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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파 타 칼라
― 아테르타 비사(悲史)
이 문 열
아케나톤의 아들 티라나투스의 몰락은 흔히 그의 굽 높은 샌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여지고 있다. 코린트 지협 (地峽)에 있던 폴리스[都市國家] 아테르타의 집정관(執政官)이었던 티라나투스가 기원전 441년 폭군 또는 참주(僭主) 란 이름 아래 방벌(放(戈)된 사건을 단순화시킨 말로, 또한 그것은 정치적 변혁의 무상성(無常性)이나 허망함을 비유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페르시아전쟁 전, 그러니까 희랍 세계가 비교적 조화를 이루고 있던 시절의 아테르타는 천(千)에 가까운 도시국가 중에서 여러 가지로 조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우선 지리적으로는 코린트 지협에 자리 잡아, 동쪽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진취적이고 우아한 문화와 서쪽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이고 강건한 문화를 골고루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남으로는 크레타 해(海)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이오니아 해로 나갈 수도 있어 통상과 해운에도 이점이 많았다.
기후나 지형 또한 다른 도시들에 비해 특별히 나쁜 것은 없었다. 하천들은 우기(雨期) 에는 범람하고 건기(乾期)에는 말라 버렸지만, 그래도 시민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밀을 바꾸어 올 수 있는 올리브유를 생산할 만큼은 되었으며, 영토와 대부분을 차지한 구릉도 소를 먹이기에는 너무 비탈졌지만 그럭저럭 양 떼를 풀어 놓을 만은 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여러 가지 광석 역시 시민의 무기나 농구를 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또 어디서든 도자기를 굽기에 알맞은 흙을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그렇게 구워진 도자기는 먼 도시로 갈 올리브유나 포도주를 담는 그릇으로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수출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테르타의 번영은 한때 놀라웠다. 아테네를 본받아 조직한 그들의 선단(船團)은 이집트를 돌아 멀리 아프리카 북안(北岸)까지 이르렀으며, 소아시아에 식민지(植民地)까지 가진 적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역사적인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용기와 신념으로 자기들의 운명과 싸워 나갔더라면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에게서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바처럼 무시당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에서 그 전해 살라미스해전(海戰)에 패한 페르시아의 잔류군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중장(重裝) 보병에게 섬멸되고, 이어 뷔칼레 산(山) 기슭에서 페르시아의 함대와 육상 부대가 다시 그리스 연합군에게 깨어지면서부터 아테르타의 번영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외부의 강력한 적이 패퇴함과 함께 그때까지 희랍 세계가 의지해 온 단결과 화목의 기반이 사라지고, 대신 그 전쟁을 주도해 온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오랜 반목과 패권 다툼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된 탓이었다.
그 극단적인 진전이 텔로스동맹(同盟) 의 변질과 펠레폰네소스동맹의 성립이었다. 비록 몇 차례의 전쟁에서 어렵게 격되하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침략할지 모르는 페르시아에 대비해 맺어진 델로스 동맹은, 페리클레스 시절에 페르시아와의 화평 이 이루어져 그 이상 유지될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맹주(盟主)인 아테네는 동맹국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았다. 펠레폰네소스동맹은 이러한 아테네에 불만을 가진 도시국가들이 진작부터 텔로스동맹에서 소외되어 있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결성한 동맹이었다.
희랍 세계가 그처럼 둘로 분열되자 아테네만 한 해군력도, 스파로타만 한 육상 전투력도 가지지 못한 도시들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코린트나 아테르타처렴 두 세계의 경계 지역에 자리 잡은 나라들에게는 그 선택이야말로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원래 아테르타는 지리적으로나 제도상으로는 스파르타에 가까운 도시였다. 그들의 혈통에 대해 정확히 전해 오는 바는 없지만 대체로는 도리아 인(人)에 가까웠고, 초기의 통치 형태도 소수의 외래인이 원주민을 노예처럼 다스리는 왕정 (王政) 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아테네의 영향을 걍하게 받았다. 아테네처럼 해상무역에 의지함에 따라 자유 시민이 늘어나 스파르타와 같은 엄격한 신분 통제가 어려웠고, 또한 하테네의 민주 사상이 전파됨에 따라 낡은 왕정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거기다가 대세도 일단은 아테네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였다.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가 이탈한 뒤에도 몇 번인가 페르시아 함대를 대파했고, 기원전 454년에는 스파르타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예(헤로트)들을 받아들여 아테르타의 이웃 나우팍토스 시(市)에 자리 잡게 해 주었다. 그런 아테네에 비하면 스파르타는 대제국을 향한 원대한 안목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성하던 시기에도 성년(成年) 남자가 사천 명을 넘지 않았으리라고 추정될 만큼 그들의 전투력에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르타의 늙은 왕은 몇몇 유력한 귀족의 도움 아래 이미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낡은 통치 제도를 유지하는 한편 스파르타와 손을 잡으려 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티라나투스였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구(舊)제도의 온갖 특권과 혜택을 용감하게 포기하고 자유와 안전을 갈망하는 시민들 편에 섰다. 그리고 3에 걸친 투쟁 끝에 마침내 왕정을 폐지한 후 아테네식의 민주정(民主政)을 수립 하였으며 아테르타를 공식적으로 델로스동맹에 가입시켰다.
시민들은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그를 첫 번째 집정관으로 뽑았다. 지난날의 특권에 연연해하는 동료들을 설득하고, 오랜 압제에 시달려 무기력하고 겁 많아진 시민들을 분기시킨 그의 웅변과, 재빨리 아테네의 원군(接軍)을 끌어들인 외교적인 수완과, 시민군(市民軍)을 지휘하여 근왕병(勤王兵)들을 격파한 용기에 대한 시민들의 당연한 감사와 보답이었다. 기원전 451년의 일로 그 뒤 그는 10년 간 계속하여 집정관에 머물러 있었다. 비록 페리클레스처럼 대단한 정치가였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집정관의 선거가 해마다 행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또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미처 그 10년을 다 채우기도 전에, 그로서는 실로 어이없다고밖에 할 수 없는 발단에 의해 몰락을 맞게 되고 만다.
그날, 그러니까 기원전 441년 어느 봄날 새벽, 그 도시의 수호신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는 언덕에는 밤잠을 설쳐 버린 한 시민이 눅눅한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명문의 후예로서, 일찍부터 학식 깊은 노예의 보살핌을 받았고, 자라서는 여러 이름 있는 수사학자(修辭學者)며 애지자들을 찾아 더욱 많은 것을 배운 소피클레스란 서른 안팎의 남자였다.
배움이란 다소간 우리를 사려 깊고 분별 있게 만드는 법이지만, 또한 그 못지않게 우리를 필요 없는 과민과 의심 속에 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피클레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무렵 에는 약간의 과민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특히 전날 밤의 잠을 앗아 간 것은 바로 그 지나친 민감에서 비롯된 어떤 의구(疑懼)였다. 혹시 자신이 압제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는 밤새워 골똘한 생각에 잠겨 보았으나 결론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역사상의 그 어느 정체(政體)보다 더 시민을 위하고, 그 어떤 국체(國體)보다 더 시민의 총의(總意) 에 충실한 도시에 태어났다는 동시대의 믿음을 지금껏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으며, 그 도시가 부여한 여러 권리와 자유 때문에 행복해 죽겠다는 동료 시민들에게 익숙하게 동조해 왔다. 어떤 심리적 폭력이 자신의 순조로운 사고를 방해한 기억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하고 싶으면 무엇이든 거의 다 말할 수 있었으며 행동 또한 그 못지않게 거침없이 해 온 터였다. 비록 티라나투스가 그 도시의 집정관이며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긴 하지만, 진실이기만 하면 그는 언제든 “티라나투스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거리낌없이 외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 그런 그의 신념에 중대한 의혹을 일으키는 일이 생겼다. 며칠 전 이스토미아 축전(枕典) 때 그는 티라나투스가 이상하게 절름거리는 것 같아 무심코 옆사람의 허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정말로 절름발이가 된 것 같은데.”라고.
그 전부터 티라나투스가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풍설은 도시 여기저기서 만연해 온 터였다. 오 년 전인 기원전 446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평화조약을 맺고 난 후부터 떠돌기 시작한 풍설로, 그는 그 풍설이 이미 권력의 근거가 허술해진 티라나투스를 비꼬는 말 정도로 여겼으나, 그날 보니 확실히 티라나투스는 절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옆구리를 찔린 상대였다. 음침한 얼굴의 그 사내는 가볍게 지나쳐도 좋을 그의 말에 정색을 하고 주의를 주었다.
“불온한 언동은 삼가시오. 내 당신의 양식(良識)을 믿어 바로 알려 주는 바이지만, 지금 집정관께서는 굽이 좀 높은 샌들을 신으셔서 걸음걸이가 어색하실 따름이오. 그분더러 절름발이라고 하는 것은 스파르타에 매수된 그의 정적 (政敵)들이 꾸며 낸 말이오.”
그 말하는 품은 마치 쫓겨난 옛 국왕의 밀정(密偵)과 같았는데, 더욱 소피클레스에게 위압감을 준 것은 군데군데, 그와 엇비슷한 사내들이 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소피클레스의 사고(思考)는 비약했다.
‘티라나투스가 밀정을 풀어 우리를 감시하는구나…….’
그러자 티라나투스의 굽 높은 샌들도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띤 행동으로 그의 의식을 자극했다. 이미 말했듯이 소피클레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중에는 태어나기 백 년 전의 역사적인 사실도 있었다. 사가(史家) 헤로도토스는 페이시스트라투스란 책략에 뛰어난 참주가 실각하여 추방됐다가 정권을 되찾은 얘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페이시스트라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키가 6피트나 되는 우러러볼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 그들은 그녀에게 갑옷을 갖추어 입히고 그 역할에 어울리는 몸가짐을 가르친 후 전차에 싣고 도시를 달렸다. 그녀 앞에는 전령(傳令) 들이 앞질러 파견되어 이런 선포를 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다정한 마음으로 페이시스트라투스를 다시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를 가장 사랑하는 아테네 여신이 몸소 그의 성채로 그를 다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널리 선포되니 아테네 여신이 그녀의 총아(寵兒)를 도로 데리고 온다는 소문은 곧 도시 전체에 퍼졌다. 시민들은 정말로 그녀가 아테네 여신인 줄 믿고(실은 논다니였다는 말도 있다.), 그 여자 앞에 엎드리고 페이시스트라투스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소피클레스에게는 티라나투스의 굽 높은 샌들이 바로 페이시스트라투스가 꾸며 낸 가짜 아테네 여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걸음걸이가 어색할 정도로 굽이 높은 샌들을 신은 것은, 바꾸어 말하면 동료 시민들 위에 홀로 우뚝하고자 하는 음험한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게 소피클레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티라나투스를 곧장 참주로 몰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라도 기도(企圖) 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생각(내심의)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통치를 압제로 보려면 그것은 좀 더 노골적이고 흉포한 모숨을 띠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비록 나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타의(他意)에 의해 교정받았지만 그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우발사일 뿐 그 이상 아무런 압제의 증거는 없지 않은가. ― 이때쯤 소피클레스의 사
고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기성의 권위 체제에 대한 본능적인 외경심(畏敬心)과 원인 모를 죄의식이 그의 도전적인 견해에 회의를 표하면 표할수록, 배움을 준 도시와 동료 시민에 대한 의무감은 더욱더 강경 하게 불의(不意) 의 고발을 종용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피클레스의 혼란은, 그가 한 상류 시민으로서, 대체로는 의식주 따위 삶의 기본적인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보다 고상하고 참된 것에만 의식이 쏠려 있다 보니, 주로 도시 하층민의 참담한 삶에서부터 노정(露呈)되는 여러 실정(失政)의 증거에 어두운 데서 더욱 가중된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설령 그가 그런 것들에 정통해 있었더라도 곧바로 어떤 단호한 행동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점에선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행동은 대개 배움의 몫이 아니므로. 그리하여 ― 날이 훤히 밝아 올 무렵 오랜 사유에 지친 소피클레스는 그만 큰 소리로 도시 전체에 대해 이렇게 문의하고 말았다.
