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과 한국전/오웰, 헤밍웨이, 한강
- 趙甲濟
- 2024-10-12, 15:20
- 스페인 內戰(내전)을 다룬 유명한 소설과 實錄(실록)이 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쓴 넌 픽션 ‘카탈루니아 讚歌(찬가)’가 그것이다. 관점은 다르다. 헤밍웨이는 좌파에 동정적이고, 오웰은 좌파 편에서 싸웠지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헤게모니를 잡은 親蘇派(친소파)를 파쇼와 같은 집단이라고 비판한다. 역사적 관점에선 오웰의 知性이 헤밍웨이의 낭만주의를 압도한다
‘카탈루니아 찬가’의 무대는 이 지방의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이다. 이 도시를 여행할 때 이 책을 갖고 다니면서 읽으면 90년 전의 역사적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람블라스 거리는 바르셀로나 한 가운데에 난 번화가이다.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곳이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빈다. 이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하여 벌어졌던 ‘內戰 속의 內戰’이 ‘카탈루니아 찬가’의 主題(주제)이다.
오웰은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두 편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때문에 反共(반공)자유민주주의자로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영국의 엘리트 양성소인 이튼 스쿨을 졸업한 그는 인도와 버마를 다스리던 영국 경찰에 들어갔다. 근무지는 버마였다. 오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버마와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영국 관리였다. 오웰은 5년간 경찰로 근무한 뒤 사회주의자로 변신한다. 영국의 식민통치 방식을 고발하는 두 글, '교수형'과 '코끼리 쏘기'를 썼다. 오웰은 소설가가 되면서 사용하게 된 筆名이고 本名은 에릭 블레어이다.
오웰은 사회주의 이론에 매료되었으나 경찰 경력 덕분인지 늘 사실을 신념보다 重視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런던의 빈민굴 생활을 거쳐 파리로 가서 접시닦이 일을 했다(이 체험을 토대로 '파리와 런던에서 기진맥진'이란 체험기를 썼다). 여기서 폐렴에 걸려 자선병원 신세를 졌다. 그 후유증으로 늘 시달리다가 47세에 죽은 것도 이때 약해진 폐 때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좌파(공화파) 편에서 싸우기로 하고 입국 허가를 받으려 했다. 공산당이 입국 허가를 내주고 있었는데, 오웰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국제여단'에 먼저 가입하면 허가를 주겠다고 했다. 오웰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내전의 실상을 확인한 다음이라야 가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웰은 무정부 주의자 단체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자원한 부대는 바르셀로나에 본부를 둔 무정부주의자들의 민병대(POUM)였다. 이 민병대는 나중에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탄압과 살육을 당한 조직이 되었다.
‘카탈루니아 찬가’의 도입부는 노동자 계급이 정권을 잡은 바르셀로나의 활기찬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당은 파괴되고, 팁은 없어지고, 상류층의 사치스런 옷차림은 사라지고, 하층민들은 당당해졌다. 오웰은 프랑코 군대와 대치한 戰線(전선)에 투입되어 지루한 참호전을 하게 된다. 敵(적)과의 實戰(실전)보다는 이와 쥐를 상대로 한 싸움이 더 처절하다. 그는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나왔다가 ‘內戰 중의 內戰’에 휘말린다. 바르셀로나의 좌파정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세력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웰은 자신의 계보와 신념에 따라 反蘇 사회주의 진영에 서게 된다. 親蘇派(친소파)가 시가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오웰은 전선에 복귀한다. 여기서 목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除隊(제대)와 출국을 꾀하게 되는데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反蘇분자’로 지목되어 언제 끌려가 총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스페인에 동행하였던 부인은 호텔에 연금되고, 오웰은 露宿(노숙)을 해가면서 거리를 방황한다.
경찰은 밤에만 설치고 낮은 자유롭다. 오웰이 안전한 낮 시간에 여기저기 들르는 카페와 음식점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관광 가이드이다. 목숨이 오고 가는 살벌한 분위기이지만 독일이나 소련과는 다르다. 오웰은 스페인 사람들이 성격상 절대로 파시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스페인人들은, 살벌한 정치상황에서도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오웰은 ‘스페인에 대하여는 나쁜 기억이 많지만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없다’고 말한다.
