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 맞은 매 - 태(笞)ㆍ장(杖)ㆍ곤(棍)ㆍ신(訊) |
| 좌우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능장(稜杖), 곤장(棍杖), 형장(刑杖)이며 주장(朱杖)을 집고, "아뢰라! 형리(刑吏)를 대령하라!" "예, 머리 숙여라! 형리요." 사또는 어찌나 분이 났던지 벌벌 떨며 기가 막혀 '허푸허푸'하며, "여봐라! 그년에게 무슨 다짐이 필요하리. 묻지도 말고 형틀에 올려 매고 골통을 부수고 물곳장(物故狀)을 올려라!" 춘향을 형틀에 올려 매고 쇄장의 거동 봐라. 형장이며 태장(笞杖)이며 곤장이며 한 아름 담쑥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부딪치는 소리에 춘향의 정신이 혼미하다.左右邏卒排成伍, 稜棍朱杖知無數, 刑吏待令恣恐喝, 刑吏應聲誰敢侮, 使道憤怒知無量, 身顫口塞氣含吐, “此女口招知奚用, 更不問之繫刑柱, 粉碎脛骨也不妨, 急急來呈物故狀, 鎖匠擧動君須看, 春香委在刑機上, 刑杖笞杖與棍杖, 一束來投聲氣壯, 春香精神自昏迷 -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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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에게 매질하는 장면이다. 집장사령(執杖使令)은 태장(笞杖), 능장(稜杖), 곤장(棍杖), 형장(刑杖), 주장(朱杖) 등을 가져다가 늘어놓는다. 장의 종류가 꽤 많다. 이들 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조선시대 형벌은 대명률을 따랐고, 태(笞)·장(杖)·가쇄(枷鎖)·축(杻)·신장(訊杖)·가철(枷鐵)·삭료(索鐐) 등의 형구도 대명률의 규정에 따라 제작되었다. 대명률 첫머리에 실린 오형지도(五刑之圖)에 따르면 법적으로 공인된 형벌은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인 오형이다. 이 중 매를 때리는 형벌, 즉 죄에 대한 벌을 온전히 매로 구현하는 것은 태형과 장형이다. 태(笞)는 가벼운 죄를 범했을 때, 장(杖)은 태형보다 조금 더 무거운 죄를 범했을 때 사용되는 회초리에 가까운 형구이며, 죄에 따라 맞아야 하는 대수가 정해져 있다. 보통 태장(笞杖)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이는 태나 장의 의미이다.
▶ 1900년 경 태형 장면 곤(棍)은 대명률에는 규정이 없다. 중종 대 이후 선조 대부터 매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곤장으로도 표현되고, 『대전통편 병전』 「用刑」에서 관련 제도가 법문화되었다. 곤장은 군무(軍務)의 용도로 한정되었고, 대상이나 용도에 따라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 치도곤(治盜棍)으로 구별하였다. 현재 장(杖)을 곤장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번역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태장(笞杖)의 장, 신장(訊杖), 그리고 곤장은 엄연히 다르다. 능장(稜杖)은 삼면을 각이 지게 깎은 것으로 삼릉장(三稜杖)이라고도 한다. 밤에 순찰을 돌 때 쓰였고, 대궐의 방비를 강화하고 불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문 안쪽에 서로 대각선이 되게 가로질러 놓았다가 유사시에 문졸(門卒)이 사용하였다. 또 적이 침입했을 때 성을 방어하는 도구로도 쓰였다. 물론 형벌에도 사용 되었으며, 군인이나 일반인이 휴대하여 불법적인 용도로 사용한 사례도 많이 보인다. 주장(朱杖)은 붉은 칠을 한 몽둥이로 경종, 영조 대에 주장 당문(朱杖撞問), 즉 국청 죄수를 심문할 때 가슴이나 옆구리를 찌르거나 때리는 등 형구로써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래는 연(輦)과 여(輿)의 의장(儀仗) 용구로써 행차, 시위(侍衞) 등에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어가 주요 기능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실제 죄인들에게 치명적인 매는 신장(訊杖)이다. 다음은 춘향이 본격적으로 매를 맞는 장면인 ‘십장애가(十杖哀歌)’의 첫 부분이다.