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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ānidānasuttaṃ (DN 15.) 대인연의 경 - nāmarūpa 名色의
'명(名)'을 '대상을 아는 주관(의식)'으로, '색(色)'을 '알려지는 대상(나무 등)'으로 보는 관점은
'名'을 '이름을 붙이다'로 오해해서 '名'을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주관적 인식'으로 보는 것이다.
'色'을 '보이는 형상' 등으로 오해해서 유정(명색)의 색을 무정물로 확대한 관점이다.
즉 색(色)은 6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名)은 受·想·思·觸·作意를 의미하지 앎이 아니다.
114.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이름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접촉[觸]이 있다’고 함은, 참으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난다여, 그것은 또한 이러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곧 이름과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접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어떤 형식(ākāra)들에 의해, 어떤 특징(liṅga)들에 의해, 어떤 상(nimitta)들에 의해,
어떤 지시(uddesa)들에 의해 명신(名身, 정신적 무더기)의 개념설정(施設)이 성립한다면,
만약 그러한 형식들, 그러한 특징들, 그러한 상들, 그러한 지시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색신(色身, 물질적 무더기)을 대상으로 하는<물질적 무더기'에게'*>
명칭-접촉(名稱觸, 개념적 접촉)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 ‘색신에게/명신에게’로 번역한 이유
1. 문법적 근거: 처소격의 기능적 다양성이다.
빠알리어 처소격은 단순히 물리적 장소(안에, 위에)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 격은 ‘~에 관하여(concerning)’, ‘~을 향하여(towards)’, ‘~에게 있어서(in the case of)’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포괄한다.
특히 지각이나 인식을 나타내는 동사(paññāyati, 알려지다/드러나다)와 결합할 때,
이 처소격은 현상이 드러나는 ‘대상 영역’을 가리킬 뿐, 물리적 내부 공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에게’는 문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해석이다.
2. 구조적·철학적 근거: 제1질문과 제2질문의 완벽한 대칭성 때문이다.
이 경문(DN 15, 114항)은 명(名)과 색(色)의 상호성(互緣性)을 입증하기 위해 정반대 방향의 두 가지 질문을 병치한다.
- 제1질문(명신의 표지 상실): 명신(정신)의 표지가 없을 때, 색신(물질) ‘에게’ 명칭촉(개념적 접촉)이 알려질 수 있는가?
(방향: 정신 → 물질)
- 제2질문(색신의 표지 상실): 색신(물질)의 표지가 없을 때, 명신(정신) ‘에게’ 유대촉(감각적 접촉)이 알려질 수 있는가?
(방향: 물질 → 정신)
만약 여기서 ‘에게’ 대신 ‘에서’(장소)를 쓰면, “색신 속에서 개념이 일어난다”거나
“명신 속에 감각 기관이 있다”는 식의 물리적 오해를 낳는다.
오직 ‘~에게’(대상으로서의 지향점)만이 이 두 질문이
각각 정신에서 물질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향하는 방향성(벡터)을 정확히 드러낸다.
이 대칭적 구조를 살리기 위해 ‘~에게’로 번역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3. 교리적 근거: 이 경이 규정하는 ‘촉(觸)’의 본질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문단에서 말하는 ‘촉’은 일반적인 ‘근·경·식 삼사화합’이 아니다.
이는 ‘명(名)과 색(色)이라는 두 무더기 사이의 정보 교환 및 접촉’을 지칭한다.
명칭촉(名稱觸)은 명신이 색신을 향해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 작용이고,
유대촉(有對觸)은 색신이 명신에게 감각적 자극을 전달하는 수용적 작용이다.
이때 ‘~에게’는 그 상호작용이 향하는 목표 지점(대상)을 정확히 지시하지만,
‘~에서’는 그 지향성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4. 번역 실용적 근거: 한국어 조사의 자연스러운 대응과 오독 방지이다.
한국어에서 조사 ‘에게’는 원칙적으로 유정물에 국한되지만,
실제 언어 생활과 불교 경전 번역 전통에서는 무정물이나 추상 개념에 대해서도
방향성과 대상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롭게 사용된다(예: ‘진리에게 다가서다’, ‘현실에게 대응하다’).
반대로, ‘에/에서’로 고정할 경우 독자는 이를 물리적 장소로 오인할 위험이 크다.
따라서 원문의 처소격이 가진 추상적 대상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조사는 ‘~에게’이다.
5. 참고 경문을 통한 논리의 보강 (補强)이다.
이러한 ‘~에게’(대상으로서의 지향적 처소격) 해석은 다른 초기경전들에서 ‘식(識)’과 ‘명색(名色)’,
그리고 ‘내외 6처(內外六處)’의 관계를 설할 때 사용된 공간적 비유와도 일관성을 이룬다.
경문 Kiṃsukopamasuttaṃ (SN 35.245)
(‘nagarassāmī’ti kho, bhikkhu, viññāṇassetaṃ adhivacanaṃ.
‘majjhe siṅghāṭako’ti kho, bhikkhu, catunnetaṃ mahābhūtānaṃ adhivacanaṃ —
pathavīdhātuyā, āpodhātuyā, tejodhātuyā, vāyodhātuyā.):
“‘성주(城主, nagarassāmī)’라고 함은, 비구여, 의식(識, viññāṇa)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네거리 한가운데(majjhe siṅghāṭako)’라고 함은,
비구여, 네 가지 큰 요소(地水火風, 4대종)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는 식(識)이 물질(4대, 즉 색)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음을 비유한다.
이때 ‘한가운데(majjhe)’는 물리적 중심이 아니라 ‘작용의 초점(focal point)’이다.
