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의 누룽지 *
가마솥.
사전에는 크고 속이 깊은 솥이라고 나와 있다.
내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집은 대가족들이 한 집안에 살았다.
3대가 사는 집은 예사였고, 더러는 4대가 한 집안에 사는 집도 있었다. 자식들도 6남매, 7남매는 보통이었고 10남매가 넘는 집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살다가 보니 밥이나 국을 끓여도 웬만큼 해서는 안 되었다. 아침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당장에 먹어야 할
아침 끼니에다가 학교에 가는 아이들 일일이 도시락을 싸야했기 때문에 크고 속이 깊은 가마솥이 아니면 감당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골 부엌에 들어가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도 가마솥이었고, 부엌 살림살이의 가장 중심에 걸려 있던 것도 가마솥이었다.
부뚜막은 안방 벽 쪽에 붙여서 황토 흙으로 만들었고, 부뚜막 가운데에 솥을 걸었다. 아궁이에서 땐 불은 솥 밑을 통과하여 불기
가 방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고, 방에 깔린 온돌을 은근하게 구워서 방을 따뜻하게 했다.
“이 산 저 산 다 잡아 먹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은 무엇?”
이 수수께끼의 답은 아궁이다.
가마솥을 걸어 놓은 아궁이는 그 가마솥을 달구어야할 정도로 나무를 때기 위해 클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산에 있는 나무들이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산에 나무하러 가던 그 시절 그 이
야기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시골에서도 나무 때서 밥하는 집은 거의 없어지고, 언제부터인가 연탄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전기나
가스로 밥도 짓고 난방을 한다.
가마솥과 같이 걸렸던 것으로 양은솥이 있었다.
가마솥에 비해 가볍고, 가격도 쌌기 때문에 부엌에는 시커먼 가마솥에서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양은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밥은 가마솥에 짓고, 국이나 찌개, 된장 끓이는 일은 양은솥을 쓰기도 했다.
대개는 아궁이 하나에 양쪽에 솥을 걸어 한 번 불을 때면서 밥 짓는 일과 국 끓이는 일을 동시에 하기도 했다.
가마솥은 무쇠를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은근하게 오랜 시간 끓여야 밥이 되었고, 그렇게 만든 밥은 더 맛이 있었다.
가마솥 하면 누룽지와 숭늉을 빼 놓을 수 없다.
많은 양의 쌀로 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위에 있는 쌀까지 다 익히려면 솥 밑바닥에 있는 쌀은 탈 수 밖에 없었다. 이
것을 긁어내면 누룽지가 되는데, 바삭바삭하는 누룽지를 조금씩 떼어 입에 넣는 맛은 가마솥 밥이 주는 또 하나의 보너스였다. 그
리고 그 위에 물을 부어 놓고 나면 솥에 눌은 밥맛이 물에 은근하게 배어 기가 막히게 구수한 숭늉이 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커피를 마시듯이 우리에게는 카페인 염려가 전혀 없는 숭늉이라는 후식이 있어서 사람들의 입안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특히 집안에 큰일이 있거나, 모내기, 타작 같은 일을 할 때에는 품앗이 일꾼들 밥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더 많
은 밥을 지어야 했고, 이럴 때에는 어김없이 며칠 먹을 누룽지가 생겼다.
그 당시 가마솥 옆에는 항상 닳은 숟가락이라 불리는 숟가락이 하나 있었다.
원래부터 이런 숟가락이 있었던 게 아니다.
처음에는 멀쩡한 숟가락이었다. 이것으로 솥 벽을 긁어내다가 보면 숟가락은 흡사 개기 월식하는 달이 차차 줄어들듯이 서서히
상현달, 반달 모양으로 변하고, 마침내 초승달 모양으로 줄어들었다가 끝내 부엌에서 사라진다.
프라이팬이라는 게 보급되기 전 시골에서는 가마솥 솥뚜껑으로 전을 구워 먹었다.
적당한 돌 세 개를 삼각형 꼴로 놓고 그 위에 솥뚜껑을 뒤집어 놓으면 설치는 끝난다.