“아테르타 시민이여, 우리는 압제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침 그가 소리를 지른 지점은 언덕 높은 곳이었고, 맞은편에는 포세이돈 신전이 서 있어 그의 목소리는 그 텅 빈 신전을 울리고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거기서 두 번째 사건이 개입되었다.
소피클레스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중턱에 사는 아주 예민한 귀를 가진 시민 둘이 그 때아닌 외침에 새벽잠에서 깨어나 버린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기 때문에, 뒤에 들려온 메아리와 처음의 목소리가 같은 사람의 목청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서로 다른 곳에서 들려온 두 개의 목소리로 파악해 버렸다. 그래서 둘이라는 복수 개념(複數槪念)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것을 언제부터인가 긴가민가하던 자기들의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는 근거로 사용해 버렸다.
한 사람은, 말하자면 실패한 정객(政客)이었다. 그는 아테르타의 독자노선(獨自路線)을 내세워 아테네건 스파르타건 자기들의 도시를 침해하면 무찔러 버리자는 따위, 지극히 애국적이고 야심만만 하지만 실현성은 크게 없는 주장을 가지고 한때는 제법 시민들의 인기를 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온건한(그로 보아서는 겁 많은) 쪽을 택한 대다수 시민들에게 자칫하면 도시 전체에 파멸을 가져올 위험 인물로 지목되어 그 무렵은 도편추방(陶片追放) 직전에 있었는데, 그는 그러한 시민들의 변화가 강력한 정적인 자기를 몰아내고 압제를 꿈꾸는 티라나투스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오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중년의 비극(悲劇) 시인으로서, 비록 앞의 사람보다는 나았지만 그의 삶이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쪽이었다. 반평생을 무대 주위에서 맴돌며 언어와 음률을 연마하였고, 경연(競演)이 있다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빠짐없이 참가하였으나 한 번도 계관(桂冠)을 얹지 못한 머리는 벌써 희끗휘끗해 오고 있었다. 그의 극은 구성이 지나치게 단조로운 데다 언어는 거칠고 감정만 앞세워 관객들과 심판관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것인데, 그는 거기에 승복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동료들을 한 줌의 기교와 재치만으로 명예를 좇는 부황한 무리라고 비난하거나 또는 심판관의 공정성을 의심하거나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좀 더 근원적인 의심을 품게 되었다. 곧 이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감각적이고 향락적인 우민(愚民)으로 만블어 참주가 되려는 티라나투스가 신(裨)에게는 경건하고 인간에게는 엄숙한 자기의 작품이 외면당하도록 남몰래 책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기다가 그들 두 사람이 그 놀라운 소리가 들려온 쪽을 가만히 가늠해 보니 신전(神殿) 쪽이었다. 불편한 심기 때문에 잠이 깊이 들지 못했고, 깊은 잠이 들지 않았으니 잠귀가 밝을 수밖에 없었건만, 두 사람은 모두 그 목소리가 자기들만을 향한 일종의 신탁(神託) 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그 두 사람은 거의 합창하듯 그 최초의 목소리에 화담했다.
“그렇다. 우리들은 압제받고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발성은 약간의 시차(時差)가 있는 데다 새벽의 고요는 깊어, 그와 같은 그들의 화답은 뜻밖으로 크고 또렷하게 그리고 생생한 복수감(複數感)을 주며 아테르타 시를 가로지른 후, 다시 메아리로 아직 잠들어 있는 거리와 집들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도시 각층에서 더 많은 시민들이 깨어났다. 원래 그런 내용의 외침은 시민들의 의식을 묘하게 자극하는 데가 있는 법이다. 때문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깨어난 사람도 한결같이 자기가 압제받고 있지나 않은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같은 의구는 스스로를 자유민이라고 칭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된 보편적인 불안과 의심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깨어난 사람들은 대개가 앞선 사람들에 비해 배움도 적고 신경도 다소간 무딘 편이었다. 거기다가 따로이 조직적으로 사고(思考)하고 체계적인 결론을 끄집어내는 훈련을 쌓은 바도 없는 계층이어서, 앞서의 목소리들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과 혼란을 느낄 뿐 당장에는 어떤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현명하다는 말이 있고, 또 그 목소리들은 도시의 높은 곳으로부터 들려온 것이란 사실은 차츰 그들의 기분을 동조적인 것으로 바뀌게 했다.
아테네의 아고라에 해당하는 그 도시의 광장으로 맨 처음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막연한 동조에 이끌린 시민들이었다. 혼자로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드러낼 말솜씨도 배짱도 없는 그들은 처음에는 가까운 이웃끼리 티라나투스에 대한 의심을 수군대다가 나중에는 네댓 명씩 짝을 지어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다스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든 완전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누구든 사소한 불만을 한둘쯤은 통치자에게 가지기 마련이었는데, 그것을 모여 털어놓는 동안 서로 간에 이상한 심리적 고양(高揚)을 느끼게 된 탓이었다. 거기다가 다중(多衆) 속에서 안도하고자 하는 소수(小數)의 불안도 그들을 광장으로 끌어모으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신념이 없는 까닭에 광장이 절반 가까이 차도 늘어나는 것은 혼란의 웅성거림뿐이었다.
아직도 티라나투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약간이라도 품은 쪽은 그 목소리가 자기들의 도시 아테르타를 유혈(流血)과 파괴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음흉한 선동가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경계를 했고, 반대로 티라나투스에게 어떤 형 태로든 적의를 지닌 시민의 일부는 그것이 이 도시의 각성을 위한 경종(警鐘) 임에 분명하다고 우겨댔다.
티라나투스에 대한 비판은 먼저 그의 은갑대(銀甲豚)와 신성대(神聖豚), 그리고 상임 정치위원의 일부를 향했다. 은갑대란 티라나투스의 호위대를 말하는 것으로, 원래 아테르타에서는 한 명의 무장한 노예밖에는 누구에게도 호위병 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티라나투스는 8년 전 스파르타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한 것을 기회로 민회(民會)의 승인 아래 50명을 거느릴 수 있었다. 또 신성대는 신전의 경비병으로, 원래는 아테르타의 청년들이 윤번제로 맡아 왔으나 티라나투스가 그 복무를 싫어하는 청년들을 선동하여 지원자로 이루어진 상비군(常備軍)으로 만든 후 자신의 추종자들을 지원시켜 사실상 사병 화(私兵化) 한 300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이 비난하는 상임 정치위원의 일부란 바로 민회의 상임 정치위원 중에 있는 자들로 티라나투스 쪽에 표를 던져 시정(市政)을 언제나 티라나투스가 원하는 쪽으로 결정되게 하는 자들이었다. 원래 아테네의 민회를 본받아 선거나 추첨에 의하여서만이 연임될 수 있는 자리였지만, 스파르타와 싸우는데 효율적이란 구실로 절반을 집정관이 임명하도록 한 티라나투스의 개혁에 의해 그들은 벌써 5년째나 계속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은갑대에 관해 티라나투스에게 반감을 가진 서민들은 말하였다. 보기에 요즈음 그들의 갑주며 투구가 너무 번쩍이더라,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이미 화평 조약을 맺었는데도 그들은 공연히 날카로운 칼들을 뽑아 들고서는 큰 전쟁이라도 하러 가듯 티라나투스를 뒤따르다가 무심코 접근하는 시민을 노예 다루듯 호령하더라고. 신성대에 대해서는 말하였다. 그들은 결국 우리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일꾼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티라나투스에게 급료를 받는 것처럼 그만을 상전으로 떠받들고, 우리에게는 도리어 상전처럼 으스대고 있다. 또 그들이 지켜야 할 것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 계시는 신전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신전에는 있지 않고 쓸데없이 거리를 저벅거리며 방패와 창칼로 시민들을 위압한다고.
그리고 티라나투스의 추종자들인 상임 정치위원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다 같이 이 도시의 시민인 처지에 그들은 마치 왕정 시대의 귀족처럼 행세하려 든다. 걷는 폼도 너무 턱을 젖히는 경향이 있고, 난데없이 화려하게 꾸민 전차(戰車)들을 하나씩 구해 타고서는, 걸핏하면 길 가는 시민들에게 꽥꽥 목소리를 높이는 버릇이 무슨 유행처럼 펴져 가더라고.
하지만 티라나투스를 지지하는 쪽에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난 10년간 희랍에서 가장 강한 스파르타의 중장(重裝) 보병은 우리 도시를 넘보지 못했고 아테네는 그 어떤 동맹시보다 우리를 우대한다. 우리 식 탁은 해마다 퐁성 해씨고 있으며, 의복은 더욱 아름답고 질기고 따뜻해졌고, 주거도 점점 안락하게 되어 간다. 확실히 티라나투스와 추종자들은 약간의 특권을 누리고 있고, 또 그것을 얻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책략이 숨은 듯도 하지만, 압제받고 굶주리던 지난 왕정 시대를 생각하면, 뭐 그리 못 참을 일도 아니잖는가. ― 하는 것이 그들의 우물쭈물하는 반론이었다.
그런가 하면 광장 또 한구석에는 스스로를 신중파로 자처하는 한 무리의 시민들이 있었다. 아직 뚜렷한 근거가 없는 한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니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가끔씩은 기회주의자로 몰려 쓴맛을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어떤 급격한 변혁에도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부류였다.
그런데 돌연 그 비교적 평화로운 공론에 이질(異質)의 성분이 끼어들었다. 아테네의 금권정치(金權政治)를 도입하면서부터 급격히 불어난 그 도시의 빈민층이었다. 이를테면 무한정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도시의 수공업자나 해상무역가들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넘기고 도시로 흘러든 농민들이나 대자본가에게 사업의 기반을 뺏기고 뒷골목을 떠도는 도시의 영세업자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강화된 신성대의 야간 경계 때문에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좀도둑이나 몇 푼의 화대 때문에 밤새 시달린 매춘부, 또는 당장에 끼니를 놓고 있는 극빈자도 끼어 있었다. 어느 시대 누구의 치하(洽下)에서도 얼마간은 있기 마련인, 버림받고 잊힌 목소리의 주인들이었다. 그러나 한번 그들의 거칠고 저돌적인 불만이 구구 각색인 시민들의 공론에 끼어들자 이내 그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과 다른 쪽으로 이끌려 갔다 땅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말했다.
“전에도 우리들의 땅은 메마르고 언덕은 가팔랐지만 그래도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티라나투스가 집정관이 된 뒤로, 우리들은 손발이 부르트도록 올리브와 포도를 가꾸고 양 떼를 보살펴도 빵을 구울 밀가루조차 넉넉히 얻을 수 없고, 결국은 땅조차 도시의 부자들에게 헐값에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들이 생산한 올리브와 포도는 턱없이 값이 떨어진 대신에, 외국에서 사들인 밀값은 까닭 없이 치솟은 탓이다. 티라나투스는 마땅히 이 일에 책임져야 한다.”