親蘇派 형사들이 오웰의 부인이 묵던 호텔 방을 급습, 두 시간 동안 수색을 하는데 부인이 누워 있는 침대는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은 이 침대 밑에 불온문서와 무기가 숨겨져 있는데도 그들은 남자의 명예심을 지킨다.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오웰은 親蘇派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노동자 계급을 탄압함으로써 계급해방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배신하였다고 개탄한다. 바르셀로나에서 親蘇派가 정권을 독점한 뒤엔 노동자들이 다시 탄압을 받고 자본가들이 回生한다. 형사들은 노동자풍의 사람들을 검문하여 잡아들이고 부유층 같아 보이는 이들은 검문도 하지 않는다.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얻은 교훈은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똑같은 巨惡(거악)이란 깨달음이었다.
‘카탈루니아 찬가’를 읽는 독자들은 오웰 부부가 기차 편으로 스페인을 벗어나 프랑스로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시가전, 암살, 투옥, 처형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스페인을 떠나 7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걱정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깊게 잠들어 있는 영국을 보면서 두려워지는 것은,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자리에서 튀어나오기 전엔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오웰의 이런 예감은 곧 적중하였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히틀러와 손잡고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배신하고 독일이 전쟁으로 달려가는 길을 열어준다. 9월 독일이 폴란드로 쳐들어가자 영국은 비로소 평화지상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1938년에 출판된 ‘카탈루니아 찬가’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오웰의 전담 출판사가 스탈린 비판 내용을 문제삼아 출판을 거부, 다른 회사를 찾아서 낸 책인데, 1951년 再版(재판)이 나올 때까지 초판 1500부가 다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1950년 47세로 죽었는데, 그때까지 번역판은 이탈리아語뿐이었다. 오웰은 죽기 직전까지 초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신경을 썼다.
그 뒤 바르셀로나도 많이 바뀌었다. 프랑코 시절에 핍박을 많이 받았던 카탈루니아 사람들은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 팀이 승부차기로 한국 팀에 지자 환호했다. 201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 팀이 우승하자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처음으로 ‘스페인 만세’와 ‘카탈루니아 만세’를 같이 외쳤다.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의 主力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이 떠오른다. 6·25 남침을 前後(전후)하여 박헌영의 남로당이 김일성에게 배신당하고 숙청당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남로당 후손들 중에서 오웰 같은 양심가가 나와서 김일성주의를 비판하는 名作(명작)을 남길 때도 된 것 같다.
조지 오웰은 이론과 신념의 포로가 된 지식인들을 싫어하고, 보통사람들의 도덕성을 더 높게 평가하였다. 그의 말년은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지식인들의 僞善을 벗기는 데 집중하였다. 매리 맥카시라는 한 좌파 지식인은 조지 오웰이 우파가 되기 전에 일찍 죽어서 다행이란 惡談을 하기도 하였다.
오웰은 인간과 사실과 체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공허한 개념이나 이론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知性人이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은 '지식인'이란 책에서 조지 오웰의 성실성과 대조적인 존재로 미국 작가 헤밍웨이의 불성실을 비판하였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러 가기 전부터 공산당 노선에 전폭적으로 동조하고 그들의 선전활동에 협조하였다. 미국 소설가 도스 파소스도 공화파 편을 들었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의 만행을 비판하였다. 헤밍웨이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동료 좌파들을 무자비하게 암살하고 고문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였다. 파소스가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헤밍웨이는 파소스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폴 존슨은 헤밍웨이가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썼다.
1940년에 그가 발표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어보면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임하는 좌익 공화파의 행태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이런 사실에 침묵하고 있다가 內戰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뒤에야 소설을 발표하였다. 폴 존슨은 헤밍웨이는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의 발간을 막으려 하였던 자들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고 혹평하였다. 조지 오웰이 진실을 알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공화파 편에서 참전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헤밍웨이는 지식인들의 행동을 선동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취재여행만 했지 총을 들고 공화파를 위하여 참전하지 않았다. 그는 2차 대전중의 상당 기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팔아 얻은 어마어마한 돈으로 쿠바의 하바나 근교에서 深海 낚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한강 씨가 2017년 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읽어보면 김일성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을 주변 국가들이 일으킨 대리전으로 왜곡하고, 전쟁 범죄자 측의 만행엔 침묵하면서도 미군의 문제와 미국의 對北강경책을 비판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兩非論도 아니고 전쟁범죄자 측에 유리한 논리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웰보다는 헤밍웨이 쪽에 가깝다.
