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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행복”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왜 이리 서둘러 가는가 하고 묻고 또 묻는다.
2015년 12월 15일 월요일이다. 여동생이 형제들 카톡에 근심어린 문자를 올린다. 사다드린 죽도, 찌개도 안 드시고 해서 어머니께서 상태가 안 좋으니 요양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고향 함평부근 요양원에 모셔도 자녀들이 멀리 있어서 경기도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 시켜드리면 좋겠단다. 그날 오후에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건강하고 평화로웠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시골에 홀로 계시기에 언제나 걱정이다. 88세의 연세이기에 깜빡 깜빡하기도 하고, 했던 말씀 또 하기도 하고, 소주나 한 잔 하시면 그 증세가 가중된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냥 외로이 고향에 계시게 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 57세에 혼자 되셔서 시골 커다란 집에 사시니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두 분 사시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니 그날부터 혼자 일어나고, 혼자 아침 먹고, 하루 종일 일하다 집에 오시면, 장승처럼 커다랗게 서있는 검은 집에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어가 거친 손으로 전기스위치를 더듬어 누른다. 캄캄한 거실을 밝히고 방을 밝히고 지친 몸을 눕힐 틈도 없이 좁은 목구멍에 밥알을 집어넣기 위해 그제야 쌀을 씻고, 밥을 짓고 김치를 꺼내 홀로 어그적어그적 드셨을 것이다. 무려 30년이 넘도록…….
육 남매인 우리는 일 년에 고작 두세 번 명절마다 찾아가 반가움을 표시하고 기쁨과 행복을 드리곤 했다. 그땐 우리 자녀 손들이 떼거리로 왔다가 떼거리로 떠나면 덩그러니 남아 고독을 질근질근 씹고 계셨을 어머니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는 우리가 어릴 적 느꼈던 그 평안함과 행복처럼 시골 홀로 계시지만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우리가 아무 때나 가도 언제나 반가이, 웃음 가득 얼굴에 담고 뛰어나와 반겨주시는 전천후 사랑의 샘, 행복의 샘, 한없이 너른 품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부터는 그 외로움과 허탈함, 둥지 떠난 빈자리 지키는 그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겠기에 어느 추석 명절 후 다시 먼 길 객지로 떠나는 우리를 향해
“너희들 다 떠나면 나는 어쩐다냐. 나는 어쩐다냐. 나도 같이 가고 싶다.” 하시는데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다. 그 얼굴 표정과 지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아! 어찌하면 좋은가. 뭐라고 달리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갔다가 금방 다시 올게요. 적어도 다섯 달, 여섯 달이 지나야 다시 명절이 오는데, 그것이 금방인가. 내게는 그 날들이 금방이고,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빨간 날이 겹쳐서 넓은 달력에 나타나면 그때서야 고향 찾는 즐거움을 찾는데, 어머니는 말 그대로 하루가 여삼추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께 하루하루 홀로 긴 밤을 지새우고, 여름날도, 눈발 날리는 긴긴 겨울밤도 그 시간이 초시게 바늘처럼 순간순간 뇌리를 때리며 지나가고 있는지 별 느낌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아도 아쉽고 아쉬워서 살아서 땅에 서 있는 근거가 되는 몸뚱이, 연약한 팔다리까지 어떤 기대나 되돌아올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고, 먹이고 입히고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피는 것만을 기쁨 삼아온 그 마음, 그 날들……. 모정의 세월은 그렇게 흘러만 간다.
우리 자식들은 많이 받고도 왜 조금만 마음에 새겨두고, 쉽게 잊고서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굴 때도 있는가. 흐르는 물결에 찢어진 노란 단풍잎 떠내려가듯 그렇게 흘려보내야만 하는가. 인생이란 게 이런 것인가. 나서 자라다 주님 부르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얼마나 쉽게 머리로만 알고 있는가.
어머니는 자주 자주 여섯 자녀에게 전화하고 또 하시면서 꼭 잊지 않고 묻는 게 있다. 언제 올래? 이번 설에 올래? 이번 추석 때 안 올래? 했던 말 또 하고 또 한다. 지겨웁지도 않은지…….
“네 어머니 갈게 가능하면 가야죠. 꼭 갈게요.”
고향을 북에 두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의 한숨과 탄식소리가 언제나 쟁쟁한데 어머니 계시는 고향이 천릿길이라 한들 어찌 조금인들 지겨우랴.