마치 네거리(4대)의 중심에 성주(식)가 앉아 사방을 향해 감독하듯,
식은 물질(색)이라는 조건을 향해(에게) 작용한다.
경문 Majjhesuttaṃ (AN 6.61)
(“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ettāvatā kho, āvuso, bhikkhu abhiññeyyaṃ abhijānāti, pariññeyyaṃ parijānāti,
abhiññeyyaṃ abhijānanto pariññeyyaṃ parijānanto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hotī”ti.):
“이름(名, nāma)은 한쪽 끝(anto)이고, 물질(色, rūpa)은 다른 쪽 끝이며,
의식(識, viññāṇa)은 그 중간(majjhe)에 있다. 갈애(taṇhā)가 이를 꿰매는 자(sibbinī)이다.”
이는 명(名)과 색(色)을 양극(兩極)으로, 식(識)을 그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규정한다.
명과 색이 서로를 향해(에게) 정보를 교환할 때,
그 교환의 중간에서 식이 그 접촉을 감독하고 인식한다.
이는 DN 15에서 ‘명칭촉(名→色)’과 ‘유대촉(色→名)’이 교차하는 지점에 식이 자리한다는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결론: 이 번역은 표면적 격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경문의 논리적 대칭성과
철학적 함의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과이다.
이로써 독자는 ‘명(名)과 색(色)이 서로를 향해 작용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 pe ...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어떤 형식(ākāra)들에 의해, 어떤 특징(liṅga)들에 의해, 어떤 상(nimitta)들에 의해,
어떤 지시(uddesa)들에 의해 색신(色身, 물질적 무더기)의 개념설정(施設)이 성립한다면,
만약 그러한 형식들, 그러한 특징들, 그러한 상들, 그러한 지시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명신(名身, 정신적 무더기)에게 유대촉(有對觸, 감각적 접촉)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 ... pe ...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 pe ...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어떤 형식(ākāra)들에 의해, 어떤 특징(liṅga)들에 의해, 어떤 상(nimitta)들에 의해,
어떤 지시(uddesa)들에 의해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의 개념설정(施設)이 성립한다면,
만약 그러한 형식들, 그러한 특징들, 그러한 상들, 그러한 지시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명칭-접촉(名稱觸) 혹은 유대촉(有對觸)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 ... pe ... yehi uddesehi nāmarūp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 pe ...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어떤 형식(ākāra)들에 의해, 어떤 특징(liṅga)들에 의해, 어떤 상(nimitta)들에 의해,
어떤 지시(uddesa)들에 의해 이름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개념설정(施設)이 성립한다면,
만약 그러한 형식들, 그러한 특징들, 그러한 상들, 그러한 지시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접촉(觸, phasso)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hassassa,
yadidaṃ nāmarūpaṃ”.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이 바로 접촉(觸)의 원인(hetu)이며, 근본(nidāna)이며,
발생(samudaya)이며, 조건(paccayo)이니, 곧 이름과 물질(名色, nāmarūpa)인 것이다.”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ṃ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issa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 —
yadidaṃ viññāṇaṃ”.
“‘의식(識, viññāṇa)을 조건으로 하여 이름과 물질(名色, nāmarūpa)이 있다’고 함은,
참으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난다여, 그것은 또한 이러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곧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이름과 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름과 물질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성숙(成熟)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 뒤에 (다시) 빠져나간다면,
이름과 물질이 (그러한) 여성성·남성성 등의 상태[itthatta, 這種性]로 태어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린아이(소년 혹은 소녀)에게 있어서 바로 그때 끊어진다면,
이름과 물질이 성장[growth]하고, 발달[development]하고, 충만[expansion]함에 이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이 바로 이름과 물질의 원인(hetu)이며, 근본(nidāna)이며,
발생(samudaya)이며, 조건(paccayo)이니, 곧 의식(識)인 것이다.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ṃ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dukkhasamudayasambhavo
{jātijarāmaraṇadukkhasamudayasambhavo (sī. syā. pī.)}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이름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識)이 있다’고 함은,
참으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난다여, 그것은 또한 이러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곧 이름과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이름과 물질 속에(에서) 설 자리[patiṭṭha, 依處]를 얻지 못한다면,
미래에[āyatiṃ] 태어남[birth]과 늙음[aging]과 죽음[death]이라는
고(苦)의 발생[dukkhasamudayasambhavo]이 알려지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ṃ nāmarūpaṃ.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이 바로 의식의 원인(hetu)이며, 근본(nidāna)이며, 발생(samudaya)이며,
조건(paccayo)이니, 곧 이름과 물질(名色)인 것이다.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jiyyetha (ka.)} vā mīyetha {miyyetha (k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아난다여, 이 정도까지[ettāvatā] (사람은) 태어나기도 하고[jāyetha], 늙기도 하고[jīyetha],
죽기도 하고[mīyetha], (이 세상에서) 떠나기도 하고[cavetha],
(다음 세상에) 태어나기도[upapajjetha] 한다.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이 정도까지가 명칭의 길[adhivacanapatho]이며, 이 정도까지가 언어표현의 길[niruttipatho]이며,
이 정도까지가 개념설정의 길[paññattipatho]이며, 이 정도까지가 지혜의 영역[paññāvacaraṃ]이며,
이 정도까지가 (윤회의) 굴레[vaṭṭaṃ]가 (계속하여) 돌아간다[vattati] —
곧 ‘이러한 상태[itthattaṃ]’를 규정하기 위한[paññāpanāya] 것이다.
즉, 이것이 바로 이름과 물질(名色)이 의식(識)과 더불어(saha)
서로[互緣, aññamañña] 조건이 되는[paccayatā] 상태가[pavattati] 작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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