몰락한 영세 수공업자들은 말했다.
“비록 가족들과 노예 한두 명 뿐인 조그만 요지(窯址)였지만 우리들의 도자기도 전에는 제값을 받을 수 있었고, 사방 열 큐핏(손끝에서 팔굽까지의 길이)도 안 되는 좁은 대장간이었지만 우리들이 생산한 철물(鐵物)도 전에는 비슷한 값으로 시장에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수십 명의 노예와 인부를 거느린 요지나 대장간이 나타나 우리들은 밑지지 않고서는 그들과 같은 값에 물건을 내놓을 수 없었고, 끝내는 일터마저 문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변화 역시 티라나투스가 집정관이 된 후의 일이니 마땅히 그가 책임져야 한다”
또 파산한 소상인(小商人) 들은 말했다.
“우리도 전에는 작은 배 한 척이면 몇 가족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반드시 멀리 소아시아나 이집트까지 가지 않아도, 에게 해의 연안 도시 사이의 중개무역만으로 어느 정도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라나투스 일파와 손을 잡은 호상(豪商)들이 대선단(大船團)을 조직하여 원산지에서 직접 곡물이며 목재, 어물 따위를 사들이자 우리들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우리들의 파산도 마땅히 티라나투스와 그 일파가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불만들이 터져 나오자 이번에는 언제부터인가 군중 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선동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준비해 온 것처럼 하층민들이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과 원인들을 설명하여 그 대부분을 티라나투스에게로 돌렸다. 아테네의 금권정치를 거기에 대한 훈련도 자체적인 조절 장치도 없는 아테르타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잘못이었으며, 그나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왜곡시킨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이익 이란 추종자들에게 내릴 은급(恩給)과 상여(賞與)의 자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티라나투스는 그걸 호상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나라의 모든 제도를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쳤다는 주장이다. 선동가들은 또 지적 했다. 스파르타처럼 철저한 평등은 아니더라도 부(富)의 상한(上限)은 어떤 식으로든 마련돼야 했지만 티라나투스는 그걸 외면했고, 축적된 부의 횡포를 조절할 장치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고. 도시의 호상들이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농민들의 올리브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부러 못 본 체했고, 그걸로 만든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비싼 값에 내다 판 이익에는 오히려 손을 벌렸으며 ― 마찬가지로 흑해(黑海) 연안에서 싸게 사들인 밀을 그 열 배의 값으로 이 도시에서 파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고.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이 도시의 모든 영세 수공업자와 소상인이 파산할 물건을 사들여도 개의치 않았고, 그에게 많은 기부금을 내면 급할 때에 시민들을 무장시킬 무기나 사원의 보석 장식을 떼다 파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고. 약간의 과장이야 있지만 자못 조리 있고 신랄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막상 광장의 시민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앞서의 빈민층이나 선동자들보다는 이미 갈 데까지 가 버린 밑바닥 사람들의 호소였다.
좀도둑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땅을 잃고 처자와 함께 처음 이 도시로 들어올 때만 해도 정직하게 일해서 벌어먹을 생각이었소. 나는 몇 날 굶주림을 참으며 이 도시를 헤맨 끝에 겨우 어떤 부호의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구했소. 그러나 내가 거기서 어깨가 빠지도록 풀무질을 해도 굶주린 처자에게는 보리떡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소. 거기다가 이보시오.(여기서 그는 웃옷을 찢고 쪼그라든 왼팔과 어깨 어름의 끔찍한 상처를 내보였다.) 어느 날 주물(鑄物)을 만지는 노예가 잘못하여 끓는 쇳물로 나를 이 꼴이 되게 만들었소. 그런데도 주인은 그 노예만 채찍질하고 일할 수 없게 된 나는 돈 한 푼 없이 내쫓기고 말았소. 그가 그런 짓을 하고서도 오회려 더욱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티라나투스 일파의 비호(庇護) 때문이오. 이 잘못된 세상 때문이오. 그러나 난들 어쩌겠소? 일하지 못하면서도 굶어 죽지 않으려면 밤이슬을 맞으며 남의 담을 넘는 일 외에는 좋은 수가 없었소. 이왕 이렇게 모였으니 하는 말이지만, 실로 이 기회에 무엇인가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편 안 되겠소.”
나이 든 매춘부는 말하였다.
“저는 이래봬도 양가의 딸이었어요. 열여덟에 결혼했는데, 제 남편은 아름다운 이오니아 직물을 짤 줄 아는 사람으로 몇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그 기술에 의지해 한동안 제법 유복하게 살았지요. 그런데 싼 양털을 대량으로 사들일 수 있고 수많은 노예와 넓은 작업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자 남편의 작업장은 점점 기울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만큼 싼 직물을 낼 수는 없었거든요. 외국으로 내려고도 해 보았지만, 한 배를 채울 만큼 양이 차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넘겨야 했는데, 선주들 역시 재료값밖에는 주려 들지 않았어요. 남편은 여기저기서 빚을 내어 한동안은 버티었지만 결국 채무노예(債務奴隷)로 팔려 가지 않으려면 목을 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거리로 쫓겨 나온 제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짓밖에 할 게 더 있겠어요? 그런데 막상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고 보니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대개 티라나투스에게 선을 대고 있는 부호들이더군요. 누군가 저들이 더 이상 다른 시민들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해야해요. 저들 몇 명 때문에 이 도시의 시민 대부분이 거지처럼 살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해요.”
티라나투스의 추증자인 상임 정치위원들의 문전만을 떠돌며 그들의 식사 제공으로 연명하는 빈민의 말은 좀 더 충격적이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 도시의 번영과 동료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찬란한 이상을 품었더랬소. 특히 젊은 날의 후반은 온전히 티라나투스와 같은 아테네의 앞잡이가 이 도시의 실권을 쥐는 것을 막는 데에 바쳐졌소. 그러나 내가 받들던 지도자는 티라나투스의 책략으로 스파르타의 첩자 혐의를 받아 처형되고, 나를 비롯한 그분의 추종자들은 대개 당신들에게 버림받아 추방당했소. 간신히 추방을 면한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모든 것은 이미 늦어 있었소. 한 번도 생업에 힘쓴 적이 없으니 따로이 모은 재산도 없었고, 부유한 양친을 둔 것도 아니었으니 유산이 있을 리도 없었소. 다행히 쓰고 읽는 것과 약간의 셈도 알아 대상(大商)의 서사(書士)가 되는 길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소. 티라나투스 일파의 눈길이 무서웠기 때문이오. 결국 내가 연명하는 길은 그 꼴 난 빈민 구제에 의지하는 것밖에 없었소. 민의(民意)를 가장할 펄요가 있을 때는 언제든 티라나투스를 지지하는 군중으로 동원될 그 우중(愚衆)들 틈에 끼어 그들이 던져 주는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오. 하지만 만약 당신들이 그런 나와 크게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오. 이대로 가면 언젠가 당신들도 나 같은 신세가 되어 티라나투스의 추종자들이 던져 주는 빵을 기다리게 될 것이오…….”
그들의 등장과 함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향방은 드디어 불온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역사상 그 어떤 황금시대인들 그 같은 이들이 하나도 없을 수야 있겠는가. 어느 시대 누구의 치세에선들 영광과 풍요의 그늘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들도 어김없이 자기들의 동료 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데서 오는 치욕감만큼이나 그들을 방치한 티라나투스에 대해 군중들은 일단 분개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옳고 그름은 나중에 따질 문제였다.
일이 재미있게 되려면 이 무렵 하여 티라나투스의 추종자가 하나쯤 나타날 때인데, 과연 그들이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시민들의 그 같은 동태를 모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치안(治安)에도 개입하게 된 신성대의 사관 하나가 당직에서 돌아오다가(혹은 밀고자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이 불온한 군중을 보고 개입하게 되었다. 아직 그 자세한 진상을 모르는 터라 크게 화내거나 긴장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새벽부터 모여 심상찮은 공론으로 웅성거리는 집회가 그에게 썩 유쾌할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속한 신성대에는 시민들의 정치적 동향도 살핀다는 은밀한 임무가 벌써부터 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 그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급료를 타는 신전 경비대의 사관답게 온건한 목소리로 해산을 종용했다. 사실 그에게는 시민들의 해산을 명할 권리가 없었으나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므로 신전 경비를 핑계 대고 해산을 종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온건함이 그만 답담할 만큼 평범한 그곳의 군중들에게 오해를 사고 말았다. 언제나 거만하고 자신에 차 있던 신성대의 사관이 저토록 공손한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거나 아니면 군중의 힘에 눌린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시민들은 조금도 겁먹지 않고 버티었으며, 일부 좀 경박한 시민들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온 그 사관의 부숭부숭한 얼굴과 흐트러진 매무새를 야유까지 했다. 심하게는 군살로 오리 궁둥이처럼 뒤뚱거리는 사관의 엉덩이를 흉내 냈고, 어떤 이는 거의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거침없이 내뱉었다.
“잠이나 자, 티라나투스의 사냥개.”
그쯤 되자 그 사관도 마침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비록 재판권은 없었으나 마침 그에게는 몇 가지 체포권이 있었다. 대개 신전 경비와 관계된 것으로 신성방해죄(神聖妨害罪)와 불경죄(不敬罪) 따위였는데, 그는 그중에서 가장 무거운 불경죄를 들고나왔다. 즉 신의 이름으로 신전 경비에 방해되는 그 새벽의 집회를 즉각 해산할 것을 명령한 후, 그래도 해산 않는 군중 가운데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몇몇 시민을 가리키며 그 죄목으로 체포를 선언했다.
과연 그 비장의 무기는 위력이 있었지만, 지목당한 시민들 또한 그 위력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교활하고 민첩했다. 마치 그 사관을 희롱하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얼굴을 싸안은 채 밀집한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교묘하게 숨어 버렸다.
그러자 정말로 화가 난 그 사관은 광장에 나와 군중을 이룬 모든 시민들에 대해 체포를 선언하고 가까운 곳부터 덮쳐 갔다. 군중도 그제야 무언가 일이 심각하게 되어 가는 걸 알았다. 먼저 그 사관의 목표가 된 축이 머뭇머뭇 뒷걸음을 치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냅다 뛰기 시작하고, 이어 기세가 꺾인 나머지도 풍비박산 ― 눈 깜짝할 사이에 군중은 흩어져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법과 질서에 대한 죄의식이나 선천적인 나약함 탓도 있겠지만, 군중이란 원래가 그러했다. 이상한 정열에 휘말리면 성난 파도처럼 휩쓸어 갈 수도 있으나, 일단 각자의 얄팍한 타산과 실리(實利)가 그 정열을 제어하게만 되면 가을 벌판의 가랑잎처럼 흩어져 가고 만다.
하지만 신성대의 사관 쪽으로 보면 일단 조롱을 당해 화가 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번 뱉은 말의 권위를 위해서도 몇 명은 꼭 연행해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몇몇 뒤처진 시민을 지적하여 정지를 명령하며 추격을 했던 것인데, 여기서 또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이 그날의 사태를 급선회시켰다. 단련된 사관에 비해 처음부터 불리한 경주를 벌이고 있던 시민 하나가 돌부리에 결려 넘어지면서 이마가 좀 심하게 찢어진 일이었다.