지겹도록 차량이 몰려가다 서다 반복해도 고향 찾고 어머니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지겹고 힘들고 멀게 느껴지는 그 길도 다시 찾을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앞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 까지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가슴 속에 묻어둔 말들을 묻고 또 묻게 된다. 그날이 와 후회하기 전에 작고 작은 행복이라도 그 맛, 그 기쁨, 자식 만나 얼굴 쳐다보고 목소리 듣는 그 행복 누리게 해 드리리라. 결심하고 다짐한다.
그날 오후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참 좋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동생의 카톡 문자에는 어머니 상태가 아주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이다. 치매 증세도 심해지고 얼굴에는 검은 피부가 덮여있다고 한다. 좀 전에 둘째 형도 전화했는데 목소리에 힘도 있고 치매 증세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상태가 안 좋다는 전갈을 받고 동생이 오후에 고향으로 출발했다. 시골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화요일에 어머니 모시고 이천 셋째 형님 집에 도착했다는 카톡방 글을 보았다. 화요일 날 점심 식사 후에 병원에 입원할 것이라며 여러 형제들의 동의를 셋째 형수가 구했다. 나는 당장 입원해서 치료받을 것은 동의하지만 요양원에 장기 입원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동생이 형수님과 노인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찍은 어머니의 얼굴은 검고 야위어서 생각보다 심각해보였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음식을 못 드시고 간간히 술을 드셨기 때문이고, 얼굴은 화장품으로 잘못 알고 세제를 얼굴에 발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머니께 병원 전화로 연결하여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조금만 참고 몸이 회복되고 좋아질 때까지만 계세요.”라고 했다. 저녁 때 어머니가 여주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하시고 링거도 맞고 여러 가지 기본 검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며칠 상태를 두고 보았다. 고향에서 오시자마자 낯선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드렸다.
병원비는 월 50만, 간병 비는 하루 1만 5천원, 매월 95만원 소용된단다. 어머니는 입원 후 자녀들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이틀이 지나자 괜찮다며 속히 퇴원시켜 달라고 한다. 셋째 형수는 의사와 상의 했다며 고혈압과 편집증과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서 조기 퇴원시켜 달라고 해도 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형제들 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고향에 혼자 계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서울이나 이천, 그리고 안산에 오셔도 며칠만 지나면 도시에는 갈 곳도 없이 방에만 있으니 시골로 내려가겠다며 야단이시다.
나는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리 자식들이 잘 해드려도 내 집만은 못할 것이다. 며느리 눈치도 봐야하고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했던 말 또 하고 고향에 가겠다하고, 행동이 좀 민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귀찮아하고 지금 이런 상태에서 병원에 그대로 계시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내 소신이다.
그래서 셋째 형에게 문자로 어머니 이번 토요일이라도 퇴원하셨으면 좋겠다고 어머니의 마음과 함께 내 마음을 전했다. 서울 형과 나 그리고 남동생은 의견을 같이 했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강력히 퇴원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거의 침대에 누워 계시기에 친구할 만한 노인도 없고, 어머니는 그 병실을 저승 가는 대합실 같은 곳이라 싫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전화 때
“어머니! 병원에 계실 동안 편히 식사도 하시고 몸도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하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걱정마세요, 곧 퇴원시켜 드릴테니까” 하며 그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혀드렸다. 주일이 지나면서 형님부부가 병원에 동지 죽을 쑤어 찾아가 대접해 드리고 카톡 방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얼굴에 검은 피부가 거의 없어지고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하루라도 빨리 퇴원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안 아픈데 왜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하느냐’고 했다.
난 그곳에 계시는 어머니가 마치 고려장 비슷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이천 형님부부 생각은 병원에 계셔야 치료와 회복이 잘 될 것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낯선 병원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갑자기 고향 떠나 낯선 땅에 잡혀간 유배지 같이 느껴지고, 마치 어린 자녀가 낯선 곳에서 빨리 구해달라며 울부짖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마음이 참 아팠다. 내가 늙어서 그 입장에 있으면 그 기분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최근 KBS TV 어떤 프로에 시골에 늙어 병든 어머니, 거동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남편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집에 모시는 어떤 육십 대 여인의 얘기가 감동을 주었다. 비록 활동은 못하고 누워 계시지만 매일 어머니 얼굴 보고 대화하고 웃고 하니 시골에 홀로 계실 때보다 훨씬 좋은 상태로 변했다며 기쁘게 얘기하는 딸을 보았다. 충분히 공감하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여겼다.
