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5)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6)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7) 사도 요한은 요한1서 2장 12-14절에서 각 연령층의 성도들에게 신앙적 격려를 준 데 이어서 요한1서 2장 15-17절에서는 하느님과 원수가 된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을 강력히 명령한다. 사탄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세상을 사랑하기 쉬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부분의 성경 말씀은 항상 명심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다. 여기 요한1서 2장 15절에서 '메 ~ 메데'(me ~mede)는 양자 모두를 금지하는 구문이다. 또한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몬'(kosmon)의 원형 '코스모스'(kosmos)는 신약에 총 187회 나오는데, 그 중에 요한계 문헌에서 무려 106회나 나오며, 요한1서에만 23회나 나온다. 그만큼 사도 요한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성도의 자세를 부지런히 교훈하였다. 그런데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세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하여 하느님을 떠나 하늘의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에페6,12)의 통치를 받는 영적인 세계, 사상, 가치관, 삶의 방식 등을 가리킨다. 요한1서 2장 15-17절에서 말하는 세상은 모두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세상 안에 있는 것들'로 번역된 '타 엔 토 코스모'(ta en to kosmo)는 사도 요한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세상의 두 가지 개념 가운데 후자에 속하는 세상의 세속적인 경향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사탄의 통치를 받는 세상의 세속성과 속화를 거부해야 할 것임이 발견된다. 한편,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가파테'(agapat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 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하여 몰두하고 더 높은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요한1서 2장 15절에서는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여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높이 평가하고, 거기에 가치와 우선 순위를 두면서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라 정욕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 몰입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정욕(욕망)의 노예가 되어 세속적인 것들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로서(로마6,6; 갈라5,24)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중간 지대나 회색 지대는 없다.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면, 그만큼 하느님을 등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상호 배타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1서 2장 8-1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빛과 어둠의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 빛과 어둠, 죄와 은총이 공존하지 못하듯이,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하지 못한다. 세상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에서 '아버지의'에 해당하는 '투 파트로스'(tu patros)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뜻하고, 목적격인 소유격으로 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지만, 문맥상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는 것이 세상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잘 대조가 이루어지므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육의 욕망' (16) 요한1서 2장 16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한다. 이것이 요한1서 2장 16절이 요한1서 2장 15절을 보충적으로 설명해 주는 구절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세상의 특징을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으로 정의하는데, 이것은 인류 최초의 범죄자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느낀 것 (창세3,6)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창세3,6ㄱㄴ) 먼저 '육'으로 번역된 '사르코스'(sarkos)의 원형 '사륵스'(sarks; flesh)는 문자적으로 '육체', '육', '몸'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타락한 본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이라고 할 때 '사륵스'(sarks)를 썼으며, 갈라티아서 5장 16절에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 대조가 되는 '육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표현할 때에도 이 단어 '사륵스' (sarks)를 썼다.이와 같은 의미가 요한1서 2장 16절에도 적용된다. 즉 여기서 '육'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 그리고 '욕망', '정욕'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인간이 가진 '욕망'을 뜻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 자체는 본질적으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가치 중립적이다. 따라서 어떤 문맥에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필리피서간 1장 23절이나 테살로니카 전서 2장 17절 등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반면에, 로마서 13장 14절이나 에페소서 4장 22절 등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여기 요한1서 2장 16절의 문맥상 사도 요한이 말하는 '욕망'은 후자로서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욕망을 말한다. 즉 '육의 욕망'(육체의 정욕)으로 번역된 '헤 에피튀미아 테스 사르코스'(he epithymia tes sarks; the lust of the flesh; sensual lust)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인간 자신의 욕구를 선택하는 죄악의 경향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와가 사탄의 유혹(꾐)에 넘어가 선악과의 먹음직스러움에 넘어간 것과 동일하다. 하느님의 분명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좇는 행위가 요한 1서 2장 16절이 말하는 '육의 욕망'이다. '눈의 욕망' '눈의 욕망'(안목의 정욕 혹은 안목의 쾌락)이라고 번역된 '헤 에피튀미아 톤 옵탈몬' (he epithymia ton opthalmon; the lust of the eyes; enticement for the eyes)은 눈을 통해서 추구하게 되는 죄악된 욕망이다. 눈은 여러 감각 기관 중에서 쾌락을 감지하는 첫번째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눈 또한 가치 중립적이고 인간에게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하지만 인간이 악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눈은 인간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좋은 도구가 된다. 하와가 눈으로 선악과를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게 보았고(창세3,6), 다윗이 눈으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범죄했다(2사무11,2). 눈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악을 향한 강한 열망을 일으키게 한다. 한편 당시 로마 시대에는 거대한 원형 극장을 만들어 그 안에서 각종 검투 경기를 열었는데, 그 주요한 목적은 로마 시민들의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경기장 안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검투사들의 모습, 또는 사자들에게 공격당하는 노예들의 모습, 맹수들의 밥이 되는 순교자들의 모습은 저열한 불신앙자들인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떻든 '눈의 욕망'은 하느님 없는 자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악이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주장이다.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으로 번역된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he allazoneia tu biu; the pride of life;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 a pretentious life) 에서 '자만'으로 번역된 '말라조네이아'(mallazoneia)는 정당한 이유와 근거가 없는 '헛된 자랑', '교만', '위선'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 소유에 대한 자랑들로서 공허한 교만을 뜻한다. '알라조네이아'(allazoneia)는 신약에서 두 번 나오는데, 야고보서 4장 16절에서는 '허세'로 번역되었다. 야고버 사도는 야고버 서간 4장 16절에서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자는 한마디로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세상에 있고, 그것의 유무에 따라 자신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여기서 '살림살이'로 번역된 '비우'(biu)의 원형 '비오스'(bios)는 인간의 생명을 통칭하는 표현이지만, 성경에서는 '조에'(zoe)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조에'(zoe)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하느님과 친교하는 삶을 의미하는 반면에(마태18,8; 요한5,24; 1베드3,10), '비오스'(bios)는 하느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을 뜻한다(루카15,30; 2티모2,4). 따라서 요한1서 2장 16절의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이승의 자랑'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관계없는 인생에 대한 자랑으로서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자신의 소유물과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세상 것을 자기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했던 것처럼(필리3,7-8),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보배로 인식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한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7) 요한1서 2장 17절은 크게 두 가지의 것이 대조된다. 그것은 바로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남는 것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모든 욕망과 이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 여기서 '지나가고'로 번역된 '파라게타이'(paragetai)의 원형 '파라고'(parago; pass away)는 세대간의 간격과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내는 변화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흘러가다', '바뀌다'라는 뜻이다. 요한1서 2장 8절의 '어둠이 지나가고'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이 단어를 현재 시제로 사용한 것은 지나가는 과정이 지속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세상과 욕망(정욕)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세상과 욕망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그 어떤 희망도 줄 수 없고 어떤 기대도 채워주지 못하며, 그것들은 심판의 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다. 한편, '남습니다'로 번역된 '메네이'(menei)의 원형 '메노'(meno; abide; live)는 요한계 문헌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단어이다(요한15,7).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 어좌에 영원히 머물게 된다. 세상과 친교하며 세상의 것만을 취하고 갈망하고 자랑하는 자들은 결국 하느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이며 종국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