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숙해진 십일월 첫 주 토요일이었다. 나는 퇴근 후 창원중앙역에서 무궁화열차를 탔다. 열차는 금방 진영역과 삼랑진철교를 지났다. 밀양역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 닿은 지기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지기의 승용차를 갈아타고 얼음골로 갔다. 얼음골에는 한창 사과 수확 철이었다. 볼이 빨간 사과는 나무에 달려 있기도 했고 길가에 쌓아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얼음골 주변 산세는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산마루에는 낙엽이 진 나무들이 둥치와 가지를 드러내었다. 호박소에서 얼음골 위쪽 산정까지 케이블카 설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산꼭대기에는 케이블카 승강장 구조물이 우뚝했다. 우리는 얼음골에서 가지산터널을 지나 석남사로 갔다. 절 바깥에서 좌회전하여 운문사 방향으로 올랐다. 산허리를 돌아가다 경주 방면 샛길로 들었다.
얼음골은 밀양시 산내면이지만 운문호수 뒤에는 경주시 산내면이 있다. 그곳에 친구의 주말농장이 있었다. 밀양 지기와 친구는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로 겨울방학 때 농장에서 같이 지난 하룻밤을 묵은 적도 있다. 울산 사는 친구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우리보다 먼저 농장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밭둑에 있는 오가피를 따고 있었다. 수확시기를 놓친 열매는 농익었다.
나도 오가피 따는 일을 거들어주었다. 이어 친구의 닭장으로 가 보았다. 가을부터 닭의 사육 두수를 줄여 가고 있다고 했다. 한꺼번에 처분할 수 없어 친지들에게 몇 마리씩 분양해 주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울산 아파트에서 종란을 인공부화기에서 병아리를 까서 농장으로 옮겨와 키웠다. 닭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그래서 자기가 기른 닭은 차마 잡지 못하고 다른 사람한테 맡긴단다.
여러 마리 실크오골계는 간간이 잡아서 연세 드신 모친한테 약용으로 썼단다. 민간에서 오골계는 피돌기를 원활하게 해주어 중풍예방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아직 깃이 알록달록한 현인닭과 검정 깃 오골계는 여러 마리 있었다. 알집에는 계란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친구는 삼 년 가량 닭을 기르고 있는데, 닭한테 시간을 많이 빼앗겨 올 연말까지 닭치기를 그만둘 작정이라고 했다.
밀양 지기와 닭장 구경을 끝내고 복분자 묘목을 파냈다. 복분자는 친구가 농장을 인수할 때 전 농장주가 심어 둔 것이었다. 복분자가 좋은 줄은 알지만 수확 철에 일손이 달려 감당 할 수 없더란다. 복분자는 여러 이랑이 있었는데 두 이랑만 남기고 필요한 사람은 와서 마음 놓고 파 가라고 했다. 그래서 밀양의 지가가 나를 대동해 산내 농장을 찾아갔다. 어두울 때까지 복분자를 파냈다.
친구는 찌개를 손수 끓여 저녁상을 차렸다. 저녁을 먹고 건천 신경주양조장의 곡차를 들었다. 친구는 경주역 앞 성동지장에서 두치를 사 두었다. 두치는 상어고기 수육으로 고급 안주였다. 친구는 전기구이기기로 갈치도 잘 구워냈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뒤란 버섯 장으로 가서 표고버섯을 따와 데쳤다. 아까 복분자를 파내다 찾아낸 민들레 잎줄기도 식탁에 같이 올렸다.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곡차를 채우고 비우는 사이 산골의 밤은 깊어갔다. 이웃에 산다는 사십대 노총각이 찾아와 잔을 거들어주었다. 친구는 잔을 비우다 말고 손전등을 들고 텃밭으로 가 더덕과 도라지를 캐어왔다. 날짜변경선이 훨씬 지난 축시에 잠 들었지만 나는 새벽녘 일어났다. 닭장에서 홰치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와 지기를 깨우지 않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비가 살짝 내려 풀밭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친구는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요량으로 배추를 넉넉하게 심었다. 나는 창고에서 노끈을 찾아 배추 결구가 잘 되도록 포기를 감싸 묶어주었다. 농사일이 아직 서툰 친구가 묶으려면 한나절 걸릴 일을 나는 아침 식전에 끝냈다. 아침밥을 먹고 나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산수유 열매를 따 주고 나왔을 텐데 서둘러 돌아왔다. 친구는 내 배낭에다 매실엑기스와 달걀을 담아주었다. 1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