뒤쫓던 사관이 그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을 때 그의 얼굴은 어느새 흘러내린 피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달아나던 시민들 가운데서 한 선동자가 돌아섰다. 그는 큰 소리로 모두에게 정지를 요청한 후 외쳐댔다.
“보시오, 저 포악한 티라나투스의 주구(走狗)가 불의를 규탄하는 우리의 동료 시민을 저토록 구타하고 상해했소. 형제의 고귀한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소…….”
그러자 시민들은 도주를 멈추고 하나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다시 군중을 이룬 셈인데, 그것은 선동자의 외침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압제받으며 신음할 것이오? 언제까지 대의(大義)를 위해 박해받는 형제를 방관할 것이오? 궐기합시다. 티라나투스의 주구를 처벌하고, 참주를 방벌(放俄) 합시다.”
그사이에도 선동자는 계속하여 외쳐 댔다. 군중이 되면 기억력도 나빠지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자기들은 이 도시에 과연 압제가 행해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군중은 차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투우사의 붉은 보자기가 황소를 흥분시키듯 피는 언제나 군중을 앞뒤 없는 격정으로 몰아넣는 법이다.
그런데도 아직 성이 덜 풀린 그 신성대의 사관은 눈치도 없이 또 다른 시민 하나를 덮치다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불행히도 두번째로 체포의 목표가 된 시민은 그냥 어쩌다 소동에 끼어들었을 뿐으로, 평소부터 심장이 나쁘고 신경 구조가 남달리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연 신성대의 사관이 한 손으로는 피투성이 시민을 끌면서 눈을 부릅뜨고 덮쳐 오자, 기겁을 한 그는 도망칠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 폭삭 꿇어앉았다. 그러나 그 사관은 애처로운 그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방금도 손바닥을 비비대고 있는 그의 희고 연약한 팔목을 남은 한 손으로 거칠게 낚아채고 ― 이미 반 넘어 혼이 나가 있던 그 시민은 앉은 채로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그걸 보자 선동자는 더욱 격렬하게 외쳐 댔다.
“시민들이여, 잠을 깨시오. 형제들이여, 일어나시오. 방금 또 압제자의 철권(鐵拳)은,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형제요,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있는 동료 시민 하나를 타살하였소…….”
드디어 그때껏 자제되어 왔던 군중의 분노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던 탓으로 진상에 어두운 군중에게, 선동자의 외침은 차츰 진실처럼 들려온 까닭이었다.
이렇게 ― 약간은 어이없게 ― 최초의 기폭제(起爆齊)는 점화되고, 비록 수는 얼마 안 되지만 거기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티라나투스의 권좌(權座)에는 무슨 필연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성대의 사관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일이 돌이킬 수없는 지경에 이른 뒤였다. 어느새 소심과 주저에서 완연히 깨어난 군중들은 점차 늘어나는 선동자들의 구호에 보조를 맞추며 쓰러진 동료 시민들과 그 사관을 향해 육박해 오고 있었다.
“티라나투스의 주구를 처벌하라.”
“참주를 타도하라. 폭군을 방벌하라.”
그 기세에 이번에는 신성대의 사관 쪽이 늘리고 말았다. 다가오는 성난 인파에 퍼뜩 눈길이 멈추는 순간, 취기에서 깨듯 분노가 싹 가신 그의 가슴에는 돌연 엉뚱한 회한이 솟아올랐다.
“아아, 나는 참주의 사냥개에 불과하였구나…….”
그렇게 되고 보면 남은 것은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그는 동료를 탈환한 군중들의 의기양양한 함성을 뒤로하고 자기들의 막사가 있는 신전 쪽으로 화급하게 달아났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위엄이나 자신감은 자취도 없었다.
어떻게 소식이 들어갔는지 막사에는 뜻밖에도 거의 전 대원들이 소집되어 있었다. 티라나투스가 공들여 기른 것이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거기서 약간은 비참하기까지 한 기분으로 쫓겨온 그 사관의 태도는 다시 달라졌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동료들과 위풍당당한 상관들을 대하자마자 자기도 그들처럼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자부심과 함께 조금 전 자기를 향해 거칠게 육박해 오던 군중의 기억이 어느새 분노로 되살아났다. 그는 이내 그 군중을 처벌하여 파괴된 법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이 소요에 대한 최선의 해결이며, 자기 및 신성대의 짓밟힌 권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에 빠졌다.
그리하여 어떤 사명감과도 흡사한 느낌에 젖은 그는 과장하여 그 새벽의 일을 보고했다. 일부 지각없는 시민들은 이 도시의 번영과 그들의 행복을 위해 각고하는 집정관을 참주라고 공공연히 헐뜯고 있으며, 몇몇 야심가와 선동자들은 그들의 무모한 힘을 조직화하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신전 경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들도 참주의 주구로만 여겨지고, 불경(不敬) 혐의의 체포령도 한낱 코웃음으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새벽의 소요는 바로 그 전형적인 예로서, 만약 이 기회에 그들을 뿌리 뽑지 않으면 이 도시는 머지않아 커다란 내란에 말려들 것이며 우리가 신전 못지않게 지켜야 할 집정관도 반드시 안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신성대의 대원들은 모두 놀랐다. 그중에서도 조급한 출세욕과 공명심으로 널리 이름이 난 그 대장(豚長)은 특히 더하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티라나투스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충성심을 표시하지 못해 안달인 그는 이번에도 꼭 자신의 충성만큼의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분께서 이렇듯 우리를 보살피고 기르신 것은 오직 이날 같은 때를 위해서였다. 우리 불멸의 충성으로 분연히 일어나자. 모든 대원들은 폭도들에 대한 분노의 창과 그분께 대한 보은(報恩)의 방패를 들어라. 그리하여…… 저 불경과 반역의 무리를 뿌리 뽑으러 가자.”
그것은 충성이 송진처럼 진득진득 묻어나는, 거의 비통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반드시 그런 그의 기분과 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관들은 물론 사병들까지도 애매한 동료 의식과 위기감에서 분기했다. 곧 비상이 발령되고, 무장과 대오를 갖춘 신성대가 소요의 현장으로 출동했다. 실제보다 몇 배나 과장된 보고가 멀지 않은 티라나투스의 저택으로 올려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군중은 아직도 광장에 남아 있었다. 인원이 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질도 크게 변해, 이미 새벽의 중구난방으로 웅성되던 그 오합지중은 아니었다. 적으나마 유혈과 권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한 다중(多重)이었고 조직적인 선동으로 어느 정도 계통을 지니게 된 시민단(市民團)이었다.
선동자들도 이제는 단순히 도시 하층민들의 물질적인 불만이나 무논리하고 감정적인 구호만을 되뇌고 있지는 않았다. 상류 시민들의 까다로운 권리 요구나 정신적인 불만까지도 정제된 말로 구호화 시키고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처음부터 위장한 채 뛰어든 사람들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지식과 실력을 겸비한 상류 시민들이 이들 도시 하층민들의 불만에 동조하고 나선 것임에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런 군중은 기세등등한 신성대의 진출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시 위축되고 주춤한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사태에 접한 신성대 쪽이었다. 자기들보다 몇 배나 많은 군중이 뿜어내는 열기와, 가리고 가려 뽑은 구흐의 신랄함이 그들 신성대원들을 압도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대장과 약간의 핵심적인 사관들은 달랐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 동요하는 대원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높건 낮건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자는 누구든 익혀 두어야 한다는 이른바 ‘엇과 채찍’의 원리였다.
대장이 먼저 머뭇거리는 대원들 앞에 나섰다. 그는 미리 준비해간 가죽 주머니에서 올뻬미가 새겨진 한 줌의 은화(銀貨)를 꺼내 높이 쳐들어 보이며 외쳤다.
“이것은 희랍 땅 어디에서든 비싸게 통용되는 아테네의 은화다. 제군들은 이것이 필요하지 아니한가? 전진하라. 그리고 저들을 체포하라. 저들 폭도 한 사람은 이 은화 열 개에 값한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붉은 수술이 달린 투구를 벗어 높이 쳐들었다.
“또한 이 투구는 백인대장(百人豚長) 이상의 신분을 상징한다. 제군들은 이것을 쓰고 싶지 않은가? 언제까지나 졸오(卒伍)에서 청동 반투구나 쓰고 있을 것인가? 전진하라. 이 투구는 언제나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자의 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열(戰列)의 뒤로 물러선 고급 사관들도 일제히 채찍과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 채찍과 비겁자란 칭호보다 폭도들의 허세(虛勢)가 두려운 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도 좋다. 그 이상…… 이 칼과 반역자란 낙인보다 폭도들의 팔매질이 두려운 자는 뒤로 돌아서서 도망쳐도 좋다. 선택은 그대들의 권리다. 그러나 신성 대의 명예를 더럽힌 자에 대한 처벌 또한 우리들의 권리다.”
이어 대장이 다시 그 말을 받았다
“아테르타의 자랑스러운 아들들, 위대한 티라나투스가 가장 아끼고 믿는 벗들이여, 어떻게 하겠는가? 나가 싸워 승리와 명예를 얻겠는가? 물러나 치욕과 죽음을 받겠는가?”
과연 대장과 고급 사관들이 번갈아 이용한 엇과 채찍은 효과가 있었다. 그들의 외침이 몇 번 반복되기도 전에 신성대의 동요는 가라앉고 억눌렸던 사기와 단결심이 되살아났다. 조금 전의 애매한 동료 의식 같은 것에서가 아닌, 여러 가지 실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즉, 달콤한 엇을 얻고자, 혹은 따가운 채찍을 면하기 위해서, 어떤 대원은 군중들의 구호가 진실되고 신랄하기 때문에 군중들을 짐짓 심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리하여, 참극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한차례 피투성이 충돌이 있은 후, 승리는 결국 장비와 조직과 합법성의 근거에 있어서 우세한 신성대 쪽으로 돌아갔다. 상당한 숫자의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더 많은 시민들이 체포되어 갔다. 나머지 시민들은 뿔뿔이 흘어져 ― 일견 그날의 소요는 완전히 가라앉은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은 그 충돌이 바로 시작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진위(眞僞)를 알 수 없는 갖가지 풍설과 유언비어가 아테르타 시 전체에 널리 퍼졌고, 한낱 몽상가나 궤변 학자의 머리 속에서만 자리 잠고 있었거나, 오랫동안 그 논의가 금지되어 있던 여러 정치적 이상(理想)들이 공공연하게 거리를 떠돌았다.
그중에는 체포된 시민들은 모두 티라나투스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형식적인 재판에 의해 독당근을 마시게 될 것이라든가, 티라나투스의 뜰에는 소요의 주모자라는 혐의를 받고 밀정들에게 붙들려 와 타살된 시민들의 시체가 다수 암장되어 있다는 등의 끔찍한 풍설이 있는가 하면, 티라나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날 소요에 가담한 전 시민을 엄히 다스릴 작정이며 이미 그 세밀한 명단까지 그들 손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그 소요에 가담했던 모든 시민들의 보편적인 방어 본능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그 밖에 티라나투스는 또 그 소요를 기회로 아테르타의 모든 순수한 이념과 정열을,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의지와 양심을 깨끗이 쓸어 내고, 이미 상처 입고 오욕받은 이 정체(政體) ― 그러나 한때는 이 도시의 명 예였고 긍지였던 민주정(民主政) ― 를 영구히 아테르타에서 말살시키고자 획책하고 있으며, 대신 역사상 그 어떤 폭군보다 더한 압제와 폭정을 ― 그 어떤 노예에게도 치욕이며 짐승들에게조차도 고통인 압제와 폭정을 ― 아테르타 시민들과 그 후손들에게 베풀려고 한다는 풍설도 널리 시민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다.
