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추석 연휴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성지 순례를 가보자고 한다. 20년 전에 규슈(九州)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나가사키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이 떠올라 나가사키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설레었다. 나이가 드니까 단체 여행보다 허물없는 가족끼리의 여행이 편하긴 한데, 전용 차량에 가이드까지 동반한 맞춤 여행이고 보니 비용이 만만찮아 좀 부담스러웠다. 그렇긴 해도 우리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가자 할 때 얼른 따라나서야지 이리저리 재며 망설이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 싶다. 일찍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컫던 황진이도 권하지 않았던가.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인천공항이 연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뉴스에 서둘러 공항에 나갔는데, 저녁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그런지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다. 후쿠오카(福剛)까지는 비행시간이 1시간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본 공항에서 입국 심사하는데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공항을 나서니 나흘 동안 우리를 안내해 줄 여행사 사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가사키현 오무라(大村)까지 3시간 반을 이동하여 가면서 저녁 식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우동으로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단무지 한 쪽 없이 달랑 우동 한 그릇뿐이다. 일본 음식 문화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형부 말씀으로는 전에 일본에서 단무지 때문에 살인이 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식당에서 손님상에 단무지 두 쪽이 나왔는데, 옆 손님상을 슬쩍 보니 세 쪽이 나왔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항의를 하니까 주방장이 옆 손님 상의 단무지는 꽁지 부분이라 크기가 작아서 한 쪽 더 나갔다고 해명을 했는데도 손님이 수긍을 못 하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살인까지 갔다는 정말 웃지 못할 단무지 같은 사건이다. 우리보다 잘 사는 일본인들이 왜 먹는 데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가이드가 일본 식당에서는 돈을 내겠다고 해도 준비한 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찬 추가를 거절하는 경우가 보통이라며 한편으론 음식 낭비가 없는 장점도 있지 않겠느냐고 두둔한다. 하기야 양이 너무 많아 음식을 죄다 남기고 일어서려면 아깝고 미안해지는 우리네 푸짐한 상차림에도 문제가 없진 않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정을 먹는 민족이라서 기껏 몇 점의 쯔끼다시(밑반찬)로는 마음의 허기를 채울 수 없으니 말이다.
여행사에서 짠 일정표에는 순례 첫날 나가사키 호코바루 처형 터와 스즈타 감옥 터를 둘러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오기 전부터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문학관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말을 꺼냈더니 언니도 영화 '사일런스'를 감명 깊게 보았다며 흔쾌히 그러자고 한다. 맞춤 여행의 좋은 점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일정을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가이드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을 따라주지 않는 우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무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곧장 소토메(外海)로 떠났다. 소토메는 엔도 슈사쿠가 천주교 박해를 소재로 1966년에 쓴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된 곳이다. 멀리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는 큰 바다를 끼고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이나 달리고 나서야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날씨가 화창하기도 했지만 소토메의 하늘과 바다는 유난히 파랗다. 가는 길가에서 본 '침묵의 비'에 쓰인 글귀가 가슴에 와닿는다.
"사람은 이렇게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나 파랗습니다." 문학관은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학관 안에는 작가의 성장 과정과 문학적 업적을 소개하는 여러 가지 자료 그리고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기도서와 성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형부는 내게 "나중에 이런 문학관 하나 가져야지."라며 농담을 건넨다. 엔도 슈사쿠가 수 없이 고쳐 쓴 친필 원고를 보고나니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에 압도되어 가뜩이나 주눅 드는데, 그런 말씀을 하니까 놀림을 당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오면서 그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소설 '침묵'을 한 권 샀다.
일본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549년 8월,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선교지인 인도에서 만난 '안지로'라는 일본인을 따라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전국시대였다. 이미 몇 해 전에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조총의 위력을 경험한 다이묘(大名)들은 서양문물의 가치를 알았기에 조총에 이어 들어온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도 관대하였다. 다이묘 중에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처음으로 자진하여 세례를 받아 기리시탄(크리스천)이 되었는데, 예수회는 오무라와 개항협정을 맺고 그의 통치 지역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의 선박들도 나가사키로 입항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전교 50년도 안 되어 일본 인구의 2%인 15만 명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587년 일본 본토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규슈 지방의 정벌에 나섰는데, 나가사키 영주민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임에 놀라 장차 큰 세력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10년 뒤인 1597년 2월에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에서 천주교 신자 26명이 처형되어 첫 순교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265년이 지난 1862년에 시성 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12년부터 금교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및 쇄국정책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기리시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島原)와 아사쿠사(天草)에서 다이묘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합세하여 3만 7천 명이 무장봉기하였다. (시마바라의 난) 막부군은 네덜란드 선박의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아 4개월 만에 히라성에서 저항하던 농민군 전원을 몰살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 이후 후미에(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것)라는 악랄한 수법을 써서 천주교 신자를 색출해 내어 처형하는 등 더욱 철저히 탄압하였기 때문에 일본 천주교는 공적 활동이 불가능해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7대에 걸쳐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천주교 신자)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1864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마르크 마리아 드 로' 신부는 소토메의 깊은 산골 마을에 박해를 피해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지역을 찾게 된다.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을 가엾게 여긴 도로 (일본명) 신부는 우선으로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친다. 메리야스 직조, 국수 만들기, 농기구 제조, 인쇄, 조산원 양성 등 서민들에게 필요한 다방면의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며 일생을 그들과 함께하였다. '소토메의 아버지' 도로 신부 기념관에 들러 그분의 복음적 삶과 훌륭한 업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토메에는 도로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시츠 교회' 가 있는데, 이 소박한 시골 성당에서 두 분의 추기경, 주교, 신부 등 많은 성직자가 배출되었다니 가히 축복받은 땅이라 하겠다. 또 성당 근처에 소토메 역사민속자료관도 있어 나가사키 주민들이 살아온 지난 세월의 자취를 잠시 둘러보았다. 전시물 중에 해저 탄광에서 채굴할 때 쓰던 실물의 거대한 기계도 있던데, 그걸 보니 일제 치하에서 징용으로 끌려와 온갖 고초를 겪은 '군함도'의 조선인들이 떠올라 씁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