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11일 워싱턴은
당시 미국 본토 제2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장군을
美 第8軍 司令官으로 임명했다.
잠시 휴가를 받아 플로리다의 과수원에서 오렌지 나무를 심고 있던 밴 플리트 장군은
당장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4월 14일 전쟁 발발 10개월 만에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지휘권을 인수한 후 지휘관과 참모들에게 첫 지침을 하달했다.
“제군들, 나는 降伏하고 이 나라에서 撤收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나는 勝利하기 위해 여기 왔소.
따라서 나와 함께 일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소.”
밴 플리트 사령관은 곧바로 景武臺로 향했다.
韓國 大統領과의 첫 대면에서 장군은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李承晩 大統領은 만족한 듯 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엄격한 유교적 윤리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유엔군 사령관과 제8군사령관이 交替되자 共産軍은 그 틈을 노려 總攻勢를 퍼부었다.
1951년 4월 22일 밤, 밴 플리트 장군은 공산군의 대공세를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韓國軍에게 訓鍊과 충분한 火力이 切實하다고 判斷했다.
그는 소수 병력으로 싸워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한국군 사단을 재훈련시키며 전력 향상을 꾀했다.
언젠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철수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승만 대통령과 일치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두 번이나 위기를 맞았던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국군의 재편성과 증강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재건하길 바라고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런 大統領의 마음을 이해하고 陸軍士官學校 지원을 추진해 상부의 허가를 받아냈다.
그 결과, 국군은 전쟁 기간에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했고
우수한 장교를 육성하는 4年制 陸軍士官學校를 再創設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밴 플리트 장군은 李承晩 大統領으로부터 큰 信賴를 받았고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2년간 나는 李承晩 大統領과 1주일에 한 번씩은 前線을 시찰했고 軍事訓鍊所를 방문했다.
추운 겨울에 지프로 이동하면서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는 손사래를 치며 늘 웃음으로 화답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 정부는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을 발표했다.
李承晩 大統領은 단호하게 休戰을 拒否했다. 밴 플리트 將軍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이번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휴전에 성공하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 세기 동안 惡夢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밴 플리트 將軍은 자신의 힘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轉役을 決心했다.
밴 플리트 將軍은 1953년 1월 28일에 景武臺에서 李承晩 大統領으로부터
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을 수여받고 2월 12일 韓國을 떠났다.
1954년 미국을 國賓 訪問한 李承晩 大統領은 7월 28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美 議會에서 演說했다.
서두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參戰한 美軍 指揮官과 將兵들에게 경의를 표한 후
특별히 한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1951년, 밴 플리트 將軍이 미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중략)
그는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 광주, 논산, 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駐韓 美 軍事顧問團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훈련시켰습니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前線에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反共軍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밴 플리트 將軍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한국 고아원을 찾은 장군.
退役 後에도 李承晩 大統領과의 友情 어린 關係는 繼續됐다.
밴 플리트 將軍은 李承晩 大統領에게 濟州島 牧場建設을 提案했고, 이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행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미국 민간원조 단체인 한미재단 이사장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은
목장 건설에 따른 모든 계획과 실행을 도맡아 한국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국립 '송당목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遺骸를 미 의장대 특별기편으로 옮기고 故國의 땅에 묻힐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한국의 재건과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한미 우호 협력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韓美友好 증진사업에 발 벗고 나섰던 밴 플리트는 1992년 100세의 일기로 他界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2년 '밴 플리트 賞'을 제정해
한미관계 증진에 공헌한 양국 국민을 선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