관념적이거나 논의가 금지되었던 정치적 이상이라는 것은 주로 스파르타의 정치제도에 관한 새로운 해석 이었다. 티라나투스 개인에 대한 비판의 불똥이 그가 도입한 아테네식 정치제도에까지 튀면서부터 스파르타의 정치제도에 대한 논의는 이전의 부정하기 위한 것에서 긍정하기 위한 것으로 서서히 변질되어 갔다. 스파르타의 스파이라는 치명적인 혐의를 받을 각오 없이는 생각조차 못 하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스파르타의 자유민들 간에 지켜지고 있는 철저한 평등이 그때꼇 무시돼 왔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최고의 미덕으로 치켜세워졌다. 재산 소유의 금지, 공동 식사, 명목뿐인 가정(家庭)같이 지난날 국가의 지나친 억압이나 무미건조한 생활로 이해되던 스파르타 특유의 여러 제도들도 쓰기에 불편한 그들의 철전(鐵錢)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경제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찬양되었다. 헤로트(노예)들에 대한 참혹 무비한 처사도 ― 그들은 매년 어느 하루를 정해 헤로트들에게 선전을 포고하고 반란의 주동자가 될 만한 자들을 골라 합법적으로 살해했으며, 뒷날 펠레폰네소스전쟁 때는 의용군에 응모한 이천 명의 헤로트를 한꺼번에 도살한 적도 있다. ― 아테르타에는 자유민이란 이름 아래 노예보다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들어, 스파르타 사람들의 정직성으로 승인되었다.
허약한 어린이를 버리는 풍습이나 아케라이(소년 집단)에서의 엄혹한 신체 단련, 피디티아(공동 식탁)에 들기 직전의 청년들에 대한 도둑질과 암살의 사주(使嗾) 따위, 전에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 번견(人間番犬)을 기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탄받던 리쿠르구스의 여러 제도들도 각기 유리한 해석을 찾아냈으며, 우수한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아내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관습도 성적(性的) 인 혼란이나 부도덕이 아닌 다른 어떤 고귀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인간이란 자기가 기르고 있는 암캐나 암말을 위해서는 빌거나 기르거나 하여 가장 좋은 수캐나 수말을 장만하면서도, 남편의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좋은 씨내리를 마련할 줄 모르는 별난 족속이다. 남편이 정신박약자이건 노쇠하건 또는 병들어 있는데도, 그것이 남편의 신성한 권리인 양 여성들을 가정에 가둬 놓고 감시하는 성 규범에서는 악과 허영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인습은 열등한 양친은 열등한 자식을 낳고, 우수한 양친은 우수한 자식을 낳는다는 것과, 그 차이를 느끼는 최초의 사람이야말로 바로 자식을 가지고 그 자식을 길러야 하는 사람이라는 그 두 가지 명백한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스파르타 평원이며 유로타스 강(江), 타이게투스 산맥, 랑가드 협곡 같은 것까지도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티라나투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테네에 대한 극단한 반감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티라나투스와 그 추종자들도 그 모든 사태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날로 민회위 상임 위원회를 소집한 티라나투스는, 그 소요를 반(反)민주적, 반도시적 불순분자의 책동으로 규정하고 아테르타가 전쟁 상태에 빠졌음을 선언케 하여, 스스로 집정관에서 장군(스트라테고스)의 직에 올랐다. 그리고 복무 연령에 있는 시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린 뒤, 소집에 응한 시민들 중에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자로는 은갑대, 신성대를 증강시키고, 나머지로는 도시 수호의 명목 아래 성채와 같은 자신의 저택을 호위하게 했다. 전보다 더 많은 밀정들을 풀어 저항적인 시민들을 감시하게 하는가 하면, 그에게 끼니를 얻고 있는 빈민들을 동원하여 그 아침의 소요에 못지않은 지지 시위를 벌이게 했다.
갖가지 불리한 풍설과 유언비어에 대해서도, 그리고 공공연히 전파되고 있는 반아테네적인 정치 이상에 대해서도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관대한 포고를 거듭 발표했고, 밀정을 통해 알아낸 주모자급의 시민들에게는 금품과 권력으로 개별적 인 매수 공작을 펼쳤다. 그리고 따로이는 아테르타의 이름난 학자와 현인들을 포섭하여 그 자신의 공적과 미덕을 새삼 추키게 하는 한편 반저항적이고 반스파르타적인 이론을 현란하게 펼치도록 했다. 그 어용학자들이 사용한 언어나 논리는 지금 거의 전하지 않고 있으나, 그 10년쯤 뒤에 행해진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추도 연설(追悼演說)이 한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체제는 민주제(民主制)라 일컫는바 이는 나라가 다수자(多數者)의 손에 있고, 소수자(小數者)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상 사적(私的)인 다툼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인재(人材)에 대해서는 각기 그 신망(信望)이 있는 대로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공사(公事)에 나서도록 받들거니와…… 우리는 권모술수에 의존하기보다는 저절로 우러나는 용기에 의존한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는 저들 스파르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용감하게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하는 데에 비해 우리는 편히 살면서도 저들에 못지않게 어떤 위험이라도 기꺼이 맞설 각오가 돼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美)를 사랑하면서도 사치에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柔弱)에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富)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실행의 수단으로 쓰이고, 가난을 인정하는 것은 조금도 수치가 아니라 일함으로써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수치일 뿐이다.
집안일과 나랏일을 똑같이 돌보는 이들도 있지만, 생업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도 나랏일에 대한 식견이 모자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테네는 희랍 세계의 학교이며, 시민 각자는 다시없는 우아함과 유연함을 가지고 온갖 상황에 그 몸을 마음대로 적응시킬 수가 있다.
……여러 도시 가운데에서 아테네만이 시련에 부딪쳤을 때 원래의 평판보다 위대하였다. 침략해 온 적들마저도 그와 같은 나라에 패배하였음을 통분히 여기지 않으려니와, 그 속방(屬邦)들이 그같이 훌륭한 상전에게 지배받고 있음을 불평하지 않는 나라도 오직 아테네뿐이다…….”
거기서 아테르타 시는 티라나투스 일파와 반티라나투스 시민들간의 본격적인 무력 충돌에 앞서 정신적인 내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양편의 사람들은 모두 거리나 광장에서 공공연하게, 혹은 골목이나 방 안에서 은밀히, 자기들에게 유리한 풍설과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자기들이 옹호하는 정치제도를 선전했다.
그런데 관찰하기에 흥미로운 것은 그 무렵의 반티라나투스 이론을 주도한 계층이다. 이미 말한 대로 처음 티라나투스의 통치에 회의를 표한 것은 오랜 배움과 지적(知的) 연마를 거친 소피클레스였지만, 그는 다만 사변(思辨)과 직관뿐 대국을 지도할 행동력이 없었다. 따라서 첫 번째 소요의 정신적인 지도는 소피클레스의 외침에서 깨어난 두 사람 ― 실패한 정객(政客)과 불우한 비극 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둘 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었는데, 그것은 그날 나타난 몇몇 선동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소요가 뜻밖에도 커지고, 희미한 대로 티라나투스의 실각 내지 아테르타 지도 체계의 변혁과 연결될 가능성이 보이자 몇 종류의 동조자들이 가세했다.
그 하나는 소피클레스 못지않게 오랜 배움과 지적 연마를 거쳤으나 그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행동력을 갖춘 부류였다. 뒷날 티라나투스 일파의 어용(御用) 이론을 철저하게 분쇄한 대항 이론은 대개 그들의 솜씨였다. 그러나 그들도 소요에 관여하는 태도에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다 같이 이성적인 토대에서 출발했지만, 일부는 끝까지 그 입장을 고수한 대신 나머지는 그 같은 시기에 흔히 나타나는 이상주의에 취해 감정의 논리에 휩쓸려 버렸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들은 대개가 아테르타 시민은 아직 정치적 이상을 스스로 쟁취할 만큼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꿰뚫어 본 축이었다. 그들은 설령 그 소요가 성공적으로 발전한다 해도 결과는 시민들의 이상에 접근한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력 장치의 변경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당장은 지도층에 끼어들었지만 자신들의 지도 능력에 대해서도 그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티라나투스가 몰락하면 당연히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는 야심가를 찾아가 선을 댄 후 소요의 이면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소요는 자기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좋은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 비해 감정의 논리에 휩쓸려 버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리석다기보다 순수한 축이었다. 그들도 아테르타의 시민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들의 성실한 지도와 소요 자체에 따른 훈련에 의해 성숙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 아테르타에서 그때껏 한 번도 실현돼 본 적이 없는 이상 정치가 실현되고, 그것이 전 희랍 세계에 퍼지게 될 것을 꿈꾸었다. 이상에 있어서는 순수하고 그 실현에 있어서는 낙관적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역할은 감정적인 군중의 드러난 층으로서 앞에서 말한 이들을 티라나투스 일파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였을 뿐이었다.
모든 정치적 변혁에서 지식인의 행동 양식이 이와 같은 두 가지 형태로 대별된다고 말하기에는 물론 비약과 무리가 있고, 또 치밀한 조직과 냉철한 계산에서 행동하되 자기를 잊고 동료 시민에게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준 지도자를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 아테르타의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본보기를 보여 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특히 민중의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음을 잘 알면서도 그들을 급격한 정치적 변혁을 위한 투쟁 속으로 끌어들일 때의.
