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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주일설교 삶을 산다는 것(갈5:1)
본문: 갈라디아서5:1
제목: 삶을 산다는 것
오늘은 갈라디아서 5:1의 말씀을 가지고 “삶을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삶을 산다는 것”
추석명절을 잘 지내셨습니까?
나에게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명절 연휴였습니다. 늘 가던 고향 부모님 산소에는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상황이 맞으면 한번 갔다가 올 예정입니다. 저는 명절에 고향을 가지 못하면 참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래서 서울에 계신 둘째 누님 집에 가서 명절 아침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누님도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화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런 명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침에 가족들이 모이지 않고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누님이 다니는 교회는 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명절이면 꼭 부흥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교회 갔다 와서 점심때 밥이나 자녀들하고 먹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은 서늘해졌습니다.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누님이 그 교회에 다닌 다음부터 그 누님은 형제들하고도 늘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늘 교회 중심으로 살았고 그 교회가 세 번 이사 갔는데 그때마다 신촌에서 흑석동으로 역곡동으로 그렇게 이사를 다녔습니다.
참 열심히 신앙생활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신앙생활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보니 가까이 살아도 누님 집을 잘 찾지 않습니다. 먼 군산을 훨씬 더 많이 갑니다. 같은 형제이지만 먼 느낌이 듭니다.
종종 친척이나 후배들이나 친한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목사라고 말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너무 신앙이 좋아 보여서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내 의견을 말했다가는 사이비 목사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입니다.
참 열심입니다. 참 삶을 열심히 살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는 그들의 모습이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세상을 떠나 형제를 떠나 열심히 교회에 가고 명절도 없이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일까요?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 목요일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송탄에 계시는 목사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송탄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해서 3시간째 걷고 있다고 했습니다. 응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송탄에서 서울 시청까지 걷겠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가끔 혼자 걷기를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전에도 42,195km를 걷기에 도전했던 분입니다. 이번에는 70km를 도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문자를 보는 순간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취미가 뭐냐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 걷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침도 안 먹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수원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수원에 오지 못해서 수원에서 ㅁ만나지 못하고 동탄 병점으로 가서 만났습니다. 아침 8시에 병점에 있는 선돌교회에 차를 세워놓고 그 목사님을 만나 함께 걸었습니다.
한 번도 한번에 70km를 걸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점에서 서울 시청까지는 50km가 남았기에 50km를 걸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20km 정도를 제주도에 가서 걸어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풍광이고 걷기에 좋은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걷기로 한 코스는 1번 국도를 걷는 것이었습니다. 평택에서부터 서울까지는 거의 도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번 국도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있어서 거의 도시와 도시를 이어서 걷는 코스였습니다.
병점에서 출발한 후 수원 터미널에 와서 아침을 먹고 수원과 의왕을 경계에서 점심을 먹고 안양예술공원을 지나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올라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걸었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청까지 가는 것은 막막하였습니다. 12시가 넘어야 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청까지는 못가도 한강이라도 보고 오자고 정했습니다. 서울 금천구를 지나 구로구에 가까이 왔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는 길을 접고 말았습니다.
9시 30분이 가까워오자 집으로 돌아올 일이 걱정이 되어 가던 길을 접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송탄에서 출발한 목사님은 75000보 정도 걸었고 나는 5만보가 넘었습니다. 거리로 하면 그 목사님은 50km가 넘었고 나도 33km정도 되었습니다.
다리는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르막길만 없다면 걸을 만 했습니다. 오르막길에서 고관절이 아파옴을 많이 느꼈습니다.
집에 오니 12시가 거의 되었고 새벽기도회는 임장로님에게 부탁을 해서 씻고 날이 샐 때까지 잠을 자고 나니 몸은 그리 무겁지 않고 고관절 부분만 좀 아팠습니다.
난 이 경험을 통해서 몇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처음 시도하는 사람이 있기에 따라서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걷기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멀리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길어야 15km정도 걸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쯤 하루 종일 걸어 보는 것 아니 24시간도 걸어 보는 것 좋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걸으니 모든 것이 보였습니다. 차타고 수없이 지났던 길, 그저 지명 정도 알았던 곳이 걸으면서 보니 밟는 땅이 어떻고 옆에 건물들이 어떻고 지나는 사람들이 어떠한지 볼 수 있었습니다.
걷지 않고 어디를 갔다고 하는 것은 제대로 갔다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로는 걸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시간을 들이면 서울도 부산도 갈 수 있습니다.
차를 탈 수도 있고 기차를 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탈 수도 있지만 걷다 보면 우리는 목적지를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걷기는 서울 시청까지는 못 갔지만 처음 해 본 일이라 얼마나 걸릴지 계산을 잘 못해서 못 갔지만 시간만 있으면 갔습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에게 걷게 하려고 홍보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하려고 이런 말을 합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다르게 말해서 신자로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신자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자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잘 사는 것입니까?
