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포드라마에 빠져 있었네요.
The Haunting of Hill House 힐 하우스의 유령(10부작)
The Haunting of Bly Manor 블라이 저택의 유령.(9부작)
특히 힐 하우스의 유령편...
소화시켜야할 것들이 정말 많은 드라마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소개하는 텔레비젼 채널을 애용해왔는데
이 '힐 하우스의 유령'은 그런 내용의 종합편인 듯싶으면서도
내용이 정말 깊고 풍부합니다.
심층에 있던 느낌과 생각거리를 끌어올리는 힘을 가진 드라마.
오래 전에 있던 원작 소설에 근거해서 드라마를 다시 쓴 모양인데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작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초과학적,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초과학, 초자연.
사실은 이런 표현도 이상하지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우리가 아직 이해를 못하기에 붙인 표현들.
수많은 경험담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묘사되는 대부분의 유령들은
갖고 있던 '몸'을 이미 떠난 존재들이고
이 몸으로 살아내는 '이 차원'을 떠난 존재들인데
그들의 의식은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
이전 경험을 반복하고 있고.
왜 그럴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론에 도달합니다.
'존재에 대한 오해' 때문.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
그러다보니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고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경험의 의미를 모르기에
얻음의 목적
상실의 목적도 모르고.
자신이 가진
조건의 목적
상황의 목적도 모르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존재의 의미는 모든 것과 연결이 되어있기에
이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결국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
어떤 장소에서 길 찾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이미 그 장소를 잘 아는 사람은
헤매일 필요가 없지요.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긴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진 에너지를 헛되이 쓸 필요도 없고.
반대로 전혀 모르는 곳에서 길찾기.
눈 먼 사람이 더듬거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군요.
앎이 중요하구나...
알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분명하고
가볍고
밝은 것.
모를 때
무겁고
어둡고
헤매이게 되는 것.
이런 존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가 수없이 많았군요.
영적지도자라고 불리는 분들이 했던 시도들.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는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죽은 후에는 어찌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들.
수많은 이야기들
관습들이 제시되었고
기록된 책들이 등장했구요.
그런데 그런 내용들이 또
다르네?
그것도 한두가지가 아닌
수없이 많은 종류이니
도대체 어느 내용이 옳은고?
이것을 분별하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고!
어느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하고 깨우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들이 주는 어떤 가르침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
게다가 그런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지요.
가르침을 전달 '받는 사람들'의 한계 또한 있으니 말입니다.
이해의 한계
이해의 다양성.
모든 이들이
눈이 먼채로
거대한 코끼리의 몸을 더듬고 있는 것.
이리 생각하면 정말 우울하군요.
어떤 가르침을 만나는가...도
결국 각 개인에게 달려있지요.
그 사람의
성향
기대
의도에 달린 것.
유유상종.
누구를 만나는가
어떤 믿음을 갖는가가
모두
각 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같은 것이 있기에
끌리게 되어있다.
끌려서 속하게 되고
그래서 과정과 결과를 경험을 하면서
속 사람을 만들어간다.
때가 되면
떠나
다른 이론, 다른 그룹을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한 번의 생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양한 존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 존재가
이 땅
이 몸
이 시간대에
단 한 번만 있는 것이라는 것이
존재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군요.
이곳에서
이 몸을 가지고 살아보는 것은
수없이 많은 별들이 있는 우주에서 단 하나의 별을 경험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른 모든 별에도 내가 있는데.
수많은 별에서의 다양한 삶을 체험하는 '나'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나'인데.
실상은
시간도 공간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삶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것.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그냥 무대에서 내려와 분장실로 돌아가는 것뿐
어떤 존재도 사라지는 법은 없는 것.
한 무대에서의 역할이 끝나더라도
다른 무대들에서는 공연이 진행되고 있고
한 무대에서 퇴장한 나는
쉼을 갖든지 다시 다른 무대로 나서게 되는 것.
다른 이야기를 갖고
다른 분장을 하고
다른 역할을 하고.