솥뚜껑 밑으로 잘게 쪼갠 장작을 집어넣으면서 솥뚜껑을 달군 후에 기름칠을 한다.
솥뚜껑이 편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프라이팬에 전 붙일 때처럼 기름을 많이 넣으면 가운데로 몰려서 안 된다. 그래서 무나 감자 같
은 걸로 도장모양의 손잡이를 만들어 기름을 찍어서 고루 문질러준다. 그리고 그 위에 미리 반죽해 놓은 전 재료를 적당한 량으로
떠 넣으면 지그르르 소리와 함께 노릇노릇하게 전이 익어간다.
파전, 진달래 꽃전, 부추전, 배추전, 감자전, 김치전, 돌미나리전.......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야채는 웬만한 것이면 모두 전의 재료가 된다. 결혼, 회갑,장례 같은 큰 일이 있으면 시골 엄마들은 모두
품앗이로 전을 붙여주러 모인다.
이럴 때면 그 집의 적당한 곳에 한 줄로 맞춰 앉아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솥뚜껑을 엎어놓고 전을 붙이는데 그 모습도 볼만했
다. 결혼이나 회갑 같이 좋은 일일 때면 전을 붙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연신 웃음과 우스갯소리로 왁자지껄했지만, 안
좋은 일(장례. 특히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 경우에는 밑에서 때는 불의 연기를 핑계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동네에 큰일을 할 때면 어김없이 돼지가 희생되었다.
그럴 때 잔칫집 마당에 걸리는 가마솥에서는 고기 삶는 냄새가 온 동네를 퍼져나갔다.
이글거리는 장작불에 부글부글 끓어대는 물에서 일어나는 거품은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꿈틀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보쌈용으로 고기를 삶아내면 가마솥에는 육개장을 끓인다.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대파, 고사리, 토란줄기, 콩나물 같은 채소와 함께 끓일 때면 그 끓어오르는 광경만 봐도 배가 부르다
고 하던 마을 사람들.
가마솥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면서 떠들어대던 그 때 그 광경들이 참 그립다.
가마솥에도 타고난 운명이 있는가?
안방 부엌에 걸리는 가마솥은 쌀을 비롯한 곡식을 품에 안아 익혀 밥을 만들고, 사랑방부엌에 걸리는 가마솥은 대개 쇠죽을 끓이
일을 한다. 떡집에 팔려 가는 가마솥은 자신이 다 닳을 동안 떡을 찌는 일로 보내고, 막걸리 만드는 집에 팔려 간 가마솥은 평생을
술밥 찌다가 마치고, 육개장 식당에 팔려간 가마솥은 고기 냄새만 맡다가 일생을 마칠 것이다.
어디 가마솥뿐일까?
사람도 주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데.......
지금도 식당가에 가보면 “가마솥 ooo." ”솥뚜껑 ooo" 같은 간판을 걸고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 음식
을 사 먹어 보면 옛날 시골에서 먹던 음식, 그 맛이 아니다.
첫댓글 닉네임도 여자같이 예쁘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섬세한 글도
남자가 썼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잊혀져가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는 글
어떻게 그리도 잘 표현해 내시는지 감탄이 저절로납니다..
저도 시댁에서 학생인 시누이 시동생 맏동서와 제 자식을 합해서 13식구밥을
매일 한달에 쌀 한가마니를 장작불 때어서 가마솥에 했으니
잔치집처럼 분주하게 살았지요..
그래서 지금 기계화된 편한 세상보다는 잊혀져가는 그 시절이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이슬기님의 글이 그때 그시절의 소박한 모습들을
그리워하며 끄집어 낼 수 있는 글이 저는 참 좋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게 살았고, 그 모습이 당연한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모습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아득한 옛날에 일어났던 일 마냥,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호롱불이 그랬고, 글씨쓰던 연필, 잉크, 펜대들이 그랬고........
지금 다시 그런 시절이 온다면 당연히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워요.
13식구.........아마도 당시에는 힘들었다는 생각이 물론 들었겠지만, 그냥 감내하고 살았겠지요.
함께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