부모가 자식들, 손자들 얼굴 보며 함께 밥 먹고 시시 컬컬한 얘기도 하고 집 드나들며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서로 인사하는 것 등이 삶에 얼마나 위로와 생기를 주고 행복한 마음을 부여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가. 일상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작은 행복의 열매를 엮어가는 것이 삶의 보람이요 기쁨이 아니겠는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나는 어머니를 퇴원시키고 우리 집으로 오셨으면 좋겠다고 연락했다. 반대가 있었지만 12월 23일 수요일 드디어 어머니께서 퇴원하셨다.
난 바로 ‘우리 집으로 모셔오세요’라고 연락하려다가 그냥 기다렸다. 성탄절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었지만 형 집에 며칠 더 계시며 성탄절에 그곳에 계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탄절에 카톡 방에 어머니 모시고 셋째형이 시골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셔서 그런다는 것이다. 그건 아니다. 어머니 그냥 시골 가시면 안 된다. 직접 밥해 드실 기운도 부족하고, 지금 영양 상태도 썩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도 그렇다. 또 내 계획은 아내는 힘들 지라도 우리 집에도, 동생 집에, 서울 형 집에도 돌아가면서 계시면 좋겠다. 그러다가 고향이 그리 우면 모시고 가서 며칠 있다가 도로 모시고 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 이건 아닌데 하며 급한 마음이 들었다. ‘시골로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 안산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세요.’하고 나서 더 지체되면 안 되겠기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쯤 가세요.”
하니 한강다리 쯤이라고 한다. 서울 둘째 형 집으로 모시고 간단다.
참 다행이고 반가웠다. 둘째 형에게 문자해서 셋째 형과 함께 얼굴 보도록 꼭 붙잡고 있으라고 부탁하고, 큰 아들을 데리고 성탄절 오후에 서울로 향했다. 막내아들도 함께 가서 할머니, 큰 아빠를 만나고 조카들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대입체육교육과 수험생인 막내는 집에 있겠단다. 그래서 큰 아들과 함께 가며 차 안에서 아들과 학교생활(중대 3년)과 장래 비전과 전망에 대해서 얘기도 나누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며 어머니는 여러 번 우리에게 전화하셨다. 형님도 운전 중 두 번이나 전화해서 어디쯤 왔냐고 했다. 길이 좀 밀리긴 했으나 무사히 도착했다.
형님 집 거실에 들어가니 큰 상에 사과, 치킨, 곶감, 딸기 그리고 내가 사간 귤이 기다리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고, 짧지만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셋째 형은 이천으로 돌아갔다. 형제간에 서로 의견이 달라서 형제간 의(義)가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둘째 형이 돌아가는 셋째 형에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와 아들은 좀 더 얘기하고 나서 어머니 편히 쉬도록 안산으로 돌아왔다. 다시 주일이 지나고 주중에 계속 어머니 전화가 온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동생들에게도 온단다. ‘시골 가고 싶다, 영배네 집에 갈란다.’ 등 하루에도 여러 번 성화였다 하시기에 형님 부부 출근하고 나면 TV도 없는 집에서 하루 종일 금언(禁言)령 내린 사람처럼, 아니면 독방에 갇힌 것처럼 있어야 하니 오죽이나 몸이 쑤시고 힘들 까.
전에 아파트 16층 형 집에서 지루해서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형님 두 분은 출근 중이었다. ‘아파트 몇 동 몇 호냐’고 경비 아저씨가 물어도 모르니 야단났었다. 겨우 아들 이름을 대고 나서야 몇 동, 몇 호인 것을 알았으나 집 앞에서 아들이 퇴근하여 문 열어주기까지 기다려야만 했으니 아파트 숲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마음에서 멀어졌겠는가.
아들들 집에 오시면 며칠도 지나기 전에 시골로 내려가시겠다는 어머니 말씀이 이해가 된다. 동네에 유모차 끌고 놀러가고, 회관에도 가고, 친구 태복 어머니 집에도 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방과 거실에만 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쓸쓸할까.
고향에서 홀로 지치고 아픈 몸을 끌고 유모차에 의지해서 기우뚱거리며 친구 집에 걸어가는 모습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아들들 집에서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종일 홀로 낯선 방을 지키는 모습을 생각해도 난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어떻게 하면 ‘짧은 여생일 텐데’ 편히, 행복하게 모실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난 안산에 같은 동네에 사는 남동생과 서울 어머니께 가기로 했다. 12월 31일 2015년 마지막 날이다. 사실 친구 카센터에(서울 국방대학원 부근) 차정비하고 나서 어머니께 들러 가기로 했는데 카센터에 갔더니 친구들끼리 중국여행 갔단다. 할 수 없이 바로 둘째 형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반가이 맞아 주신다. 조카들도 있다.