곤장 태장을 치는 데는 사령이 서서 하나 둘 세건마는 형장부터는 법장(法杖)이라 형리와 통인이 닭싸움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디어서 하나치면 하나 긋고, 둘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 없는 놈이 술집 바람벽에 술 값 긋듯 그어 놓으니 한 일자(一字)가 되었구나.[棍杖笞杖一二三, 使令止是呼數字, 刑杖則爲法杖故, 刑吏通引冷嚴伺, 對立動以筆畫耕, 一拷則一再拷則二, 有如無識無錢徒, 酒家壁上畫債易, 看看一字自然成.] 『열녀춘향수절가』 | 이 중 ‘형장부터는 법장(法杖)’이라는 대목을 주목해 보자. 형장을 법장이라고 하면서 태장, 곤장과는 달리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형장은 곧 신장이다. 신장은 죄인의 죄를 자백받기 위해 집행하는 합법적인 고문의 매이다. 자백할 때까지 시행된다는 점에서 신장은 정해진 대수가 없다. 그러나 한 차수(次數)에 3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몇 대를 쳤는지 기록해 두어야 한다. 형리와 통인이 닭싸움하는 모양으로 마주 앉아서 때린 차수와 장수(杖數)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이다. 신문(訊問), 즉 신장을 때리며 심문하는 경우 그 결과는 둘 중 하나이다. 죄를 자백하고 신장을 맞지 않거나, 신장을 맞다가 장폐(杖斃)되는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중국의 신장에 비해 조선의 신장이 갑절 더 엄중하다고 하였다.중국의 신장은 밑과 끝이 모두 둥글어서 태장(笞杖)의 큰 것에 불과하며, 또 볼기와 넓적다리를 나누어 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신장은 밑은 둥글고 끝은 모나며, 그 두께도 차이가 있고 또 정강이를 맞게 하니, 중국의 법과 비교하면 갑절이나 더 엄중하다.[案中國訊杖本末皆圓, 不過爲笞杖之大者, 又以臀腿分受. 吾東訊杖本圓而末方, 其厚有差, 又以膝骨受之. 比之中國之法, 倍加嚴重也.] 『목민심서 형전』 「신형(愼刑)」 | 심문과 관련하여 맹장(猛杖), 중장(重杖), 형장(刑杖) 등으로 표현되었다면 그때의 장은 곧 신장(訊杖)이다.
▶ 출전 : 『흠휼전칙』 춘향전에는 죄에 대한 대가로 맞는 태와 장, 군인들이 대상이었던 곤장, 성(城)이나 진(鎭)에서 외적 방비용으로 사용되었던 능장, 의장(儀狀)용의 주장 등,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온갖 종류의 장이 형구로 등장한다. 단순히 위협용이었는지 실제 때렸는지는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고 있으나 실제 춘향이 맞은 매가 신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에게 변학도는 엄히 신장을 치고 칼을 씌워 하옥하라고 지시한다.[嚴打訊杖 着枷下獄] 춘향은 열흘 동안 세 번의 형벌을 당했다고[一旬三刑] 항변하는데 이는 곧 10일 동안 3차례 신장을 맞았다는 얘기이다. 그래도 변학도가 ‘3일 안에 재차 고신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은 나름 지켰던 모양이다. 집장사령들이 친 매가 허장(虛杖)일 수도 있겠으나 산술적으로 춘향은 10일에 90대의 신장을 맞은 셈이다. 춘향전이 소설로 읽히고 판소리로 불리어졌던 영조 대 당시, 을해역옥사건의 연루자 24세 윤경은 1주일 동안 하루 2차례 11차까지 330대의 신장을 맞고 물고 되었다. 윤상호라는 피의자도 8차의 형신으로 240대의 매를 맞고 역시 물고 되었다. (『 推案及鞫案』 21권, 193책 乙亥 逆賊沈鼎衍等推案 二, 5월 20일.) 그 시대도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더 가혹했던 듯하다. |
글쓴이조윤선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주요 저·역서- 『조선후기 소송 연구』, 국학자료원(한국사연구총서 38), 2002
- 『조선시대 생활사 4집』, 공저, 역사비평사, 2013
- 『推案及鞫案』 번역 및 역주, 흐름, 2014
- 『승정원일기』(영조 32)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2012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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