세상 나라의 부귀영화와 권세의 상징이라면, 왕국은 하나님나라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궁은 세상 나라를 상징하고,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셈이지요. 그래서 왕궁은 일시적이나, 왕국은 영원합니다. 만일 당신이 바로를 선택했다면 바로의 왕궁에서, 하나님을 선택했다면 하나님의 왕국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왕궁을 포기했습니다. 비록 어려서는 바로의 왕궁에서 양육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장성한 모세는 더 이상 왕궁에 머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기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요(빌3:20).
그는 더 이상 바로의 왕궁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충분히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왕궁보다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시켰을 것입니다. 때문에 보장된 왕궁을 포기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왕국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모세의 탁월한 선택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왕국보다는 눈에 보이는 왕궁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그리워합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성도들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바로의 왕궁을 선택하며 살 것인지, 혹은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선택하여 살 것인지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바로 왕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 원하는대로 지금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결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국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왕국을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므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단만 남은 셈이지요. 믿음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하여 탁월한 결단을 할 줄 알았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바로의 왕궁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육신의 모든 행복과 안정이 보장된 곳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세의 용기 있는 결단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는 결단이거든요. 아마도 우리 같으면 왕궁과 왕국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심각한 고민과 엄청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기득권과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왕궁과 왕국 사이에서 어떤 것을 결정하시겠습니까?
(3) 순간과 영원 사이에서(믿음의 결국)
25절에 보면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과 고난 받는 것 사이에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순간의 기쁨보다 영원한 기쁨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 있게 눈앞에 펼쳐진 화려하고 멋진 세상의 기쁨을 과감하게 거절했습니다. 포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바울은 좋은 신분에, 좋은 조건과 좋은 환경에서 잘 배우고 촉망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의 쌓은 모든 스펙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린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가 갈고 닦은 스펙들을 내려놓으면 죽는 줄로 생각합니다. 세상 것은 순간의 죄악을 누리기 위해 더 없이 좋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기가 얻는 것보다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얻으려면 버려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모세도 세상적인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잠간동안의 부귀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왕궁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쾌락은 허무하고 허탄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모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믿음의 탁월함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눈앞에 보이는 쾌락이나 감정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세상이 주는 순간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영원한 기쁨을 포기하시렵니까? 순간의 기쁨이냐! 혹은 영원한 기쁨이냐의 선택에 대한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 헐리우드 영화계에 촉망을 받던 여배우가 둘 있었습니다. 한 여성의 이름은 굴린 타운센트요, 또 다른 여성의 이름은 마릴린 몬로입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타운센트는 예수님을 만나서 헐리우드 영화계를 떠나 목사님과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마릴린 몬로는 계속해서 섹스의 심볼이 되어 헐리우드 영화계를 석권합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몬로가 타운센트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합니다. ‘우리가 영화배우가 되기로 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스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그 꿈을 이루었어. 그런데 지금 나는 아주 큰 대가를 치루고 있어.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이야’. 그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릴린 몬로가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36세의 꽃다운 나이에 가정부에 의해 발견된 몬로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사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타운센트는 하루하루 즐겁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헐리우드 스타 몬로만의 이야기일까요?
세상 끝날까지 우리 앞에 놓여진 선택과 결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과 결단의 순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때로는 수월하고 간단하게 해야 할 선택과 결단도 있지만, 몇날 며칠 밤잠을 설쳐가면서도 내릴 수 없는 선택과 결단도 있습니다. 솔직히 어떤 전문가를 만나도 해결할 수 없는 선택과 결단도 있습니다. 인생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선택과 결단!!!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주시는 선택과 결단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보다 분명하고, 그보다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의 선택은 실수가 없고, 그분의 결단은 후회가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그분의 선택과 결단을 신뢰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고 그분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나에게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선택하시고 결단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모세 믿음의 특징이요, 선택과 결단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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