*한강 씨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은 제목이 "미국이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한국은 몸서리를 친다. 승리로 결말 나는 전쟁계획은 없다"이고 쟁점이 있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한국전쟁은 인접한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에 가해진 대리전이었다.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3년의 잔혹한 기간 동안 도륙당했고, 이전의 국가 영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최근에 들어서서 이러한 비극적인 과정에서 미군이나 동맹군이 남한 주민을 잔혹하게 살해했던 몇 가지 사건들이 재조명될 뿐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노근리 학살로서 미군이 수백명의 시민들, 주로 여성과 아이들을, 돌다리 밑으로 몰아서 며칠 동안 양쪽에서 총을 쏴 그들 대부분을 죽였던 사건이다.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만약 그들이 남한 피란민들을 “인간 이하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들이 피란민들의 고통을 숭고한 인격체로서 완전하고 진실하게 인식했더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거의 매일 미국 뉴스를 접하고 있는데 위험하게도 익숙하게 들린다. “우리는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매일 2만명의 남한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한반도에서 일어날 뿐입니다.”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도 오직 대화와 평화를 주장하는 한국 정부에 미국의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만 이해한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한 가지만 알고 있다. 우리는 평화가 아닌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승리”는 공허하고 불가능한 구호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다른 대리전을 전혀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 지금, 이 한반도에 살고 있다.
내가 앞으로의 몇 달을 생각해 볼 때, 지난 겨울의 촛불이 생각 난다. 매주 토요일, 남한 전역에서, 수십 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서로 노래 부르며 부패한 정부에 반대했고, 종이컵 속에 담긴 촛불을 들어, 대통령의 사임을 외쳤다. 나 역시, 그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 때, 우리는 이것을 “촛불 집회” 또는 “촛불 시위”라고 불렀었고, 우리는 지금 그것을 우리의 “촛불 혁명”이라 부른다.
우리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촛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 결국 이를 실현했던 사람들, 아니, 수천 만명의 존엄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연약하고 순수한 그 사람들이 카페와 찻집, 병원과 학교의 문을 매일 열며 밀려드는 새로운 순간의 미래를 위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평화가 아닌 새로운 시나리오를 말할 것인가?>
한강 씨의 주장과는 반대로 한국전은 대리전이 아니고 국제 공산전체주의의 확장을 저지, 자유세계를 지켜낸 위대한 자유수호 전쟁이었다. 한국군과 미군을 주력으로 한 유엔군의 정의로운 抗戰으로 대만이 살았고, 일본이 경제부흥하고, 서독은 재무장한 뒤 나토에 가입하였으며, 나토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고, 미국은 군사비를 4배로 늘려 본격적인 對蘇 군비경쟁에 돌입, 그 40년 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평화적으로 무너져 자유세계가 냉전에서 최종승리 하도록 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유수호의 전쟁 승리에 한국과 미국은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토만 터키 제국,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렸고,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쇼, 일본 군국주의를 파괴하였으며, 한국전은 국제공산 제국을 해체, 세계사의 진보와 인류평화에 기여하였다.
한국전의 이런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냉전시대의 제한된 정보에 근거한 대리전 개념으로 현대사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소설로 말하고자 하는 역사도 왜곡될 개연성이 높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는 조건에서 김일성 남침을 대리전이라고 하여 전쟁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모든 도덕률이 무너진다. 적과 동지, 선과 악의 기준이 뒤집힌다.
그 예가 핵무장한 북한정권 앞에서 펼친 한강 씨의 무조건적 평화론이다. 李承晩은 일찍이 '일본의 내막'이란 책에서 무조건적 평화론자는 결과적으로 적(나치독일가 일본)을 이롭게 하는 제5열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한편으론 그가 노벨문학상이란 名聲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분발, 그동안 침묵했던 한반도의 최대 비극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名作을 남기기를 기대해본다. 나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온다면 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고발했던 솔제니친처럼 북한인권 문제의 진실을 전하는 문학가가 받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반디'라는 필명으로 북한 작가가 쓴 단편집 '고발'을 한강 씨에게 권하고 싶다.