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8장 22절에서 26절 말씀)
오늘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유에는 독특한 면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신기하게도 2단계로 치유하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단번에 치유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그 사람을 굳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하시고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 이유가 나와 있지 않아서 딱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면 둘 다 '메시야관'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맹인을 보면 처음에 사람들을 보고도 나무가 걸어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안수를 받고 나서야 시력이 온전히 회복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2단계로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긴 하되 처음에는 이스라엘에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군사적,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야 그보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그 증거로 맹인이 보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치유기적을 보고 자신을 군사적, 정치적 메시야로 떠받드는 것을 경계하셨다고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이 밝혀진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서 흐릿하게 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4대성인 중 한명이라고,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믿으면서 지금도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나누고 영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는 인정하되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삽니다.
우리도 맹인과 같습니다. 눈을 떴으되 아직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안수해 주십시오. 주님을 밝히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