무대에 설 때마다
새로운 배움을 갖는다.
이 곳에서 배우들이 그리하듯이.
이 곳, 이 몸으로의 모든 경험은
드라마 속에서 연기를 하는 것.
배우가 무대에서 퇴장하더라도
드라마 속에서 설혹 죽더라도
그 장면이 지나고 나면
분장실로 가듯이
본래 자신으로 돌아가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본래 집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도 그리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의 나만이 아닌 것.
다른 누구도.
본래의 자신이 있다.
유령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지요.
왜 유령이 되는가?
드라마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을 잊어버린 것.
무대에서 퇴장했는데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드라마내용에 집착하며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자신을 잊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내용일 뿐인데
그것을 잊다.
누군가가 깨우쳐 줄 때까지
스스로가 지쳐 다른 곳을 바라볼 때까지
똑같은 연기를 계속하다.
무대가 닫힌 다음에도.
이렇게 되는 것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고?
가끔은 스스로를 깨우쳐야하겠네요.
너무 몰입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마음 속에서 가끔은 무대 밖으로 나와볼 일입니다.
큰 그림을 볼 일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볼 일.
지금
무대에서
연기하는 중임을
가끔씩
인식할 일.
그러면 왜 이런 연기를 하는고?
무엇인가
느낄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어서.
그래서
이해를 넓히고
현명함을 얻기 위해.
그래서
가볍고
밝은 존재가 되기 위해.
모든 어두운 성향, 의도, 감정들은
무겁지요.
발목을 잡고
끌어내립니다.
그것들을 청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밖으로 끌어내야합니다.
대면하기 원치 않아
깊이 깊이 숨겨 바닥에 가라 앉힌 것들을
표면으로 떠올리고 바깥에 내치도록
우리를 뒤집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정말 소중한 누군가가 죽고
정말 귀중한 무언가를 잃고.
미치지 않고는 안되는
뭔가를
연기하다.
그 과정에서 그 경험이 너무나 격렬해서
자신이 배우임을 잊어버리는 존재들이
진짜 미치기도 하고
유령이 되기도 하다.
측은한 존재들...
그들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들을 인도해줄 손길이 필요하고.
이 차원에서 정말 사악한 일들을 한 존재들도
이 차원을 떠나지 않데요.
자신이 한 일을 대면하기 두렵고
자신이 파괴한 존재들을 만나기 두렵고
특히 처벌이 두려워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영원히 탄다니 어찌 갈 수 있는고.
역시 오해이지요.
사실 돌아가며 그런 사악한 연기를 한다데요.
이번에는 내가 해보고
다음에는 네가 해보고.
가해자도 되어보고
피해자도 되어보고.
그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끌어내지는 감정들, 생각들이 있기에.
오랫동안 묵혀온, 무겁고 역겨운 쓰레기통을
뒤집는 일을 하다.
피해자나 가해자,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모두
뒤집혀 쏟아져 나온 것들을
다루게 되다.
아무것도
의도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것.
우연은 없는 것.
우리는 이곳, 이 몸에 국한된 존재가 아닙니다.
상상할 수 없을만큼
더 크고
엄청난 존재들.
이곳에서
무대에 올라
연기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의
극히 작은 한 조각.
수많은 별들 중 한 별에서 경험을 해보는 존재.
수많은 별들에 있는 수많은 '나'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이곳에서 퇴장한다는 것은
이제 분장을 지울 때가 된 것이고
이제 무대의상을 벗을 때가 된 것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고
이제 진정한 내가 될 때가 되었다는 것.
드라마가 아무리 극적이라도
드라마인 것.
나를 잊을 일이 아닙니다.
길을 잃을 일이 아닌 것.
마음이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봅니다.
하지만 늘 손을 내밀며 돕고자하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참을성 많은 존재
밝은 존재
가벼운 존재
그래서
영원히 길을 잃을 수는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새삼스럽게 떠올립니다...
첫댓글 인생의 무대에서 겪게 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근데 실제로 너무 아프다는 것이
단점 입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