형은 직장에서 좀 빨리 종무식하고 3시 반쯤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3시 15분 쯤 도착하여 수육해서 맛있게 먹으며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렸을 때에 젊은 어머니께서 예쁜 한복 입고 꽃 양산을 쓰고 집을 나서니까, 형은 어머니를 따라가며 집을 떠나는 줄 알고 ‘가지 말라’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안 도망간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형은 막무가내로 졸졸 따라 갔다고 했다.
집에서 학다리역 부근 까지는 2km 정도 되는데 얼마나 울며 따라 갔는지 모른단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어머니는 학교(鶴橋)역 부근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으러 갔다고 한다. 나도 집에 그 흑백사진 복사해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깔깔대고 웃었는지 모른다. 어머니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참 예뻤다. 몸도 날씬하고 허리도 곧게 뻗어있고 머리는 쪽머리에 비녀를 꽂아 아름다웠다.
이제 늙어버린 어머니, 지치고 슬픈 눈이 되어버린 어머니께도 이렇게 젊고 예쁜 시절이 있었다니. 우리도 언젠가 어머니가 서 계신 그 자리, 늙고 병들고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 눈치 보며 자식들 집에 들어갈 날이 금방 올 텐데. 어찌 우리는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드리지 못하는가.
저녁 8시가 되어 형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우리 집에 가겠다고 졸라대셨다. 나는 어머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복이 넝쿨째 들어오는 일 아닌가. 우리들이 함께 있고 싶고, 곁에서 섬기고 싶고, 모시고 싶어도 세월이 마냥 어머님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바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형이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오며 전송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형은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형 집에서 모시고 싶어 한다. 주변 여건이 다 충족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조수석에 동생이 타고, 승합차 뒷자리에 어머니 모시고 안산으로 향하는데 보물을 싣고 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내고 뒤돌아서는 핼쑥한 형의 모습이 짠하다. 왜 우리는 헤어질 때마다 아픈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이렇게 미숙한가.
어머니는 안산 우리 집에 여장을 풀고 나서는 동생네 집에 가서 주무시겠단다. 동생은 얼마 전 아픈 일을 겪고 나서 조그만 방에 혼자 지내고 있다.
“어머니, 그러세요.” 난 매일 고독을 씹고,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곱씹으며 지낼 동생을 생각하니 시원하게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상한 마음 하나씩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하지만 막내아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할까. 애기 때 사주보니 ‘장차 아주 잘 살 거라고 했다는데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고 탄식과 한숨을 내쉬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머니,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산 것도 죄송하고, 보란 듯이 출세해서 어머니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지 못한 것도 너무 송구합니다. 어머니는 칠남매를 키우면서 어려운 시절 보낼 때, 내 자식 중에 면서기(面書記) 하나라도, 순사(巡査) 하나라도, 하다못해 깡패 하나라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고 했다.
나도 개척해서 목회를 시원하게 해서 보란 듯이? 하고 싶었는데 개척교회 딱지를 아직도 떼지 못하고 비실댄다. 여러모로 감추고 싶은 것이 많다. 특히 온 힘을 다해 자식 기르느라 말 그대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 고향 동네 사람들 다 모아 놓고 큰 소 한 마리라도 잡아놓고 큰 잔치라도 해드릴 마음이 꿀떡같다.
‘아!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래도 힘내세요.
아직도 우리 앞에 기회가 있잖아요. 동생도 다 잘 될 거예요.
손자들도 이제는 우리 말고 다 컸잖아요. 취직도 하고 공부도 잘하잖아요.’
우리 애들은 하나는 올 해 대학 4학년, 막내아들은 한국교원대 체육교육과 전형 중이다. 큰 애는 졸업하면 학사 장교로 가도록 되어 있다. ‘어머니! 명진이, 장교로 군대 간대요. 멋진 장교복 입고 군 복무하는 모습 보도록 기운 차리고 힘내세요.’ 참 좋은 울 엄마!
2016년 1월 1일. 어머니와 함께 새해를 우리 집에서 맞이했다. 별 대접도 변변치 못하다. 새해에 용돈이 뚝 떨어졌다는 어머니께 용돈 삼 만원을 드렸다. 더 많이 드리고 싶고, 자주 드리고 싶다. 어머니도 이 연세에 쓸 곳이 왜 없겠는가. 어머니의 존재감을 스스로 느끼게 해 드리고 싶다.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이리저리 여행도 다니고 싶다.
막내아들은 저녁 때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형과 중앙역 부근에서 자기들 끼리 저녁 먹는다고 문자가 왔다. 한참 있으려니 큰 아들 전화가 왔다. 막내와 사우나 가서 진로와 학교생활에 대해 얘기도 하고 거기서 자고 오겠다고 한다.