1.교회를 잘 다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종종 교회에 안가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배 교육 봉사 친교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율리교회 비전 선언문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는 것과 성도들에게 봉사하는 것과 사회에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에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 교제는 같이 노는 것을 넘어서 서로를 세워주는 일입니다. 이 교제는 힘을 주는 것이고 위로를 해 주는 것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더 나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보면 끝없이 학교를 다니는 청년들을 봅니다. 유치원을 들어가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어학연수 그리고 또 공부 30세가 넘어도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으니 많이 공부해야겠지만 공부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공부를 했으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했으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교제를 하고 전도를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삶이 없다면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어야 사과나무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사과나무가 되지 못합니다.
공부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듯이 물론 신앙생활 자체가 기쁨이고 삶의 일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삶으로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아직 나무가 자라는 시기라면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직 꽃을 피우는 시기라면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직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라면 그 열매가 맛을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무는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달콤함으로 배부름으로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사과나무는 매년 봄부터 여름 가을 겨울까지도 열심히 일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렇게 행합니다.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멈춰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교회에 왔다가 갑니다. 형식적으로 왔다갑니다. 왔다가지 않으면 불안하니 그냥 왔다가 갑니다.
그러다 보니 가을이 되어도 열매가 없고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고 앙상한 잎만 조금 보일 뿐 그냥 저냥 지나갑니다. 그러니 그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무엇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시간 곧 예배와 말씀의 시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영과 진리로 해야 합니다. 그저 모임에 왔다 가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를 만나고 사랑과 삶을 연습하는 장소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딸 둘이 있습니다. 그 딸들이 참 좋습니다. 욕심 같아선 평생 옆에 두고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직장도 가야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시집도 가야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여행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 좋다고 그저 집에만 있게 하고 나와 함께만 있게 한다면 그것은 바른 일이겠습니까?
자녀를 키우는 것은 내 보내기 위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우리가 고생한 것은 세상에 나가 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복에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을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나가 살아야 합니다. 그저 교회란 테두리 안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2.굳건하게 서라.
3.종에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자유는 아무나 누릴 수 없습니다. 자유는 독립적인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뚝 선 자유인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유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1.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
2.법률의 범위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위
3.소극적으로는 외부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적극적으로는 자기의 본성을 좇아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말
이렇게 세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신 목적 곧 구원해 주신 목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자유는 구속을 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실행할 수 있어야 구속을 받지 않고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뜻은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배워야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배우지 않으면 엉뚱한 자기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유의 두 번째 뜻에서 보여주듯이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위가 되려면 규율과 법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삶의 테두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세계관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잘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알아서 그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입니다. 교통법규를 알면 우리는 자유롭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멈출 때 멈추고, 달릴 때 달릴 수 있고, 좌회전 우회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고 싶은 곳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이 열린다면 북한도 러시아도 더 넘어 유럽도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라고 자동차가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하라고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까?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넓습니다. 그런데 넓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다양하게 살고 있습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좁게 살아갑니다. 자기 교회 자기 가족 자기 동네에서 만족합니다. 넓게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동네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자기 동네 산도 가보지 않습니다. 자기 동네 냇가도 가보지 않습니다.
동네를 넘어서 다른 곳으로 여행도 하고 다른 사람도 만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저 가족하고만 삽니다. 아니 가족하고도 잘 만나지 않고 혼자 일만 하다가 인생을 끝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유는 넓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넓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양하게 살 수 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가야 행동해야 합니다. 경험해 봐야 합니다. 걸어서도 가보고 뛰어서도 가보고 차 타고도 가보고 비행기 타서도 가봐야 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멀리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걸어서 군산도 가지 않을까요? 2박3일이면 갈 수 있어 보입니다. 해보면 이렇게 용기가 납니다. 살아보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어렵습니까? 다리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가 어렵습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려고 들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그냥 누워서 인생 끝내는 것보다는 무엇인가가 하다가 가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아름답지 않을까요?
혹시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도울 용의가 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가기가 어렵다면 제가 여러분의 도움이 되어서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율리교회 학생 청년들에게 그런 경험을 많이 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을 다녔으며 해외도 필리핀과 대만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들의 눈을 조금을 크게 뜨도록 도와주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좀 더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자유롭게 살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시면서 구원해 주어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자유와 방종은 다릅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잘못 알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은 넓고도 넓습니다. 많이 주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 어머니가 딸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과 용기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와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나가면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에게 시련을 줄지라도 결국 기쁨을 줄 것이며 많은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
우물 안에 세상이 아닌 넓고 넓은 세상 곧 하나님이 사랑한 온 세상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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