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세가
명종 12년(1182) 임인년
12년 봄 정월
임오일. 낭장(郞將) 김광유(金光裕)를 금나라에 보내 특산물을 바치게 하고, 낭중(郞中) 전원균(田元均)은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게 했다. 갑신일. 왕이 거처를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겼다. 을유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자일. 금나라가 야율중방(耶律仲方)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신묘일.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했다. 갑오일. 금나라 사신을 위해 대관전(大觀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을해일. 왕이 거처를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다.
• 2월
을사일.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최충렬(崔忠烈)이 죽었다.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침탈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의 애기(愛妓)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 3월
초하루 신미일.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경진일. 군기주부(軍器注薄) 장광부(張光富)가 삼년간 여묘살이를 했으므로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계미일. 상장군 권절평(權節平)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상서우승(尙書右丞) 송단(宋端)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각각 임명했다. 관례상 양계의 병마사가 임지로 떠나는 날에는 도성 바깥 역정(驛亭)에서 송별연을 열 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개인적으로 돈을 들여 전송할 수 없었는 바, 이는 부임하는 이의 체통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그런데 근자에는 저마다 송별연[祖餞]을 열어주는 일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도성 바깥 들판에 모여들어 온통 소란을 피우는 통에 새로 부임하는 이의 체통이 크게 깎였다. 그러나 병마사로 임명된 두 사람이 아예 일찍 임지로 출발해 버리는 통에 전송객들은 송별연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제대로 체통을 지켰다고 칭찬했다.
오른쪽 두번째줄 하단 ▶[본문]庚寅慮囚初 全州司錄 「陳大有」 頗負淸介用刑極酷民多苦之及國家遣精勇保勝軍造官船大有與上戶長李澤民等督役甚苛 [본문내용]▶경인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없는지 재심사했다. 이에 앞서 전주사록(全州司錄)인 진대유(陳大有)가 자신의 청렴만 내세우며 혹독한 형벌을 가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조정에서 정용군(精勇軍)과 보승군(保勝軍)을 그 지역으로 파견해 관용 선박을 건조하게 하자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 등과 함께 일꾼들을 가혹하게 닦달했다. 기두(旗頭)인 죽동(竹同) 등 여섯 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노(官奴)와 불평분자를 불러 모아 진대유를 산사(山寺)로 내쫓고 이택민 등 10여 명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주리(州吏)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자 반도들은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을 위협해 주리(州吏)를 모조리 바꾸게 했으며, 고효승은 새 주리들에게 임명장만 줄 따름이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가 전주에 당도하자 반도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진대유의 위법사실을 죄다 고했다. 안찰사가 부득이 진대유를 체포해 개경으로 압송한 후, 강온 양면으로 회유했지만 반도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도내(道內)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자 반도들은 성문을 닫고 버텼으며 이러한 사태들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종 12년(1182) 임인년 (국역 고려사, 2008.8.30, 경인문화사)
[출처]진씨사랑방|작성자"해송(海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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