“그래라 재밌게 지내고 와.”
난 막내에게 용돈 2만원과 사우나비 만 원을 건네 주었다. 오랜만에 자기들만의 시간에 신이 난 모양이다.
“잘 되어라.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두 형제간 얘기도 많이 하고 나중에 커서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아주고 밀어주고 당겨주며 잘 살아야 한다. 너희가 목회자 안 될지라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한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배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라. 인격을 성숙하게 가꾸고 달인처럼 자기 일에 뛰어나도록 갈고 닦아라. 그래야 어두운 곳에 손 내밀어 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 덕분에 고마워하고 세상 살맛난다고 고백하도록 살아라. 너희들 덕분에 영생 길을 찾고 거룩한 순례자의 대열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참 좋겠다.”
어머니는 어느 한 곳, 한 집에 조금만 계셔도 지루해 하신다. 나도 그럴 것이다. TV보는 재미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이런저런 취미로 없고, 이제는 눈도 흐려지니 오래 보면 어지러워하신다. 그렇다고 춤을 출 수도 음식 맛있게 먹는 재미도 없다. 다행히 식사는 잘하신다. 아!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드디어 아무 낙이 없는 인생의 자리에 어머니께서 와 계신다. 죄송하고 미안하다.
동생이 우리 집에 왔기에 조금 앉아 있다가 밖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어머니께 환경을 자꾸 변화시켜 주어 지루하지 않게 하고, 시간도 즐겁게 쑥 지나가도록 해드리고 싶다.
“어머니 오늘 점심 동지 죽 어때요?”
“응, 괜찮다.” “네, 그럼 함께 나가요.”
막내는 오후에 체력훈련 가고 큰 아들은 할 일 있어 그냥 집에 있겠단다. 아내는 어디 아픈지 모르나 그냥 침대에 누워있다. 우리 셋이 물왕 저수지로 차의 방향을 잡았다. 전라도 칼국수집이 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우리도 한 상을 잡고 앉았다. 팥 칼국수냐, 팥 동지냐? 어머니께서 동지를 선택했다.
붉은 동지 죽, 어렸을 때는 매년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죽이 아닌가. 아무리 가난해도 죽은 쑤어 주셨다. 그때는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오늘 함께 먹는 동지죽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쑤어주신 죽 맛은 아니다. 동생도 맞장구친다.
“어머니 맛있게 드세요.”
난 이런 장면이 좋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가. 난 행복한 사람이다. 김치와 동치미에 천천히 추억을 즐기며 잘 먹었다. 식후에 커피를 타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정자에서 우리만의 겨울여유를 누렸다.
다시 차를 타고 물왕 저수지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돌아오는 길에 월피동 섬기는 교회에 들러 예배당에 들어갔다. 우리시찰 조 목사님이 마침 나오다 마주쳤다. 예배당에서 잠깐 기도하고 나오는데 사무실에서 조 목사님이 나와서 어머니께 ‘맛있는 것이라도 사드시라’며 신사임당 한 장을 내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의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 대하듯 하신 것에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께서 과자를 사자고 하신다. L마트에 가려고 하니 차가 많아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려 H마트로 갔다. 어머니께 백화점 구경시킬 겸 그곳에 갔다. 식품부로 이동하여 이것저것 구경했다. 어머니는 애들을 위해 치킨을 사고 고구마도 샀다. 또 애들 엄마 위해 실내화도 사고 동생을 위해 간장도 샀다. 겨울이면 차가운 내 귀를 위해 귀마개도 샀다. 어머니 마음이 감사하고 따뜻하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 아들과 나 함께 맛있게 음식을 나누었다. 어머니는 동생 집으로 주무시러 가셨다. 주일 예배 후에 따뜻한 점심 어머니와 우리 식구들이 함께 먹었다. 점심 드신 후에 어머니는 남동생에게 서울 둘 째 형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난 우리 집에 더 계시기를 바랐으나 그럴 수 없는 분위기다. 어머니는 하나 뿐인 방 안에 어머니의 훈훈한 정, 아쉬운 정을 남겨 주시고 동생 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내 집에 계실 자리가 없어서인가.
‘어머니 죄송합니다. 따뜻하게 모시지 못해서.
그곳에서 지루하시면 부족하지만 언제든지 또 오세요.’
2016년 1월 야화(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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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구 마음 아프네요~
아파해요.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선생님 가정사에 마음이 울쩍합니다. ~
인생길에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있어요.
당신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