하지만 이들보다 관찰하기에 더욱 흥미로운 것은 또 한 부류 ― 불우한 비극 시인을 정점으로 소요의 지도층에 가세한 한 무리의 예인(藝人)들이었다. 초기에 활동한 것은 주로 극시인(劇詩人) 들과 서사 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 하나는 티라나투스 일파에 대한 분노와 변혁에 대한 의지에 있어서 순수함을 특징으로 삼는 부류였다. 주체할 수 없는 열정 때문에 종종 그들의 감정은 터무니없이 과장적 이며 목소리는 지나치게 격앙되고 행동은 현실적이지 못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시인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었다. 거기 비해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찾아든 속인(俗人)들이었다. 자기 재능에 대한 오해나 삶에 있어서의 우연한 계기로 시인의 이름을 얻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세속적인 것, 즉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 같은 것들이었는데, 때를 당하자 억눌려 있던 그런 관심이 ‘행동하는 욕심’으로 불붙어 올랐다. 따라서 그런 그들에게는 극(劇) 이든 시(詩)든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초기에 그들이 거둔 성공은 놀라웠다. 대사는 거칠고 구성조차 엉망인 비극도 그 내용이 티라나투스의 처참한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경박한 희롱과 상스러운 욕설의 범벅에 지나지 않는 희극도 그것이 고발적(告發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쑤 떠들썩 한 갈채를 받았다. 기원전 6세기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던 「일리아드」와 「호디세이」의 전통도 험구와 중상의 문틀로 되살아나 티라나투스의 일생을 악덕과 오욕의 세월로만 노래한 시인은 단번에 호메로스 이후 제일가는 서사시인이 되었고, 어제까지도 젊음과 사랑, 술과 유랑의 슬픔 따위를 읊던 서정 시인들은 황급히 혀를 비틀고 목소리를 돋우거나 까닭 없는 부끄러움 속에 침묵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잡다한 예인의 무리가 불을 향해 날아드는 하루살이처럼 그 화려한 성공을 향해 몰려들었다. 예술 외적(藝術外的)인 것으로밖에는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메울 길 없는 삼류 극작가와 시인들, 터무니없이 큰 몸짓과 격앙된 목소리만이 연기(演技)의 전부인 무명의 연극배우들, 손가락이 굳어 고음(高音)밖에 뜯지 못하는 수금(竪琴) 연주가들이며 테스모폴리아 제전(부인들만이 참가함)의 광대나 사적(私的) 향연에서 흥취를 돋우던 피리장이들까지, 일시에 명예와 인기를 얻기 위해 그 고정된 주제(主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아테르타 시는 한동안 연극인지 티라나투스의 화형식(火刑式)인지 모를 난장판과, 노래인지 욕설인지, 아니면 정치적 선전 구호인지 분간 못 할 시 낭송과, 음악인지 소음인지 구별 안 될 만큼 높고 시끄러운 악기 소리로 악머구리 들끓듯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시민들의 격앙된 감정에 있었다. 민중이란 원래가 많건 적건 통치 기구에 대해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어서, 하필 티라나투스의 시절이 아니더라도 지배 체제에 대한 도전적인 비판이나 통치자에 대한 험구는 흔히 예술 주제의 인기 품목이 된다. 그런데 아테르타 시민은 이미 유혈충돌을 한 번 겪은 데다 다시 선동가들의 반복된 구호에 격앙된 후이고 보니 자연 그런 내용의 연극과 시에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살피면 그런 현상의 보다 큰 원인은 민중 자체보다는 그들 뒤에서 부추긴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라나투스의 권좌를 노리는 야심가에게 선을 대고 있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디까지나 막후 조종자로 나앉은 이른바 배움과 지적 연마를 거친 계층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는 물론 아무런 속셈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만 뛰어든 동류(同類)들을 내세워 예인의 무리들을 부추기게 했다.
“예술한다는 것은 바로 악(惡)과 투쟁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아테르타에서 가장 큰 악은 티라나투스이다. 당신들의 수단이 언어이건 음(音)이건 동작이건, 그와 투쟁하지 않는 것은 참다운 예술일 수가 없다.”
아무리 타락한 예인인들 무슨 수로 그들이 앞세운 명제(命題)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애초부터 사소한 논리의 시비를 초월한 채, 정의(正義)란 만능의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또 시민들에게는 이런 미신을 널리 뜨ㅓ렸다.
“배움과 지혜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참된 예술 ― 즉 악과 싸우는 예술 ― 을 거리의 잡다한 기예와 구분할 줄 알고, 거기에 감탄과 갈채를 보내는 데 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징표는 거기에서 고양된 정의와 양심을 실천하는 일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죄악이다.”
실천하는 데는 좀 문제가 있지만, 일정한 주제의 예술에 감탄하고 갈채하는 것만으로 배움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누군들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실제로 그 무렵의 기록에는 어떤 연극에서 단순히 자신의 지성(知性)을 과시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이 살해당하는 장면에까지 박수를 보냈다가 망신을 당한 시민의 이야기가 보인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런 다분히 목적적 인 명제와 일면적(一面的)인 미신을 예인들과 일반 시민에 유포시키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한 사람들 중에 각종 경연 대회의 심판원들도 포함돼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소요의 막후 조종자나 그들에게 사주된 이상주의자들 또는 그 같은 견해에 비판 없이 말려든 예인들이나 일반 시민들과는 달리, 경연 대회의 심판원들은 일종의 전문가들이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에 대해 비평 이란 그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그들 심판원들도 바로 거기에 의지해 수많은 경연 대회에서 여러 가지 등급을 매기고 투표 항아리에 가부(可否) 의 표시를 던져 왔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단순히 일반 시민들보다 먼저 예술에 대한 그런 목적적인 명제에 말려들어 거기에 맞게 활동하는 예인들에게는 이전의 그 어떤 경연 대회에서 받은 월계관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언어의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사람의 소신(所信)이나 견해는 경우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법이지만, 확실히 그들 중 몇몇에게서는 이른바 의식 있는 대중의 인기를 겨냥한 고급한 통속을 의심할 만한 데가 있었다.
어쨌든 그들 심판원들의 지지는 결정적 이었다. 오랜 세월 심판원으로 종사하면서 획득한 권위를 들어 예술의 그 같은 변질을 환영할 만한 것으로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과 논리의 기교를 다하여 그 이론적인 근거까지 마련해 준 까닭이었다.
물론 그런 현상은 오래전 아테네에서도 일종의 문화적인 유행으로 시민들의 의식을 휩쓴 적이 있고, 또 정치적 변혁의 과정에서 예술이 그 독특한 설득력으로 협조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아테르타 시에서는 실속도 없이 너무 목소리가 높았으며, 자기들 이외에는 일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내부의 반이론(反理論)을 급속하게 성장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요란하게 찧고 까분 것은 자기들끼리만이거나 극장 또는 경연장 안에서였을 뿐 예술을 빈 그들의 주장이 일반 시민들을 행동화하는 데는 무력 했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사이에도 크고 작은 소요는 연일 계속되었다. 이미 넌지시 밝힌 바 있듯 어떤 이념적인 원인에서보다는 소요 자체가 가지는 확산 작용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불만은 한번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면 계속하여 참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아테르타 시도 마찬가지여서 애매하고 우발적인 대로 첫 번째 소요가 있게 되자 그다음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충분히 시정될 수 있는 불만들도 소요의 형태로 폭발하였다.
거기다가 저절로 가라앉기를 단념한 티라나투스가 강경하게 대처하자 소요의 규모는 더욱 커져 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체포되면 다섯 명의 친구와 열 명의 친척이 적극적인 적대자가 되고, 스무 명의 이웃이 다음 소요에 가담했으며, 한 사람이 부상당하면 그 배(倍)의 적대 세력이, 그리고 사망할 경우에는 그 배(倍)의 배가 되는 적대 세력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 그렇게 확대된 소요는 다시 티라나투스의 통지 아래서는 도저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정치범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시민들은 더 이상 이성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이상한 열기에 사로잡혔다. 뒷날의 혁명 이론을 적용시켜 그 소요를 일종의 혁명으로 보면, 그것은 어느새 중반기로 접어든 셈 이었다.
군중도 그사이 많이 달라져, 선동자의 감정적인 구호와 일시적인 행동 통제로 그때그때마다 산발적인 체계와 조직을 가졌던 초기의 그 다중(多衆)은 아니었다. 비록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구성되어 막후에 숨겨져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고정적인 지도층과 수뇌부를 가진 반란 시민ㅌ}으로 변질해 갔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자생적(自生的) 인 지도층과 도편추방에서 돌아온 크고 작은 야심가들이 손을 잡은 결과였다.
시(市)의 무기고는 티라나투스 일파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길 또한 새로운 법령으로 막혀 있었지만, 군중들의 폭력도 차츰 무장되어 갔다. 겉으로는 티라나투스의 편인 것 같아도 속으로는 군중들에게 남몰래 무기와 자금을 대는 부호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웃 도시 무기 제조업자들의 집요한 상혼(商魂)은 후불(後拂)로 아테르타의 소요 군중에게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군중들의 심리적인 변화였다. 증가된 대항(對抗) 엘리트의 냉철하고 교묘한 이론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직업적 선동가의 신랄하고 절실한 선동 속에서 처음의 불안, 처음의 요구들은 잊힌 지 오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 통제와 반복 구호의 홍수 속에 개성은 흔적 없이 파묻혀 버리고, 가치 박탈(價値剝奪)의 체험이나 사적 권익의 침해에 대한 불만은 물론, 나름대로의 고매한 정치 이상이나 변혁에의 순수한 열정 같은 것들도 모든 반(反)압제의 대의(大義) 아래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대신 정형화(定型化) 된 구호와 선전만이 그들을 충동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변질 후의 군중을 자극하는 데 한동안 가장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지도자로서의 미화(美化)와 허구를 잃어버린 티라나투스에 대한 험구와 비난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참주(이때를 앞뒤해서 티라나투스의 공식 칭호는 참주가 된다.)는 하루 한 마리의 살찐 양과 두 마리의 가금(家禽) 그리고 몇 광주리의 질 좋은 과일을 먹어 대며, 그 몇 배를 여러 가지 구실로 비축한다. 때문에 우리 가난한 과부의 한 마리뿐인 양이 징발당하고, 홀아비 농부의 씨암탉이 차압되며, 황무지에서 피땀으로 거둔 과일이 싼값에 강제 매상당한다. 대식(大食)하는 참주를 방벌(放(戈)하라.”
“수많은 시민들이 헐벗고 있는데도 참주는 하루 세 번씩 옷을 갈아입고, 또 한 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기 위해 없애 버린다. 때문에 궁한 직인(職人) 이 밤새워 짠 직물은 전매품(專賣品)이 되어 매매 금지에 떨어지고, 혼숫감으로 애써 마련한 노처녀의 수단(繡緞)은 공출을 강요받는다. 사치하는 참주를 추방하라.”
“수많은 시민들이 노천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잠자는데 참주는 쫓겨난 폭군 [前王] 의 궁궐보다 더 큰 저택을 지었다. 때문에 부근의 수많은 민가가 헐리고 시민들은 변두리의 움막으로 쫓겨났다. 시(市)는 과중한 성금에 시달렸으며, 수백의 시민들은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폭군을 흉내 내는 참주를 추방하라.”
“이미 죽은 영웅들 중에도 석상을 가지지 못한 이가 있는데 참주는 거리마다 자신의 석상을 세웠다. 때문에 도시에서 질 좋은 대리석은 모조리 거두어졌고, 심지어는 성스러운 신전의 축대까지 뽑히었다. 불경(不敬)과 독신(瀆神)의 참주를 추방하라.”
“아테네와 우리는 대등한 동맹 시인데도 참주는 페리클레스 앞에서 천한 종자(從者)처럼 굴었다.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경박한 아첨꾼으로 보고 그의 지도를 받는 우리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비굴한 참주를 추방하라.”
이 같은 구호들은 언뜻 보기에는 유치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노련한 선동가들의 힘들인 고안이었다. 가령 대식(大食)에 관한 것만 해도, 당장에 배고픈 군중들에게 티라나투스가 자기의 추종자들과 사병들을 위해 국고에서 빼돌린 수천 탈란트의 돈을 말한들 그게 무슨 실감이 나겠는가? 그보다는 한 끼에 살찐 양을 두 마리씩이나 먹어 대는 그의 대식이 상징적이긴 하나 훨씬 밉살맞게 느껴질 것이며, 실제로도 군중들은 그런 종류의 구호만 들으면, 그 진위(眞僞)도 묻지 않고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이나 노호하며 거리를 내달렸다.
그러다가 군중이 제법 정연하게 조직된 무장 단체로 변해 갈 때쯤 폭풍의 눈은 참주를 떠나 그의 애첩(愛妾)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애첩에서 비롯된 논란은 티라나투스에게 가해졌던 그 어떤 비난이나 험구보다 더욱 애매모호하다. 사실 아테네의 어떤 참주는 첩을 아홉이나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또 티라나투스에게도 첩이 없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 논란은 앞서의 구호들보다 훨씬 강한 상징성을 띤 어떤 것으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테르타는 관례로 지도자에게 한 사람의 애첩을 허용하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 티라나투스에게도 몹시 총애하는 여자가 하나 있다는 소문은 벌써 오래전부터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벽처럼이나 높다란 담장과 삼엄한 은갑대의 창칼과 쇠창살의 창문과 두터운 커튼 뒤의 일이었다. 일반 시민들 중에서 그때껏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녀에 관한 모든 지식도 대개는 몇 다리를 걸친 간접적인 정보에 의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녀에 대한 지식이 시민들 사이에서 제법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용모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쌀쌀해 뵈는 날카로운 콧날에 비해 눈길이 지나치게 음란하다든가, 혹은 성격은 치밀하고 사려 깊지만 때로 가혹하리만큼 비정한 데도 있다는 따위였다.
그러다가 첫 번째 소요가 일기 직전에는 그녀의 출신에 대한 추측이 아테르타 시 일부에서 은밀하게 나돌았다. 비록 티라나투스의 추종자는 아니지만, 한때 그 측근에 있으면서 먼빛으로 그녀를 본 적이 있노라는 어떤 시민이 그녀에 관해 처음으로 밝힌 것은 티라나투스가 쫓겨난 폭군에게서 그녀를 물려받은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옛 폭군의 궁전에서도 그녀를 본 적이 있다는 게 그 근거였는데 그러나 그 추측은 이내 부인되었다. 그때만 해도 성실하고 정의감에 가득 차 있었던 티라나투스가 자기가 축출한 폭군의 악덕을 단 하나라도 물려받았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새로이 떠돌게 된 추측은 그녀가 티라나투스의 폭군 추방에 무언가 중요한 몫을 하고 그 대가로 그의 총애를 사게 된 것이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처럼 소요가 일어 옛 폭군의 몰락이 상당히 뚜렷한 징후로 나타났을 무렵, 그녀 쪽에서 자진하여 그때껏 섬겨 오던 옛 폭군을 배신하고 티라나투스에게로 구애해 왔다는 것으로서, 그걸 주장하는 이들도 그녀의 출신 성분에 대한 것은 찰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공론이 식자(識者) 들 간에 무슨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예로부터 제우스가 땅의 통치자에게 주어 온 특권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그녀를 데메테르(여기서는 대모신(大母神))의 딸이라든가 원래 왕과 같은 권위를 가졌던 여신관(女神官)의 후예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낡은 신화는 이미 사왕국(四王國) 의 쇠퇴 이후로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되고 보면 그녀는 부득불 땅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거기서도 의견은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보잘것없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그 타고난 아름다움과 재치로 티라나투스를 홀렸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양가의 딸로 호색한 티라나투스가 납치해 간 것이라고도 했다. 거리의 시궁창에 함부로 몸을 굴리던 여인을 재물로 사들였다는 사람도 있고, 이웃 종족의 왕녀(王女)를 힘으로 빼앗아 왔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녀가 어디까지나 합의에 의해 티라나투스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그녀는 바로 시민 자신들에 의해서 맡겨진 여인이라든가, 혹은 몇몇 부유한 상인들이 보다 큰 이권(利權)을 얻어 내기 위해 바친 것이라든가 하는 따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히 종합해 보면 어딘가 권력 내지 국가의 발생에 대한 여러 학설을 상기시키는 데가 있다. 이 애첩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史實)로서보다는 어떤 상징성을 띤 희화로 본 앞서의 가정(假定)은 아마도 온당한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출신에 관한 이 구구한 논의는 결론을 얻지 못한 채 그녀의 본질에 관한 논의로 넘어감으로써, 티라나투스의 몰락을 한 걸음 앞당기게 된다.
논의가 전개되던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을 생략하고, 티라나투스의 적대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도된 혐의가 짙은 그 결론은 이러했다. 요컨대 그녀의 본질은 주위에 전염병과도 같은 기아 심리(飢餓心理)를 퍼뜨리고, 그녀를 소유한 자를 부패시키며 마침내는 치욕 속에 떨어지게 만드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하여, 원래 선량하였거나 적어도 평범은 하였던 지도자 티라나투스를 오늘과 같이 지탄받는 참주로 만든 것은 순전히 그녀의 그 같은 악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대식은 보통 아닌 그녀의 색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역사(力事)의 결과이며, 그의 사치도 그녀의 변덕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더욱 큰 비난의 대상이 된 그녀의 악덕은 단정하지 못한 행실이었다. 그녀는 티라나투스의 측근이면 누구에게나 서슴없이 추파를 던지며, 은갑대의 대장이나 밀정의 우두머리와는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온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뒷골목 불량배의 두목이며 거리의 미청년(美靑年)들과도 거리낌 없이 야합(野合)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심하게는 티라나투스의 정적(政敵)들이나 소요 군중의 지도자들과도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비유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얼른 알아낼 수가 없는 그녀의 악덕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런 그녀에게 흥분하는 군중의 태도였다. 대의는 그 같은 악부(惡婦)를 이 아테르타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녀에게 홀려 있는 티라나투스와 그를 옹호하는 여러 권력 장치를 타도해야 한다는 데 있었지만, 그걸 외치는 군중에게는 어딘가 석연하지 못한 데가 있었다. 순수한 이념 이상의 어떤 왜곡된 욕정이 그 외침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짐작건대는, 그녀에 대한 갖가지 극렬한 험구 뒤에 반드시 붙기 마련인, 그녀가 굉장한 미인이며 방사술(房事術)의 기교 또한 놀랍다는 풍설이 그들 군중의 의식 깊은 곳에서 어떤 미묘한 작용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밖에 그녀에 관한 논의 중에는 일시 원론(原論)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군중을 이끌어 간 것도 있었다. 주로 그때껏 아무런 비판 없이 허용해 온 애첩 제도(愛妾制度) 자체에 관한 것인데, 한때의 극단한 결론은 일쑤 지도자를 부패와 치욕에 빠뜨리는 그 위태롭고 해로운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적(性的)인 것에의 의지는 인간의 의지 중 가장 치열한 것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에 대한 보상 또한 인간을 가장 크게 격려할 수 있는 것들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제도는 지도자 하나에게만 애첩을 허용하고 있어 만약 지도자가 어리석으면 그녀는 겪려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악이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제도를 폐지하자. 그녀를 시민 모두의 공유(公有)로 하여 그녀가 더 이상 이 아테르타를 해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녀를 이 도시에서 내쫓고 우리 모두가 절제함으로써 지금 이 도시가 겪고 있는 불행을 예방하자.”
대개 그런 주장이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극히 일부분의 군중에게만 감명을 주었을 뿐, 그리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아직도 잘만 운영되면 그 제도가 자기들의 도시에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믿거나,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녀를 차지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야심적인 시민이 군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탓이었으리라.
그러면 여기서 잠시 군중을 떠나, 그에 대응하고 있는 티라나투스 일파의 동정(動靜)에 유의해 보자.
겉으로는 합법성과 정통성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티라나투스를 뺀 나머지 추종자들은 처음 대개가 무정견(無定見)하고 피동적이며 비판 능력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소요가 점차 정치적인 변혁으로 진행됨에 따라 그들도 차츰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사고주체로 변해 갔다. 뒷날의 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변화로서 그것은 대개 두 개의 상반된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 한 방향은 시민들의 불만과 개혁 의지를 수긍하고, 소요 군중에게 은근한 동정을 느끼는 쪽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응하는 행동 양식으로 보면 그들은 다시 둘로 갈라졌다. 그 하나는 혼연히 티라나투스의 진영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적극파였고,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나 티라나투스의 진영에 남아 ‘위로부터의 개혁’을 꿈꾸는 온건파였다. 얼핏 보아서는, 유혈(流血)과 파괴를 피할 수 있는 온건파 쪽이 훨씬 현명해 보이지만, 이미 충돌한 양편의 상반된 이익을 새삼 조정하고 중재할 수 있다고 보는 그들의 낙관론은 대개 끝내는 깨어지게 되어 있는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다른 한 방향은 시민들의 불만과 개혁 의지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그 소요에 분노와 혐오를 느끼는 쪽이었다. 오랜 기간 티라나투스의 그늘에서 시민들을 다스려 오는 동안에 몸에 밴 독선과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데 그런 경향은 특히 티라나투스가 서 있는 권력의 정점에 가까운 자들일수록 심했다. 대개는 어쩔 수없이 티라나투스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티라나투스 또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른 한 무리의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기회주의자들로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들은 어느 편이 승리하든 그 편의 동료였음을 인정받기 위해 티라나투스와 군중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였다.
물론 그 모든 분파의 비율이 항상 일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소요의 진전과 비례하여 변해 갔으니 ― 소요 군중이 기세를 떨치면 떨칠수록 티라나투스에게 충성하는 패거리의 비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갔다. 크게 뜻밖은 아니지만, 그 같은 현상이 자기들이 의지해 온 표현적(表見的)인 합법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라, 한 줌의 실리(實利)나 길게 끌어 봐야 그리 대단할 성 싶지도 않은 목숨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듣는 이에게 까닭 모를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완전히 무장된 시민군으로까지 성장해 간 군중이 전면적인 봉기 날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무렵, 티라나투스의 진영에는 다만 깊은 고뇌에 젖은 소수의 권력 핵심과 죽음을 각오한 몇몇 충성파, 그리고 너무도 그 악명이 널리 알려져 군중에게 투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약간의 추종자들만이, 사병화(私兵化)한 은갑대와 신성대를 친위군(親衛軍) 삼아 거느리고 있는 티라나투스와 함께 남아 있었다. 물론 수적으로는 그 모든 인원을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민병(民兵)들이 아직 그들 편에 있었지만, 티라나투스 일파가 독점하고 있는 표현적인 합법성에 의해 징집에 응한 그들은 언제든 때가 되면 칼끝을 돌릴, 반티라나투스 시민군의 잠재력에 가까웠다.
아테르타 시민들의 전면적인 무장봉기는 생각보다 빨리 있었다. 사태도 대략 그들의 지도층이 예측한 대로 진전되어 ― 며칠 되기도 전에 티라나투스를 지지하던 모든 권력 조직과 권위 체계는 군중에게 접수되거나 깨끗이 소멸되어 버렸다. 티라나투스 일파가 줄곧 걱정해 온 대로 표현적인 합법성의 한계가 드러나, 징집되어 와 그들 편에 있던 민병들이 일시에 군중과 합세해 버린 탓이었다. 남은 것은 오직 언덕 위에 음울하게 서 있는 티라나투스의 저택뿐이었다.
성급한 승리감에 젖어 저택을 포위한 군중과는 달리, 지도층의 정확한 눈으로 보면 그곳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원래도 성채와 다를 바 없이 견고하게 지은 그 거대한 저택은 소요가 일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보강되어 그 무렵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두려운 것은 그 저택이 담고 있는 저항력이었다. 그 속에는 비록 긍지에 몰려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장군(스트라테고스)의 권위를 유지 하고 있는 티라나투스가 소수이기는 해도 정예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전히 독점하고 있던 합법성 덕분에 아테르타에서는 가장 우수한 장비와 훈련된 병사를 가진 은갑대와 신성대도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용병(傭兵) 출신의 고급 지휘관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도 한결같이 이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밖에 아테네를 비롯한 이웃 도시들의 반응도 문제였다. 고지식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화평 조약을 내세워 군중을 직접으로 돕기를 거절한 반면 아테네와 몇몇 도시들은 티라나투스에게 원군(援軍)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테르타와 같은 소요가 자기들의 도시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전부터 티라나투스와 친분이 두텨운 집정관 또는 장군들이 통치하는 도시들이었다.
만약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있는 티라나투스 일파가 그들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틴다면 그 뒤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군중의 동태도 지도층에게는 걱정이었다. 오랜 소요와 혼란을 겪어 오는 동안. 그들에게도 조금씩 피로와 염전(厭戰)의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 며칠만 더 싸움이 계속되면 희생을 치르더라도 빨리 결말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 그것이 지도층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소요의 발생 이래 가장 처참한 유혈과 파괴가 티라나투스의 저택을 둘러싸고 몇 날 몇 밤을 계속되었다. 양쪽 모두 수많은 사람이 다지거나 목숨을 잃었고, 언덕은 그을리고 파헤쳐진 흙더미처럼 변했다. 그러나 끝내 대세는 기울어져 승리는 수와 기세에서 우세한 군중의 것이 됐다. 굳게 지키기만 하면 이웃 도시의 원군들이 폭도들을 돌파하고 자기와 추종자들을 구해 주거나, 마침내 파괴와 혼란에 지친 폭도들이 스스로 지리멸렬하여 물러가리라는 티라나투스의 기대는 한낱 허망한 환상으로 끝나 버렸다. 성벽 같은 담은 부서지고 참호는 메워졌으며, 보루는 무너지고 목책은 불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지막까지 피투성이 저항을 계속하던 은갑대와 신성대도 온전히 괴멸하고 말았다.
참으로 길고 괴로운 투쟁과 크고 가슴 아픈 희생의 대가였으나, 막상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폐허처럼 괴괴한 저택으로 들어서자 군중은 일종의 허탈에 빠졌다. 그간의 일은 모두가 한순간의 일로 착각되었으며,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진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야릇한 쓸쓸함으로까지 느껴졌다.
군중은 티라나투스마저도 자기들이 어지러이 날려 보낸 비행 무기에 숨을 거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습관이 된 방화와 파괴로 그 거대한 저택의 방실(傍室)을 하나하나 점령해 가던 그들은 뜻밖에도 그 한곳에서 마지막 독배(毒盃)를 들고 있는 티라나투스와 마주쳤다. 두터운 벽과 청동 판을 씌운 겹문으로 거의 장갑(裝甲)되다시피한 어느 넓고 화려한 방실에 힘들여 난입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지만, 무엇인가 깊은 회상에 잠겨 있는 듯한 티라나투스에게는 그래도 한때 이 도시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던 인물의 용자(勇姿)가 남아 있었다. 이상한 위엄이 침중한 비극감과 함께 무슨 후광처럼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으며, 산악처럼 태연한 자세와 조금도 위축된 기색이 없는 목소리는 죽음을 초월한 어떤 당당함으로 군중을 압도했다.
“조용히 하라.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 나의 사랑이 저 휘장뒤에서 최후의 단장을 마칠 때까지만, 내가 지금 잠겨 있는 이 감미롭고 행복한 회상에서 평화롭게 깨어날 때까지만, 그리하여…… 한때 나를 신애(信愛)했던 동료 시민들이여, 나를 내 불변의 사랑과 함께 조용히 떠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달라. 이미 독당근의 즙이 심장을 향하고 있으니 이제 나는 머지않아 스스로 떠나리라. 대지로부터, 대지의 총아 아테르타로부터, 그리고 그대들의 불쾌한 기억으로부터.”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형언할 수 없는 애정으로 실내를 가로지른 두터운 휘장을 꿰뚫듯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다시 선동가의 목소리가 다시 그들을 충동하지 않았던들, 군중은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것 같은 숙연한 감동에 젖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시민들이여, 잊었는가? 저자가 우리를 압제하던 자, 우리의 부모 형제를 살육하고, 단란하던 보금자리를 불태운 자다. 저자를 죽여라. 정당한 분노의 돌로 저자를 쳐라.”
선동자가 그렇게 외치며 들고 있던 흉기로 티라나투스를 내려치자 군중들에게도 이제는 거의 어떤 강박관념이나 습성과도 같아진 분노와 흉포성이 발작하였다. 일순의 숙연한 감동을 부끄러워하듯이나, 이내 갖가지 무기가 티라나투스를 난자하고, 마침내 티라나투스의 영혼은 다져진 고기처럼 된 육신을 떠났다.
그 피로 다시 발광한 군중은 뒤이어 티라나투스의 애첩이 단장을 하고 있던 휘장으로 짓쳐들었다. 그런데 가장 멋없고 기이한 종말이 그 순간에 왔다.
미처 군중들의 손에 젖혀지기도 전에 갑자기 그 휘장이 스스로 열리며 결혼식의 신부처럼 단장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말로만 듣던 티라나투스의 애첩이었다. 작은 공포의 그림자도 없이, 그리고 고기처럼 다져지던 순간까지도 그녀를 연연해하며 떠난 옛 정부(情夫)의 시체에 대해서도 희미한 연민의 눈길조차 없이, 수줍은 듯 두 눈을 내리깔고 군중을 향해 똑바로 걸어 나왔다.
오히려 까닭 모를 당황과 요의(尿意)와도 흡사한 욕정에 젖어 길을 내준 것은 민중 쪽이었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비정한 선동가조차도 말문이 막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마치 결혼행진곡에 발을 맞추듯 경쾌한 걸음으로 그런 군중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러자 저만큼 군중의 배후에서 한 사내가 나타나 서슴없이 안겨오는 그녀를 당연한 듯 끌어안았다.
이 사내, 대부분의 군중들에게는 마치 땅바닥에서 돌연히 솟아오른 것처럼 만 느껴지는 이 사내는 누구였을까? 억눌리고 마비된 시민의 의식에 최초로 각성의 일섬(―閃)을 던지고는 사라져 버린 소피클레스 또는 그 같은 배움과 지식의 사람이었을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게도 절실하고 격렬한 구호로 막연한 시민들의 불만을 구체적인 군중의 소요로 바꾸어 놓은 선동자들 중의 하나였을까? 역시 아니었다. 번쩍이는 예지와 달변으로 티라나투스 일파의 반동이론(反動理論)을 여지없이 분쇄하던 이론가? 소요 군중을 시민군으로 개편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던 군략가(軍略家)? 군수와 병참에서 놀랄 만한 수완을 보인 이재가(理才家)? 갖가지 자극적 인 풍자시(諷刺詩)를 읊고 티라나투스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고발극(告發劇)을 쓰고, 소요 군중을 고무하는 행진곡을 짓던 그 예인의 무리? 그러나 그 누구도 아니었다. 군중에겐 거의 낯설었지만 의심할 바 없이 아테르타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인 그분, 그 어려운 변혁의 과업이 진행되는 동안 지도층에게 영감(靈感)처럼 내려왔던 모든 효과적인 지령(指令)의 주인이었다.
물론 그의 등장에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 중에 그를 알아본 몇몇이 그를 새로운 티라나투스라고 말했다가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갔다. 그는 한낱 패배한 티라나투스의 옛 정적(政敵)으로서, 음험한 야심이나 그 야심을 실험하기 위한 무자비한 수단도 티라나투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 소요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은 추종자들이 조작하여 퍼뜨린 그의 신화(神話)가, 그런 시기에 흔히 시민들을 사로잡는 일종의 메시아니즘[救援心理]에 의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탓일 뿐이다. ― 이것이 끌려나간 이들의 폭로였다.
그 밖에도 이상한 욕정에 눈먼 몇몇 지도적인 시민이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티라나투스의 애첩에게 공공연한 구애를 표시하다가 티라나투스의 잔당이라는 혐의로 체포되고, 더 많은 그 변혁의 중추적 인물들이 그녀의 공유를 주장하다가 그 방에서 무력하게 쫓겨났다. 그녀를 처형하고, 그녀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제도는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운명도 앞서의 시민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방 안에 온전히 침묵만 남게 되었을 때, 새로운 지도자는 군중을 향해 엄숙히 선언했다.
“여러분, 모든 것은 우리 시민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졌소. 참주는 타도되었고 자유와 평등과 풍요로운 도시로의 전망을 얻었소. 신들의 은총이오. 우리들의 사랑인 이 도시 아테르타를 휩쓸던 태풍은 사라졌소. 이제는 모두 돌아갈 때요. 가정과 생업으로, 분별 있고 명예를 아는 시민으로. 그리하여 스스로 세운 법과 질서 아래서 바야흐로 번영하고 성취할 때요.”
그러고는 새로 얻은 애첩의 교태로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화려한 휘장 뒤로 사라졌다. 거기에는 살해된 티라나투스의 안락하고 호화로운 침대가 있을 것이었다. 새로운 은갑대가 휘장 앞을 경계해 늘어서고, 군중은 하나둘 침묵 속에 흩어져 갔다.
그 뒤 아테르타의 역사는 한마디로 비사(悲史)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상과는 달리 끝내 티라나투스의 몰락을 방관한 아테네는 새로운 지도자가 집정관(執政官)으로 자리를 굳히기 바쁘게 속셈을 드러냈다. 늘어난 델로스동맹 군자금 청구서가 그것이었다. 아테르타는 그 동맹에 함대와 선원을 내지 않고 돈으로 대납해 왔는데, 교활한 페리클레스는 아테르타의 정변을 이용해 할당금을 올렸고, 새로운 집정관은 자신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아테네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은 스파르타의 횡포였다. 약간의 식량과 무기를 대 준 것밖에 없으면서도 스파르타는 새로운 집정관을 마치 자신들의 속관(屬官) 다루듯 했다. 그 단적인 표현이 아테르타로 하여금 델로스동맹을 이탈하여 폘레폰네소스동맹에 가입하라는 요구였다. 요란하기만 하고 실속 없이 끝난 변혁은 다만 새로운 상전(上典)을 하나 더 만든 셈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테르타는 전보다 훨씬 밀접하게 아테네와 결속함으로써 스파르타의 횡포를 면해 보려 했지만, 그거야말로 아테르타의 마지막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기원전 431년 여름, 마침 내 폘레폰네소스전쟁이 터지자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는 희랍 최강의 육군을 이끌고 아티카로 침입했다. 그들은 농성 작전(籠珹作戰)을 펴는 아테네에 대한 대응책으로 그곳의 올리브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렸는데, 아테네의 동맹 시중에서 가장 먼저 아티카의 올리브 나무 꼴이 된 것은 아테르타였다. 스파르타 육군은 아티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테르타를 배은(背恩)의 죄를 물어 유례없이 철저하게 파괴하고, 살아남은 시민들은 코린트를 비롯한 인근의 폘레폰네소스동맹 시로 흩어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자신의 문의(問疑)로 시작된 아테르타의 소요가 어이없는 결과로 끝났을 때, 소피클레스가 했다는 말이다. 무력한 자신의 배움과 지식을 스스로 위로한 것인지, 성숙하지 못한 동료 시민들의 의식을 한탄한 것인지, 아니면 그 두 가지를 모두 잘 알면서도 일을 벌인 동류(同類)들의 무모함을 일깨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시민으로부터 일의 결말을 전해 들은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칼레파 타 칼라(Xαλεπα Tα Kαλα).”
좋은 일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1982년)
2016년 11월 2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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